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께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3월이다. 기다리지 않았는데 시인의 부고 소식이 날아 들었다. 발인이 3월 1일이다. 봄은 오고 시인은 가셨다. 가시는 길이지만 화창한 봄빛이 함께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명복을 빈다.

 

게으른 봄이 드디어 오는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봄도 내게 한 소식을 전해왔다. 어딘가에서 한눈 팔다가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이제서야 온다.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고 행여나 땡깡 부릴까 흘겨보지도 못하겠다.

 

봄과 관련한 시어들이 눈에 띄는 건 내 마음의 반영인가.

 

 

 

 

벌판에 이르면/이성부

 

 

지나는 바람에게 말 걸고 싶어

벌판에 이르면 보이누나.

 

매맞고 내려가서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더 튼튼해진 몸 되어 달려오는

봄이 보이누나.

 

아직 털스웨터 벗는 것도 잊어버린

노동에게,

눈곱 낀 줄도 모르고 세상 들여다보는

 

뱀이나 개구리나 벌레들에게,

하나씩 입맞추면서

어깨 두드리면서,

 

달려오는 봄 보이누나,

지친 사람들에게는 눈 바로 뜨고

정신 차리라 고함치는

봄이 보이누나.

 

바로 세워야 하고,

터져 나올 것은 나와야 하는

때가 보이는 구나.

 

 

 

 

혹독한 내 생의 겨울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구 달려오는 봄도 보고싶다. 그러나 두 팔 벌리고 뛰어나가 맞이하지 않겠다. 벅찬 가슴 억누르고 반가워 저절로 나가는 손도 거두어 들이리라. 기다리는 내 맘 아시거든 머물만큼 머물다 가시라. 어느 곳에선가 또 누군가 간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병이 사람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가진 시인이 있다. 오늘 그가 어제 썼다며 보내온 시를 읽고 코끝이 매웠다. 병이 시를 짓게 하고 시가 병을 낫게 하고, 병이 사람을 낫게 하는 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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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01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에 이성부 시인의 '벼'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서야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네요.

반딧불이 2012-03-02 18:20   좋아요 0 | URL
하하..여전히 학생이시잖아요~ 저도 잊고 있었는데 부고를 받고 깜짝놀랐답니다. 봄에는 시인의 부고가 많은것 같네요. 쉼보르스카도 가시고...이성부 시인도 가시고..또 한분 계셨는데 생각이 안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