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 화장실에 거미 한 마리가 산다. 그런데 이 거미는 상당히 수다스럽다. 자기 얘기뿐만 아니라 집 주인의 내밀한 비밀까지 다 누설한다.  한 달 전에 이 집에 누군가 새로 이사를 왔다. 이삿짐이 나가고 들어오는 북새통 속에 용케 살아남은 거미는 불안하다. 새 주인이 집 청소를 하면서 자기 집을 헐어 버릴까봐. 눈여겨 살펴보니 새 주인의 직업은 시인이다. 거미는 안도한다. 왜? 시인은 게으르니까 빗자루로 거미집을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거미


한달만의 식사다
나방은 즙이 많아서 좋다
위턱과 아래턱을 놀린 지 오래여서
입이 좀 뻐근하다 집주인이 들어온다
저 남자는 시를 쓴다
한달 전, 저 남자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게을러서
화장실 귀퉁이에 세 들어 사는 내 집을
빗자루로 걷어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간만의 식사 탓일까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꾸 신트림이 나온다
밥 먹는 내 모습을 처음 보았겠지, 남자가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남자도 나처럼 오랫동안 굶었는지 깡말라간다
생각하면 저 남자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지금처럼
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는지
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남자가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있을 때나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릴 때면 나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남자가 알몸을 씻을 날은
주린 아랫입에 손가락을 물려 또 다른 허기를 달랬다
남자가 밖으로 나간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한 달 동안 주인을 관찰한 거미의 수다에 의하면 시인은 깡말랐다. 시인은 칫솔을 물고 들어와 천장에 붙은 거미를 한참씩 지켜본다. 가끔 아픈 배를 누르며 변기에 앉아있기도 하고, 양치질을 하다가 욱욱거리기도 한다. 아무래도 시인은 위장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목욕을 한 날은 수음도 한다.(근데 이거 순서가 거꾸로 된 거 아닌가?)


거미는 집주인의 신상명세서를 수다스럽게 전하면서 주인에 대한 연민을 테트리스 조각 맞추듯 배치해두었다. ‘칫솔을 문 채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고 있다/날개라도 한쪽 떼어줄까’ ‘내가 대신 뒤틀려주고 싶었다’ 등. 이 거미는 수다스러울 뿐만 아니라 영악하기까지 하다.‘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지금처럼/내가 잘 있는지 먹이는 언제쯤이나 잡게 될는지/쳐다보곤 하던 따뜻한 눈길, 알기나 할까?’ 그러니까 거미는 시인이 자기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은 알기나 할까? 라고 되물을 만큼.

한달씩 굶으면서 화장실 벽을 지키고 있던 거미가 어쩌다 시의 화자로까지 등장했지만 거미는 거미다. 거미는 양치질을 하며 한참씩 자기를 쳐다보는 시인과 눈을 맞추고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거미여, 경계하라. 오로지 살아있는 너를 포획하기 위해 언어의 그물을 짜고 있는 시인을. 아니 그대는 이미 시인이 짠 언어의 그물에  포획되어 시집 속에 갇혔다. 이 시집 속에서 그대는 영원히 안도하리라.  

박성우 시인은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첫 시집 제목도 『거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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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4-0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미를 생포하기 위해 언어의 그물을 짜고 있는 시인이라...크아, 반딧불이님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져부렀습니다. 이런 글을 쓰시는 당신은...그 시인의 친구의 친구시죠?!^^

반딧불이 2009-04-04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여우님. 여우님이 나타나면 왜 자꾸 장난이 하고 싶어지는 걸까요? 머 제가 여우님의 정체가 궁금해 오래 지켜보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궁금해하시니 영광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