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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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심야 영화를 보다가 요절한 시인. 제임스 딘처럼 문단과 독자는 오래도록 그를 기리고 있다. 專門家」, 빈 집」, 홀린 사람」, 엄마 걱정」 을 학창 시절 배웠다. 평이했다. 사회 의식을 가진, 젊어서 생을 마감한 덕에 고평가받는 시인인 줄로만 알았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관람하고 시집을 샀다. 그리고 인생 시집 중 하나가 되었다. 질투는 나의 힘」은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내 심정을 이리도 절절히 새겼을까. 꿈은 창대했으나 현실은 비루했고, 할 말은 넘쳤으나 경청해 줄 상대는 없었다. 사랑 받고 싶었다. 그러나 자아를 잊고 무엇을, 스스로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 대학 시절」



시인의 감성은 당연하게도 시대와 불화했다. 하필 플라톤이었을까. 사회구조론이나 혁명론이 아니라 플라톤이었을까. 정의론과 이데아 진리를 추구했던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와 어떤 간격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나뭇잎조차 혁명 감성으로 읽히는 시대, 주변인에게 비애를 느낀다. 감성은 가열차게 시대에 맞서지도, 시대와 동떨어지지도 못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이한열 열사 사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검은 잎은 군부 정권이 물린 재갈일까. 텁텁한 입 속은 ​양심의 발로일까. 민감하고 젊은 감성은 검은 잎이 두렵다고 한다. 시집은 엄마 걱정으로 마무리한다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엄마 걱정」



엄마 걱정은 한 편의 동떨어진 시가 아니다. 프리퀄이다. 유년 시절을 엿본다. 시인의 감성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세계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두컴컴한 빈방에서 혼자 채소장수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어른이 되어 사랑을 했고, 시대의 아픔을 맞닥뜨렸다. 세계는 어둡고, 쓸쓸하고, 우울하다.



생각건대, 시인 기형도를 알기 위해선 작품을 단편적으로 접하기보다 유고 시집을 만났으면 한다. 시인의 무던한 말투 속에 묻어 있는 민감한 감성. 사랑, 방황을 읽는다. 시대와 불화하는 양심, 권위에 대한 저항, 쓸쓸한 유년 시절이 가져다 준 태생적인 우울함과 맞닥뜨린다. 배경음악은 김광석 노래를 추천한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입 속의 검은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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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1-17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빈 집도 좋습니다.. ㅎㅎ

캐모마일 2017-01-17 12:01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교과서로 배울 때는 몰랐는데, 시집으로 기형도 시인을 만난 후로 다시 읽으니 그 감성이 느껴지고 공감되었습니다.

cyrus 2017-01-17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형도 시집을 읽었을 때 김광석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김광석을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곡을 좋아해요. 저는 기형도 시집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좋아합니다. 김광석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 곡을 절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

캐모마일 2017-01-17 12:03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에겐 왠지 기형도 시인과 김광석 씨가 너무도 잘 어울리게 다가왔씁니다. 거리에서를 들으며 시집을 읽어봐야겠네요.^^

푸른희망 2017-01-17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이 시집은 인생의시집입니다만
펼칠 때마다 마음이 따끔거리네요

캐모마일 2017-01-17 21:56   좋아요 0 | URL
그 따끔거림을 어렴풋이 알듯 하지만... 다시금 여러번 읽어봐야겟네요.
 
서양철학사 (합본, 양장)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지음, 윤형식 옮김 / 이학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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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분이라고 한다. 과학철학, 페미니즘, 사민주의 등 독자가 궁금해하는 다양한 조류를 담은 점이 장점 같다. 램브레히트 서양철학사에서 안타까운 점이었다. 반면 영미철학은 도움됐지만. 일단 구매목록에 넣어두었다. 자매품 철학연대표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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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nbeen 2020-07-23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덴마크 아니고 노르웨이 입니다

캐모마일 2020-07-23 18:55   좋아요 0 | URL
네. 정정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2020-07-23 19:03   좋아요 0 | URL
덕분에 수정하였습니다.
 
철학도해사전 - 그림으로 읽고 텍스트로 정리하는 철학의 정석 우리는 학생이다! 평생공부 시리즈 2
페터 쿤츠만.프란츠 페터 부르카르트.프란츠 비트만 지음, 악셀 바이스 그림, 여상훈 옮김 / 들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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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저명한 철학자가 공저한 철학사전이자 철학사. 교양철학계의 세계적 스테디셀러인데, 우리나라에선 한때 절판됐고 중고가가 몇 갑절 뛰기도 했다. 작년 이월에 출간됐고, 이제 주문했다. 유명 철학사 서적과 값이 뛴 절판도서가 많이 출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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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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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 신작 공터에서 초판본 두 부를 예약 주문했다. 현대사 질곡을 다뤘다. 하근찬 작가의 수난이대가 연상되기도. 출간일 2월 2일이 기다려진다. 개인적으로 작가강연회를 찾아간 몇 안되는 김훈 작가님. 삶이 주는 고단함과 비루함 속에서도 긍정이 보이는 작품들. 신간아 빨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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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1-1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캐모마일님 벌써 주문하시다뉘ㅎ
부러워용^^
 
빛나는 사진을 위한 미러리스 사진 찍기
김선웅.이소민 지음 / 성안당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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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휴대폰 카메라 사진만 찍다가 일년 전에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매했다. 요즘은 웬만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갤러리 게시판이 있고, 작가뿐 아니라 실력 있는 아마추어 회원들 작품까지 다양하게 올라온다.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팔로워 수를 늘리려면 사진 찍기는 필수다. 남 사진을 부러워만 하다가 큰맘 먹고 구매한 미러리스. 막상 쓸려니 모르는 기능 천지고 자동 모드로 휘뚜루마뚜루 찍었다. 기대는 컸지만 결과물은 휴대폰 카메라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케이스에 먼지가 쌓인다.



<빛나는 사진을 위한 미러리스 사진찍기>는 미러리스 입문부터, 실력을 키우고 싶은 초보 사진가에게 교과서같은 책이다. 촬영 모드, 빛, 인물, 풍경,구도, 액세서리, 카메라 연출과 재미있는 기법을 설명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지인에게 물어보기 힘들고, 메뉴에 있는 기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독자(본인)에겐 친절하고 유용한 입문서다.



요즘은 카메라가 발전하여 입문자도 자동모드로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자동모드도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인텔리전트, 프리미엄, 상황별 모드, P, A, S, M 모드가 있다. 원하는 작품을 연출하기 위해선 자동모드도 특성과 기초를 배워야 한다. 다양한 연출에 욕심이 생기면 수동 모드로 넘어가게 된다. 자주 사용하는 기능 설정, 프레이밍과 줌, 초점 선택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같은 사진이라도 역광, 측광, 순광 등 여러 빛 조절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입문자도 사진 배운 티를 내는 구도, 도전해 볼만한 다양한 설정도 설명한다. 앵글에 따른 효과도 뺴놓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물, 풍경 사진을 찍기 전 준비물, 모델과 장소에 대한 지식도 넣었다. 작가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을 보고 어떤 설정으로 찍었고, 무슨 효과를 노렸는지를 알 수 있다. 유명한 SNS 운영자가 사진에 캘리그라피나 그림을 넣고, 신기한 연출을 한 사진을 보고 단순히 부러워만 했는데, 비록 실력이 그만큼은 아니라도 기법을 배울 수 있다. 사진도 아는 만큼 보인다.



일단 초보자인만큼, 여행을 가면 인물사진을 찍어야겠다. 2:1 황금분할로 풍경사진과 지인을 담고 싶다. 실루엣이나 할레이션 촬영법, 안개 배경 연출도 해 보고, 앵글도 바꿔보며 찍어볼 테다. 사진을 많이 접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따라하면서 배워나가야겠다. 전엔 뭣도 몰라서 기법을 모르니 따라할래야 할 수가 없없다. 미러리스에 입문하고 난 뒤, 친절한 기본서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빛나는 사진을 위한 미러리스 사진찍기>를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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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1-14 1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 많이 담으시구요..책으로 배우는 카메라 보다는
실전에서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카메라가 훨씬 강합니다~^^.

캐모마일 2017-01-14 10:18   좋아요 1 | URL
조언 감사합니다.. 전 너무 기초가 너무 없어서 일단 책을 참고해야하지만 기초를 벗어나면 많이 보고 많이 찍는게 답같습니 다.^^

yureka01 2017-01-14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론입니다..모르는 것 보다는 기초지식을 가지고 찍으면 응용이 더 빠르죠..그래서 자신만의 색을 입힌 사진이 나올 것입니다. 사진의 창조가 이루어지죠..사진도 기능사처럼 찍지 말고 사진 작가처럼 찍으시면 좋겠습니다^^.

캐모마일 2017-01-14 10:19   좋아요 1 | URL
기능사처럼 찍지 말고 작가처럼 찍어라...와...명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