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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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한 마디로 평하기 어려운 색다른 소설이다. 사실적인 배경, 은유를 통한 상징과 실재가 뒤섞인 표현, 예상을 살짝 빗겨가는 전개로 인하여 몰입해서 읽었다. 조직(연방)과 개인, 동료(친구)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첩보물의 흥미진진함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정적 감성, 악마라는 새로운 병기를 둘러싼 거대한 스케일로의 확장, 다시 개인으로 수렴되는 본연의 문제들... 꽤 색다르고 다양한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소설이다.

11년을 일하면 1년은 휴가다.

"어떤 악마는 스스로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천사는 혹시 자신이 바로 그 악마가 아닐까 평생을 고뇌한다."

세분화된 공정 어딘가에서 나사 하나를 조이는 일만 하루 종일 한 사람은 감히 자기가 만든 게 비행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 13

그때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좋은 건 다 사랑인 줄 아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 중에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걸 발견하면 그저 이런 게 사랑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소유할 수 없는, 어느 선 이상은 다가가서는 안 되는 무언가. 욕심을 내는 순간 그만 사라져버리고 마는 어떤 것. 가만히 두어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은경이. - 28, 29

한 5도쯤. 경사가 느껴졌다. 땅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평하게 놓여 있지 않은 땅. 아직은 마찰력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어서 그 위에 있는 것들이 모두 와르르 쏟아져 내릴 정도는 아니지만, 이리저리 그 위를 자유롭게 오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조금씩 아래쪽으로 옮겨가고 있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애매한 경사로. - 70

내리막 쪽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 과속이 아니어도, 커브길이 나타나지 않아도, 자꾸만 브레이크 위에 발을 올려놓는 마음. - 171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에게 나를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내 일부를 빼앗긴 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숨겨진 부분을 누군가가 보다 효율적으로 점령해준 것뿐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나의 영역이 누군가에 의해 새로 발견되었을 뿐. 그런데 그 부분이 그렇게 넓을 줄은 나도 몰랐다. 내 의식이 평생을 장악해온 부분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거대한 나. 그리고 그 깊고 거대한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초월해 결국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자연의 일부, 우주의 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나. - 242

그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었다. 없던 악마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잠재해 있던 악마를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악마가 아니라, 나라는 개념이 발생하기 훨씬 전, 생명의 보다 근원적인 부분에 잠재해 있던 악마를 불러내는 일. 중추신경계 어딘가에 남겨진 기억이 아니라 유전자 안에 새겨진 기억들.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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