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동물들을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다. 낮게는 구더기에서 높게는 기린까지 그 층위가 참으로 다양하다. 한 시인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그 시인이 보이는 듯도 하다. <풀> <폭포>등으로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김수영은 자신을 거미와 동일시했다.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그에게는 ‘바라는 것’이 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그는 설움에 몸을 태운다. 설움에 자주 몸을 태우다보니 이제 자신의 모습이 풍경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설움에서 빠져나와 있는 것이다. 설움에 몸을 태우고 있을 때는 몰랐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자 그 모습이 싫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몸이 까맣게 타버린 거미의 모습이다.
‘바라는 것’과 ‘설움’의 두 세계에 끼여 있는 자의 고통이 거미로 형상화되어있다. 거미는 모기와는 달리 공격적이기 보다 수동적이다. 먹이가 올만한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그저 기다리는 존재다. 때문에 우리는 모기는 기를 쓰고 잡아도 거미는 대충 쫓아내고 만다. 그런데 김수영의 아내는 거미를 잡는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자꾸자꾸 잡는다. 참다못해 시인은 소리친다.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라고.
거미잡이
폴리號颱風이 일기 시작하는 여름밤에
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
꼴이 우습다
하나 죽이고
둘 죽이고
넷 죽이고
…………
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
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
아마도 거미들은 태풍을 피해 집안으로 몰려든것 같다. 아내는 일삼아 거미를 잡는다. 김수영은 아내를 돈만 아는 속물취급하기도하고 길바닥에서 비닐우산으로 때려 눕히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비닐우산을 버리고 왔음을 후회한다. 그리고는 그 상황을 시로 쓴다.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한다. 나는 김수영의 이런 솔직함에 반했다.
그리곤 언제나 아내에겐 큰소리친다. 김수영은 이 시를 1960년 7월 28일에 탈고했다. 4.19혁명으로 잠깐의 희망을 본 듯하다가 5.16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4.19와 5.16은 시인에게 폴리호 태풍과 다름 아니었다. 거미인 시인은 태풍을 피해 집안으로 파고든다. 그렇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 않다. 거미잡이로 변한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손에 죽어가는 거미를 지켜보는 거미시인. 아마도 시인은 다시 설움에 몸을 태우고 까맣게 타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