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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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전처 '레베카'의 흔적을 추적해 그녀의 죽음 뒤에 감춰진 비밀들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뮤지컬 <레베카>가 있다. 20세기 초 소설이 원작임에도 주체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긴장감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인상깊게 봤었다. 소설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초기 단편소설 모음집이 나왔다. 책 <인형>에는 총 13편의 단편이 묶여있다. 집필순으로 묶인 소설들은 남녀관계, 결혼, 종교적 믿음, 계급 등의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짧은 분량만큼 서사는 집약적이다. 인물들의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정과 사고의 흐름에서 머뭇거림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소설집의 제목으로 등장해 가장 대표작으로 느껴지는 단편 <인형>은 압도적이다.


액자소설인가? 소설은 E.스트롱맨 박사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독자들은 소설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는걸까 궁금해진다. 주인공은 '나'다. 나는 '내 안의 모든 것을 부서뜨리고 아픔을 주는 것은 허무함이다. (중략) 나를 채우는 것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다. (p.28)'라며 복잡한 마음을 드러낸다. 사랑에 빠진걸까. 실의에 빠진걸까. '나'는 말한다. '리베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p.29)'라고. 아, 그의 혼란스러운 감정은 리베카에 대한 사랑 때문이구나 싶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혼란스럽다. '나'와 리베카는 장미빛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처럼 보였는데, 이야기 종반부 예상치 못한 '무엇'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줄리오'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라기 아니다. 내게는 두 인물이 보여주는 '각자의 (광적인)집착'으로 읽혔다. '나'가 사랑에 대한 불만족으로 고통스럽다면, '리베카'는 불안을 응축하고 있다. 특히 리베카의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대사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보면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당신이나 다른 남자를 아무나 좋아할 수 있겠어? (p.52)"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녀의 모습은 흡사 '리얼돌'을 즐기는 사람들의 그것과 닮았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된걸까? 21세기인 지금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와 표현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대프니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건지 궁금하다.

<인형> 외에도 책에는 <동풍>,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등을 수록하고 있다. 술기운에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는 남자(<동풍>), 결혼으로 괴로워하는 연인(<성격차이>), 표리부동한 성직자(<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과거에만 몰입해 스스로 우울한 길로 걸어들어가는 이혼녀 딜리(<인생의 훼방꾼>) 등 불안한 영혼들을 주인공으로하는 소설 13편이다.

그간 접한 단편집들은 분량의 문제로 상대적으로 추상적이었다. 내용에 깊이 몰입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책 <인형>은 다르다. 각 소설마다 주제가 독특하고 표현방식도 예사롭지 않다. 풍자적이고 혹은 회의적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여운이 길어 오래 곱씹게 된다고 할까. 반전을 넘어서는 놀라움과 깊이가 있는 작품들이다. 지금 봐도 혁신적인 이런 소재와 내용들을 1900년 초에 만들어 냈다니 역시 대프니 듀 모리에가 '서스펜스의 여제'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소설을, 게다가 서스펜스를 즐기는 독자라면 무조건 봐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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