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없음 - 넷플릭스, 지구상 가장 빠르고 유연한 기업의 비밀
리드 헤이스팅스.에린 메이어 지음, 이경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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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가 우편으로 DVD 대여업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경쟁자는 텍사스에 있었다. 규모는 대략 1,000배. '블록버스터'란 이름에 걸맞은 차이였다. 회원수와 독특한 서비스 전략으로 볼 때 넷플릭스는 꽤 성과를 낸 스타트업이었지만 2년 차에 다다를 때까지 수익은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한해에 적자만 570억을 내는 기업이었다.


CEO 리드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를 블록버스터에 매각하기 위해 몇 달을 공들인 끝에 드디어 CEO를 안티오코를 만난다. 제안한 금액은 5,000만 달러. 거기에 인수 후 넷플릭스가 '블록버스터닷컴을 개발하여 그들의 스트리밍 서비스 파트너'가 되겠다는 제안도 곁들였다. 안티오코는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 뒤에 두 기업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붐!


넷플릭스를 한낱 비디오 스트리밍 기업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넷플릭스는 경쟁사보다 한참이나 적은 콘텐츠를 갖고도 한참이나 높은 재구독률을 자랑한다. 그들의 추천 알고리즘은 부지런히 없는 살림을 꾸리며 구독자에게 최적의 콘텐츠를 제안한다. 썸네일은 당신이 클릭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을 소프트웨어가 판단하여 자동으로 생성, 교체한다. 당신이 무엇을 보는지, 어디에서 멈췄는지, 얼마 만에 다시 들어왔는지, 재미를 느끼는 요소가 감독에 있는지, 배우에 있는지, 이야기에 있는지, 아니면 이야기가 펼쳐지는 나라에 있는지를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꼼꼼하게 파악한다. 이 데이터들은 단순히 사용자 경험을 높이는데만 사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넷플릭스를 만든 일등공신, '오리지널 시리즈'는 바로 이 데이터에 기반해 기획된다. 넷플릭스를 기점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도박이 아닌 과학이 됐다.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그들의 기업 문화를 정의하는 한마디는 '규칙 없음'이다. 출근 시간도, 근무 시간도, 휴가 규정도 비용도 보고체계도 없다. 넷플릭스의 직원들은 무한한 자유와 함께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 받는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유를 사용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스스로 반납하고 규칙과 강제가 가득한 권위의 밑으로 복속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건 자유와 평등인 것이다.


높은 수준의 자유를 감당하기 위해선 알아서 판단할줄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 넷플릭스는 이를 '인재 밀도'를 높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애매한 사람을 뽑아 그들에게 이런저런 가이드를 제공하는 대신 애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그들의 판단과 자율에 맡기는 것. 이를 위해 넷플릭스는 막대한 연봉을 제공한다. 인센티브를 포함한 액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넷플릭스는 처음부터 성과급을 연봉에 포함해 경쟁사들보다 20~30% 높은 금액을 제시한다. 거기다 이들은 타사의 스카웃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을 장려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현재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만약 경쟁사가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다면 넷플릭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액수에 맞춰 연봉을 인상해준다.


모든 직원이 자율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회사의 현상황을 투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는 Top Confidential 수준의 극비사항조차 모든 직원에게 공개한다. 그 정보를 들고 경쟁사의 문을 두드릴지, 주식에 투자를 할지, 언론사에 팔아넘길지는 모두 자유다. 그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투명성은 동료에 대한 피드백에서도 이어진다.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는 위아래가 없다. 그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또는 1:1 면담과 이메일을 통해 수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물론 피드백에는 4A라 불리는 규칙이 있다. 주는 쪽은 Aim to Assist(도움을 주려는 생각으로), Actionable(실직적인 조치와 함께)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받는 사람은 Appreciate(감사하고), Accept or Discard(받아들이거나 거부) 할 수 있다. 이것이 단순히 형식적인 회사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사례를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이런 문화는 넷플릭스 같은 미국 회사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조차 넷플릭스는 독보적인 기업 문화를 자랑하는 회사다. 뿐만아니라 이 회사는 현재 미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큰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설립한 법인에서 넷플릭스는 자신의 문화를 로컬 환경에 맞춰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고 있다.


넷플릭스의 문화에서 가장 부러운 점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피드백이다. 한국 기업에선 모든걸 '좋게 좋게' 처리하는 능력을 높은 수준의 처세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뭘 좋게 좋게 한단 말인가? 나쁜 건 나쁜 거고 못한 건 못한 거다. 비판은 비난이 아니다. 오히려 더 잘해보자는 격려인 것이다. 비판이 충고와 조언으로 포장돼 위에서 아래로만 작동하는 것도 문제다. 실수와 실패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일이다. 따라서 비판이 아래로만 이뤄진다면 리더들은 잘못을 자각하고 개선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물론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땐 항상 과장을 경계해야 한다. 한때 몸담았던 기업들의 문화를 대단한냥 칭송하던 여타의 책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쓴웃음을 지었던가? 하지만 이 책은 나름 쌍방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 조직 문화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도, 모두가 적응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힌다.


<규칙 없음>은 확실히 대세에 편승해 돈 몇푼을 벌어보려는 얄팍한 기업문화 찬양서는 아니다. 내실과 균형을 모두 갖춘 책이니, 긴 연휴의 끝을 이 책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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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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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이 거식적 관점에서 본 건축 이야기라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미시적 관점의 건축 이야기다. 이 책엔 도시와, 거리와, 광장과, 교회, 공원,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공간. 그 공간이 왜 그런 모습을 갖게 됐는지,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읽다 보면 내가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모르고 살아왔는지 실감이 든다. 유현준 교수 특유의 포괄적 시선과 다르게 보기는 인식의 전환과 고정관념의 파괴라는 책 읽기 본연의 즐거움을 채워준다.


이 책은 1장부터 15장까지 하나의 주제로 관통하는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 도시가 품은 공간들 중 흥미로운 것들만 뽑아 마치 도슨트가 유명 그림을 설명하듯 그것들을 해설한다. 서울과 세계의 유명 도시에서 시티 투어를 도는 것 같다. 바쁜 사람이라면 꼭 그 모든 투어에 참석할 필요는 없다. 목차에 실린 스케쥴을 확인한 뒤 구미가 당기는 투어에 신청하면 그만이다. 여기서 몇 가지만 얘기해 보자.


우리는 왜 퇴근 후 TV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걸까? 물론 요새는 TV의 자리를 스마트폰이 대체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 집은 고정된 공간으로 매일 매일 똑같은 모습이다. 그중 유일하게,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게 TV와 스마트폰 화면이므로 그 앞에서 넋을 놓은 채 '멍'을 때릴 수 있는 것이다. 선사 시대에 이런 역할을 했던 게 바로 불이었다. 원시 인류는 육체적으로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뒤 동굴로 돌아와 중앙에 피워 놓은 불을 보며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최근 각광받는 '불멍'은 트렌드가 아니라 태곳적부터 우리 DNA에 담겨있던 근원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모텔이 많은 이유는 뭘까? 경제와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자의식과 개인주의는 발달한다. 필연적으로 사적 공간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성인이 돼도 결혼 전에는 부모와 같은 집에 사는 우리 형편상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것과 젊은 세대들이 집을 사기 전 차부터 flex 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집값이 오르면 더더 아끼고 아끼는 게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개인의 노력으로는 목표를 이루는 게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리자 대체제를 찾은 것이다. 차는 외부와 차단된 개인 공간이자 이동성까지 갖춰 내 사회적 맥락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사적 공간이 된다. 그렇다고 섣불리 자동차 업계와 숙박업에 투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갈수록 늘어나는 1인 가구의 증가와 이 사업들의 성장이 반비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처럼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엮어 하나의 납득 가능한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읽고 있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유현준 교수가 우리의 공간에 대해 이토록 폭넓은 사고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건축을 예술과 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이 종합된 복합 학문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시멘트를 부어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것 이상의 일. 공간은 시대의 맥락에서 외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시대란 바로 지금 우리와 닿아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통섭의 관점에서 우리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건축을 공부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모든 선생이 유현준 교수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건 아닐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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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2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이 이런 내용이었네요. 관심이 가서 보관함에 찡박아두기만 했는데... 좋은 내용 소개 감사합니다. 곧 봐야겠어요. ^^

한깨짱 2020-10-02 18:06   좋아요 0 | URL
네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해요. 주변의 익숙한 공간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부동산 약탈 국가 - 아파트는 어떻게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었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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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 시끄럽다. 대한민국 서민들의 영원한 꿈, 내 집 마련은 한해 한해 멀어져만 간다. 영끌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거다. 영혼을 팔고 싶어 악마를 찾아갔지만 악마조차 사주지 않는 영혼. 우리 대부분은 그런 영혼을 안고 살아간다.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여전히 공급이 부족하다 말하고 하나는 투기 세력과 다주택자들을 지적한다. 무엇이 맞는지는 갑론을박이다. 하지만 이 갑론을박은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에 편향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도권에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둔 세력은 공급의 문제를, 부의 불평등 해소로 표와 자기만족을 얻는 세력은 후자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떤가? 확인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새로 공급된 주택을 누가 가져갔는지를 보면 된다. 차명 소유 등 갖가지 편법이 동원되어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면 고위 공직자들과 그들 가족의 다주택 현황을 보는 것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집을 갖고 있는지도 함께.


<부동산 약탈 국가>는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탐구하는 책은 아니다. 짧게는 한두 페이지, 길어도 다섯 페이지가 넘지 않는 챕터들이 단편적으로 이어진다. 주로 현정부의 정책 실패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려받은 무주택자의 넋두리가 내용의 큰 축을 이룬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으면 저자 강준만 교수가 지적하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부동산이 아니라 국가 균형 발전이다.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서울 공화국, 넓게봐도 수도권 공화국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으며, 모든 정권을 통틀어 가속화하는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제3기 신도시나 그들을 이어주는 수도권 광역 철도는 부동산 문제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인서울에 집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외곽으로 돌리는 대신 출퇴근이 용이한 교통 시설을 갖추는 건 꽤나 논리적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확장된 수도권은 수도의 인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는 동시에 지방의 인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서울 주변에 아무리 신도시를 많이 지어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울에 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에 '명문대'와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부동산에 관한 한 백약이 무효하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노무현 정부의 행정 수도 이전은 그래서 중요했다. 정치력의 심각한 부재로 무려 위헌 판정까지 받아버린 대실패작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의지를 직접적으로 이었다고 여겨지는 문재인 정부가 지금 다시 이 카드를 꺼내 든 건 그래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냥 박수를 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강준만 교수는 현 정부의 행정 수도 이전 발언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국면 전환용 카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해당 건은 야당의 일부 충청권 의원들마저 찬성하는 사안인 데다 여론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야당을 내적, 외적으로 압박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을 온전히 야당에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균형발전에 그토록 관심이 있었다면 집권 초기부터 뚝심 있게 밀고 나갔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걸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꺼내 든다? 잡히지 않는 부동산 가격에 쏠려있는 국민의 눈을 남쪽 땅으로 돌려야 한다! 국가의 대계를 오로지 정략으로 활용하는 태도는 이 정부가 무능을 넘어 교활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무원을 비롯한 국가 권력자들이 국가 균형 발전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겐 자식을 서울의 명문대에 보내고 싶은 욕망과, 부동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리고 싶은 탐욕과, 이런 의지를 실행해나갈 능력과 정보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요 부처를 지방으로 옮겨도 당당히 다주택자의 길을 걸으며, 비난이 쏟아지면 묵묵히 지방의 집을 팔고 서울의 집을 남기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엄한 명령은 5년을 넘기지 않지만 강남의 부동산은 평생을 간다.


책임을 온전히 개인의 도덕 문제로 돌리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행동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의 합이 집단의 이기심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더이상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1~2년의 노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수십 년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의 대계가 빈대떡 뒤집듯 바뀌는데 무슨 수로 구조를 개혁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민의 각성이 중요하다. 눈을 부릅뜨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요구하는 것. 부동산 코인에 올라타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분노하는 대신 이런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돌리는 것. 뜬구름 잡는 얘기 같지만 답은 이것밖에 없다. 세입자가 내 집을 폐허로 만들고 있다면 주인이 나서서 쫓아내야 한다. 그러니 이 대한민국을 바꾸는 걸 누가 해야겠는가? 국가의 주인, 바로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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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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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 길이와 재미는 반비례한다. <캐비닛>은 같은 형식의 농담들이 무려 350페이지에 걸쳐 반복된다.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김언수는 책의 끝머리에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p.391)라고 썼다. 그리고는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p.391)라고 덧붙였다.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는 때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은 심토머라 불리는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땅히 소개할 줄거리가 없다. 화자는 오랜 고생 끝에 한 공기업에 취직하지만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아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권박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연구원이 자료를 보관해 놓은 캐비닛에 손을 댄다. 그걸 계기로 화자는 권박사의 조수가 되어 캐비닛을 관리하고 거기에 기록된 심토머들의 고충을 들어준다.


심토머들 중 거론할만한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키메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거나 혀 밑에 도마뱀이 사는 등 이종간 교배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

2. 타임 스키퍼: 갑자기 현재의 시공간에서 사라져 몇 시간, 몇일 심지어 몇 년 뒤에 다시 나타나는 사람들

3. 토포러: 곰이나 다람쥐처럼 주기적으로 동면에 빠지는 사람들

4. 메모리모자이커: 물리적, 화학적, 신비주의적 방법을 이용해 기억을 삭제하고, 채워 넣고, 변형시키는 사람들


이 중에 관심있는 심토머가 있다면 <캐비닛>을 읽어보자.


김언수는 이 긴 농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문기술자라는 무리수를 둔다. 기술자는 캐비닛 속 정보 중 키메라의 높은 경제적 가치를 본 기업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화자가 키메라를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20억을 제안하지만 여의치 않자 그를 납치한다. 하지만 그가 알리가 있나! 화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채 폐인이 되어 세계 밖으로 사라진다.


작가란 세계의 사건과 자신의 경험, 기억, 판단 그리고 이것들이 연결되어 파생된 상상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존재다. 심토머의 자료들이 담긴 캐비닛처럼. 하지만 작가의 비극은 이 자료들이 그 자체로 소설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소설은 농담 같은 이야기에 특정한 '형식'이 부여돼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지치고 힘든 일이다. 마치 고문기술자에게 납치되어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잘리는 것처럼 말이다.


<캐비닛> 속 화자는 끝내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해 세계 밖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귀싸대기를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 터프한 작가는 온갖 고시원과 산속을 전전하며 기어이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재밌다는 말은 못하지만, 박수는 쳐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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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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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일명 특수청소업을 운영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처음 겪었을, 다급한 요청 전화를 받고 찾아간 곳에는 집주인이 자신의 집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열쇠 또는 자동키의 비밀번호를 건네준다. 집주인은 떠나고 저자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 써야 할 게 방독마스크인지 아니며 방진인지 안다. 죽은 자의 빈방은 구더기들과 냄새가 차지한다. 발견된 시간이 길수록 정도는 심하다. 하지만 아무리 심해도 그건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저자는 장비를 들쳐 메고 하나씩 죽음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고독의 크기만큼 찐득하게 달라붙은 흔적들을, 저자는 어르고 달래 저세상으로 놓아준다.


남의 죽음으로 밥을 버는 일은 얼핏 잔인해 보인다. 타인의 절망으로 이득을 얻는 일이라니. 하지만 누가 죽든 말든 산 자들의 세상은 계속된다. 산자들의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다. 죽기 전엔 이러쿵 저러쿵 할 일 조차 없는 데면데면 무명의 이웃이었지만 죽음 뒤에는 온갖 저주의 대상이 된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질까 무섭고 이웃은 냄새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더럽게 재수 없는 일. 나가서 곱게 죽지 못하고 기어이 방구석에서 뒈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미친놈. 청소를 시작하는 저자를 향해 이웃이 나와 애먼 소리를 지르고 들어간다.


저자는 오히려 기사 한줄에도 기록되지 않는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고 배웅하는 유일한 친구다. 아무리 냄새가 지독해도, 현장이 참혹해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가스관 위에 내걸린 빨랫줄과 눌어붙은 짬뽕 국물과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을 통해 죽은 자의 고독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부잣집에 청소를 간 적이 없다. 살아생전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은 죽어서도 고독하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경찰과 시체를 수거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신을 신고 들어와 건조한 조사를 마친 뒤 방 여기저기에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간다. 저자는 천천히 방안을 돌아보며 죽은 자의 삶을 복원한다. 그들의 남긴 옷가지에서, 책에서, 잠자리에서, 음식에서, 죽기 전 가지런히 쌓아 놓은 분리수거 쓰레기에서.


그는 이 일을 하기전엔 출판 업계에 몸을 담은 적이 있고 시인으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깊은 감정을 담는다. 이 책은 온통 죽음과 그 상실이 가져온 고통으로 빼곡하지만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오히려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설령 내가 그렇게 죽더라도 이 분이 찾아와 내 마지막을 기억해줄 것 같은. 죽은 뒤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내 죽음을 떠올리며 외로워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니 이런 위로는 무의미하지 않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저자는 그 사실을 매일 실감하고 산다. 죽음과 손을 잡고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늘 서늘한 공포가 뒤통수를 오싹하게 만들까?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 어렵고 힘들고, 도저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고난을 맞을 때면 나는 늘 죽음을 떠올린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차분해지면서 힘이 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뭘, 하고 생각하면 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찮아 보인다. 그도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걸지 모른다.


살아생전 고통에 시달리던 인생도 죽음 뒤엔 평온을 얻는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은 뼛속까지 잔인해지기로 작정한 인간들의 악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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