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식탁 - 논쟁으로 맛보는 현대 진화론의 진수 다윈 삼부작 2
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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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대한 거짓말 혹은 픽션에 빠져버렸다. 


<다윈의 서재>를 읽은 후 연달아 읽게 된 <다윈의 식탁>에서 저자는 사실과도 같은 설정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며, 다윈주의/진화론에 대한 거대한 콘서트로 독재들을 초대한다. <다윈의 서재>에서는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문객들이 그의 서재를 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한 끝에 데닛 교수가 다윈이 멘델의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는 상황을 설정한다. 이 때문에 그동안 다윈의 유전학이 조야했다는 비난의 원인을 밝혀냈고, 이것을 계기로 '21세기에 다윈이 살아 있다면 그의 서재에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상 저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다윈의 식탁>에서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진화론의 대가들이 총집합한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워, 진화론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들을 도킨스와 굴드의 팀으로 나누어 각각의 견해 차를 듣는다는 설정이다. 거듭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설정'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게 된 독자들은 사실인 줄만 알았던 그 치밀한 '설정'에 배신감을 느끼기 이전에 진화론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을 살펴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나와 같이 진화론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윈의 서재>에서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하여, '통섭'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올리버 색스, '침팬치의 대모' 제인 구달 등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학자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론을 대담 형식으로 설명하였는데, <다윈의 식탁>에서는 강간의 적응성, 이기적 유전자와 협동, 진화의 속도, 진화와 진보, 진화와 종교 등에 관하여 다양한 학자들의 생각과 이론을 접목시킨다. 이 책에서는 각 팀을 꾸리고 매회 팀의 멤버도 변경을 하는데, 이런 설정이 막상 쉬워보이지만 각각의 주제에 맞게 학자들을 배치하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빙의?) 주장을 제기하고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각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만들 수 없는 설정이며, 쓸 수 없는 글이다.  


책을 읽다보면, 대중서이기 때문에 쉬운 표현으로 쓰려고 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물론 이에 대하여 '깊이가 없다'는 등의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대중서는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덜 느끼도록 쉽게 쓰여져야 한다는 것에 찬성하는 나로서는 그런 비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책에 빠져들었다. 일반인들이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대가들의 논문을 접할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원하는 이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될 일이다). 그들의 이론과 주장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여 이렇게 쉽게 풀어 표현한 것을 보면 저자인 장대익 교수의 내공에 대해 '깊이'를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앞으로는 어디로 갈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은 단순히 철학적인 사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변모해왔고 생명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답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다윈의 정원>이라는 미발간 책까지 3부작으로 진행되는 것 같다. 과연 저자가 <다윈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거짓말(설정)로 우리를 진화론의 논의에 초대할지 자못 기대된다.

자연선택은 복잡하고 정교한 형질들이 어떻게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는가에 대한 유일한 설명방식입니다. 가장 복잡한 형질이라고들 하는 인간의 눈이 자연선택으로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뮬레이션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연선택의 이러한 강력한 힘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것이 누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선택은 정교함을 단 한번에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금고털이범 같이 일을 하지요. 무슨 말이냐고요?
여러분이 만약 금고털이범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 앞에 비밀번호 숫자 열 개를 순서대로 다 맞춰야 열 수 있는 금고가 있습니다. 어떻게 여시겠습니까? 제 아무리 금고털이의 신이라 해도 단 한 번에 그 숫자를 다 맞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청진기를 다이얼 근처에 대고 일의 자리부터 돌리다가 덜커덕 하면 그 번호를 그대로 둔 채 다음 자리로 이동하는 식으로 하겠지요. 이런 과정을 열 번을 거쳐야 금고가 열립니다. 금고털이범은 이런 식으로 `누적적인 과정`을 거치며 `불가능해 보이는` 금고 열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 32쪽

자연에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형질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단번에 생겨날 수 있겠느냐"며 진화론을 의심하고 창조론으로 쉽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금고털이범의 예에서처럼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그렇게 단번에 일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게다가 복잡한 형질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아직 없다는 이유로 창조론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회피`이지, 더 좋은 대안적 설명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론자들은 "자연계는 너무 정교해서 자연적 원인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자신들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32, 33쪽

어떤 능력이나 행동의 적응성 여부는 옳고 그름의 여부와 별개라는 것. 같은 적응이라도 고도의 언어 능력은 좋지만 강간은 나쁜 행위이다. 자연은 윤리적 기준을 갖고 선택하지 않는다. 자연은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여성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성 편도 아니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 - 94쪽

(도킨스) 일벌의 불임은 벌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일벌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직 유전자의 이득을 위한 행동인 것이지요. 자연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설명이죠. 이렇게 뒤집어 보면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이며 운반자(vehicle)일 뿐입니다. 주체가 인간 집단이나 개체에서 유전자로 바뀌었지요. 닭이 알을 낳는 게 아니라 알이 닭을 낳는다는 식이지요. -107쪽

(도킨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수준 모형이 설명하는 모든 현상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도 설명합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거든요. 물론 차이는 있죠. 어떤 현상에슨 `친족/비친족`의 분해를 통해 설명을 하는 것이 더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다른 현상에는 `집단 내/집단 간` 분해를 해야 더 쉬운 이해가 가능합니다. - 127쪽

(도킨스) 저는 이런 인간 중심주의적 시각이 탈색된 진보 개념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진보에 대한 적응주의적(adaptationist) 견해인데, 진보를 복잡성이나 지능 등의 증가로 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의 성공적 적응에 기여하는 특성들이 축적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예컨대 여러 계통에서 발생한 눈의 진화는 바로 진보적 진화 과정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사람의 눈이든 거미의 겹눈이든,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명암과 색조를 감지할 수 있는 장치는 여러 계통에서 진화했죠. 그런데 이런 식의 진화가 가능하려면 각 계통들에서 보유한 시각 능력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조건이 돼야 하죠. 물론 그렇게 되려면 환경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고요. 만일 영장류 계통에서 갑자기 작은 두뇌 크기가 유리한 상황으로 환경이 바뀌었다면, 그런 환경 변화 속에서 진화는 진보적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 219쪽

(도킨스) 제가 셋째 날,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개체가 진화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인간이 유전자의 운반자(vehicle)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전자뿐 아니라 밈도 운반하고 전달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명령`과 밈의 `명령`이 상충하기도 합니다. 가령 독신(獨身)이나 만혼(晩婚)의 예를 생각해봅시다. 현대 사화에서 이 밈들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요. 주로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흔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유전적 적합도를 생각해봅시다. 분명히 적합도는 낮아집니다. 그럼에도 밈들은 계속 사람들 사이에서 복제되지요. 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밈이 마치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기적 유전자> 초판의 맨 마지막 문장을, "우리만이 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다"고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242쪽

(굴드) 저는 전통적인 다윈주의가 세 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연선택이 다양한 조직의 수준에서 작동하기보다는 주로 개체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이며, 나머지 하나는 개체군 수준에서 벌어지는 점진적 변화를 단순히 확장하기만 하면 생명의 전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20세기 초반에 헤게모니를 쥐게 된 `근대적 종합`이 일어난 이후에 다윈주의의 이 세 가지 토대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죠 (...)
하지만 저는 자연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만 작용하고 진화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그런 변화가 누적되어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진화해왔다는 견해는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는 한마디로 `울트라슈퍼 다윈주의`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 253, 254쪽

(굴드) 저는 창조론자들이 제 `NOMA` 원리를 제발 좀 이해하고 수용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 원리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종교는 가치와 의미만을 얘기할 뿐 객관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창조론자들은 정확히 이 원리를 어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것 마냥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 어디에서 창조에 대한 `어떻게(how)`를 얘기한단 말입니까? 창세기는 인류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아시아 지역의 신화일 뿐입니다. 창조론자들과 괜히 과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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