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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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다녀왔습니다. 우수 경칩 지났지만 산속의 계곡은 겨울의 흰 복면을 아직 벗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직립의 소나무가 빼곡한 숲을 한참 오르자 산 중턱부터는 칡넝쿨이 부스스 엉켜있었습니다. 산도 헝클어진 제 속은 숨기고 사나 봅니다.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봉우리를 넘지 못한 바람의 성난 따귀를 더러 맞아야했습니다. 올랐기 때문에 내려가야 하는 곳, 정상에서 고동산 표지석과 까마귀 가족을 만났습니다. 까마귀 가족을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모두 달랐으므로 단출한 가족임을 알 수 있었죠. 
 

당신의 이름 카프카가 까마귀를 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꾸 입에 올리다보니 카프카와 까마귀가 정말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인적이 드문 산 정상에 사는 까마귀가족과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당신의 세계 역시 닮은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은 지금 나는 당신이 왜 아버지께 이 편지를 썼는지 마치 오작교위에 서있는 것처럼 발밑이 깜깜합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이 편지를 쓴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때 당신 아버지의 연세는 칠순을 바라보는 67세입니다. 멀리 계신 아버지의 안부를 여쭙는 평범한 아들의 편지는 아니더군요.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결혼을 허락해달라거나 작품을 발표했다거나하는 근황을 전하는 내용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때의 당신은 이미 「판결」「변신」「시골의사」등 당신의 대표작들이 책이나 잡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져 있었고 나이로나 문학으로나 원숙한 시기였습니다. 청소년기도 까마득히 지난 중년의 사내가 왜? 어쩌자고 이런 편지를 써야했습니까?

당신의 편지에는 어릴 적부터 당신이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묘사하는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닮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더군요. 당신의 아버지는 사진에서 보이듯이 지나치게 건강해보이고 생의 의욕으로 충만해 보입니다. 반면 당신은 깡마르고 허약하고 거기다 키까지 커서 털갈이를 앞둔 까마귀처럼 꺼칠하고요. 사실 나는 “아버지를 상대로 제기한 전대미문의 ‘소송’”, “카프카 문학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결정적인 열쇠, 너무도 강하고 권위적인 당신”등의 광고카피를 보고 당신보다도 당신의 아버지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유태인인 당신의 아버지는 유태인에 대한 적대감이 충만한 프라하에서 자수성가하셨죠. 강한 생활력, 왕성한 사업욕, 끊임없는 정복욕을 가진 아버지 덕분에 당신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배울 수 있었고 걱정이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른 채 자랐더군요. 우람한 체격의 아버지. 깡마르고 허약한 당신.  생의 의욕이 흘러  넘치는 아버지. 턱없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당신. 이 육체적 정신적 괴리 앞에서 당신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당신의 모습을 본 듯싶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에게 노골적인 욕설을 퍼붓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또 자신이 아들에게 내린 계율을 스스로 지키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는 당신을 짓누르는 권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며 세상 만물의 척도가 된 아버지로부터 당신이 탈출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에게 글쓰기와 결혼은 탈출 시도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글쓰기가 내면으로의 도피라면 결혼은 외적인 도피죠. 그러나 당신은 “가장 대단하고도 가장 희망적인 탈출의 시도”이고 “더없이 통렬한 자기 해방과 독립에 대한 보장”인 결혼에서 실패합니다. 세 번씩이나 약혼을 하고도 말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찾습니다. 당신에게 결혼은 “ 강인함과 타인에 대한 경멸, 건강과 어느 정도의 무절제, 뛰어난 언변과 불충분한 설명, 자기 신뢰와 모든 것에 대한 불만족, 세상에 대한 우월감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억압, 인간에 대한 이해와 불신, 거기에다가 근면, 끈기, 침착, 대담성과 같은 완벽한 장점들까지 두루 갖추고서,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아버지에게서처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가능한 것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저 모든 것을 갖출 수가 없었고 그러므로 결혼은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이었습니다. 당신이 저것들을 다 갖추었다하더라도 당신은 결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혼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더없이 밀접한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글쓰기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글을 쓸 때면 당신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글쓰기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합니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과정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만 제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지요.” 이제 당신은 “글을 쓰고 또한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면서 소박하나마 독립과 탈출을 위한 시도를 했고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지만 약간의 성공도 거두었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버지께 이 편지를 썼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의 편지는 내용뿐만 아니라 분량, 형식 등 모든 면에서 제게는 의문투성이입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버지는 가해자이고 당신은 일방적인 피해자입니다. 당신 편지의 거의 대부분은 피해자의 고발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해자인 아버지의 변도 마련해두었더군요. 이것은 아무리 당신의 전공이 법학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재미있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부모 자식간에 전공을 살려 대화 하지는 않잖아요? 더구나 당신의 고발은 이성적인 듯하지만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거기에서는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고 또다시 노여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껴집니다. 반면 당신이 아버지의 입장을 대신해서 쓴 짤막한 아버지의 반론 부분은 너무나 간결하고 이성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당신의 모든 고발을 일축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하죠. “남들에 대한 아버지의 불신조차 제 자신에 대한 저의 불신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다분히 자학적으로까지 들리는 이 말에 저는 당신에 대한 연민으로 하마터면 눈시울이 젖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당신의 말을 실천합니다. 바로 다음문장이죠. “아버지께서 저를 그렇게 길러주셨지요.” 자신의 모든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단 하나의 힘없는 듯한 읊조림으로 그것을 아버지에 되돌려주는 당신. 나는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한 아버지만큼 당신이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당신의 긴 고발, 아버지의 짤막한 반론, 그 반론에 대한 당신의 단 한 줄의 반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편지라는 형식은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을 일차적 대상으로 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런데 당신은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의 반론 부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을 경우를 대비하여 아버지의 반론에 대한 반론까지도 준비해두셨더군요. 치밀한 당신. 이것은 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편지의 형식을 빌어서 쓴 한 편의 소설입니다.  무서운 당신. 이것은 편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젊은 당신이 늙은 아버지에게 내미는 유언장입니다. 애처로운 당신. 이것은 편지입니다. 증오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면 이것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당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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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3-2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레가 된 카프카가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이므로 약간 이해해주세요.ㅋㅋ

반딧불이님의 보르헤스에 이은 카프카 때문에 제가 살짝 조바심이 날라 그럽니다.
-문학에 영 시원치 않은 여우 드림-

반딧불이 2009-03-30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를 낳아주고 그 창작의 동기부여까지 일생을 책임진 셈이지요. 이래서 부모를 잘만나야 한다는 말에 공감안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