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았니? - 2022년 칼데콧 영예도서상 수상작 지양어린이의 세계 명작 그림책 73
숀 해리스 지음, 윤지원 옮김 / 지양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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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았니?

 

  280*242의 커다란 판형 그림책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게다가 표지를 덮고 있는 덧싸개까지 있으니 더욱 정성스러워보인다. 화분을 들여다보는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니 함께 궁금해진다. 과연 이 화분에 무슨 꽃이 피어날지. 형광의 색감이 가득한 이 그림책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대중음악가인 숀 해리스의 작품이다. 이 그림책의 작업 과정을 유튜브로 보았는데 마치 색연필의 마술사같았다. 내용도 무척 철학적이었지만 일러스트에 눈을 뗄 수 없어 행복했다. 덧싸개와 같은 표지 그림일 거라 생각했는데 표지를 열어보니 생명력 가득한 꽃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꽃밭 속에 파묻힌 소녀의 호기심 어린 모습이 사랑스럽다.

 

  첫 페이지는 무채색의 인공도시가 나왔다. 목탄으로 그려진 듯하다. 페이지 전체 검은 실루엣으로 덮인 도시 아래 한쪽 구석에 어린아이만 색을 입힌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아이는 어딜 달려가고 있었을까? 작가는 질문했다. “꽃을 보았니?” 도시를 벗어나 대비된 화려한 자연의 빛깔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며 신나게 달려가는 아이는 꽃이 핀 넓은 풀밭에 엎드려 꽃과 얼굴을 맞대고 눈을 감고 꽃의 향기를 맡는다.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꿀?’, ‘호박벌들의 다리?’, ‘꽃의 요정?’, ‘벌꿀 축제에서 춤추는 아기?’ 깊이 숨을 들이쉬면 이것들이 보이냐고 물어본다. 금빛 수술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아주 작은 여왕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이어 작가는 생명에 대한 사색을 예찬한다. ‘네 손등의 핏줄을 만져 보듯 꽃잎의 줄기를 더듬어 보았니?’ 라고. 아이의 배꼽이 꽃의 뿌리가 되어 마치 한 모금 물을 마시면 그 물이 몸속에서 천천히 흘러 뿌리로 퍼지고 해님을 향해 뻗어가는 몸을 느껴 드디어 활짝 꽃을 피워보라고 이야기한다. 여운이 남는다. 꽃과 같이 아이는 찬란한 생명 그 자체였다.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깔과 노랫말 같은 간결한 글밥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책이었다. 일러스트와 글 모두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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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언어 - 삶과 죽음, 예측불허의 몸과 마음을 함께하다
크리스티 왓슨 지음, 김혜림 옮김 / 니케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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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언어

 

  엄마가 간호사였기 때문에 오늘 읽은 책이 더 와 닿았다. 영국의 간호사이자 작가인 크리스티 왓슨은 20년간 간호의 현장에서 경험한 희로애락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단지 생물학이나 약학, 해부학만이 자신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신규 간호사 시절을 거쳐 철학과 심리학, 윤리와 정치가 간호학의 실체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 여정을 함께 들여다보자.

 

  그녀는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곳은 참 두려운 공간이었다. 생명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앞일을 알 수 없고 미약한 존재다. 하지만 그곳만의 매력이라면 모든 갈등을 잊게 하는 일체감,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 시간, 하루를 강렬하게 체험하고 숙고하며 진정한 삶을 산다는 느낌일 것이다. 위급 환자를 대하는 간호사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아과 신생아실에서 근무할 때 만난 아기들, 특히 특수간호영아실의 아기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랑스럽고, 상태가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업무의 일부라는 사실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부모들은 인내와 차분함으로 자신의 아기가 삶의 벼랑 끝에서 안전지대로 옮겨올 거라는 믿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간호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유모는 오늘까지 건재하며 그 정신은 아직도 간호의 중심이라고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 바로 간호다. 간호의 기능을 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한 저자는 간이 감염을 통제하고 조직재생에 관여하는 효소를 만들 듯 몸 안의 독소를 직접 제거해줄 수는 없지만 희망과 위로, 친절을 통해 나쁜 것을 변화시키려고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소아중환자실에선 평생 간직할 인생관을 배우기도 했단다. 자신의 실수를 등에 짊어지고 이전에 취했던 행동을 돌이키며 영원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환자들은 그렇게 그들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극한을 경험하고자 선택한 곳이 소아중환자실이었는데 점점 감정이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때로는 끔찍한 괴로움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수백 번 죽었을 아이 샬롯, 그 병의 위중함이 의사와 간호사의 능력을 넘어섰음에도 샬롯은 질병보다 강한 생존의 의지로 살아남았다. 샬롯의 의지가 간호사로서 치러야 하는 비용을 감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소회가 감명깊었다.

 

  1950년대 간호사들에게서 처음 발견된 연민피로는 남을 돌봐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기 쉬운데, 끊임없는 정서적 공감이 오히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 등 정서적 고갈을 가져와 결국 환자에게 필요한 돌봄과 친절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것이다. 간호의 진정한 모습인 노인 돌봄의 경우 나이팅게일은 환자가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있거나 정신이 희미하거나 체하거나 욕창이 생긴다면, 이는 병의 문제가 아니라 간호의 문제다라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가장 연약한 존재를 다루는 이곳에서 다시 친절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책의 제목대로 돌봄의 언어는 말뿐 아니라 간호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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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 내로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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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

 

  ‘벽지가 나를 쳐다본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그 무례한 눈빛에 나는 몹시 화가 난다

저 벽지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도 모르고 오직 나만이 알아본 무언가가

그건 마치, 허리를 굽히고 무늬 뒤를 기어 다니는 여인같아 보여 정말 보기 싫다

 

  이런 문장을 접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난 당장 내가 있는 장소의 벽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기괴한 벽지 대신 아주 단순한 무채색의 무늬 없는 벽지가 보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그런 아내가 걱정된 의사 남편은 아내를 외딴 시골의 별장으로 데리고 와 3개월간 휴식을 취하도록 돕는다. 여기서의 휴식 치료법은 몇 주간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며 외부 자극을 삼가고 지적 활동, 창의적 활동은 절대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마사지 요법이나 전기 충격 요법을 병행하기도 했고 강장제라 부르는 신경 안정제를 주사하기도 했는데, 상당수 그것은 환자를 나른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마약 성분을 함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샬롯 퍼킨스 길먼이다. 이 소설은 정신 이상의 발단 과정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포착한 자신의 경험담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안정 요법을 통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파멸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던 그녀는 광증으로 떠밀려 가는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완전한 휴식을 위해 온 커다란 방에 갇혀 흉물스러운 벽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매우 안타까웠다. 아내를 무척 사랑했지만, 자신의 아내가 나약하고 불안증세를 보이며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생각한 남편은 상상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없다고 경고한다. 글쓰기 또한 아내를 병들게 한다고 믿고 있어 글을 쓰는 행위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점점 더 머릿속에 벽지 생각으로 가득찬 그녀는 고문 수준의 벽지 무늬가 빛에 따라 바뀐다는 느낌을 받고는 특히 달빛에 비췬 벽지의 겉무늬가 쇠창살이 되어 그 뒤에 여자가 또렷하게 나타나는 환영을 본다. 그 여자는 언제나 벽지 무늬를 뚫고 나오려고 애쓰지만 무늬가 목을 조르기에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달빛이 들이치자 배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기어 다니며 무늬를 흔들기 시작하는 그 여자를, 그녀 또한 달려가 도와주었다. 벽지를 있는 힘껏 떼어내니 해방된 기분이 든 그녀. 갇혔던 벽지에서 이토록 넓은 방으로 나와 그 여자처럼 마음껏 기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하며 벽이 둘러 난 얼룩이 자신의 어깨와 꼭 맞아 만족스러워한다. 그 모습을 목격한 남편은 기절하여 쓰러지고 그녀는 그의 몸을 기어 넘어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기괴하지만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통해 여성이 억압받던 현실을 생생히 묘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 이후 휴식 치료법은 중지되었다. 하나의 문학이 여성의 수많은 억압장치 중 하나를 무너트렸다. <월간 내로라>의 취지처럼 단숨에 읽고 잔상은 깊어졌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의 욕구를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누런 벽지> 와 같이 단순에 읽을 수 있는 고전 단편을 번역할 다음 달의 소설 또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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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서 좋아요
김민서 지음 / 민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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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서 좋아요

 

  나는 동생과 1살 차이 나는 연년생이다. 그래서 많이도 싸웠다. 특히 먹을 거 가지고. 양념통닭(치킨보다 더 정감 있는 단어)을 시키면 양손에 닭다리 하나, 날개 하나를 들고 욕심껏 먹는 모습이 얄미웠다. 짜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시키면 자기 짜장면이 불어가는데도 공동으로 먹는 탕수육부터 모조리 먹어 치우는 모습도 얄미웠다. 내 딴에는 엄마가 동생만 편애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시절 얘기지만. 어쨌든 오늘 읽은 <함께라서 좋아요>라는 12살 김민서 작가의 그림책을 보니 달래와 열매 남매의 모습이 꼭 나와 동생 같아서 웃음이 났다.

 

  동생 열매 편만 드는 것 같은 엄마도 밉고 동생도 미워 기분이 나빠진 달래는 자신만의 공간인 옷장 문을 열고 쏙 숨어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사막여우 두 마리가 서로를 꼭 안은 채 붙어있었다. “우리는 사막여우야. 우리는 항상 붙어 있지. 함께라서 포근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다음 장에는 두 마리의 코끼리가, 그 다음 장에는 앵무새, 사슴, 홍학 등 다양한 동물들이 한 쌍씩 짝을 지어 등장한다.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느낌이 든 건 꼭 붙어있는 두 마리의 동물들을 아주 사랑스럽고 예쁘게 그린 작가의 솜씨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고도 멋진 일러스트였다. 특히 거북이 등껍질과 화려한 카멜레온의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옷장 속 동물들에게 눈을 떼지 못한 달래가 엄마와 동생의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들은 건 귀여운 햄스터 두 마리가 쳇바퀴를 영차영차 달리고 있을 때였다. 달래는 눈을 떠 옷장 문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 동생 열매를 다시 만난 달래는 함께라서 너무너무 좋아요!” 라고 외치며 서로를 껴안았다.

 

  동생에게 읽어주는 그림동화책이란 소개답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쁜 책같다. 곧 태어날 동생을 인지하고 있는 네 살배기 첫째에게 이 책을 꼭 읽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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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밥 짓는 여자
이지영 지음 / 지식공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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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짓는 여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글밥이란 단어가 익숙했다. ‘글밥이 많은 그림책은 책에 들어 있는 글자의 수가 많다는 뜻이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글밥 짓는 여자>에서 막 날아가려는 것들을 붙잡아 글밥을 지었다고 했다. 여기서 글밥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퍼담아 먹을 수 있는 든든한 양식이었다. 내가 수필을 좋아하는 이유도 밥같이 익숙하고 친근해서다. 이지영 작가는 부디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하나의 예술품인 와 나의 삶이 활자와 더불어 아름답게 춤추기를 기원했다!

 

  봄부터 겨울, 그리고 명상 이야기까지 더불어 계절감으로 나눈 일기 같은 수필이 저자의 삶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 같다. 아버님의 칠순 잔칫날 늙으신 부모님을 등에 업고 속 빈 강정같이 가벼운 느낌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는 마음이 독자인 나도 느껴져서 슬퍼졌다. ‘그러니 부모님을 뵐 때마다 자식은 더욱 든든해져 갔고 그럴수록 늙으신 부모님은 텅 비어 울림통이 되어 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와닿았다. 엄마랑 나는 키가 비슷했는데 어느 순간 엄마의 키가 줄어들어 있었다. 허리가 굽은 건 아니었는데 점점 왜소해져 가는 엄마의 모습에 울컥했다. 내 시선이 엄마를 내려다보는 것 자체가 슬펐다. 저자도 텅 빈 울림통 같은 부모님의 모습에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눈물겨운 자아 성찰> 이란 제목의 에세이에서 잘 익은 목화 다래를 키워본 에피소드가 소개되었다. 뿌리를 새싹으로 알고 하늘로 뻗쳐 놓은 채 목화가 매달리기를 바랐던, 자신의 확신과 선의가 어리석고 산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는 성찰이 재밌기도 하고 나도 살면서 이런 오해는 없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네 마음속 어디까지 들어가 봤니?> 에선 해녀의 계급을 언급했다. 깊은 수심까지 들어가 작업이 가능한 해녀가 상군이라면 자기 키만큼의 곳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눈질래기라고 한단다. 계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계급 밖의 해녀인 셈. 해녀가 바닷속을 헤엄쳐 들어가듯 나도 나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내 마음속 심연까지 들어가면 저자의 말마따나 전복이나 소라같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난 아직 그런 경지엔 다다르지 못한 것 같다. 피상적이고 순간적인 감정에 일희일비하니 명경지수를 꿈꾸는 것은 머나먼 얘기 같다. 하지만 나를 들여다봄으로써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것보다 더 심오한 건 나를 들여다보는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라 하니 지루함도 못마땅함도 없어질 것이다. 저자의 포근한 글밥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기분이 들어 행복해졌다. 글밥 한 그릇 잘 먹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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