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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 산문의 향기 005
나쓰메 소세키 지음, 미요시 유키오 엮음, 이종수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편지를 묶은 것이다. 청년시절부터 1916년 그가 죽기 한 달 전까지의 편지 158통이 실렸다. 편지는 마사오카 시키를 비롯한 친구, 아내를 포함한 가족, 그리고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와 몇몇 문하생들, 독자 등 다양하다.
일기와 편지는 독자가 단 한명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기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편지는 타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만이 공유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편지는 그렇기 때문에 내밀한 사연이나 진정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편지는 쓰는 사람의 성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형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세키의 편지글은 겉치레 없이 담백하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이다.
나는 소세키가 영국유학 당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영국에서 일본으로 편지를 보내면 보통 한 달 정도가 걸리는 듯하다. 소세키는 영국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소상하게 아내에게 적어 보낸다. 런던의 풍경이나 하숙생활, 공연을 보고 온 이야기 등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훨씬 자상한 남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내 교코는 편지를 잘 보내지 않았는지 소세키는 답장을 잘 쓰지 않는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자주 한다. 오래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련만 머리를 자주 감으라는 둥 늦잠을 자지 말라는 둥 잔소리가 많다.
소세키의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마사오카 시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시키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과 시키의 습작에 대한 소세키의 의견들이 진지하고 나타나있다. 가슴속에 일말의 사상도 없이 문자만을 희롱하거나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할 바에야 일찌감치 문학을 포기하라고 한다. 시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색하고 쓴 문학에 관한 글뿐만 아니라 형수의 죽음,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 교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등등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글이 많다. 도쿄대학 예비문(교양학부)동급생이었던 소세키와 시키는 서로 간에 마음을 터놓았던 유일한 친구였던 듯싶다. 소세키가 영국 유학중 시키는 죽었다. 소세키가 쓴 글에는 시키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 더러 있다.
제목으로 쓰인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는 소세키의 문하생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구메 마사오 앞으로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 평을 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는 등 스승으로서 갖추어야할 품위와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소가 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세. 우리는 어떡하든 말이 되고 싶어 하지만, 소는 웬만해선 될 수 없네. 나같이 늙고 교활한 사람이라도, 소와 말이 교미하여 잉태한 아이 정도일 걸세. 서둘러서는 안 되네. 머리를 너무 써서는 안 되네. 참을성이 있어야 하네. 세상은 참을성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불꽃은 순간의 기억밖에 주지 않네. 힘차게, 죽을 때까지 밀고 가는 걸세. 그것뿐일세. 그리고 우리는 고민하게 한다네. 소는 초연하게 밀고 가네. 무엇을 미느냐고 묻는다면 말해 주지. 인간을 미는 것일세. 문사를 미는 것이 아닐세.”
눈앞의 사소한 일상과 싸우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명이나 악평도 겁내지 않고, 칭찬을 구하지도 않으며 오직 후세의 숭배를 기대하며 자신의 글을 백대까지 전하려는 야심가였던 소세키의 결기가 느껴지는 글이기도 하다. 소세키는 이런 마음을 그의 문하생들과 함께 나누었다. 청출어람이라고 했던가, 스승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던 문하생들은 일본 문단의 주요인물이 되었다. 현재 일본 문단의 아쿠타가와 상은 소세키의 문하생이었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는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