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농담의 길이와 재미는 반비례한다. <캐비닛>은 같은 형식의 농담들이 무려 350페이지에 걸쳐 반복된다.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김언수는 책의 끝머리에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p.391)라고 썼다. 그리고는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p.391)라고 덧붙였다.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는 때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은 심토머라 불리는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땅히 소개할 줄거리가 없다. 화자는 오랜 고생 끝에 한 공기업에 취직하지만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아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권박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연구원이 자료를 보관해 놓은 캐비닛에 손을 댄다. 그걸 계기로 화자는 권박사의 조수가 되어 캐비닛을 관리하고 거기에 기록된 심토머들의 고충을 들어준다.


심토머들 중 거론할만한 사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키메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거나 혀 밑에 도마뱀이 사는 등 이종간 교배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

2. 타임 스키퍼: 갑자기 현재의 시공간에서 사라져 몇 시간, 몇일 심지어 몇 년 뒤에 다시 나타나는 사람들

3. 토포러: 곰이나 다람쥐처럼 주기적으로 동면에 빠지는 사람들

4. 메모리모자이커: 물리적, 화학적, 신비주의적 방법을 이용해 기억을 삭제하고, 채워 넣고, 변형시키는 사람들


이 중에 관심있는 심토머가 있다면 <캐비닛>을 읽어보자.


김언수는 이 긴 농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문기술자라는 무리수를 둔다. 기술자는 캐비닛 속 정보 중 키메라의 높은 경제적 가치를 본 기업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화자가 키메라를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20억을 제안하지만 여의치 않자 그를 납치한다. 하지만 그가 알리가 있나! 화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채 폐인이 되어 세계 밖으로 사라진다.


작가란 세계의 사건과 자신의 경험, 기억, 판단 그리고 이것들이 연결되어 파생된 상상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존재다. 심토머의 자료들이 담긴 캐비닛처럼. 하지만 작가의 비극은 이 자료들이 그 자체로 소설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소설은 농담 같은 이야기에 특정한 '형식'이 부여돼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지치고 힘든 일이다. 마치 고문기술자에게 납치되어 손가락, 발가락이 모두 잘리는 것처럼 말이다.


<캐비닛> 속 화자는 끝내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해 세계 밖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귀싸대기를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 터프한 작가는 온갖 고시원과 산속을 전전하며 기어이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재밌다는 말은 못하지만, 박수는 쳐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