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작가가 쓴 무협소설들은 중국 문화 입문서로도 쓰인다. 실제로 중화권이나 화교계에선 김용 소설로 중국 문화를 가르치기도 한다.....



아마 올해 5월 김영사에서 출간된 <천룡팔부> 정식완역본 부록에서 읽은 내용이다. MSG를 조금 치자면 내가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거의 팔 할은 바람이 아니라 김용 작가가 쓴 무협지 덕분이다, 중국어는 교양 수업으로 잠깐 들어서 셰셰, 워아이니, 니취팔러마 급이고, 한문학이래봤자 한자검정시험 2급 따고 동아리에서 <논어>,<맹자> 강독 정도만 들었으니 입문자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김용 작가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노력을 했다. 일단 <소오강호>만 말해보자. '소오강호'는 강호를 비웃다, 혹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즐겁게 강호에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소설 주제를 함축한다. 작중에선 줄거리 초반에 정파 거물 유정풍과 사파 장로 곡양이 정사 간의 무림 정쟁을 떠나 지음(知音)지기를 맺은 후 만든 합주곡으로 나온다. '광릉산'이란 중국 고전 거문고 연주곡을 편곡했다는 설정이다.



이 광릉산은 실존하는 곡으로 혜강과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혜강은 윤리 시간에 배운 중국 죽림칠현 중 리더격인 인물이다. 사마 씨가 세운 진나라(삼국지연의에서 사마의 후손들이 세운 그 나라.) 시대를 살았고 당시 사마 씨와 종회를 비롯한 권력층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사형을 당했다. 형장에서 거문고(중국에선 고금, 칠현금) 연주를 했으니, 바로 그 곡이 광릉산이다. 일설에는 당시 혜광이 곡이 실전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죽기 전에 연주했다고 한다. 



광릉산은 어떤 곡일까. 사마천이 쓴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섭정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연주곡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원본을 참고 바란다. 여하튼 무협 소설 제목이자 그 작품 속에 나오는 합주곡 하나를 이해하려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적 여정을 떠나야 한다. '소오강호'를 제대로 알려면 '광릉산'을 알아야 하고, '광릉산'을 제대로 알려면 혜강과 섭정을 알아야 한다. 혜강을 알려면 죽림칠현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진나라 를 알아야 하고, 섭정을 알려면 사마천의 <사기>로 넘어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게 끝일까.



그렇다면 작가가 굳이 <소오강호>에 광릉산을 집어넣은 의도가 궁금해진다. 섭정은 차치하고 죽림칠현 혜강만 풀어보자. 그가 살았던 사마 씨의 진나라는 이른바 정치 막장 시기로 유명하다. 초대 황제 사마염은 어머니인 문명왕후 왕원희가 서거하자 사치와 향략에 빠졌다. 황실은 권위를 잃었다. 귀족과 유지들이 방관할 리 없다. 일설엔 권세가들이 토지 주인인 백성을 길거리에서 그냥 후려치고 땅을 강탈했을 정도라고 한다. 



혜강은 죽림칠현의 리더이자 명망가였다. 그러나 사마 씨의 중용을 거절하고 권세가인 종회를 냉대하여 미움을 샀다. 참소를 당해 종회에 의해 사형당한다. 윤리시간에 죽림칠현은 이른바 청담 사상의 대표격으로 속세에서 벗어나 유가, 도가에 기반한 철학적 담론을 발전시켰다고 배웠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칠현은 신선처럼 살지 못했다. 더러는 관직에 나갔고 더러는 치부도 했고 서로 의절도 했다. 혜강은 초심을 지키고자 했으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용 작가가 <소오강호>를 집필할 시절, 홍콩도 사마 씨의 치세처럼 평안하지 못했다. 본토는 문화대혁명을 겪고 있었고 홍콩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래서일까. 김용 작가는 유독 <소오강호>를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비록 작가는 당시 정치 상황을 빗댄 것이 아니라고 답하였지만, 평론가를 비롯한 독자는 소설에서 정치적 은유를 읽었다. 비록 무협지이나 작품이 그리는 인간 군상과 주제에서 당시 정치적 혼란기의 상황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품엔 다양한 캐릭터가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위선자에 대한 묘사가 많다. 그들은 대의 명분을 앞세우나 정작 권력욕에 눈이 멀어 정치 공작과 권모술수를 일삼는다. 사리사욕을 위해 위군자 행세를 한다. 명망을 쌓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무림인들을 선동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립과 혼란, 전쟁과 숙청, 살육이다. 반면에 혜강처럼 강호를 떠나 유유자적하며 살고자 했지만 비참한 죽음을 맞거나, 강호의 생리를 벗어나지 못해 변절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인물도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소설 <소오강호> 리뷰를 참고 바란다.



이쯤에서 '소오강호'를 광릉산과 엮은 이유가 짐작된다. 비록 혜강과 섭정이 살았던 시대가 문화대혁명 시기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인물 중 누구는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같고, 어떤 집단은 홍위병과 비슷하다는 등의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가 관과할 수 없는 점은 냉혹한 혼란기에 여실히 드러나는 인간의 천태만상과 그 본질적 접점이다. 



혜강은 나름 초심을 지켰고 죽림칠현 중 정신적 지주였다. 하지만 그는 청담을 논하며 신선이 될 수 없었다. 철저한 속세의 논리로 사형당했다. 위군자들이 판치고 편을 가르고 숙청과 살상이 벌어지는 시대적 참극 속에서, 시대를 조롱하며 유유자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이 점에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즐겁게 강호에 사는 것"이라는 <소오강호>의 주제와 상통한다. 



소설에선 '소오강호'를 작곡한 정파 유정풍과 사파 곡양이 혜강 이후 소실된 줄 알았던 광릉산을 한나라 말 정치가, 문장가, 학자인 채옹의 묘에서 도굴하였다고 밝힌다. 혜강을 넘어 채옹까지 나오는데, 그가 살았던 한나라 말 시기 또한 정치적 혼란기였고 백성들은 죽어났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군웅할거만 기억할 게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백성의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봐야지 않을까.



이처럼 <소오강호>를 이해하기 위한 입문 과정으로 광릉산 코드 하나만 풀려고해도 긴 여정길을 나서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국 역사, 문화 탐방기가 따로 없다. 춘추전국시대 섭정의 고사부터 중국 문화대혁명까지 거치는 장정이다. <소오강호>를 넘어 작가 김용에 대한 담론을 꺼내자면 80년대 말 90년대 초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홍콩 무협 장르에 대한 이해와 대한민국 출판사까지 다다른다. 



게다가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소오강호> 최신판이 2018년에 방영되었고, 다른 작품도 근 3년 간 몇 작품이나 방영되었다. 지금도 방영 대기중인 작품이 기다리고 있지만, 공산당 당국의 검열 때문에 방영이 지연된고 있다는 후문이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 최신 중국 미디어 환경과 역사 공정까지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협 장르가 대중적이라한들,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왜 독자들은 그 힘든 일을 사서 하는 것일까. 가장 빠른 이해를 위해서 <소오강호>를 잠시 뒤로 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인 대하무협소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 세 작품은 내용이 이어져 사조삼부곡으로 통칭하는데, 우리나라 독자에겐 <영웅문>으로 유명하다. <영웅문>은  대한민국 출판 역사상 베스트셀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도서로 약 칠백만 부가 팔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실 이 <영웅문>은 지금은 없어진 고려원 출판사에서 저작권 동의 없이 해적판으로 출간된 판본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과 관련하여 베른 협약에 가입하기 전이었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출판사에 남은 작품이 해적판인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김영사 정식완역본이 나올 때마다 나는 내돈내산했다.)



또 <소오강호>로 넘어오면, 우리나라에서 <동방불패>, <아! 만리성>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영웅문>만큼은 아니나 큰 인기를 끌었다. <동방불패>하면 임청하, 이연걸 주연의 동명 영화가 떠오르는데, 이 작품 또한 김용 작가가 쓴 <소오강호>가 원작이다. 영화 <동방불패> 뿐인가. 이쯤되면 사골 우려먹기다 싶을 정도로 김용 작품은 지금도 끊임없이 영상 미디어로 제작, 방영된다.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우리나라 출판사에 길이 남을 해적판을 남기고 50여 년이 넘는 사골 우려먹기식 드라마, 영화 제작이 이뤄지는 이유는 한마디로 소설이 재밌기 때문이다. 모르고 봐도 그냥 재밌다. 



하지만 대중성만으로 사람들은 신필(神筆)이라 말하지 않는다. 김용 작가가 2018년 타계한 이후에도 신필로 인정받는 이유는 미친 대중성과 함께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덕분이다. 소설 내적인 작품성은 물론이고 작품 속에 중국 역사, 문화가 녹아들어 있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 못하다는 <논어> 구절처럼, 독자는 재미로 입문했다가 은연중에 중국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나는 화교권에서 김용 작가가 남긴 무협지로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지 아닌지 진위를 모른다. 다만 설득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작가가 <소오강호>에서 언급한 광릉산이 무엇이고 어떤 의도로 설정했는지 그 코드 하나만 풀려고해도 중국 역사, 철학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중국을 공부한대서 나한테 금전적 이득과 명예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발적인 내돈내산 지식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히 재밌어서다. 그외에 달리 어떤 이유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고(故) 김용 작가를 애정하고 기리면서 김영사에서 나오는 정식완역본을 기다리고 모으는 것이 낙이다. 여전히 대륙에선 원작을 바탕으로 드라마들이 만들어진다. 보고 또 볼 것이다. 그리고 모르고 의문가는 점이 생기면 중국 역사서나 고전을 펼쳐볼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게 문화 컨텐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김용 월드를 통해 자발적으로 중국 문화에 입문했다. 최근에 출간된 웨이보 대상을 받은 소설 <당나라 퇴마사>나 좀 지났지만 드라마 <삼생삼세 십리도화>, 최근에 나온 <절대쌍교> 등 다른 중화권 컨텐츠를 자주 찾아본다.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그랬듯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 문화 컨텐츠로 한국 문화에 입문하는 외국인도 많지 싶다. 요즘 외국 여러 나라에서 집계된 넷플릭스 시청순위 탑 10을 보면,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이태원 클라쓰> 등 한국드라마들이 너덧 개 씩이나 포진해 있다. BTS......까진 넘어가지 말아야겠다. 결국 그들도 내돈내산하며 재미로 한국 문화를 알아가고 있을 것이니 나와 다르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0-10-15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용 작가의 사조영웅전이 다시 출간되는군요. 전에 고려원에서 출간된 3부작과 이전 김영사 출간판을 보았는데, 이번 번역본은 표지가 달라져서 새로운 책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캐모마일님, 좋은 밤 되세요.^^

캐모마일 2020-10-15 23:29   좋아요 1 | URL
표지가 다른 김영사판 사조영웅전은 이전 김영사판의 개정판이라고 합니다. 줄거리가 바뀌진 않았지만 번역과 윤문에 더 신경을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캐모마일 2020-10-15 23:35   좋아요 1 | URL
의천도룡기도 내년에 개정판이 출간된다고 하네요. 아마 가격은 오르겠지만 구판 사실 분들께선 이 점 유념하고 선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실 고려원 3부작은 못 읽어봐서 아쉽습니다. 그래서 서니데이님처럼 두 판본 다 읽어보신 독자님들이 많이 부럽습니다. 해적판이긴 하지만 나름 가치가 있어서요. 김용 작가님이 생전에 개정을 여러 번 하셨고 김영사판이 최근 개정한 내용을 정식 판권을 주고 번역해서 저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지만, 고려원판은 최종 개전 이전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김영사판과 내용이 다른 점이 있다고 들어서요. 기회가 된다면 소장까진 아니라도 고려원판과 김영사판을 비교하면서 어느 부분이 달라졌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부럽네요....

서니데이 2020-10-15 23:43   좋아요 1 | URL
사조삼부곡의 내용은 계속 개정이 되면서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개정판에 따라 제작되는 드라마의 설정도 달라지는 것 같긴 해요. 번역도서의 문체가 역자와 판본에 따라 달라지는 점도 있고요. 이전 고려원 도서를 보관하지 않아서 지금은 조금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