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그린비에서 펴내는 리라이팅 클래식 001번이다. 리라이팅이 고전을 현대의 시각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라면,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고전은 다양한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고미숙은 박지원을 읽는데 들뢰즈-가타리의 안경을 선택 했다. 그런데 이 안경의 렌즈는 아무래도 다초점 렌즈인 것 같다.어디를 바라보아도 망막에 정확하게 상이 맺히기 때문이다. 책에서 그녀가 자처하고 있듯이 그녀는 박지원의 열성팬이고,『열하일기』의 중독자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그녀가 들뢰즈-가타리의 안경을 쓰기전에 박지원의 열성팬이고 『열하일기』의 중독자였는지 혹은 들뢰즈 가타리의 안경을 쓰고 더욱 박지원에게 열광하게 되었는지가. 어찌되었든 고미숙이 박지원의 열성팬이 되는 덕택에 나까지 즐거운 것을 숨기고 싶지 않다. 나는 그녀가 들뢰즈-가타리를 박지원에 대한 찬탄을 보낼때마다 그녀의 변죽을 울려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 

 

고미숙이 사용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들은 고전의 입문자인 내게 고전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만들어 주었다. 고미숙의 글쓰기는 경쾌하고, 고미숙의 책 읽기는 유쾌하다. 고미숙은 18세기를 산 박지원과 21세기의 들뢰즈-가타리, 거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프랑스 현대철학과 봉건조선의 문장가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뚜쟁이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 박지원과 고미숙과 들뢰즈-가타리. 시공을 넘어 이렇게 궁합이 잘맞는 삼각관계라니! 글을 쓰다보니 어째 고미숙이 박지원에게 보내는 열정을 내가 그대로 답습하여 고미숙에게 보내고 있는 꼴이 되어버리는것 같다. 

 

어쨌거나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실린 기본적인 개념들을 어느정도 이해한 다음이라면 훨씬 더 유쾌한 탄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하는 주요용어들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들뢰즈를 번역하는데 있어서도 『천개의 고원』번역자인 김재인이나 그 책에 대한 해설서를 펴낸 김진경, 또다른 들뢰즈 연구자 이정우 등이 들뢰즈의 주요용어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 미묘한 차이들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책의 제목에서조차 김재인이나 이정우는 『천개의 고원』이 아닌 『천의 고원』을 더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묘한 차이들이 고미숙의 박지원을 읽는데는 크게 해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존재론적으로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때, 중세적 세계관은 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이런 위계적 세계관은 근대적 사유가 시작되면서 주체를 중심으로 圓形的으로 재배열되었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하고 어떤 중심도 없는 場으로 인식하며, 이 場은 관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곳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바로 이런 현대적 사유의 출발점인듯 하다. 들뢰즈-가타리와 박지원이 공명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 아닐까. 박지원의 몸은 근대화가 시작되기 전 시대 (위계질서가 선형적으로 배열된)를 살았지만 이미 그의 정신은 근현대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일까. 고미숙은 들뢰즈-가타리와 박지원의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그들과 '관계' 맺기를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그리하여 그녀는 현대와 고전의 '경계'를 허물고 시간과 공간의 '탈영토화'를 시도하고 있는 셈인데, 내가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왠지 고미숙의 그것보다 뻑뻑하고 이물스럽다. 하지만 어떠랴.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고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키지 말라"고 들뢰즈-가타리가 말하지 않았는가. 고미숙의 말처럼 만약 내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순전히 들뢰즈-가타리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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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aladin.co.kr/734872133/206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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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3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