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의 언어 - 형용사는 명사의 적이다
유종민 지음 / 타래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싶거나 정치 지도자가 되고 싶은 분들이라면, 정당을 쉽게 옮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감히 말씀드린다. 정당을 담장 넘어다니듯이 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저로서는 마땅치 않다.” - 동아일보 <이낙연, 민생당 등 ‘李마케팅’에 “쑥스럽고 거북…사양한다”(4.2)>

이낙연 후보를 따르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입당 또는 복당에 대한 생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답했다. 이 답에서 그는 두 가지 효과를 냈다. 첫째,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드러냈다. 둘째, 정치적 신념이나 민생에 대한 고민 없이 누군가의 인기를 등에 업으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술수를 막겠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전했다.

경제 전문 케이블 방송 ‘한국경제TV’ 파트장인 유종민 저자의 책 <이낙연의 언어>은 이낙연 후보자의 ‘말’내공을 분석한다.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쓰기의 언어’다. 저자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빗대어 이 후보자의 글을 설명한다. 저자는 이 후보자의 글에 대해 20년의 기자생활 덕에, 군더더기가 없고, 팩트와 감정을 명확히 구분하며 단문으로 알기 쉽게 쓴다는 특징을 꼽는다. 2부에서는 볼테르에 빗대어 ‘그의 말’을 설명한다. 특히 총리 시절, 의원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들이 예시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적에게 흥분해 약점을 보이기 보다, 상대방의 질문을 역으로 이용해 질문자가 되려 자승자박이 되는 상황을 만든다. 그가 ‘사이다’라고 불리는 이유다. 3부에서는 한지바를 통해 ‘그의 생각’을 바라본다. 정치인으로서의 소명을 일깨우듯 그는 무던히도 ‘중용’을 강조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국민의 시각에서 민생을 먼저 돌보자는, 근본에 가닿고자하는 그의 의지가 읽히는 부분이다. 마지막 4부에서는 정치현실을 분석한다. 이 부분에서는 독자들은 정치라는 곳에서 이 후보자가 돋보이는 이유를 새삼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알 수 있다. 또한 말과 글은 생각을 만든다. 생각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 (중략) 잘 쓰고 잘 말해야 한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 <이낙연의 언어> 서문

저자는 이 책이 '이낙연이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 아니고, 정확히는 이 전 총리의 '언어'에 대한 책이다. (p.4)’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서문에서 보듯, 누군가의 말과 글은 곧 그의 삶이요 생각의 궤적이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이낙연 후보자 ‘사람’에 대한 글이기도, 혹은 아니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은 쉽고 간결하게 그의 특징을 서술한다. 문단이 짧고 예시가 많아 이해가 돕는다. 반면, 단점도 있다. 같은 내용이 수 차례 반복된다. 이를테면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찬조 연설을 다니다가 목이 상해 문자메세지의 달인이 된 사례, 정치인으로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4대 의무 외의 ‘설명의 의무’는 1부와 2부에서 중복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책의 가장 큰 울림은 ‘이낙연 총리의 우회화법’에 있었다. 평소 질문에 맞춤하게 딱 떨어지는 답을 하지 않는다면, 비겁한 태도라고 생각해왔다. 동문서답은 이해력 부족, 우회 답변은 맞대결을 피하려는 의도로 읽었다. 하지만 책을 통한 이 후보자의 우회답변은 힘이 있었다. 저자의 표현처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효과를 냈다. 특히 상대방이 추진력을 잃고 오히려 자신의 질문에 이용당하는 모습은 정치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표현법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힘을 알고 나니, 나도 구사하고 싶어진다. 간혹 정치인들의 말을 듣고 보며 혀를 찬다. 이 책을 통해 일부 그런 오해들도 해소되었다. 또, 말과 글에 대한 생각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이낙연의 언어>는 이낙연 후보자에 대한 이해를 넓힘과 동시에 말과 글이라는 ‘언어’를 짚어볼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편의 전처 '레베카'의 흔적을 추적해 그녀의 죽음 뒤에 감춰진 비밀들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뮤지컬 <레베카>가 있다. 20세기 초 소설이 원작임에도 주체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긴장감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인상깊게 봤었다. 소설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이 나왔다. 책 <인형>에는 총 13편의 단편이 묶여있다. 집필순으로 묶인 소설들은 남녀관계, 결혼, 종교적 믿음, 계급 등의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짧은 분량만큼 서사는 집약적이다. 인물들의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정과 사고의 흐름에서 머뭇거림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소설집의 제목으로 등장해 가장 대표작으로 느껴지는 단편 <인형>은 압도적이다.


액자소설인가? 소설은 E.스트롱맨 박사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독자들은 소설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는걸까 궁금해진다. 주인공은 '나'다. 나는 '내 안의 모든 것을 부서뜨리고 아픔을 주는 것은 허무함이다. (중략) 나를 채우는 것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다. (p.28)'라며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다. 사랑에 빠진걸까. 실의에 빠진걸까. '나'는 말한다. '리베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p.29)'라고. 아, 그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리베카에 대한 사랑 때문이구나 싶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나'와 리베카는 장미빛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처럼 보였는데, 이야기 종반부 예상치 못한 '무엇'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줄리오'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기 아니다. 내게는 두 인물이 보여주는 '각자의 (광적인)집착'으로 읽혔다. '나'가 사랑에 대한 불만족으로 고통스럽다면, '리베카'는 불안을 응축하고 있다. 특히 리베카의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대사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보면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당신이나 다른 남자를 아무나 좋아할 수 있겠어? (p.52)"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모습은 흡사 '리얼돌'을 즐기는 사람들의 그것과 닮았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된걸까? 21세기인 지금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와 표현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대프니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건지 궁금하다.

<인형> 외에도 책에는 <동풍>,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등을 수록하고 있다. 술기운에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는 남자(<동풍>), 결혼으로 괴로워하는 연인(<성격차이>), 표리부동한 성직자(<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과거에만 몰입해 스스로 우울한 길로 걸어들어가는 이혼녀 딜리(<인생의 훼방꾼>) 등 불안한 영혼들을 주인공으로하는 소설 13편이다.

그간 접한 단편집들은 분량의 문제로 상대적으로 추상적이었다. 내용에 깊이 몰입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책 <인형>은 다르다. 각 소설마다 주제가 독특하고 표현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풍자적이고 혹은 회의적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여운이 길어 오래 곱씹게 된다고 할까. 반전을 넘어서는 놀라움과 깊이가 있는 작품들이다. 지금 봐도 혁신적인 이런 소재와 내용들을 1900년 초에 만들어 냈다니 역시 대프니 듀 모리에가 '서스펜스의 여제'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을, 게다가 서스펜스를 즐기는 독자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맘쇼 - 개그우먼 엄마들의 리얼 전투 육아기
정경미 외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여자, 아내, 며느리, 직장인, 엄마. 여성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역할갈등 중의 최고는 뭐니뭐니 해도 ‘엄마’아닐까. 인구절벽이 도래했다지만 많은 여성들이 엄마되기를 희망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엄마인 여성들은 굳이 엄마될 필요 없다 말한다. 가진 자의 복에 겨운 소리인걸까? 책 <투맘쇼>를 보며 ‘복에 겨운 것 맞네’ 싶었다. 읽고나면 너무 부러워지는 건 나만의 마음이 아닐게다.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육아에세이인가 코믹북스인가.

- 김가연(탤런트), <투맘쇼> 추천사 중 일부

책 <투맘쇼>는 실제 <투맘쇼>를 진행하고 있는 개그우먼 김경아, 조승희, 정경미가 쓴 결혼과 육아에 대한 에세이다. 전국 투어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투맘쇼>는 세 개그우먼이 의기투합하여 시작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원하기 까지,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 그 시간안에 엄마들을 위로하는 쇼를 만들고 싶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장소 대관은 정경미가, 회계와 관련한 각종 업무는 조승희가, 시나리오나 대본은 김경아가 맡았단다. 주인공들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얻었지만, 그것이 꽃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생활이 바뀌고, 매순간 엄마로서 부족한 건 아닌지 고민하고, 경력이 끊기지는 않을까 걱정한단다.

(여기서 미리 알아둘 것 한가지. 김경아, 정경미는 실제 육아맘이지만, 조승희는 미혼이다.) 책은 참 잘 짜여져있다. ‘시즌1. 결혼인가 전투인가’은 김경아, 정경미라는 개그우먼이 결혼하고 남편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시즌2. 육아인가 전투인가’은 육아 초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담았다. ‘시즌3. 출퇴근인가 전투인가’에서는 경력과 엄마 사이에 고뇌하는 그녀들을 볼 수 있고, ‘시즌4. 전쟁인가 평화인가’에서는 변덕스러운 아이들 덕에 웃고 우는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구성의 백미는 매 시즌 오프닝과 엔딩의 책임지고 있는 조승희의 멘트다. 두 엄마 개그우먼과 함께 육아에세이를 쓰고 육아 관련 쇼를 하는 것도 어려웠을텐데, 책에서 이를 알맞게 배치해 한 명의 미혼이 외로워보이지도, 두 명의 엄마가 과해보이지도 않는다. 아주 맞춤한 구성이다.

물론, 내용도 찰지다. 그래서 '리얼 전투 육아기'라는 부제를 달 수 있었을 터. 회사에서 보면 보통 일 잘하는 동료가 뭐든 잘한다. 말도 재밌게 하고, 성격도 좋고, 놀기도 잘 논다. 책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웃기기까지 한 개그우먼들이 글도 이렇게 잘 쓰다니. 현실육아를 살아내면서 적은, 진정성 200%의 글이라 그런걸까. 아직 아이가 없는 기혼녀이지만 여러 지점에서 같이 울고 웃었다.

빵 터져 한참 웃었던 77p


정경미는 오랜 시간 연애하고 결혼하자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 혹시? 라며 임신여부를 많이 물어봤다고 한다. 여기에 그녀는 “나도 하루빨리 엄마가 되고 싶었기에 ‘저 배 속에 아이 있어요.’라고 빨리 대답하고 싶었다. (p.13)”고 말한다. 어쩜, 지금 내 마음같은지. 나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묻고 여러 번 대답하고 있다. 그 와중에 대답을 하면 할수록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 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책에는 미혼인 조승희와 육아맘인 정경미, 김경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기혼이지만 아이가 없기에 딱 그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다. <투맘쇼>를 읽으며 아이나 육아에 대한 환상을 더듬어보고,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을 돌이켜봤다. 친정엄마를 생각하며 눈물짓고, 누군가가 했던 임신공격이 불쑥 떠올라 화가 나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이지만 언제나처럼 봄이 왔다. 주말 날씨는 화창하다. 책 <투맘쇼>는 봄처럼 따뜻하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좋은 책이다. 나는 오늘부터 저자 세 명을 더욱 응원할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침에 눈뜨면 핸드폰으로 코로나 관련 기사를 흝어본다. 그리고 10시를 기다린다. 질병관리본부의 생중계를 듣기 위해서다. 일상이 코로나다. 회사에서는 탄력근무와 순환근무를, 지인들과의 만남은 온라인에서 진행된다. 겨울이 녹아 봄이 찾아왔지만 지난 12월에 시작된 코로나19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훗날 지금의 이 시기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까?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로날트 D. 게르슈테는 이런 궁금증으로 과거를 바라보았다.

과거에는 질병으로 인한 사건이 얼마나 있었을까. 책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 게르슈테는 질병과 역사의 물결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를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대중적으로 많이 논의된 사회적, 경제적 여파 외에 “역사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결정권을 지닌 정치가들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뜻밖에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가야(p.8)”한다고 그는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만약 그 때 그랬다면 어땠을까?’와 같은 다소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만약 그 때 매독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 때 매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면? 만약 그 때 콜롬버스가 신대륙에 귀환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질병이고, 나머지 하나는 각종 질병에 걸린 권력자들 (p.10)”이라며 두 가지 요소 중심으로 설명한다고 밝힌다.



예컨대, 매독과 관련한 부분을 보자. 저자는 ‘매독’에 대한 여러 일화를 소개한다. 첫째, 매독의 ‘이용’이다. 1495년 2월, 전장에서 승전보를 울리던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이 나폴리에 입성한다. 이때 나폴리군은 여인들을 프랑스군에게 보낸다. 식량부족과 시간 끌기를 위해서. 여인들은 건강에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매독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때에 나폴리 군은 여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쟁에 보낸것이다. 여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프랑스 병사들은 성기 주변에서 시작된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갔고, 이 질병은 당시 ‘악성 천연두’로 불렸다고 한다.

둘째, 매독의 ‘발발’이다. 책에는 매독의 발발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소개한다. 콜럼버스가 이끈 탐사단이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들였다는 가설과, 콜롬버스(1492년) 이전에 이미 유럽 대륙에서 매독이 발발했다는 가설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유럽에 이미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전자에 무게를 둔다. 또한 매독의 발발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당할 고통을 예상하고 백인들에게 미리 가한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p.69)”며 역사적 의미를 덧붙인다.

셋째, 역사속에 녹아있는 매독의 ‘활용’이다. 매독이라는 성병은 고위 성직자들 뿐 아니라 귀족들에게 퍼져나가며 일종의 낙인으로 작용했다며 “왕조 계승 문제 등으로 국왕과 갈등관계에 놓인 정적들이 국왕을 음해하기 위해 매독 환자였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p.71)”고 저자는 말한다. 현존하는 자료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샤를 8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 그는 라이벌이었던 황제 카를로스 5세도 매독 환자라는 설이 있었다고 예시로 든다.

마지막은, 매독의 ‘효과’다. 성병이 도대체 어떤 효과를 냈단 말인가. 저자는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 팔로 피오를 언급한다. 그는 1,100명의 표본 집단에게 성관계를 가질 때 리넨 천으로 만든 작은 덮개를 사용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리넨 천에는 소금에 절인 약초 용액, 우유, 타액 등이 묻어있었다. (현재)성병 연구의 고전이라 불리는 팔로피오의 이 실험 덕에 그는 ‘콘돔의 창시자’로 서게 된다.

이처럼 저자는 의학과 역사적 지식을 결합해 페스트, 천연두, 통풍, 독감, 결핵, 에이즈 등의 질병과 그 병들과 얽힌 조지워싱턴, 히틀러, 루즈벨트, 케네디 등의 인물의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 질병은 황제, 대통령, 독재자를 가리지 않았다. 먹이 사실의 마지막 소비자로 보이는 인류도 ‘병균’에게는 하나의 숙주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 고찰을 통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희망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21세기가 된 지금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페스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접어들면서 폐결핵은 매독이나 페스트 그리고 무엇보다 콜레라와는 달리 ‘아름다운’ 질병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비단 영국에서만 일어난 현상은 아니었다. 일단, 폐결핵 희생자들 중 많은 이들이 젊은 층이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게다가 폐결핵에 걸린 환자들의 외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졌는데, 새하얀 피부를 선호하던 당시의 미인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다가올 최후를 감지한 덕분인지, 폐결핵 환자들 중에는 폭발적인 창의력을 발휘한 이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위대한 문필가 집안인 브론테 가문을 들 수 있다. 지방 교구의 사제였던 패트릭 브론테의 자녀들은 모두 폐결핵에 걸렸다. (p.244)

질병은 발병한 후보다 ‘예방’이 먼저라고 한다. 치료법이 명확하지 않다면 더욱이. 그래서 코로나19로 혼돈의 시간을 보내는 지금도 정부는 ‘거리두기’라는 묘책을 쓰고 있을 것이다. 지금 시각 국내 사망자는 144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19로 우리의 역사는 바뀌고 있다. 먼 훗날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어떤 역사적 의미로 읽히게 될까. 혹 빅토리아 시대의 폐결핵처럼 아름다운 질병으로 미화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과거와 빗대어 현실을 살펴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페미니즘하다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1
이은용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신저 앱을 통한 디지털 성범죄, 성 착취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는 초등학생, 중학생 등 미성년자가 대다수, 가해자는 수십만명으로 추정된다. 가장 전문적이고 처리가(?) 확실하다는 박사방의 경우 최소 74명의 회원이 있었고, 이곳에서는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성착위 영상물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인문학자 임옥희의 책 <여성혐오가 어쨌다구?>에서 “정보가 넘쳐날수록 익명성 속으로 가라앉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점점 더 극악스럽게 혐오 강도를 높여 간다”고 말한다. 메신저 앱에는 포토라인에 선 자에대한 추모방이 생긴다고 한다. 당사자는 '악마의 삶을 멈추게 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마치 그들에게 '악마'란 상징적이며 거대한 권력으로 보이나보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 악마를 '낭만화'해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익명성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요구조건으로 혐오 강도를 높였던 그들의 소식에 임옥희의 분석이 새삼 와닿는다.

기자 이은용은 대학생이 된 아들과 대화를 주고 받다가, 또래 친구 하나가 성추행 피해를 세상에 알린 양예원씨를 비웃으며 놀린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경찰서에 불려간 일을 듣게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생각하던 기자 이은용은 ‘혐오’라는 말을 떠올린다. “세상 그 누구든 컴퓨터 자판 위 손가락 따위가 빚은 혐오 때문에 괴롭거나 아프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11)”라고 생각한 그는 그렇게 여성에 대해,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관계에 대해 톺아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자 이은용은 책 <나, 페미니즘하다>을 세상에 내놓는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살펴보고, 여성이 사회제도 및 관념에 의해 억압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여러 가지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포괄하는 용어다.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즘’은 다소 피로하다. 어떤 사안을 페미니즘의 기준 아래에 둘 때, 보통 나는 약자이거나 피해자다. 목이 막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 힘을 내 소리를 내더라도 혼자 오해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기 일쑤다. 용기내 기준선 위로 끌어올리면, 얘기를 듣는 누군가의 생각은 곧 잘 ‘여혐’에 닿는다. 의도와 상관없이 여성의 어떤 것을 논하는 건 페미니즘이고 이건 여성 우월주의에 따라 남성 불평등을 조장해, 결국 여성혐오와 연결되는 사고체계. 지금까지 경험한 페미니즘은 내게 그런 인상을 주었다.


책에는 양예원씨의 ‘합정(동) 불법 누드 촬영 수사 및 진상 규명’관련 사건 청원에 동의 버튼을 누른 수지가 등장한다. 수지는“용기 있는 고백에 힘을 보태 주고 싶었다”말하지만 누리꾼들에게 뭍매를 맞고 만다. 그러자 “그분이 여자여서가 아니다.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끼어들었다. 휴머니즘에 대한 나의 섣부른 끼어듦이었다. (p.82)”고 말했단다. 사안에 대한 연관단어가 만들어 낸 두려움에 급히 의견을 철회하고 싶은 모양으로 읽혔다. 아마 수지도 그런걸 느끼지 않았을까? 피로감. 그래서 없던 일로 덮고 싶은 마음.

문득 ‘페미니즘(feminism)’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단어의 어원에 따라 ‘메니즘(menism)’혹은 ‘메니미즘(menimism)’정도 될까 싶었지만, 그런 단어는 검색되지 않았다. 조금 더 찾아보니 평등주의로 읽히는 ‘이퀄리즘(equalism)’이 페미니즘 반대말의 근사치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주요 객체일텐데 여성과 연관된 페미니즘만 개념어로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미니즘이 '여성의 단어'라기 보다 젠더를 바탕으로한 인간 관계를 분석한 개념이기 때문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굴러가는 사회에서 남성들의 어떤 사상과 관계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즉각 여성 혐오와 연관되는걸까?

거울을 손에 든 채 ‘못된 남자가 욕한 그대로 돌려 주는 데’ 매이지 않고 여성 삶을, 아니 한국 사회를 ‘고르고 판판하게 바꿔 보자’고 말하기 시작한 겁니다. (p.57)

이에 대해 이은용 기자는 책에서 여러 증거를 든다. 책 <못생긴 여자의 역사>를 지은 클로딘느 사게르는 ' 마녀'가 “독신 혹은 과부로 흔히 아이가 없으며 당대 사회의 가치와 규범에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를 가진 독립적인 여성(p.27)”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남자일수록 ‘여성을 제대로 알거나 함께 살 기회’가 없었고 경제적으로 홀로 선 채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p.28)"고 덧붙인다. 즉, 힘없는 남자들 사이로 두려움이 퍼지고 이게 마녀 허상을 만들고 점차 혐오의 틀로 굳어졌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책에서 마지막 쐐기를 밖는다. “힘센 여성 때문에 나와 내 삶이 쪼그라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솟자 남자들끼리 은근히 ‘여성을 하찮게 여겨 깔보는 짬짜미’를 이뤘다. (p.28)”라고. 여성과 혐오가 유닛처럼 붙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유가 남성 중심 사고의 표현이고 그들끼리 만들어낸 ‘남자들의 짬짜미’라는 분석이다.

남성 기자분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분석했을까 궁금했다. 저자는 여러 뉴스와 현재의 이슈를 페미니즘과 버무려 쉽게 설명한다. 강남역 살인과 마녀사냥에서 시작해 메갈리아 워마드, 아이돌 페미니즘, 김학의, 안태근, 안희정, 불꽃페미액션 등. 기자의 시각이어서일까? 글은 굉장히 중립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책에는 새로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톺아보기(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기), 핫아비(유부남), 매조지(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는 일) 등. 숫자나 영어 표현을 쓸때도 한글로 적는다. 시시 티브이(CCTV), 시월 3일 이런식으로. 이은용 기자는 책날개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꾸준히 올곧고 이로운 글을 쓰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다진다"고 했다.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든, 세상의 한 단면을 그의 표현대로 '톺아보아' 책을 낼 수 있었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생태계의 다양성은 중요하면서 젠더의 다양성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순사회, 인권은 중요하면서 여성의 그것은 나중문제로 치부해버리는 우월주의, 요즘의 뜨거운 감자 N번방과 얽히며 여러 생각할 지점을 건드리는 책이었다. 저자는 말미에 "귀 기울일수록 한국에 사는 남자로서 많이 낯부끄러웠다. (p.192)"고 말한다. 또 "페미니즘은 오랜 가부장제 때문에 비틀어지거나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는 생각이자 움직임입니다. (p.188)"라고 정의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라도 배우고 익힐 수 있었으면, 그래서 귀 기울이고, 조금 더 나은 세상 만들기에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