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VS 판결 -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
김용국 지음 / 개마고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법이라는 것. ‘정의’라는 관념과 같이 읽기에는 왠지 거창한 것 같고, ‘판례’라는 용어와 같이 읽기에는 매우 복잡해 보이며, ‘생활’이라는 단어와 같이 읽더라도 뭔가 불명확하게 다가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법과 관련된 교양서들을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조국의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와 같은 자기고백적 에세이에서부터 봉욱의 <미국의 힘 예일 로스쿨>과 같은 리포트 형식의 글, 김욱의 <법을 보는 법>이나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와 같은 말 그대로의 교양서, 금태섭의 <디케의 눈>,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과 같은 보다 현실적인 해설을 포함하여, 박홍규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 같은 학계 비판적 글과 임종인의 <법률사무소 김앤장>,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법조계에 대한 고발과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까지.

 

그런데 최근 김영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읽다가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 책을 골랐을 때에는 그동안 대법관으로 이 사회의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된 사건들을 판결해온 그의 글에서 뭔가 일반인이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생각이나 관점을 한수 배울 것으로 기대했는데, (물론 책에 언급된 사건들이 앞으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게 글을 쓰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책이 판결에 얽힌 법관들의 다수와 소수 의견을 정리한, 정말 제목 그대로 다시 ‘생각’만 한 글로 다가왔다. 잘 읽히지 않던 그 책을 덮고 다른 책을 펼쳤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또 판결에 관한 책이다. 실망을 해서 책을 덮었는데, 또 같은 분야의 책을 골랐다니... 그런데 <판결 vs 판결>이라는 제목과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라는 부제를 보니 상반된 판결을 분석함으로써 무엇이 더 옳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이런 식의 구성이 나처럼 어떤 판단에 대한 분명한 긍정 혹은 부정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더욱 적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판결은 완벽할 수 없다’는 주제 하에 정당방위, 증거가 부족한 살인죄의 판단, 성폭행과 화간의 구분,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처벌, 존엄사의 인정, 자살 원인제공자에 대한 책임 등 유사한 사건이지만 다른 결론이 난 것들을 독자가 대비하여 읽어볼 수 있도록 엮어 놓았다. 2부 ‘재판대에 오른 판결’에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황제노역, 스폰서 검사와 같은 사법부에 대한 비판적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권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 사법부의 굴욕적인 민낯이나 21세기임에도 여전히 ‘유전무죄’라는 말을 되뇔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평에 어긋난 잣대, 강자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현행법의 문제점,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국민참여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3부 ‘법정 안의 사회’에서는 김대중과 이석기의 내란음모 해프닝을 대비시키고, ‘종북’이라는 프레임으로 단순히 매도당했던 정치인들의 사례, 강용석과 신지호의 모욕죄 적용 여부, 친일파의 재산권에 대한 법원의 태도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들을 풀어낸다. 3부의 마지막에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의 파업을 통해 살펴본 노동권의 현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사법부의 판결은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문구가 단지 법전이라는 두꺼운 책에 적힌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규범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숨을 불어 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비슷한 사안에 대한 상반된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원칙이나 판결의 관점, 그밖에 실질적 요인들을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이 판례를 찾아볼 일은 거의 없다. 고작 한쪽이나 반쪽짜리의 뉴스를 보고는 자신이 갖고 있는 프레임에 맞춰 ‘이건 말도 안 돼’ 혹은 ‘사법부가 모처럼 제대로 판단했군’이라고 나름의 정리를 할 뿐이다. 어차피 이런 고정된 생각과 이분적 프레임을 갖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A vs B'와 같은 상반된 사안을 대비시키는 방식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찬성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거나 반대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다만, 책 제목이 주는 대립(vs)구도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유사하게 분류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결과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판결 vs 판결’이라는 형태로 엮은 것에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정당방위에 관하여 도둑을 폭행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남편의 폭력을 피하려고 밀고 발로 차 사망하게 한 사건은 둘 다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았다(후자는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사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노숙자를 방치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공공임대주택의 임차인 명의가 아닌 노인의 퇴거 사건은 ‘법대로’라는 범주에 같이 묶어 다루기는 하였으나, 두 사건이 대비되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책을 읽다보니 대법원에서 뒤집힌 판결이 많아, '판결 vs 판결'이 각 장마다 엮인 두 사건의 대비라기보다는 동일 사건에 대한 ‘지방법원.고등법원 vs 대법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특히 2부의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이나 KTX 여승무원 복직사건은 더욱 그러하다).

 

가끔 판결문을 보면 판사들의 작문실력은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이 일부로 어렵고 난해하게 쓰는 것을 일종의 특권적 글쓰기인 줄로 알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써가며 도저히 끝이 날것 같이 않게 만연체로 쓰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판결문의 문장들은 글쓰기 작법의 나쁜 사례로 꼽을만한 것들이 즐비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을 분석하거나 해설한 책을 읽을 때에도 동일한 우려가 생긴다. 대개의 저자들은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온전히 독자의 몫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사건의 발생과 경과, 판결의 쟁점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평이하고 간결하게 분석하여 해설하고 있다. 판결문의 경우도 인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부 필요한 경우는 보정을 하고, 매 사건 말미에 간단한 저자의 생각을 덧붙여 놓기도 하였는데, 짧지만 분명한 그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이 독자들에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저자는 “우리편에 유리한 판결은 ‘정의의 승리’로 추켜세우고, 불리한 판결은 ‘썩은 판결’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판결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결과에 따라 사법정의를 ‘세운’ 판결과 ‘죽인’ 판결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검찰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판사가 정의롭거나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도 실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은 제도적으로 ‘최종’의 결론일 뿐이지 정의롭고 공평타당한 결론은 아닌 것이다. ‘최상과 최선 사이에서’라는 이 책의 머리말 제목처럼 많은 판결이 ‘최상’을 찾지 않고 ‘최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듯이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을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복으로 비유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도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재판부는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줄 것인가?"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선을 할 의무와 권한이 법원에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재판부는 70대 노인을 구제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현행법을 뛰어넘어 법의 정신을 꿰뚫으려는 판결이었다. - 40, 41쪽

대법원은 보편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을 강조했다. 이것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함부로 뛰어넘어 개념을 확장.변경하여 법률 문언을 넘거나 반하는 해석을 하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2심 판결은 결국 이렇게 뒤집어졌다.
대법원은 평소엔 소수자 보호, 정의나 공평의 관념을 강조하지만 실제 법해석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노숙자를 보호하지 않는 서울역 직원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처벌 법규가 없으면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이씨처럼 법을 잘 몰라서 중요한 실수를 한 사람을 법은 좀처럼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법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전고법의 판결처럼 법의 해석은 때로는 적극성을 띠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홀로 사는 칠순노인에게 임대주책을 분양해준다고 해서 ‘불법행위’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을까. 법률을 해석하는 법원은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법대로’라는 게 법전의 문구에만 정답이 있을까. 행간에 숨어 있는 정신까지도 판결에 녹여낸다면 법원의 신뢰는 한층 더 높아지리라. - 42, 43쪽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피고인 강기훈의 승리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승리이다. 지금 저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강기훈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이다. 강기훈은 무죄이다. - 132쪽

모든 재판이 고도의 법률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실관계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취지가 기존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민감한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법원에 대한 불신 해소와 공정한 형사재판의 정착을 위해서는 앞으로 국민참여재판을 더 확대해야 한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배심원들의 평결과 법원의 판결 일치도는 90% 이상이었다. 선거법 위반 등 이른바 정치적인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97쪽

대중의 판단은 잘못되거나 편향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면, 선거제도도 없애야 하지 않을까. 각종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이 항상 최선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선거제도를 유지하는가. 바로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다. 만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을 소수 정치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어떻게 될까? 그들 나름대로 정치인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여 국민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선출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에 수긍할 사람은 없다.
물론 재판절차와 선거절차는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판사들의 선발부터 재판까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판사를 포함한 소수의 법률전문가 집단이 ‘그들만의 언어’로 재판을 해오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일반 시민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그들을 참여시키는 사법제도의 개혁은 그래서 불가피하다.
그런 차원에서 유용한 수단이라 할 국민참여재판은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사법비리와 사법불신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좀 더 투명한 사회, 상식에 맞는 판결을 원한다면! - 198쪽

결국 2004년의 사법부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에 대해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의 수호자’가 되었다. 23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판결이다. 사법부는 불법구금과 잘못된 재판으로 949일 동안 갇혀야만 했던 김대중에게 보상금으로 9490만 원을 지급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사법정의는 바로잡힌 것일까?
사법부 입장에서 보면 낯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의 입장 변화는 김영삼정부 시절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1996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반란수괴.내란수괴죄 등으로 처벌받은 뒤에야 나온 것이다. 만사지탄이 있지만 사법부가 뒤늦게나마 재판을 바로잡아 무고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까지 그들의 논리를 따르다가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고 나서야 이런 판결을 내놓았으니, 사법부가 결코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다. - 223쪽

지금은 변호사가 된 한 퇴직 판사가 현직에 있을 때 항상하던 말이 있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판사가 ‘바로 지금’ 자신의 소신대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 표현을 빌린다면 김대중 내란음모 무죄판결도 혹시 "지연된 정의"는 아니었을까. - 224쪽

법원은 그러나 ‘종북’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그 표현의 해악이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표현"까지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원은 "구체적 근거나 명확한 증거가 없이 배제와 차별, 증오, 적의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표현이 다원성, 관용, 관대함을 이유로 허용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한국 사회에서 ‘종북’이 바로 그런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북과 같은 의혹제기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신중함과 엄격함이 요구된다고 당부했다. - 239쪽

두 글자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면 종북 두 글자면 충분하다. 법원도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를 타인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무분별한 종북 꼬리표 남발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이석기 의원 내란선동 유죄 판결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도 있겠다. 그때마다 피해 당사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형사고소하는 일로 해결해야 하는가.
법적인 판단 여부를 떠나 북한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섣불리 예단하고 공격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법원의 말마따나,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보더라도 "배제.차별.증오"를 담은 표현을 "다원성.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종북 낙인은 또 하나의 반공주의일 뿐이다. - 239, 240쪽

수사기관은 미네르바의 수많은 글 중 단 두 편만을 문제 삼았고, 홍씨 역시 SNS 글 한 편과 방송인터뷰 하나로 전격 구속했다. 결국 둘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100여 일이나 옥고를 겪어야 했고 네티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법이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돼서는 곤란하다.
세월호 해경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은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기관의 명예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부나 수사기관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 253쪽

반세기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에 대한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친일 부역으로 획득한 재산까지 법이 지켜주어야 한다는 건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근호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의 재판을 맡은 이종광 수원지법 판사(현재 수원지법 부장판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헌법은 장식적인 말이 아니라 재판 규범"이라는 인식으로 판결에 접근했다. 그의 결정은 소 각하였다. - 273쪽

이제 파업 손배소는 더 이상 ‘신종’ 노동탄압이 아니다. 노사관계에서 일상이 됐다.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억대 손해소는 노조에겐 해고나 감옥보다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고, 사측에게는 파업과 노조활동을 막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 281쪽

1128억8802만4953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사측이 법원에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 걸려 있는 총액(2014년 1월 현재 민주노총 잠정집계)이다. 연봉 4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2822년을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배소 상황은 대한민국 노사관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 282쪽

반면, 노조의 파업은 목적이나 수단 모두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노조가 경영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인 정리해고 자체를 반대하기 위하여 파업에 나아갔다고 할 것이므로,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정리해고를 반대하기 위한 파업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경영권을 상당히 ‘존중’하는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파업의 방식에 대해서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수반하는 등 반사회성을 띤 행위"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노조는 "2010년 당시 파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합원 총회를 거쳐 실시한 합법파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조는 파업의 목적에 대해서도 "임단협 교섭과 관련된 조합원들의 처우개선이 주목적이었다"고 반박했다. 노조는 "단체협약 갱신 교섭을 하는 자리에 회사가 일방적인 구조조정안을 의제로 들고 교섭을 계속적으로 요구"했다며 "부득이하게 파업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 284, 285쪽

대법원은 헌법상 권리인 노동권과 경영권이 충돌할 때 십중팔구 경영권의 손을 들어준다. 판례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파업=불법’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하면 귀족노조의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되고, 민영화 반대 등으로 공공성을 목표로 내걸면 그것대로 불법파업이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만 죽어가고 있다.
파업은 자제해야 할 일인가? 아니다. ‘감수해야 할 손해’다. 이건 노조의 주장이 아니다. 이미 1979년에 법원에서 내린 판결이다.

단체행동권의 행사란 근로계약상 근로의무 있는 경우에 그 근로의무의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시민법의 원리에서 본다면 위법된 행위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이를 허용한 이유는 노동력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하고 있는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행해지는 한 사용자는 근로자들의 그 위법된 행위를 용인하고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헌법에 규정하여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대법원 1979.3.13. 선고 76도3657 판결) -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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