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의 고려유물 전시를 계기로 독서회에서 고려사에 관한 책을 읽기로 했다. 한 권만 추천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한 권만 꼽을 수가 없어 3권을 제시하고 각각 원하는 책을 읽고 와서 토론하기로 했다. 역사, 그것도 고려사는 낯설 수밖에 없는데 3권이나 추천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저 너무 어렵지들 않기만을 바라며 독서회에 갔다. 그런데 내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모두들 재미있게 읽었단다. 2권을 읽은 이들도 많았다. 어찌나 기쁘고 즐거운지!
그날 토론에서 회원들이 밝힌 소감을 여기 정리해둔다.
* 역사서는 왠지 버겁거나 지루할거라는 생각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읽게 된 "고려 역사상의 탐색"은 깊이있고 세밀하게 기술돼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부여한 정조의 개념과는 다르게 고려시대에는 정조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말처럼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만 인지했었던 내게 역사는 직간접적으로 현재와 연관돼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 중국이 화와 이를 나누는 명분은 힘이 아니라 문화였다. 중국은 수준 높은 문화를 보유했기 때문에 화이며, 그렇기에 이는 중국을 섬기면서 그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태조는 자국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한 반면 최승로는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 보편 문화를 추종했다고 평가할수 있다.
한국의 역사과정을 통시적으로 보면 자국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점차 약화된 한편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갔다. 이런 흐름은 고려와 조선 통치자의 복식에서도 볼수있었다. 그동안 역사를 가까이하지못한것을 반성하면서, 빈약한 자료로 고려연구에 매진하신 역사학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고려 역사상의 탐색>, '역사의 사실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굴절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 책이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현재 역사가의 올바른 해석과 평가가 요구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싶다. 특히 고려사회 제반 분야를 망라한 역사서술은 나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었다.
* 누군가에 의해 또 하나의 역사로 기록 되어질 지금 이시간을 나는 살아가고있다. 기록 되어질 역사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큰 힘을 가질것이다. 역사 책을 읽고, 역사는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역활이 더 중요한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를 통해본 역사는 대부분 지배층 들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또는 방어를 위해 만들어지고 고쳐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졌다. 민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거의 느낄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비슷한 점들을 볼때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앞으로 기록 되어질 역사에서 우리 시대는 어떻게 기록되어질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 우리가 잘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 역사에 문외한인지라 읽기 전에 미리 겁을 먹었다. 그런데 이 책은 구체적 연도나 사건중심의 구성이 아니라 그 상황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결과를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알기 쉽게 잘 설명해주어서 의외로 읽기가 수월했다. 총체적으로 역사를 해석해서 현재와의 연결성을 찾아내는 저자의 능력이 놀라웠다.
역사 속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고려시대도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고,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렵게만 느꼈던 '역사'라는 분야에 재미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 나는 역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어렵다고 생각했고 이번 책에 대해서도 부담감이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혜진씨의 말에 용기를 얻어 읽어보니 고려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됐고 역사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고려의 본관제, 실리외교 정책, 문화적 자존의식, 다원사회의 면모 등을 접할 수 있었고 고려 역사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무신정변에 대해서는 중심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현재와도 공통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계 정세를 보는 시각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보는 시각을 넓혀주고 현재 우리가 가진 문제에 실마리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초보인 나에게는 고려시대를 잠시 엿보고 온 듯한 재미있고 의미있는 책이었다.
* 역사연구는 현재와 담쌓은 죽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살아움직이는 과거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분단상황에, 계층간 지역간 대립이 심한 지금,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대안으로 고려의 역사와 전통에 주목하고,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조선시대 관점이 아닌 고려자체의 독자적 특성에 촛점을 맞춘 시각, 지배층만이 아니라 민의 생활과 문화를 포함한 관점, 상호연결된 총체적 시각으로 재해석된 고려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특히 그 흐름을 설명하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근본적 원인을 찾아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고려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는데, 큰틀에서 그 역사와 전통, 전개과정을 볼수 있었고, 해석에 따라 역사가 얼마나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지 볼수 있었던 고마운 기회였다.
이 두 책과 함께 <천추태후 그대로>를 추천했는데 이걸 읽고 온 분도 두어 분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재미있게 쓰여 있어 즐겁게 읽었다고. 모두들 역사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며 앞으로 더 자주 역사책을 읽자고 했다. 그래서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여운형, 김규식 같은 이들의 책을 읽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