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퀸스 갬빗" 공식 예고편.
화제의 드라마 <퀸스 갬빗>
요즘 화제인 넷플릭스 드라마가 있다. 체스(chess)를 소재로 한 <퀸스 갬빗>이다. 2020년 10월부터 방영된 7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인데, 체스라는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소재를 기자고 평론가와 시청자에게 높은 평점을 얻었다.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뛰어난 드라마로 인정받고 있다.
1950년대 한 보육원. 불우한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소녀 엘리자베스 하먼(베스 하먼)은 체스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다. 드라마는 그녀가 입지전적인 여성 체스 기사로 우뚝 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베스 하먼이 당시 사회와 체스계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차별과 무시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 성장 드라마이기 때문에 여성 서사로 볼 수 있다. 다만 작품은 그녀를 단순히 여성주의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고, 남성 체스 기사들을 악역으로 낭비하지 않는다. 여성주의적 관점을 보다 넒은 휴머니즘의 카테고리로 풀어낸다.
그녀가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한 단계씩 도약하는 과정. 그녀를 인정하고 조력자가 되는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진행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최종 보스조차 젠틀하다. 그냥 젠틀맨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그녀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그래서 베스 하먼이 놓는 수를 읽어낸다.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으면서 나를 인간적으로 인정하고 이해하기에 역설적으로 제일 무서운 상대. 치명적이고 매력적인 적이다. 여성주의에 관심 없는 시청자, 심지어 체스에 문외한조차 이 드라마의 매력에 빠지는 이유다.
만화에 비유하자면, 많은 독자들이 농구를 할 줄 몰라도 <슬램 덩크>에 희열을 느끼고, 바둑을 둘 줄 몰라도 <고스트 바둑왕>을 정주행하고, 클래식을 듣지 않아도 <노다메 칸타빌레>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퀸스 갬빗>은 미드답게 고증에 신경을 썼는데, 국내외 여러 체스 유투버들이 드라마에 나온 경기를 해설할만큼 체스 대국도 흥미롭게 잘 풀어냈다는 평이다. 선수들 간의 심리 싸움이나 수읽기, 여러가지 제스쳐도 현실감 있게 극화했다고 한다.
참고로 작품 제목인 "퀸스 갬빗"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퀸스 갬빗은 체스 오프닝 중 하나다. 오프닝이란 바둑에 빗대면 초반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갬빗은 폰(우리나라 장기로 치면 졸) 등을 희생하여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하거나 게임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말한다. 갬빗은 체스에서 유래했지만 다방면에서 쓰이고 있는 관용어가 되었다. 또한 퀸은 체스에서 가장 강력한 기물이다. 물론 킹이 체크메이트(외통수)를 당하면 게임이 끝이지만, 퀸을 잃어버린다면 전략적 희생이 아닌 이상 대체로 기권하는 것이 수순이다.
요약하지만, 퀸스 갬빗은 게임 초반에 내 기물을 하나 희생하여 퀸이 있는 중앙 주도권을 차지하는 다소 공격적인 오프닝이다. 기물 이름인 퀸(여왕)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 내 기물을 희생해서 주도권을 얻는 공격적인 기풍,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는 세상사의 이치. 드라마에서 베스 하먼이 걷는 길과 참 닮았다.
원작은 故 월터 테비스 작가가 쓴 동명 소설로,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 역으로 유명한 배우 히스 레저가 영화화를 계획하였으나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2020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영상화되었다. 아직 한국어 정식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드라마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으니 조만간 한국어판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체스와 예술, 그리고 <퀸스 갬빗>
체스는 전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두뇌 스포츠 중 하나다. 기원은 고대 인도의 차투랑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쟁이 만연하던 시기라 놀이를 넘어서 전쟁술을 익히는 도구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는 서양에 전파되어 체스가 되었고, 지금과 흡사한 룰이 정립된 시대는 대체로 15세기로 본다. 차투랑가는 동양에 전파되어 중국에서 샹치, 한국에서 장기로 변형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체스가 서양 장기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 놀이이자 추상전략게임이란 점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체스가 가진 역사성을 문학화했고, 두뇌, 심리 싸움을 인생에 빗대기도 했다. 추상전략성에 예술가들은 주목햇다. 러시아의 작곡가 프로코피에프는 체스 선수였고, 특히 <샘>으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은 후자의 경우로 아예 전향하여 프랑스 체스 국가 대표가 되었다. 그는 체스에서 예술을 봤고 작품 속 소재로 활용하다 못해 본인이 체스마스터가 된 경우다. 말년에도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는 마르셀 뒤샹>(1963)같은 퍼포먼스를 했으니, 그 사랑을 알 만하다. 결국 이러한 그의 체스 사랑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인공지능 발전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1997년 IBM에서 만든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챔피언 게리 파스카로프를 체스 대국에서 꺾어 화제가 되었다. 2016년 우리나라 천재 바둑 기사 이세돌과 구글 알파고의 대국 당시 딥 블루도 자주 언급됐으니, 체스에 관심 없는 독자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드라마 배경인 1960년대는 딥 블루 이전으로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한 때였다. 이는 대국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당시엔 챔피언 매치처럼 주요 대국을 치루는 경우 하루 종일, 혹은 며칠에 걸쳐서 두었다. 한 수를 위해 몇 시간씩 장고했고, 그 한 수가 체스 역사를 다시 쓰기도 했다. 드라마틱한 시대였다.
<세기의 매치>로 개봉됐던 영화 <폰 새크리파이스>에 비슷한 대국이 나온다. 바로 체스계의 기인 바비 피셔(당시 미국 챔피언)와 세계 챔피언 보리스 스파스키 간의 실제 타이틀 매치다. 당시는 냉전 시대였고 경기는 체스계뿐 아니라 전세계적 관심사였다.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지만 체스는 역사적 전통이 있는 두뇌 스포츠인지라 해당 경기는 체스를 넘어 양국 간의 자존심 싸움과 체제 선전 대결의 장이었다. <퀸스 갬빗>과 함께 보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웅배씨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이 녜 웨이핑 9단을 꺾고 우승했을 때 귀국길에 국가적 카 퍼레이드를 벌였다. '세기의 매치'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웅배씨 결승은 윤태호 작가의 <미생> 독자라면 챕터 제목과 함께 나오는 기보로 익숙한 대국이다.
여성과 체스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으로 <퀸 오브 카트웨>가 유명하다.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는 <체스의 여왕>으로 개봉했다. 우간다 카트웨 지방 빈민촌 소녀가 체스 마스터가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만든 영화라 <퀸스 갬빗>처럼 약물 중독, 알콜 중독 같은 소재는 나오지 않으니 자녀와 보기 좋다.
덧붙이자면 지금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었다. 스포츠 요소가 강화되어 블리츠 등의 속기 게임이 유행이다. 5화에 베스 하먼과 베니 와츠가 카페에서 친선 경기를 벌인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수를 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 며칠씩 인간의 머리로 장고하는 것보다 분석 프로그램을 몇 분 돌리면 더 나은 수를 분석할 수 있으니 유행이 바뀌었다. 현재 세계 챔피언은 노르웨이 국적의 매그너스 칼슨 선수다.
체스를 모르면 체스판은 삼차원 기물이 멋진 서양 장기지만, 체스를 알면 체스판에 얽힌 역사, 추상전략, 게임성이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이를 인생사에 빗대어 작품을 남겼고, 더러는 추상전략에서 예술의 본질을 보기도 했다. 과학계는 딥 블루처럼 인공지능의 척도로 체스를 활용했다. 현재는 더욱 스포츠화되어 다양한 대전 형식들이 유행 중이다. 유투브에 현 챔피언 매그너스 칼슨을 검색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속기 경기 영상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