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김화영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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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미셀 투르니에의 글을 덧붙인 사진첩을 본 적이 있다. <뒷모습>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사진첩에는 '찍히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찍힌 자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모습들은 아름다워보이고자하는 가식적인 모습이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부바의 사진과 사진을 읽어내는 미셀 투르니에의 글과 김화영의 번역이 잘 어우러져 가끔 꺼내보게 된다. 

최근에 '자연스러운 모습'의 사진을 파일로 보내야하는 일이 가끔 있다. 더러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되어 모조리 뒤져보고나서야 혼자 찍은 사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사진관을 찾기도 뭣하고 새로 찍기도 우습고 해서 직장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찍힌'사진을 대신 사용하고 있다. 이날 찍힌 사진들은 모두 의도되지 않은 사진들이다. 나중에 사진찍은 동료에게 물어보니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김에 성능테스트 차원에서 보일때마다 나를 찍어댔다고한다. 희한하게도 나는 이날 찍힌 몇장  안되는 사진들이 모두 마음에 든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질색이다. 햇빛을 등지고 서면 어둡게 나온다고 쏟아지는 햇빛 앞에서 찡그림을 참고 있는 거북함이 싫고, 나도 모르게 긴장하는 안면근육도 싫고,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억지 웃음을 지어야하는 순간도 싫다. 이런 마음탓인지 찍은 사진들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우연히 찍힌 사진들 혹은 일상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찍힌 사진들을 보노라면 더러 정이 가기도 한다. 정이 가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언가 다른 세계에 빠져 있다. 아이를 돌보거나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등. 그 속에는 나의 몸을 가졌지만 무언가 다른 깊은 세계에 빠져있는 또다른 모습의 내가 있다. 내 모습이지만 나는 결코 볼 수 없는 나의 모습. 누군가 나 모르게 찍어서 보여주어야만 볼 수 있는 내 모습들을 보면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내가 사진과 관련하여 싫어하는 모든 요소를 거세하고 사진을 찍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모델이 자신만의 다른 세계에 몰입하고 있는 순간들을 포착했다. 이 사진들을 모아서 <내면의 침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것은 내면의 침묵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의 아우성이다. 그들은 침묵하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송의 사진 속에는 두개의 직선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 모델을 쏘아보는 브레송 카메라의 시선과 모델이 쏘아보고 있는 그 자신만의 세계를 향한 몰입의 시선. 두 직선이 주는 긴장감이 이 사진첩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뒷모습>에서는 사진 못지않게 투르니에의 글이 빛났다. <내면의 침묵>에는 브레송 재단의 이사장이자 큐레이터라는 아네스 시르의 글과 철학자 장 뤽 낭시의 글이 실렸다. 이들의 글 때문에 사진이 더욱 빛난다. 90여편이 넘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얼굴은 모르더라도 이름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표지에 실린 베케트의 포스가 느껴지는 모습,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싸르트르, 마리린 먼로의 얼굴은 낯익은 얼굴이지만 생경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수잔 손택이나 롤랑 바르트의 젊은 날의 얼굴들을 만나게 될줄은 미처 몰랐다. 이들은 생경스럽지만 반갑고 친숙했다.  다만 Thames&Hudson이라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낸 탓인지 책값이 비싸다. 하지만 사진첩을 두어번만 뒤적이다보면 만족감이 책값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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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6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공이 영화인지라 항상 카메라 뒤에 서서 인물을 어떻게 프레임안에 효과적으로 가두어야 할 건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은 저에게는 하나의 전설이자 아이콘 같은 대(大)존재이지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던 평전은 정작 사진들이 없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갈증을 해소해주겠군요~

반딧불이 2009-02-16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전공이시라구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요~ Thames&Hudson이라는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냈다고해요. 비싼것 말고는 흠잡을 곳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