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게이션/유안진

 

 

너무 많은 것을 보느라고

한두 가지도 제대로 못 본 관광에서

너무 여러 가지를 먹어서

맛있는 게 없었던 뷔페에서

너무 많이 배워서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공부에서

만신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나이에서

 

뭔가를 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주장하고 설득하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울부짖어 발광하기보다는 눈감고 견디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열심히 살아온 것이 열심히 망친 것이 된 줄을

겨우 알아지고 보니

 

山을 섬겼는데

江에 와 있다

강물이야말로

처음부터 따라 갔어야 할 길이라고

한 참 두 참......, 많이 늦었지만― 


  

어쩌면 이리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데 참 욕심도 많으시다.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한 강물의 네비게이션만 가지시지. 세상의 모든 강물을 당신의 네비로 챙기시다니.......

 
우편함에서 꺼내온 계간지들을 선채로 훑어보다 이 시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읽어야할 책들을 읽는 일에 시간을 다 보내고 있는 요즈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뒷통수가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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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0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안진의 시를 참 좋아했었어요. 그래서 시집이란 시집은 다 찾아 읽고 베껴두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특유의 딱딱 맞아들어가는 댓구가 기계적으로 보이는거예요. 참, 사람 마음의 변덕이라는게...
오늘 오랜만에 유안진의 시를 보네요. 다른 일 모두 그만두고 시인으로, 시인으로만 살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요. 저 시 속에도 그런 뜻이 얼핏 비치고요.

반딧불이 2010-09-28 12:24   좋아요 0 | URL
베껴두실 정도면 시를 정말 좋아하시는거네요. 저는 유안진 시인의 시를 눈여겨본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 시인의 특징을 파악하지는 못했구요. 아마도 제가 반복해서 읽으면 hnine님처럼 기계적인 댓구가 보이겠죠. 그렇다면 아마도 저 역시 '이거뭐야 국화빵이잖아!' 하면서 외면하게 될거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