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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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주말 점심과 저녁을 모조리 스파게티와 피자, 그러니까 이탈리안 식당에서 처음보는 남성과 해결하던 때가 있었다. 소개팅을 정주행하며 맛없는 음식에도 입맛에 맞는다고 답하는 예의를 발휘하고, '걷는 걸 좋아한다'는 말에 눈치없이 석촌호수를 두 바퀴나 걷게 해도 미소를 잃지 않던 당시. 이제 그만할까 싶었는데 헛! 했던 사람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으며, 문화생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정수리 머리숱이 부족해보이는 첫인상에 다소 실망했지만(이런 내가 너무 속물적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 그와 나눈 책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다. 두 시간이 넘게 서로의 추천도서에 대해 침을 튀며 얘기했고 한 영화의 장면들을 사시미 포처럼 분석하며 나눴다. 그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책 좋아하는 소갈머리 없는 남자'로 남아있다. (남편 미안)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를 읽으며 '그 남자'가 떠올랐다. 차이점이 있다면 저자는 유머까지 겸비했다는 것. 어릴 적 '야한 대목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소설을 탐독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짜샤이 이론'에 따라 읽었단다. 짜샤이 이론이란 중식당 기본 반찬인 짜샤이가 맛 있으면 그 집 음식도 맛있다는 경험에 따라, 책 초반 30페이지를 읽고 괜찮다 싶으면 끝까지 읽는다는 그만의 방법이다. 혹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는가. 짜샤이 이론에서 드러나듯 <쾌락독서>에는 문유석 판사의 '유머'가 가득하다. 문유석식 유머의 결정체를 소개한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며 철학을 논하던, 대학시절의 선배들을 떠올리며 그가 하는 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세상 이치에 통달한 심오한 철학자처럼 굴던

대학교 2학년, 3학년 선배들이 트와이스의 나연, 정연, 사나보다 어린 애송이들이었다.

이거야말로 심오한 인생의 진실 같기도 하다. (p.140)

그는 왜 책을 읽는걸까? "나는 그저 심심해서 재미로 읽었고, 재미없으면 망설이지 않고 덮어버렸다. 의미든 지적 성장이든 그것은 재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걸리는 부산물에 불과.(p.10~11)"하다고 말한다. 무릇 책이라고 하면 범우주적 교훈과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신성'에 도전하는 다소 건방진(?) 입장이아닐 수 없다. 나는 바로 여기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어디 한 번 보자.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 몸을 사정없이 꼬며 책을 열고 덮기를 반복한다. 어디 이뿐인가. 재미없지만 꼭 읽어야만 하는 책 - 토론도서, 참고도서, 특히 업무용 책 - 을 읽으라고 하면, 가능한 끝까지 안 읽다가, 마지막 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 정독하고 본문은 휘리릭 기법으로 넘겨버린다.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지사. 문제는 더 있다. 다 읽지 못했기에 언젠가 읽어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제 그 책은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읽지도 않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책장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 이제 책장에 놓여있지만 내가 안읽을 것 같은 책을 보며 굳이 미안해하지 않으련다.

책에는 그럼 유머와 자신감만 있느냐. 그건 아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수호할 최후의 보루라는 곳들이 서열주의, 상명하복,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평판에 대한 두려움, 청탁문화, 아랫사람은 쥐어짜면서도 윗사람에게는 순종적인 이중성으로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다양한 내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p.210)"며 <불멸의 신성가족>을 언급하고 가능한 동료들(판사)에게 권한다고 한다. 일반인보다 객관적이라는 자기 확신을 점검하고 무오류성이라는 착각을 철폐하기 위해. 즉, 판사로서의 자기객관화를 위해 책을 읽는다는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서의 일종의 직업적 고찰로 읽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저자는 가능한 법조계를 다룬 책들은 꼭 읽으려고 한단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판사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니 아주 살짝 위로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책'의 특징도 설명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미디어 시대에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p.183)"이라고. 인간의 비열함과 어리석음, 그악스러움은 공기와 같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사람의 보석같이 반짝이는 순간들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걸 표현한 정수가 바로 '글'이며 이걸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책'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연신 ㅋㅋㅋㅋ 하면서 읽었다. 2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쾌락독서>는 문유석 판사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가 읽었다는 책을 읽고 싶게 만다는 책이다. 종일 '문유석'이라는 사람을 찾아봤다. 다소 장난기 넘치는 사진 속 표정이 '역시'하며 감탄하게 된다. 요즘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글도 잘 쓰더라'는. 기생충박사 서민 교수가 그랬고(<서민의 개좋음>), 영어가르치는 박균호 선생님이 그렇고, 이번에 문유석 판사도 그렇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렇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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