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이 흐르고, 작가로서 경험을 쌓아가며 나이가 들면서, 그것으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미완성 작품에 - 혹은 작품의 미숙성에- 적절한 결말을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한 가지 대응이긴 했지만, 다른 형태의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덮어쓰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병립하는, 가능하면 상호 보완적인 작품이."(p.765)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학창 시절에 읽었다. 주인공은 어딘지 기묘하게 떨어져 있지만 연결돼 있는 두 세계를 경험하고, 일각수 혹은 단각수, 외뿔 달린 황금색 동물, 들이 다니는 도시에서 일각수의 꿈을 읽는 이였다. 하루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로 입문한 독자로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사뭇 달랐다. <<상실의 시대>>보다 미스테리하고 환상적인, 한편 독자에게 끊임없이 추리를 하게 만드는 작품 분위기에 놀랐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 올해의 책에 올랐다. 작가가 1980년에 쓴 중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모티브로 하였다. 그리고 이미 1985년 즈음<<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해당 중단편을 장편화한 소설임을 알았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작가가 작품을 쓰고도 "목에 걸린 생선 가시"(p.766)처럼 여겨졌던 못다한 세계를 2022년 일흔의 원로 작가가 되어 또 하나의 장편으로 냈다. 작가 후기처럼 병립 가능하고 상호 보완적인 작품으로. 하루키스트부터 일반 독자까지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p.11)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 '나'는 17세로 고등학교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16살의 "너', 소녀를 만난다. 그후 첫사랑에 빠지고 소녀가 구상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듣는다. 둘은 데이트를 하면서 가상의 도시를 구상한다. 묘사를 덧대고 구체화시킨다. 소녀는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은 그림자이고, 진짜는 그 도시에서 도서관 일을 한다고. 마치 청춘 로맨스처럼 진행되던 이야기는, 갑자기 소녀가 사라진 뒤 미궁에 빠진다.



한편,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장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나'는 첫사랑 당시 이야기 나누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이'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떼어내고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낸 채. 저녁에 도서관에 출근해 어느날 사라졌던 첫사랑 소녀의 도움 아래 오래된 꿈을 읽는다. 도서관 소녀는 바깥 세계의 자신과 '나', 그 관계를 알지 못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단각수의 두개골에서 그들의 꿈을 읽었던 것처럼.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시간 관념이 없다. 시계는 있다. 문자반은 있으나 바늘은 없다. 문지기가 출입자를 단속하고 단각수 무리가 드나든다. 주민은 각자 지구에서 단소한 삶을 살며 도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자 일을 한다. 개체로서의 의식은 희미해지고 도시인이 된다. 마치 전작 설정이 떠오른다.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된 장소"(p.53)지만, 주인공은 의문을  품는다. 꿈은 왜 읽어야 할까. 도시를 탐험한다. 높은 벽은 견고하나 스스로 움직인다. 경계는 계속 움직이며 하나의 세포같다. 떼어낸 '나'의 그림자는 주장한다. "도시는 벽 안에서 빈틈없이 완결된 상태"(p.91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을 품고 있다고. 



1부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총 3부로 이뤄져 있다. 2부는 '나'가 그림자와 함께 바깥 세계로 돌아와 작은 마을 도서관 관장으로 정착하며 벌어지는 일들, 3부는 마을 도서관에서 만난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얽힌 기묘한 이야기다. 옐로 서브마린은 비틀즈가 부른 노래이자 그것을 모티브로 만든 동명의 만화 영화다. 만화 영화의 시그니쳐인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파카를 주로 입어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 불린다.  M**으로 실명은 언급되지 않지만, 작중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미스테리를 품고 있다. 그만의 공식을 따른다. 처음엔 청춘 로맨스로 시작하다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바깥 세상처럼 기묘하게 나눠진 세상, 기시감이 드는 예지몽, 계속 드러나는 비유와 상징, 거기서 진실을 찾아가며 어떤 식으로든 변화, 성장하는 주인공이 그렇다.  



책은 750여 페이지로 두껍지만, 이틀 만에 읽었다. 문장은 현학적이지 않아 가독성이 높다.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와 연관된 퍼즐을 나름대로 풀어간다. "우린 아무래도 가설에 가설을 더하고 있는 것 같네요. 뭐가 가설이고 뭐가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져요."(p.216)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p..494). 주인공과 함께 추리극 속으로 들어간다. 주인공과 여러 인물들의 아이디어를 분석한다. 놓친 단서 혹은 비유와 상징이 없을까. 사흘째는 덮은 책을 열어 표시해 둔 부분 위주로 속독했다. 



많은 독자들이 말하듯 메시지는 모호하다. 흥미롭게 책장을 덮고, 무언가 여러 감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형언하기 어렵다. 작가는 소설 후반부에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언급한다. 매직 리얼리즘, 마술적 사실주의에 관해.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 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p.672)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굴곡진 남미 역사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상적으로 풀어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와 소녀가 기묘한 도시를 만들어냈듯, 하루키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독자와 소통하는 듯하다. 독자가 주인공과 함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다앙햔 메타포를 통해 진실를 추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작가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소녀가 되고, 독자는 작품을 읽고 구체화시키는 소년이 된다.



소년이 되어 보자. 예를 들면, <<데미안>>에서 아프락사스로 대표되는 자아의 통합적 성장이 떠오른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p.452)라거나, 소설에서 어디가 벽인지, 어디가 바깥 세상인지 알 수 없는 세계를 통합하며 성장하는 주인공의 서사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고 전 마을 도서관장 고야스 씨, 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 이어지는 인물 간의 관계도 독자라면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하루하루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면서 중년이 된 한 인간이, 첫사랑과 함께 구상했던 신비한 도시, 그와 관련된 기묘한 일들을 겪고 그림자같은 옛 삶과 더불어 잊고 있던 본질적인 정체성(본체)을 찾는다. '나'는 보다 원숙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연다. 일상의 의식에 대비해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을 넘어 사회적 은유로 보고 싶다. 첨단을 달리는 사회. 개인은 반대로 고립돼 간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확한 인과관계와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일상의 개인은 단순해진다. 가상 현실의 관계망은 끝없이 넓어지지만 현실 삶은 고립되었다. '그 도시' 생활처럼 의식은 유지하지만 마음은 잃어가고 있을 지도. 작품은 현대 사회의 고립상을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이야기로 기록한다. 



그 사회를 사는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진실을 찾는 여정을 나선다. 스스로 기계적 완결성을 가진 것 같지만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을 품고 있는 사회. 사회 속 개인 또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갖고 산다. 우리들의 소통과 관계에 관한 은유인가. 그래서 작가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내세우며 독자와 작품을 구체화시킬 여백의 공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p.767)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 P11

그리하여 나는 도시의 문을 넘었다. 그림자를 버리고, ‘꿈 읽는 이‘로서 눈에 상처를 내고, 두 번 다시 그 문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의 ‘계약‘을 맺고. - P68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 P263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 P426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 P451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추론인가? - P494

내가 품은 마음은 좀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온당하고 부드러운 옷을 두르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긴 시간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었다. - P682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 P744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1-03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집에 있어서,,, 함께 읽어보려고 꺼냈다가 시간에 쫒겨서 포기하고 다시 넣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