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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평면위에 찍힌 점의 좌표를 읽고 관계식을 세우듯 이 사회에서의 나의 좌표를 읽을 수는 없을까? 어느 누구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 요즈음 나는 나의 안부와 함께 내 좌표가 궁금하다. 잡목더미 위를 미친 듯이 포복해가는 8월의 하늘수박 넝쿨처럼 출발점이 어디였는지도 모를 만큼 생을 살고 나서 이런 궁금증이 생겨도 되는 걸까?
나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자랐다. 또 나는 죽을 때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죽어야하는 줄로만 알고 자랐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고 학교는 뻑하면 휴교령이 내렸지만 부모님은 등록금이 아깝다고 한숨조차 짓지 못하셨다. 북한에 산다는 빨갱이라는 괴물이 우리집안에 살았고 짭새들이 수시로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성동구치소, 영등포구치소, 남대문 경찰서 등에 흩어져있는 형제들을 면회하러 다니느라 일주일이 짧았다. 빨갱이, 김일성, 공산당, 마르크스는 모두 동의어로 쓰였고 이 모든 단어들은 집안의 금기였다. 자신의 몸을 화염병 투척하듯 하는 형제들의 이데올로기는 내게는 알레르기 그 자체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월드컵 때, 빠진 사람 없이 챙겨 입은 붉은 셔츠의 be the reds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거가 <공산당 선언> 읽기를 미루어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다윈만큼이나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최근의 시대상황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게 만든다. 한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으면서 책은 구색을 갖춰 네 권이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책은 크고 두꺼워졌다. 밑줄이나 낙서의 흔적으로 보아 여러 번 시도했던 것 같다. 백산서당 판 <공산당 선언>은 영문이 함께 있는데 머리말만 읽은 듯 하다. 박종철 출판사판 <공산주의 선언>은 머리말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만 읽었다. 이론과 실천에서 강유원의 번역으로 나온 <공산당 선언>은 1998년 공산당 선언 출간 150주년을 기념하여 에릭 홉스봄이 쓴 “1998년 Modern Edition 서문”과 역자후기 “선언 160주년에 부쳐”만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큰맘 먹고 새로 시작한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저자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는 강의의 목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것이라고 밝혀두었다. 내가 책을 읽는 두 번째 이유와 일치한다. ‘『공산당 선언』은 제목만 보자면 공산주의 혁명을 촉구하는 팸플릿’이지만 이 책이 쓰인 ‘당시의 세계 자본주의의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명하고 있다’고 한다. 강유원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저자의 말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 서문에 모두 밝혀둔다. 그는 또 밝혀두었다. ‘이 책은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실한 해설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돌이켜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 즉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체제에 자신의 몸과 머리를 완전히 착취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약도에 불과하다고.’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어서 못내 아쉬웠다. 원래 『공산당 선언』은 머리말과 네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선언>의 첫째부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 집중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부르주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켰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학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낚아챈 상황들은 집중력의 우물이다. 그 우물은 신선했고 감칠맛이 있기 때문에 그냥 빠져있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를 거리를 두고 새로 볼 수 있게 된다. 닭대가리 모이쪼듯 지독한 근시인 내가 고개를 들고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좌표를 어렴풋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책에 대한 책’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었다. 해설서는 언제나 또 하나의 텍스트로 나를 괴롭혔고 시간만 갉아먹었다. 그러나 강유원의 '책에 대한 책'은 신뢰감으로 나를 붙잡아둔다. 나는 그가 쓴 ‘책에 대한 책’을 두 권('장미의 이름 읽기'와 '공산당 선언') 읽었다. 고전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관점을 지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것은 당대의 상황속에서의 이해일 것이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태어난 당대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당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런 두가지를 강유원은 골고루 충족시켜주었다. 물론 내게는『공산당 선언』이 주는 정치적 의도나 수사학적 특징이나 문학적 아름다움은 또 다른 과제로 남아있다. 이런 만족감으로 『공산당 선언』전체에 대한 해설서를 기대하는 사람은 나 뿐일까? 고전으로 애둘러가는 길이라 여겼는데 지름길임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고전으로 가는 자기부상 열차를 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