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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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은 미래 세상 - NAS - 에서 시작한다. 피부색(Skin Color)에 따라 사람은 ST1~ST10으로 분류된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죄질에 따라 '추방' 또는 '삭제' 당한다. 추방이 기억이 사라진채 또 다른 세상으로 내던져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라면, 삭제는 증기처럼 사라지는 일이다. 아드리안 스트롤이 펜스보로 고등학교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한다. 그녀의 졸업연설은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이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소녀는 체포되고 만다. 이제 소녀는 반역자로 분류되어 80년 전의 과거로 '추방'당한다. 1959년 위스콘신 주의 작은 마을, 소녀는 이제 '메리 엘렌 엔라이트'로 살아야 한다.

소설 <위험한 시간 여행(원제 Hazards of Time Travel)>은 1938년생 미국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이다. 58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고 다양한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녀는,미국에 생존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녀는 책에서 미래의 미국을 억압적인 디스토피아 사회로 설정한다. 피부색에 따른 구분, 항상 감시하는 정부, 추방 또는 삭제라는 형벌. 그 파괴성은 아드리안 스트롤(또는 메리 엘렌 엔라이트)를 통해 그려진다.

작가는 SF소설의 문법에 어울리는 소재 두 가지를 활용한다. 첫째는 시간여행이다. 2039년의 미래에서 형벌을 받아 와버린 1959년의 세상. 책은 소녀의 카오스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상당부분 할애한다. 마이크로칩으로 일부의 기억만 사라진 아드리안은, 미래를 '알고'도 있지만 현실을 '살기'도 해야한다. 그런데 혼란스러움은 예상외로 단순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탈출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삶을 영위하려는 주인공, 종국에 이런 생각을 밝힌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다. (P.378)"라고. 즉, 전복적 시도를 반복하며 추방의 상태를 벗어나려던 주인공은 갑자기 현실순응주의자로 변하면서, 책은 미래에서 과거로 단 한차례 시간여행만 이뤄질 뿐, 다른 시점의 시간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큰 바탕에서 다양한 시점이동과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다면 디스토피아 사회가 더 피부로 와닿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책에는 아드리안이 과거 세상에서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웨인스코샤 대학의 심리학과 조교수 울프만 박사다. 아드리안은 울프만을 보자마자 '동일한' 상태임을 직감한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는데, 울프만 박사가 아드리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바로 여기서 작가는 두번째 장치가 등장한다. "여기 제9구여, '행복한 곳'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다 가상이야. 난 너의 친구야. 하지만 동시에 나는 컴퓨터 전략국의 연구원이기도 해. (중략) 너도 깝박 넘어갔지? 추방자들이 다 그래! 그렇게 믿었던 거는 죄책감 때문이고 또 순진해서야. 제9구역은 가상이라고. 실재가 아니야. 컴퓨터 전략국의 연구진으로 내가 이 가상 현실 세팅 작업을 직접 했어. 1959~60년을 배경으로 위스콘신, 웨인스쿄샤 주립대학 복제판을 만들어낸 거지. 이곳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아. 컴퓨터 전략국의 지도상에만 있지. 정말 멋지지.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현실과 맞는 축도로 만들었으니까. (중략) 사실을 말하면 아드리안, 너는 아직 청소년 규율부에 수감되어 있어. 넌 뉴저지를 떠난 적이 없다고. 너는 지난 8개월 동안 혼수상태나 최면 뭐 그런 상태에세 계속 그곳, 아니 여기 있었던 거야. 그곳에서 그들이 너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또 카테터를 통해 비워주고 있지. 그리고 네 부모님에겐 아무 통보도 해주지 않았어. 부모님은 당신들이 뭔가 잘못해서 네가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계실 거야." 바로 추방당한 세상은 사실 '가상현실'이라는 말이다. 영화에서 봤던 수액 속에 잠긴 인간, 그 속에서 또 다른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아라니. 아드리안은 물론 독자도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그럼 1959년은 과거가 아니었던건가? 미래에서의 추방은 수액에서의 시간을 말하는 건가? 그럼 울프만은 왜 탈출을 계획하는 거지?

책은 아드리안(또는 메리 엘렌 엔라이트)의 심리묘사에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내던져졌다는 외로움, 동일한 처지라는 울프만을 봤을 때의 반가움, 그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은 간절함, 그에 대한 사랑까지. 17세 고등학생의 풋풋하고 서툰 이런 모습들은 주인공의 심적 어려움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시간여행' 설정은 가상현실을 등장시키며 개연성을 떨어뜨렸고, 가혹한 형벌같던 추방과 삭제는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통해 허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아란 기능적으로 통합된 반응체제를 대변하는 기제일 뿐이다.

스키너 <과학과 인간 행동>

작가의 의도는 마지막에 이해가 된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p.378)"며 현실순응적 자세를 취한다. 다소 맥이 빠지는 이 대사는 책에서 줄곧 등장하는 '행동주의', '자유의지', '스키너'와 버무려지면서 '지금을 살아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철학을 녹여낸 부분이 아닐까? <위험한 시간 여행>은 SF소설이지만 다소 로맨틱하고, 미래 세계에 대한 생각보다 '현실을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SF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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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은유 지음, 임진실 사진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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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끔 힘에 부쳐 '못 하겠다'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목구멍까지 울분이 차올라 싫은 소리라도 뱉으면, 소위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도 못 버티면 앞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상황에 대한 불평은 곧 잘 '무능'으로 귀결되고, 그 희한한 논리에 말문이 막힌 당사자는 '무능한 자'가 되버린다.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과 부조리 앞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법은 무엇일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는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다.


"내일 난 제정신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요? (김동준군의 트위터 기록)"


은유 작가의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김동준 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인터뷰집이다. 특성화고 졸업 후 CJ제일제당에서 현장실습생으로 근무하던 동준 군은 2014년 1월, 고3의 나이에 죽음을 선택했다. 일터 괴롭힘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동준군의 죽음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듯 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산재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책의 1부 '김동준'에는 김동준 군의 유가족(어머니와 이모님)과 동준군의 사건을 담당했던 노무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2부 '김동준들'에는 또 다른 현장실습생이었던 이민호 군의 아버지와 특성화고 선생님, 학생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책은 여러 화두를 던진다. 첫째, 편견이다. 사람들은 동준군의 죽음에 대해 '특성화고' 혹은 '자살'이라는 수식어로 그의 맥락을 쉽게 추측하고 단정짓는다. 가정은 불우했을 것이고, 학교에는 자주 가지 않던 학생일 것이고, 부모님은 자주 싸우거나 이혼한 상태일 것이라는 생각들 하지만 동준군은 그 반대였다. 또 특성화고에서 이렇게 부조리한 문제들이 있다면서 왜 관계자들은 가만히 있는 걸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소홀했다고 말한다.


"그동안 거리에서 장애인을 못 봤다면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여건이 아니라서 그렇듯이, 지금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못 봤다면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듯, 특성화고 학생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맥락에 따라 자연스레 비가시화된다. (중략) 대개의 편견이 그러하듯 '잘 모름'에서 생겨나고, 편견은 '접촉 없음'으로 강화된다. (중략) '특성화고 학생'이나 '현장실습생'이라는 분류 코드의 구성원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 진지하게 시도되지 못했다." (p.10~11)


둘째, 노동 환경에 대한 생각. 동준군의 죽음이 단지 '청소년'이기에 의미있는 걸까? 저자는 동준군과 같은 청소년 역시 '동료 시민'으로 볼 때 문제의 관점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경험과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적은 그들에게 가장 '기피하는' 업무를 시키고 '방치하는' 노동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즉, 노동 환경이 나쁘다면 그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나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청소년 노동에 대해 ‘안쓰럽다’ 혹은 ‘보호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나 같은 어른의 입장이 왜 문제인지를 알았다. 그건 청소년을 동료시민으로 보지 않는 ‘친절한 차별주의자’의 태도에 다름 아니다.(p.27)"라고 일갈한다.


동준군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담임 선생님께 '무섭다'는 문자를 보내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동준군의 친구, 정래관 군은 인터뷰에서 "저라도 담임선생님께 먼저 고민을 이야기했을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회사나 상사에게 이야기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더 큰 문제를 불러왔을 거라 생각해요. 회사 사람들이 다 알게 되면 보호를 받지 못할 테니까요."라고 말했다. 취업률을 따지는 학교에서는 '기업'으로 아이들을 '배출'하기 바빴다. 그들이 회사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위험하거나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때의 방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서 셋째, 자신들을 돌볼 권리다. 세월호의 학생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에 차가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준군은 괴로운 나머지 선생님께 문자를 보내고, 트위터에 글을 남기는 것 말고는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동준군의 이모 김수정씨의 말 “싫으면 하지 마. 넌 하기 싫은 것을 안 할 권리가 있어. 기존의 잣대로 널 재려고 하지 마. 그 자가 틀렸을 수도 있어.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넌 자유롭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어. 때론 가족도 너 자신보다 중요하진 않아.(p.95)"라는 말이 마음에 밖힌다.


팟캐스트에서 은유 작가는 '주제가 무겁다보니 책을 쓰기가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힘드니까 해야하는거 아닌가, 이런 삶을 산 분도 있는데 듣고 쓰는 건 해야하겠더라."고 말했다. 2016년 5월 26일,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참변을 당한 김군도 역시 동준 군과 비슷했다. 가장 기피하는 업무에 그를 몰아넣은 어른들은 그를 방치했다. 모두의 책임이고 잘못이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낸 죽음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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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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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주말 점심과 저녁을 모조리 스파게티와 피자, 그러니까 이탈리안 식당에서 처음보는 남성과 해결하던 때가 있었다. 소개팅을 정주행하며 맛없는 음식에도 입맛에 맞는다고 답하는 예의를 발휘하고, '걷는 걸 좋아한다'는 말에 눈치없이 석촌호수를 두 바퀴나 걷게 해도 미소를 잃지 않던 당시. 이제 그만할까 싶었는데 헛! 했던 사람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으며, 문화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정수리 머리숱이 부족해보이는 첫인상에 다소 실망했지만(이런 내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 그와 나눈 책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다. 두 시간이 넘게 서로의 추천도서에 대해 침을 튀며 얘기했고 한 영화의 장면들을 사시미 포처럼 분석하며 나눴다. 그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책 좋아하는 소갈머리 없는 남자'로 남아있다. (남편 미안)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를 읽으며 '그 남자'가 떠올랐다. 차이점이 있다면 저자는 유머까지 겸비했다는 것. 어릴 적 '야한 대목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소설을 탐독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짜샤이 이론'에 따라 읽었단다. 짜샤이 이론이란 중식당 기본 반찬인 짜샤이가 맛 있으면 그 집 음식도 맛있다는 경험에 따라, 책 초반 30페이지를 읽고 괜찮다 싶으면 끝까지 읽는다는 그만의 방법이다. 혹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는가. 짜샤이 이론에서 드러나듯 <쾌락독서>에는 문유석 판사의 '유머'가 가득하다. 문유석식 유머의 결정체를 소개한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며 철학을 논하던, 대학시절의 선배들을 떠올리며 그가 하는 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세상 이치에 통달한 심오한 철학자처럼 굴던

대학교 2학년, 3학년 선배들이 트와이스의 나연, 정연, 사나보다 어린 애송이들이었다.

이거야말로 심오한 인생의 진실 같기도 하다. (p.140)

그는 왜 책을 읽는걸까? "나는 그저 심심해서 재미로 읽었고, 재미없으면 망설이지 않고 덮어버렸다. 의미든 지적 성장이든 그것은 재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걸리는 부산물에 불과.(p.10~11)"하다고 말한다. 무릇 책이라고 하면 범우주적 교훈과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신성'에 도전하는 다소 건방진(?) 입장이아닐 수 없다. 나는 바로 여기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어디 한 번 보자.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 몸을 사정없이 꼬며 책을 열고 덮기를 반복한다. 어디 이뿐인가. 재미없지만 꼭 읽어야만 하는 책 - 토론도서, 참고도서, 특히 업무용 책 - 을 읽으라고 하면, 가능한 끝까지 안 읽다가, 마지막 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정독하고 본문은 휘리릭 기법으로 넘겨버린다.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지사. 문제는 더 있다. 다 읽지 못했기에 언젠가 읽어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제 그 책은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읽지도 않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책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 이제 책장에 놓여있지만 내가 안읽을 것 같은 책을 보며 굳이 미안해하지 않으련다.

책에는 그럼 유머와 자신감만 있느냐. 그건 아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수호할 최후의 보루라는 곳들이 서열주의, 상명하복,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평판에 대한 두려움, 청탁문화, 아랫사람은 쥐어짜면서도 윗사람에게는 순종적인 이중성으로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다양한 내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p.210)"며 <불멸의 신성가족>을 언급하고 가능한 동료들(판사)에게 권한다고 한다. 일반인보다 객관적이라는 자기 확신을 점검하고 무오류성이라는 착각을 철폐하기 위해. 즉, 판사로서의 자기객관화를 위해 책을 읽는다는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서의 일종의 직업적 고찰로 읽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저자는 가능한 법조계를 다룬 책들은 꼭 읽으려고 한단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판사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니 아주 살짝 위로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책'의 특징도 설명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미디어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p.183)"이라고. 인간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은 공기와 같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사람의 보석같이 반짝이는 순간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걸 표현한 정수가 바로 '글'이며 이걸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책'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연신 ㅋㅋㅋㅋ 하면서 읽었다.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쾌락독서>는 문유석 판사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가 읽었다는 책을 읽고 싶게 만다는 책이다. 종일 '문유석'이라는 사람을 찾아봤다. 다소 장난기 넘치는 사진 속 표정이 '역시'하며 감탄하게 된다. 요즘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글도 잘 쓰더라'는. 기생충박사 서민 교수가 그랬고(<서민의 개좋음>), 영어가르치는 박균호 선생님이 그렇고, 이번에 문유석 판사도 그렇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렇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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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삭스를 신고 차이나를 걷는 여자 - 어떻게 최고의 커리어를 얻는가
이은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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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골드만삭스를 신고 차이나를 걷는 여자>는 글로벌하게 성공한 여성직장인의 에세이다. 주인공은 GLG 이은영 전무. 연대 영문학 전공, 미국 코넬대 대학원 언어학을 졸업하고, 이후 맥킨지,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 SK그룹, 중국 안방보험까지 국내외 내로라하는 기업을 섭렵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저자가 직장을 선택하고 진입하고, 난관을 맞닦뜨리고, 헤쳐나가 다시 성공하는 '직장'을 중심으로 한 분투기다.

 

 

1장. DKNY와 프라다 그리고 맥킨지

2장. 프로들의 집합소, 골드만 삭스

3장. 역사의 현장, 리먼 브러더스

4장. 글로벌 기업이 되고 싶은 로컬 기업, SK그룹

5장. 마침내 신대류을 밟다, 안방 보험

<골드만삭스를 신고 차이나를 걷는 여자> 목차

 

 

저자 이은영은 여성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겪거나(생각하는) 유리천장을 익숙한 방식으로 헤쳐나간다. 각 기업에서 그녀는 동양인 여성으로서 여러 고초들을 겪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해 해결했다고 책에서는 설명한다. 예를들어, 맥킨지 컨설턴트 시절 고객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수모를 당하고, 이를 방관하는 동료들에게 실망한다. 저자는 직접 매니저에게 불합리한 상황을 설명하고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본인이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만다. 또, 국내 대기업 임원시절 '사내정치'가 곧 '관계'를 의미하며 각종 '술자리'와 연결된다는 걸 알게된다. 저자는 '나도 한다 사내정치' 챕터에서 '술을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해요'라고 말을함으로써 술자리를 피할 수 있게 됐고, 대신 부족해진 '잘 지낼 기회'는 외국어 등 자신의 강점을 활용했다고 설명한다. 너무 평이한 솔루션 아닐까. 직장에서 알고/보고/경험하는 유리천장 혹은 부조리를 글로벌하게 성공한 여성이 무언가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길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김이 빠지는 마무리일 수 있겠다.

반면, 저자의 열정과 적극성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보일테다. 책에 줄곧 등장하는 '점 뿌리기'는 '원하는 바를 좇아라'의 다른 말이다. 언어를 전공했지만 컨설팅 회사에 발을 내딛고, 기업을 직접 속속들이 파악해 딜을 하는 M&A에 손을 뻗고 이후 '차이니스월'이 존재하는 중국기업의 임원까지 이뤄냈다. 그녀는 "나는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도전해보는 모든 행위를 점 뿌리기라고 말한다. 점 뿌리기는 계산이나 계획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이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명확한 선이 만들어질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 뿌리기기는 호기심, 도전과 맞닿아 있다.(p.149)"며 '마음이 원하는 바'를 좇으라고 한다. '하고싶은 걸' 하다보면 각각이 하나의 점이 되고, 여러 방면에 뿌려진 점들은 어느 순간 선으로 모이며 자신의 스펙과 경쟁력이 된다는 설명이다. 적극 공감한다. 각 순간마다 집중하고 열정적으로 몰입했던 무언가는 어느 순간 튀어나와 내 삶의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Life is not fair. Deal with.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받아들이고 헤쳐나가길.)

이 책을 학생 때 읽었다면 어땠을까. 외국에 나가고 싶은 내 마음에 촉매제가 되지 않았을까. 책은 저자의 경험만큼 다양한 외국기업의 사례를 담고 있다. 들어가고 나오는 방법 뿐 아니라 자세와 삶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따라서 이 책은 해외 기업을 속속들이 알고 싶고, 글로벌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직장인'으로서의 '여성'을 적나라하게 아는 데도 효과적이다. 모든 사회초년생들에게도 한번쯤은 꼭 읽히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짧막하고 쉽게 술술 읽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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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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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10시 회의 주제는 <5g+전략>이었다. 기지국이 있어도 잘 터지지 않는다고 언론이 보도할 때, 한켠에서는 5g가 상용화되었으니 이를 국가의 성장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한다. 이해와 관점이 달라 발생하는 상황이겠지. 그렇다면 5g는 과연 중요한 문제일까? 정보통신 분야 종사자라면(나는 IT관련 회사에 다닌다) 응당 이 범국가적 트렌드를 공부하고 분석하고 연구해야 하는걸까? 어쩌면 우리는 정부의 발언과 이것말고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듯한 언론의 태도로 인해 정말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웨덴의 통계학 석학이자 의사인 한스로슬링의 저서 <팩트풀니스>는 이러한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1. 간극본능 :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생각

2. 부정본능 : 세계는 점점 나빠진다는 생각

3. 직선본능 : 세계인구는 단지 증가한다는 생각

4. 공포본능 : 두렵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

5. 크기본능 :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려 생각하는 경향

6. 일반화본능 :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려는 경향

7. 운명본능 : 타고난 특성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

8. 단일관점본능 : 단일한 원인과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향

9. 비난본능 : 왜 안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생각

10. 다급함본능 : 위험이 임박했다고 느낄 때 즉각 행동하고 싶게 만드는 본능

책은 인간의 사고 방식에 오류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그 근거는 10가지 본능이며, 이 본능들로 인해 인간은 '느낌'을 '사실'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 즉 '사실충실성'을 제시한다. 저자는 인간이 본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우리가 '판단' 할 때 본능보다 '사실'에 기반하도록 '사고의 흐름'을 제어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1)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판단은 오류를 발생시킨다 > (2)본능보다 사실에 입각해 사고해야 한다 > (3)이를 위해 사실충실성을 훈련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한스로슬링은 '세계 소득 수준'을 예로 든다.

"세계 인구 다수는 저소득 국가도, 고소득 국가도 아닌 중간 소득 국가에 산다. 중간 소득 국가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사고방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범주이지만,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인류의 75%가 사는 곳인자, 사람들이 간극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곳이다. 중간소득 국가와 고소득 국가를 합치면 인류의 91%에 해당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세계시장에 편입되었으며 상당한 발전을 이뤄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산다. (중략)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러 나라를 두 집단으로 나누는 행위를 멈추는 것이다. (p.51~53)"

통상적으로 소득수준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나누는 구분은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간극본능'에 기인하며 이는 중간소득 국가를 제외한 사고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네 단계 소득수준'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하루에 2달러를 벌면 1단계, 2~8단계는 2단계, 8~32달러는 3단계, 32달러 이상은 4단계 입니다. 극빈층인 1단계는 세계인 70억 중 10억명이 채 되지 않으며, 2~3단계는 각각 30억, 20억명, 가장 상위인 4단계는 한국을 포함해 10억명입니다(p.55~58)" 세계 소득수준에서 시작한 이 개념은 책 전반에서 10가지 본능을 해석하는 툴로 작용하는데 바로 여기서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간극본능은 사실 그대로의 인식을 방해하는데, 네 단계로 설명한 저자의 개념은 사실로,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걸까.

저자가 의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책은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보인다. 특히 마지막 제언, 인류가 '진정' 고민해야 할 다섯가지 문제 - 유행병, 금융위기, 제3차 세계대전, 기후변화, 극도의 빈곤 - 를 보자. 저자는 "이 문제들이 왜 가장 걱정되는 것일까?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며 "앞의 세 가지는 예전에 일어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섯 가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인간의 발전을 여러 해 또는 수십 년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p.338)"고 말한다. 전 세계를 관통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겠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충실성에 입각한 주장일까. 혹 '(로슬링의)본능에 입각한' 판단으로 읽힐 수 있지는 않을까.

책은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본능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어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라고 정의된다. 과연 이 부분을 훈련으로 통제할 수 있는걸까? 공포본능에서 언급되는 자극적인 소재로 이목을 끄는 언론의 행태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한 다섯가지 이슈 외에 인류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과연 없는걸까? 로슬링은 다양한 통계학적 데이터를 분석했고 근거로 삼았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데이터의 방대함에 독자들은 놀라면서 동시에 그의 논리적 흐름에 질문을 던지게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긍정적이다. 악성 범죄는 늘고,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환경은 파괴되는 와중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근거를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양한 통계, 평균, 분포를 활용한다. 저자는 세상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정확한 사실 데이터를 근거로 이 세계가 나아지고 있음을 바로 보자고 말한다. 책은 읽을수록 '사실'이 무엇이고 이를 바로 '보기' 위해 필요한 사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게한다. 독자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데이터들은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이것은 생각보다 강력한 위로가 된다. 저자가 '사실충실성'에 기반해 보여준 세계는 실제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비평도서가 힐링을 주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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