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은 미래 세상 - NAS - 에서 시작한다. 피부색(Skin Color)에 따라 사람은 ST1~ST10으로 분류된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죄질에 따라 '추방' 또는 '삭제' 당한다. 추방이 기억이 사라진채 또 다른 세상으로 내던져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라면, 삭제는 증기처럼 사라지는 일이다. 아드리안 스트롤이 펜스보로 고등학교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한다. 그녀의 졸업연설은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이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소녀는 체포되고 만다. 이제 소녀는 반역자로 분류되어 80년 전의 과거로 '추방'당한다. 1959년 위스콘신 주의 작은 마을, 소녀는 이제 '메리 엘렌 엔라이트'로 살아야 한다.

소설 <위험한 시간 여행(원제 Hazards of Time Travel)>은 1938년생 미국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이다. 58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고 다양한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녀는,미국에 생존하는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녀는 책에서 미래의 미국을 억압적인 디스토피아 사회로 설정한다. 피부색에 따른 구분, 항상 감시하는 정부, 추방 또는 삭제라는 형벌. 그 파괴성은 아드리안 스트롤(또는 메리 엘렌 엔라이트)를 통해 그려진다.

작가는 SF소설의 문법에 어울리는 소재 두 가지를 활용한다. 첫째는 시간여행이다. 2039년의 미래에서 형벌을 받아 와버린 1959년의 세상. 책은 소녀의 카오스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상당부분 할애한다. 마이크로칩으로 일부의 기억만 사라진 아드리안은, 미래를 '알고'도 있지만 현실을 '살기'도 해야한다. 그런데 혼란스러움은 예상외로 단순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탈출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삶을 영위하려는 주인공, 종국에 이런 생각을 밝힌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다. (P.378)"라고. 즉, 전복적 시도를 반복하며 추방의 상태를 벗어나려던 주인공은 갑자기 현실순응주의자로 변하면서, 책은 미래에서 과거로 단 한차례 시간여행만 이뤄질 뿐, 다른 시점의 시간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큰 바탕에서 다양한 시점이동과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다면 디스토피아 사회가 더 피부로 와닿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책에는 아드리안이 과거 세상에서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웨인스코샤 대학의 심리학과 조교수 울프만 박사다. 아드리안은 울프만을 보자마자 '동일한' 상태임을 직감한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는데, 울프만 박사가 아드리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바로 여기서 작가는 두번째 장치가 등장한다. "여기 제9구여, '행복한 곳'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다 가상이야. 난 너의 친구야. 하지만 동시에 나는 컴퓨터 전략국의 연구원이기도 해. (중략) 너도 깝박 넘어갔지? 추방자들이 다 그래! 그렇게 믿었던 거는 죄책감 때문이고 또 순진해서야. 제9구역은 가상이라고. 실재가 아니야. 컴퓨터 전략국의 연구진으로 내가 이 가상 현실 세팅 작업을 직접 했어. 1959~60년을 배경으로 위스콘신, 웨인스쿄샤 주립대학 복제판을 만들어낸 거지. 이곳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아. 컴퓨터 전략국의 지도상에만 있지. 정말 멋지지.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현실과 맞는 축도로 만들었으니까. (중략) 사실을 말하면 아드리안, 너는 아직 청소년 규율부에 수감되어 있어. 넌 뉴저지를 떠난 적이 없다고. 너는 지난 8개월 동안 혼수상태나 최면 뭐 그런 상태에세 계속 그곳, 아니 여기 있었던 거야. 그곳에서 그들이 너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또 카테터를 통해 비워주고 있지. 그리고 네 부모님에겐 아무 통보도 해주지 않았어. 부모님은 당신들이 뭔가 잘못해서 네가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계실 거야." 바로 추방당한 세상은 사실 '가상현실'이라는 말이다. 영화에서 봤던 수액 속에 잠긴 인간, 그 속에서 또 다른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아라니. 아드리안은 물론 독자도 혼란스럽기 시작한다. 그럼 1959년은 과거가 아니었던건가? 미래에서의 추방은 수액에서의 시간을 말하는 건가? 그럼 울프만은 왜 탈출을 계획하는 거지?

책은 아드리안(또는 메리 엘렌 엔라이트)의 심리묘사에 지면의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내던져졌다는 외로움, 동일한 처지라는 울프만을 봤을 때의 반가움, 그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은 간절함, 그에 대한 사랑까지. 17세 고등학생의 풋풋하고 서툰 이런 모습들은 주인공의 심적 어려움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시간여행' 설정은 가상현실을 등장시키며 개연성을 떨어뜨렸고, 가혹한 형벌같던 추방과 삭제는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통해 허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아란 기능적으로 통합된 반응체제를 대변하는 기제일 뿐이다.

스키너 <과학과 인간 행동>

작가의 의도는 마지막에 이해가 된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p.378)"며 현실순응적 자세를 취한다. 다소 맥이 빠지는 이 대사는 책에서 줄곧 등장하는 '행동주의', '자유의지', '스키너'와 버무려지면서 '지금을 살아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철학을 녹여낸 부분이 아닐까? <위험한 시간 여행>은 SF소설이지만 다소 로맨틱하고, 미래 세계에 대한 생각보다 '현실을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SF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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