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죽음 1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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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死者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한없이 고통스럽고 끔찍하기만 할 죽음이 종종 춤, 승리, 축제, 굿판 따위의 단어들과 만나, 때로는 철학적 의제가 되기도 하고 또는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미학의 '미'가 아름다울 '美'라는 것 밖에 알 턱이 없는 나로서는 '죽음'이란 단어와 '춤'이라는 단어의 만남이 영 불편했다. 애초부터 형이상학적 접근이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림책을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저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무겁기만 한 죽음이 生者의 입장에서 보자면 굿판 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축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명사보다 누구누구가 '죽었다'라는 구체적인 동사에서 더욱 공포를 느꼈던 어린시절을 거쳐, 막연하게 죽음이란 뭔가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처음 어른으로서 친구 아빠의 장례식엘 갔다. 처음에는 정신없이 울었지만 이내 모든 상황이 다 행위 자체로만 다가왔다. 상여를 부여잡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얘기하는 어머님의 모습도, 울부짖다 쓰러지는 친구의 모습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눈에 박혔다.

방정맞은 생각이었을까? 조금 전까지도 오열하던 친구의 모습이, 금방 앓다 일어난 사람의 가뿐하고 뽀시시한 얼굴마냥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님은 가슴 속 이야기를 다 전해서일까 한결 평온한 얼굴이셨다. 친구도 어머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지만 그날 이후, 죽음은 어쩌면 '生者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에 실린 수많은 그림들 가운데 페르디낭 호들러의 <병상의 발렌틴>, <병든 발렌틴>, <죽어가는 발렌틴>, <죽은 발렌틴>, <제네바 호안>이라는 그림을 보고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 병상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입을 단정하게 다문 채 앞을 응시하던 그녀는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연채 침대와 수평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화가의 사랑스러운 아내였고, 화가는 그녀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처음에는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다는 것이 고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발렌틴이 죽어감에 따라 심적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여지없이 흔들리고 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순간까지도 화폭에 담아내려는 것 역시 死者를 보내는 그 만의 방법이었고, 그건 바로 그 자신인 生者를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死者를 위한 죽음의 의식이 生者를 살게 한다? 아무튼 죽음은 生者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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