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게이션/유안진
너무 많은 것을 보느라고
한두 가지도 제대로 못 본 관광에서
너무 여러 가지를 먹어서
맛있는 게 없었던 뷔페에서
너무 많이 배워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공부에서
만신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나이에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주장하고 설득하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울부짖어 발광하기보다는 눈감고 견디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열심히 살아온 것이 열심히 망친 것이 된 줄을
겨우 알아지고 보니
山을 섬겼는데
江에 와 있다
강물이야말로
처음부터 따라 갔어야 할 길이라고
한 참 두 참......, 많이 늦었지만―
어쩌면 이리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데 참 욕심도 많으시다.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한 강물의 네비게이션만 가지시지. 세상의 모든 강물을 당신의 네비로 챙기시다니.......
우편함에서 꺼내온 계간지들을 선채로 훑어보다 이 시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읽어야할 책들을 읽는 일에 시간을 다 보내고 있는 요즈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뒷통수가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