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김기상
어디 갈 곳이 있어
칡넝쿨 바쁘게 허공을 기어오르는지
소나무는 알고 있었나
제가 일군 길을 내주었다
소나무가 죽고
칡넝쿨은 그만 길을 잃었다
치렁치렁 머리 풀고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
정말 죽은 것이냐
뿌리 가까이 귀를 댄다
자기가 일군 길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칡넝쿨 때문에 소나무는 죽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길을 내주었던 소나무가 죽으면 길을 잃은 칡넝쿨은 다른 나무로 옮겨 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칡넝쿨은 ‘치렁치렁 머리 풀고/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와 ’‘뿌리 가까이 귀를 대고’묻는다. ‘정말 죽은 것이냐’고.
시인은 인간중심주의의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칡넝쿨과 소나무 공생은 그래서 시인에게 보였던 걸까? 아니다. 시인에겐 인간이 동식물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없다. 그 겸손함이 이런 시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인간이 사물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 즉 자연의 일부였을 때를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의 사회’라 부른다. 칡넝쿨과 소나무의 동행. 그것을 지켜보는 시인이 공생하는 대칭성의 사회가 10줄 시로 형상화되었다.
눈처럼 하얀 혹은 까만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
어미의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빼꼼히 첫눈에 담았을 땅이
그를 받아낸 것이다
땅은 그랬을 것이다
정말 맘 푹 놓고 새끼는 나왔을 것이다
겨울의 언 땅인 줄도 모르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몸을 무작정 던졌을 것이다
언 땅이 받쳐 든 새끼를 얼마나 부지런히 핥아댔는지
닳고 단 어미의 혀가 새끼의 까만 몸에서 반짝거린다
땅도 무던히 마음 졸였다보다 질펀하게 녹아있다
담장 옆 목련 꽃봉오리
보송보송한 털옷 한꺼풀 벗어주고.
엘리아데는 시간을 축적하는 삶이 아니라 매번 갱신하는 삶을 '영원회귀'라 불렀다. 원시인들은 카니발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 새롭게 태어났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로부터 나왔다'를 살았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증명이었다. 인디언 세계에서 remember, 다시 멤버가 되는 것은 다시 우주의 멤버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 그리고 맘을 졸여 질펀하게 녹은 땅, 더불어 목련
이처럼 아름답고 따스한 세계라니... 이곳에 수장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