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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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가죽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 든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까마득한
계단 같은 것,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천천히 지우나니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몇몇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커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母法)이 있다.



아프리카



비닐봉지 하나가 시꺼멓게 떴다, 비스듬히
기운다, 길쭉하게 처진 저
빈 젖, 허공을 빨다만 아이의 입가엔
쇠파리떼가 소리도 안 나는 울음을 빤다.


 

 

 

이것이 날개다

 

뇌성마비 중중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 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
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
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
실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
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 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
심, 창공이다.


 

 

 

 

굿모닝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
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
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
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
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
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
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
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
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
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내게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
으며 웬 무식? 그런다. 지난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
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 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 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동백 씹는 남자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운 눈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직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낄낄 웃었다.
동백독이 올랐는지 그의 안색이, 잠시
붉어졌다  

 

“선생님, 방금 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거든요.”
“알아요.”
“그럼, 신문사에 제보해도 될까요?”
“이왕이면 대서특필케 해주시오.”

한 장면,
즉흥 퍼포먼스가 수평선 멀이 넘어가고 여러 섬들이
주먹만한 활자처럼 시커멓게 몰려와 박히는 뱃길이여.
봄이 오는 사태만큼 사실 큰 사건은 없다.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
씹어먹어도 먹어도
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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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17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 참 좋으네요.
반딧불이님 리뷰들 따라 읽다 여기까지 왔어요.
첫방문이네요, 반갑습니다. 좋은 글 읽고 찜도 몇개 해갑니다.^^

반딧불이 2009-02-1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굿모닝..저한테 하시는 아침인사인줄 알았어요. 문단의 어른이신데 초심을 잃지 않고 서늘한 시선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굿모닝'에서는 외람되지만 장난꾸러기 같아 귀엽기까지 했습니다. 혜경님, 방문도 댓글도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