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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거울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맨 처음 이 책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110가지 개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문학과 철학의 즐거운 만남’이라는 컨셉을 기반으로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으로 명명되어졌다. 컨셉은 좋았지만 과연 소크라테스와 헤세가 즐거운 점심을 했는지 뜨악한 점심시간을 가졌는지는 미지수다.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해서 자기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헤세가 시도 때도 없이 집요하게 질문을 해대는 소크라테스를 만났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한 때 000가지 시리즈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통합교육이라는 말이 원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이용되면서 각 학문 영역의 경계를 허물자는 운동 아닌 운동도 있었던 것 같다. 책 제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살아남기 위해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출판업계의 흔적이 이 책 한권에서 다 보이는 듯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이런 과정을 거쳐 『생각의 거울』이라는 원래의 제목을 찾게 되었다.
그동안 미셀 투르니에의 글은 김화영의 번역본을 주로 보았었는데 이 책은 김정란 시인의 번역이다. 언젠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최승자 시인과 박갑성이라는 철학교수의 번역본으로 읽은 적 있었다. 시인은 관념을 구체적 사물로 형상화하는데 능했고 철학교수는 개념어를 능란하게 구사했다. 기호로 표현하기 어려웠던지 철학교수가 누락시킨 부분은 시인이 전해주는 생생한 이미지로 전달받았다. 최승자 번역본은 시적이고 박갑성의 번역은 철학적이었다. 그래서 골라 읽는 재미에 서로 비교하면서 읽는 건 부록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의 거울』을 번역한 두 사람은 모두 문학전공자여서 그런지 나는 번역의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하겠다. 투르니에의 문학적 아름다움과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해 준 두 번역가 모두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투르니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듯 글은 분명하고 명료하다. 철학적 관념을 구체적 사물로 대체하거나 그 반대 역시 그는 탁월하다. 구체적 사물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는데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관념의 문턱을 넘어가 있었다. 그는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에서 표면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리 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행위인 목욕과 샤워에 대한 글에서 그는 그것이 둘 다 몸을 씻는 행위라는 공통점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는 곧 차이점에 천착하게 되는데 목욕은 따뜻한 물이 가득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누워있다는 행위에서 수평을,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내맡기는 샤워에서는 수직을 말한다. 더 나아가면 목욕은 양수 속에 떠돌고 있는 태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퇴행을, 세례요한이 예수에서 세례를 줄 때 샤워를 시켰지 목욕을 시켰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샤워와 세례를 연결 짓는다.
그의 말을 새기다보면 목욕은 수동적이고 정적이며 무방비 상태이며 샤워는 능동적이고 동적이며 공격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만약에 샤를로트 코르데의 칼에 찔려죽은 마라가 목욕을 하지 않고 샤워를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이르면 샤워하고 있는 사람은 깨끗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반면 목욕하는 사람은 깨끗함 따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속성으로 그는 목욕과 샤워를 정치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즉 샤워는 좌파 쪽에, 목욕은 우파 쪽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투르니에는 시공을 넘나들고 추상과 구체적 사물을 자유롭게 연결 지으며 생각의 지평을 깊고도 넓게 확보해가고 있다.
이외에도 개와 고양이, 기쁨과 쾌락, 물과 불, 시와 산문, 남자와 여자 등 다양하고 즐거운 지적 유희가 책 속에 가득하다. 투르니에의 개념의 유희가 내게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투르니에의 생각을 거울로 들여다보듯이 ‘생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는 데에는 전환점이 될 만큼 소중한 책이다. 생각의 터닝 포인트를 위해 마리 장 레로 드 세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하자. “다가올 차이점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차게 식히고 천천히 생각해야 한다. 유사성을 잘 식별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뜨겁게 달구어서 재빠르게 생각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