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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오늘
법상 지음 / 마음의숲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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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받을 용기>가 서점가에서 여전히 베스트셀러다. 기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기반의 심리학 교양서들과 다르게 아들러 개인심리학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책은, 트라우마 개념을 부정하며 '지금 여기에서' 를 강조하는 용기의 심리학으로도 불린다. 책의 인기 이면에는 독자들이 단순히 '괜찮다 다 괜찬다' 식의 힐링서적에 질린 탓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종교에세이 <눈부신 오늘>을 읽고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를 다시금 떠올렸다.

저자 법상스님은 군법사로서 청년들을 상담하고, 인터넷 카페 '목탁소리'의 지도법사로서 대중들과 활발히 소통한다. 평일 아침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진행하며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이라는 아침 문자서비스를 발송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아포리즘은 가볍지 않은 깨달음을 담고 있지만, 쉽고 감성적이면서 아기자기하다.

먼저 책의 대목차는 마치 구도의 여정을 떠나는 듯하다. '1장 나를 바라보다', '2장 당신을 받아들이다', '3장 삶을 내려놓다' '4장 고통을 벗어나다', '5장 행복에 도착하다'로, 수행의 단계를 나눠서 결국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어려운 불교 용어나 법문들을 스님 나름으로 해석하고 풀어서 아포리즘 형식으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매력이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인 교훈들을 맞닥드린다.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가 되려 하고,/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한다./그러나 사실은 되어야 하거나/얻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그 마음만 없다면/그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이 되어 있다./우리가 이 생에서 해야 할 것은/오직 이것뿐이다.// 그저 지금 이대로의/나 자신이 된 채로/ 있는 것이다."(p.94) 라 한다. 내가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야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스스로를 속박한다.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를 생각하는 순간, '지금 여기'는 없으며, 분별을 놓아야 진실을 볼 수 있다. 세상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진리들이 보다 감성적으로 다가와서 뇌리에 꽂힌다.


무엇보다, "모든 일은// 꼭 필요한/'일'이 꼭 필요한/그 '때'에/꼭 필요한/'만큼' 일어난다"(p.269)는 말이 인상적이다. 우주법계는 이미 갖춰져 있으며, 인연법에 따라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세계관. 싫다 좋다라는 분별을 떠나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괴로움의 대상은 아니게 된다. 분별과 집착이 환상을 만들고, 환상이 고통을 부풀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증오의 대상에게 집착하면 스스로 증오의 대상에게 삶의 힘을 부여하는 격이다. 스스로 노예가 된다. 인연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아야지 관계 속에서 내가 나일 수 있으며, 상대방을 바로 보는 혜안이 생긴다.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는 바로 이 순간을 관조하고, 이 순간을 살다간다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들 수가 있다.

법상스님은 모든 것을 놓고 관조하라고 하지 않는다. '슬플 때는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마음껏 슬퍼하라.'(.290)고 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실패하라고 가르친다. 다만 어떤 것에 매몰되지 않고,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을 살라 한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참되어질 것이다라는 임제 스님의 말씀. 핵심은 이것이 아닐까. 책은 불교의 개념인 연기법, 인연법, 오온五蘊 등을 감성적으로 풀어내고 결국 수처작주의 삶을 말한다. "지금 여기의 현재에, /주어진 삶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있으라."(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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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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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감상한 기분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마치 영상을 보는 듯이 생생했다.   맹인 프랑스 소녀와 독일 고아 소년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 한 순간이지만 가장 빛났고, 그래서 더 애틋했다. 2015년 퓰리처상, 카네기 메달상 수상, 그리고 6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라는 화려한 실적. 무엇보다 영화화가 진행되어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개봉이 되면 다시금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을까. 


소설은 1944년 8월 7일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 해안의 작은 도시 '생말로'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전쟁의 포화와 폭격이 빈번한 도시. 맹인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은 폭격의 굉음을 들으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도시의 모형을 숙지하고 있다. 독일군 소년 베르너는 아비유(꿀벌) 호텔이 폭격으로 붕괴되자 지하에 갇힌다.


작품은 시간을 이동하며 마리로르와 베르너를 번갈아가며 조명한다. 6살 선천성 백내장으로 맹인이 된 마리로르. 아버지가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하며 외동딸을 지극정성으로 살핀 덕분에, 마리로르는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점자책으로 읽고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접하며 감성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누린다. 한편, 독일에선 베르너가 동생 유타와 함께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베르너는 하인리히 헤르츠의 '역학의 원리'를 품속에 끼고 살며, 라디오에서 프랑스어로 나오는 과학이야기에 심취한 소년이다. 과학과 기계에 관심이 많고, 특히 라디오 수리는 동네에서 정평이 날 정도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소년과 소녀의 생활을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리로르는 아버지와 함께 생말로로 피난을 가고, 베르너는 국립정치교육원 원생에서 기술병으로 전선에 참전한다. 소설은 생말로를 배경으로 맹인 소녀 마리로르가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겪는 2차세계대전의 참상. 엔지니어가 꿈인 베르너가 독일군이 되어 겪는 전쟁의 잔혹함을 주로 그린다. 무엇보다 작품의 구성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시간을 오고 가면서 두 소년 소녀를 조명하는 덕분에, 마치 퍼즐 조각 조각으로 전체적인 얼개를 맞추는 듯이 긴장감과 속도감 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 독일에서 히틀러 독재가 공고해지고 국가 전체적으로 제국주의의 물결이 만연해지고, 프랑스가 전쟁으로 붕괴되고 나치 치하로 편입되는 시대적 상황을, 직설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반면에 맹인 소녀와 꿈으로 가득한 소년을 그리는 문체는 너무나 서정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애잔했다. 선천성 백내장으로 맹인이 되었지만 박물관과 책을 통해 세상의 빛을 알아가는 소녀가, 풍족하지 못한 보육원 생활 속에서 동생을 보살피며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소년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꿈과 낭만을 가졌기에 전쟁으로 고통받고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아팠다.


특히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이 라디오 송출기로 레지스탕스 활동에 조력하게 되는데, 마리로르가 송출기에 '해저 2만리'를 읽는다. 마침 붕괴된 호텔 지하에서 베르너가 라디오를 통해 마리로르의 나레이션을 듣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정적이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에서 나치 치하 하에서 라디오 소지는 중죄였듯이, 소설에서도 라디오는 그 자체로 자유의 상징이자 억압의 대상이었으며, 긴장감 있게 인물들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풍부한 감성과 꿈을 가진 두 소년 소녀가 겪는 전쟁의 참상을 서정적이면서도 긴장감 있게 다룬 <우리가 볼수 없는 모든 빛>.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갖혀 있습니다....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p.80) 베르너는 보육원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고 독자 나름의 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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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은의 스피치 시크릿 21 - 낭독으로 연습하는 말하기책
우지은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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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기 표현이 중요한 시대이다. 각종 입사, 공무원 시험에서 면접이 강화되고 있으며, 실제 사회생활에서 스피치, 발표 능력이 부족하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다. 하지만 직접 스피치 학원을 찾아가기는 부담스럽고, 서점에서 각종 스피치 서적을 둘러보지만 마땅찮은 현실. 막상 준비하려면 어디서부터 할지 막막하다. <우지은의 스피치 시크릿21>은 하나의 대안이다.

 

개인적으로 우지은씨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목소리, 누구나 바꿀 수 있다> (2009)였다. 당시 목소리 트레이닝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은 별로 없던 시절에, 손쉽고 실용적인 내용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의 내용 또한 복식호흡, 성대구조 등 기본에 충실하면서 실제 활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담은 덕분에 유용했다. 저자의 아나운서 경력을 바탕으로, 실전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발음과 발성  연습용 낭독글과 음성파일을 충실하게 마련해 둔 점도 장점이었다. 무엇보다 3주 가량 충실히 따라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게 구성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신간 <우지은의 스피치 시크릿21 - 낭독으로 연습하는 말하기책>을 서점에서 보고 기대했다. 책은 보이스 트레이닝과 스피치 스킬 업그레이드를 동시에 가미한 것이 특징이었다. 스피치 훈련의 단계를 기초, 기본, 발전, 완성으로 나누고, 챕터의 끝에는 실전 훈련이 가능하도록 명문장과 모범 스피치 예시, 오늘의 트레이닝을 통해 실전 연습을 하도록 구성해서 알차게 느껴졌다.  

 

먼저 복식호흡과 성대발성법, 발음/억양/속도, 강조법을 통해 스피치의 기초를 다진 다음, 기본단계에서는 스피치의 논리적 구성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대표적인 논리구조를 OSC법칙(Opening - Storytelling-Closing)을 기반으로 하여, 이를 심화한 OPREMP법칙(Opening-Point-Reason-Example-Move&Point), PREP법칙 등으로 나누고, 각 부분 전개 노하우를 가르쳐 준다. 특히, 도입부(Opening)에 청중의 집중을 유도하기가 어려운데, '질문을 던져라', '공감할 만한 문구를 인용하라.'연관있는 일화나 시사이슈를 말하라' 등의 구체적 지침은 막막할 때 활용하기에 유용하겠다. 

 

 그리고 스피치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ECN법칙(Example, Cite,Number)을 꼽는다. 적절한 예시, 인용,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청중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핵심을 반복, 강조하는 OPSSC구조(P : preview, S : summary) 노하우도 실전 프리젠테이션에서 유용한 팁이었다. 특히, '마법의 숫자, 3의 법칙'이 인상적이었다. UCLA와 조지타운대에서 인간이 인지하기에 가장 호감도가 높고 효과적인 가짓수가 3개였다. 장점을 나열할 때도 4가지 이상을 제시할 때부터 청중들의 호감도가 떨어지고 의심이 급격히 높아졌다고 한다. 각종 자기소개서, 면접 시에 숙지해야 할 포인트였다. 스피치의 대가로 꼽는 스티브 잡스는 3의 법칙을 누구보다 적절히 활용한 인물이었다.

 

위의 논리구조, 설득력을 제고하는 스피치 요소들은 프리젠테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에세이를 쓸 때도 적용되는 조언들이었다. 스피치의 발전단계, 완성단계에서는 프리젠테이션 현장에서 청중들과 교감할 수 있는 구술과 제스쳐에 관련된 노하우를 제시하고 있다. 추상적인 단어보다는 세부 묘사를, 고유명사와 숫자를 활용하고, 오감을 자극하는 표현을 활용하도록 권한다. 각종 은유, 비유를 적절히 가미하여 보다 생생하고 인상적인 스피치 기술을 터득하도록 구성하였다. 마지막에는 독자가 인용할 수 있도록 여러 명언과 드라마 속 명대사까지 첨가하였다.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여겼던 스피치의 논리구조, 단계, 노하우 등을 일목요연하게 구성한 점이다. 그리고 스피치의 각 부분마다 청중에게 설득력을 높이고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구체적인 노하우를 제시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론 중심의 딱딱한 책도, 사례 중심의 물렁한 책도 아닌 이 둘을 적절히 섞은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스피치는 연습이다. "하루 한 챕터씩 완성한다는 목표로 하루 30분씩, 딱 3주만 훈련해보자."(p.11) "말이 변하면, 인생이 변한다. 당신은 변화된 멋진 인생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p.11). 책의 제목처럼 21일 간 스피치 시크릿 트레이닝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발표에 자신감을 갖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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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밤바 - 1915 유가시마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나지윤 옮김 / 학고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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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로밤바>의 저자 이노우에 야스시를 처음 접한 계기는 신영복 교수의 <담론>을 통해서였다. 책에선 이노우에 작가의 <공자>를 중점적으로 다뤘지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는데도 우리나라 독자에게 생소한 점이 가장 신기했다. 우리나라 서점가에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를 끌고, 웬만한 작가들의 이름은 대체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1907년 훗가이도 태생으로, 군의관 아버지의 사정상 가족과 떨어져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고교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일본의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시로밤바:1915 유가시마> 는 작가의 유년기 추억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로, 1962년에 발표되어 일본의 국민적 베스트셀러로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작품 소개) 


소설은 시골의 온천 도시인 유가시마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소학교(초등학교) 소년 고사쿠의 성장기이다. 사실 고사쿠는 할머니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기묘한 사이인데,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내막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고사쿠의 증조외할아버지의 첩이었다. 증조외할아버지는 임종 전 할머니의 미래를 염려하여 손녀 나나에, 고사쿠의 어머니를 할머니의 딸로 입적시켰고, 나나에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맏아들을 양어머니에게 의탁한다. 할머니에게 고사쿠는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본가에 대항할 방패막이이자, 쓸쓸한 노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보물이었다. 고사쿠도 자기를 살뜰히 보살피는 할머니 덕분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처지가 가히 나쁘지 않았다.


피붙이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가족 사이가 된 할머니와 고사쿠. 소설은 20세기 초 유가시마를 배경으로 한 일본의 전통 풍속과 축제, 분위기 - 가도마쓰, 모치쓰키 등- 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비록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작품을 읽는 동안 만화 검정고무신을 보는 듯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고사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과 동경들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누이 같은 이모 사키코에 대한 사춘기적 동경, 사키코가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하자 고사쿠가 갑자기 공부에 열중한다든지, 또래들을 불러모아 그들만의 장례를 치룬다는지 하는 장면들은, 고사쿠의 감정을 무던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리고 애잔하게 그렸다. 사키코가 떠나고 고사쿠는 관청 소장의 한살 연상의 딸 아키코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사춘기를 겪게 된다. 아키코에게 "가슴이 쿵쾅거리며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웅얼거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나서, "그날 밤 고사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춘기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바로 후회였다....." (p.364~365) 라고 소회한다든지, 후회, 수치심, 비겁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때로는 아키코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것을 스스로 깨닫는 고사쿠의 심리 변화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늙어가는 할머니에 대한 양가 감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서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말미에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사쿠의 심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나는 고사쿠. "유년기를 보낸 정든 고향을 떠나는 날이라 감상에 젖은 까닭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사쿠가 이제 쓸쓸한 것을 쓸쓸하다고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p.466)으로 마무리한다. 20세기 초 당시의 시대상과 소년의 성장기를 서정적이고 품격 있게 그린 작품. 성장소설의 묘미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심리 전개를 따라가면서, 독자가 공감하고 나아가 성장을 공유한 듯한 애착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시로밤바>를 통해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인 '시로밤바'는 '백발의 할머니'란 뜻의 솜뭉치 모양을 한 곤충이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지만 어둠이 내리면 나타나는 '시로밤바'를 아이들은 이리저리 쫒아다닌다. 읽는 내내 작가의 솜뭉치 같은 유년기 추억을 이리저리 쫒아다닌 기분이다.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후속작인 <여름 풀과 겨울 물결>, <북쪽 바다>를 잇달아 발표하여 '성장소설 3부작'이 완성되었을 만큼 일본에서 인정받고 있다.(p.467)  위의 두 작품이 하루 빨리 국내에 소개되어 고사쿠의 뒷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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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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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의 저자 하퍼 리의 55년만의 출시작, < 파수꾼>은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기대를 모았다. 외국 독자들은 서점에서 줄을 서서 책을 구매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특히, 전작에서 주인공 스카웃이 6살 소녀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면, 파수꾼은 스카웃이 20년 후 성인이 된 시점의 이야기인지라 독자들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저자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의 예상치 못한 성공에 위압감을 느낀 나머지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 실제 책은 <앵무새 죽이기> 이전에 집필되었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출판사의 권유로 차기작을 쓴 다음 그것을 먼저 출간했다고 한다. 그 후, <파수꾼>은 그녀의 안전 금고 속에서 원고가 발견되어 최근에 출간되기에 이른다. 내용만큼이나 출간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은 195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시골 도시 메이콤을 배경으로 한다. 진 루이즈 스카웃은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26세의 여성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 메이콤으로 내려온다. 스카웃의 집안은 남부 중상류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큰고모 엘리자베스는 코르셋을 갖춰입고, 교양을 쌓기 위한 여자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귀족지향적인 남부 여성이다. 비교적 자유분방한 스카웃과는 자주 부딪힌다. 아버지 에티커스는 변호사로, 앵무새 죽이기의 모티브가 된 강간죄로 기소된 흑인 청년의 사건을 변호하여 무죄를 이끌어낸, 스카웃에게는 정의와 신념의 인물이자 우상이다. 헨리는 스카웃이 결혼 상대로 꼽고 있는 청년으로, 이웃에서 사고로 고아가 된 헨리를 에티커스가 교육시키고 이제는 변호사 사무소를 같이 운영하고 있다.


 책의 초반부는 스카웃의 집안과 메이콤 읍의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그러던 중, 스카웃은 충격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아버지가 인종차별 팜플렛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 스카웃은 그것을 읽으며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 개최되는 위원회. 그곳은 흑인민권운동을 대항하기 위한 집회였고,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그의 남자친구 헨리는 이미 아버지의 추종자가 되어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전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뢰했던 유일한 사람이 그녀를 실망시켰다. 그녀가 알았던 사람들 중, <그는 신사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신사입니다>라고 전문가로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대놓고, 흉하게, 파렴치하게 그녀를 배신했다.(p.161) 진 루이즈가 통찰력을 지녔더라면, 그래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고도로 선별적이고 배타적인 세계의 장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더라면,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평생 동안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색맹이란 것을.(p.173)"


 앵무새 죽이기를 먼저 접한 독자들에게도, 에티커스의 변모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무엇보다 백인 중상류층 사회에서 NAACP(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에 대한 공포감, 저항감이 팽배한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니그로'가 중립적인 표현으로 쓰이는 시대 상황에서, 그러한 흑인 민권 운동은 남부의 소도시 메이콤 백인들에게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메이콤 시의 백인들만의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에티커스 또한 참석하고 있었다.


 "NAACP가 남부를 전복하기 위해 전념하는 단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p.246) 오히려 스카웃에게 색맹이라고 꾸짖는 그들. 책은 이러한 남부의 시대적 분위기와 이제는 뉴욕 외지인인 스카웃과의 대립, 스카웃이 우상이었던 에티커스의 이면을 발견하고 아버지와 대립하는 구도를 그리고 있다. 에티커스는 결국 딸에게 "네가 자랑스럽다고"(p.390)라고 말한다. 스카웃은 에티커스와의 격렬한 설전과삼촌 잭 핀치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우상의 파괴만이 아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같이 할 수는 없다는 스카웃. 결국 자신의 길을 간다.


 <앵무새 죽이기>가 워낙 대작인 탓일까. <파수꾼>은 그에 비해 이야기의 갈등 구조가 보다 평이하고,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이나 감성을 일깨우는 명문장은 부족한 느낌이다. 실제로 집필 순서가 <파수꾼>이 먼저인지라, 스카웃의 20년 후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계하여 그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50년대 보수적인 미국 남부의 모습을 이해하고, 또한 스카웃의 여정에 집중하면서 읽어나가면 작품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의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어찌됐든 선물같은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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