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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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편집을 읽고 리뷰를 쓸라치면 언제나 이런 고민에 빠진다.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감상을 일일이 적어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긴 글을 주절주절 써야 하나, 아니면 세인의 평가와 내가 받은 전반적 인상을 적당히 버무려 보는 이들은 그저 알쏭달쏭, 도대체 책을 사야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상망측한 글을 써야하나 같은 고민 말이다.


전자의 방법을 쉽게 쓸 수 없는 이유는 역시, 힘이 들어서다. 이 방법은 쓰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힘이 든다. 게다가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단편집이라고 해도 독자의 사랑은 그 모두에게 고루고루 분배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작품은 잔뜩 정성을 들이게 되고 또 어느 작품은 설렁설렁 쓰게 되 아무래도 균형이 맞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개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만다. 그럴 수 밖에 없지.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공포의 순간이니까.





이 책은 SF다. 이 과감한 명제를 선술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인하여 적어도 70% 이상의 독자가 이 리뷰를 읽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SF는 무협지와 더불어 글쓰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낙인이다. 이유야 어떻든 이 바닥에 발을 들인 이상 평생 이류 작가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SF 작가들의 운명. 이 잔인한 선입견은 SF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속설에서 기인한다. 기껏해야 애들이나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무시. 


'니가 애냐? 아직까지 그런거나 보고 있게?'


단언컨대 자신이 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양있는 어르신들의 95%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언어학과 종교, 수학과 물리학, 프로그래밍과 명명학을 이해하는 아이라면 가능할지도. 


나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 과학을 100%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평가에 따르면 테드 창의 과학적 정밀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게 일반적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니, 도대체 어떤 작품을 써내야 이렇게 무시무시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벌써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했다.


두 번이나 정독했지만 사실 두 번 모두 그의 과학적 엄밀성에 감탄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과학적 엄밀성이란 걸 따져볼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요 또 그런 건 그닥 나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란 건 과학이 아니었다. 나를 감동시킨 건 과학 이외에 그가 가진 다양한 지식이었다.


이른바 통섭이라는 화두가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의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모양이지만 아직까지 그 중요성이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워낙에 절실한데다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험에 나오는 것만을 달달 외우는 것이 배움의 왕도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니까, 통섭따위 사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그런데 외국을 보면 인문학으로 IT 업계를 이끈다거나 철학자가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테드 창도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다. 아이비 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저자는 과학보다는 글쓰기가 맘에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라는, 그리고 과학적 엄밀성 이라는 말에서 전문 지식이 난무하는 긱(Geek) 소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테드 창의 소설엔 확실히 과학 이외의 것들이 더 묵직하게 자리한다. 소설은 과학에서 시작했나 싶지만 어느덧 신학으로 향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힘차게 반동한 뒤 언어학, 명명학, 수학, 물리학, 신경생리학 등으로 눈부시게 산란한다. 뿐만 아니다. 이른바 '기발한 상상력'으로 뭉뚱그려지곤 하는 소재의 특이성은 이미 범상한 장르 소설의 한계치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내가 특히 감동을 받은 작품은 이름의 신성한 힘을 주제로 한 '일흔 두 글자'와 순차적 문법 규칙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전달하는 어의문자(語義文子)를 소재로 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모두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만물의 이름을 지을 때 썼던, 인류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지만 바벨탑 이후에 잃어버린 그 태초의 언어를 암시하는 듯 했다. 발터 벤야민의 철학이기도 한 이 신비주의적 언어 철학은 요 몇년 동안 내 마음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린 믿음과 깊은 조응을 이룰 수 있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첫째, 이런 류의 소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특징인 뒷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쫄깃함이 없다는 점이다. 주제가 가진 철학에 이야기 본연의 재미가 상당수 희생됐던 걸까? 둘째로 테드 창의 문장은 그 주제가 가진 심오함에 비해 아름다움의 깊이가 부족했다. 장르의 특성인가보다고 생각하려는데 뒤이어 어슐러 K. 르귄의 '어둠의 왼손'을 읽고는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문장의 아름다운은 결코 장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테드 창은 똑똑하고 재주 많은 사람들의 글이 으레 그렇듯 재기발랄하지만 표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해 있는, 그런 류의 문장을 구사했다.


상당한 비난을 감수할 각오로 극도로 단순화해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읽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나 할까. 두 작가 모두에게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워낙에 정리를 좋아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두 사람 모두 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리라 믿고 이 어수선한 글을 서둘러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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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7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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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마침내 소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20년간 헤매던 미로에서 드디어 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문을 나서는 순간 햇빛이 쏟아져 내려 질끈 두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뜨자 내 앞에 거대한 이야기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로를 헤매는 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거기 그렇게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오열하는 슬픔이라기 보다는 바위처럼 묵직한, 차가운 슬픔을 안고 나는 무덤을 올랐습니다. 무덤은 생각보다 크고 높았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나 놀라울 정도였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이라도 쐬면 이 무거운 슬픔이 조금이라도 씻겨져내릴까 싶어 저는 정상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 한번 무겁고 차가운 슬픔이 가슴을 쿡 찔러왔습니다. 


발 밑에서 희미하게 꿈틀대는 작은 진동을 느낀 건 바로 그 때였습니다. 저는 죽어서 힘이 다한 물컹한 이야기들을 손으로 걷어 내며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야기 한 다발을 발견해드랬죠. 이야기는 거의 죽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자 숨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흐물거리던 몸체가 단단해지고 창백했던 얼굴에 신선한 광채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진동은 발 밑을 찌릿찌릿하게 만들 정도로 커져있었습니다. 저는 흥분한 마음에 주변의 시체들을 걷어내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냈죠. 그 순간 이야기는 크게 기지개켜듯 더미 속을 뚫고 나와 하늘에 강렬한 빛 한 줌을 토해내더니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거대한 진동과 함께 형형색색의 이야기가 솟구치더니 앞서 날아간 이야기가 그려 놓은 빛의 통로를 따라 어느 하나는 바다로 또 하나는 강으로 또 다른 하나는 숲으로, 산으로, 그리고 저 너머 무지개 속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들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제가 큰 상실감을 느꼈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니 슬픔이라니요? 오히려 행복했죠. 즐거웠습니다. 이야기들이 아무리 멀리 날아갔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꼭꼭 숨어 있다고 한들 그들은 모두 제 세계 안에 있습니다. 지금 제 노트에는 이야기들이 날아가면서 뿌려놓은 편린들이 빽빽히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단서로 꼭꼭 숨어버린 이야기를 찾아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강한 확신에 온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위 이야기는 모두 내가 경험한 실화다. 나는 이 소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를 읽고 비로소 내 머리 속에 빅뱅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불쌍한 과학자들은 빅뱅이니 양자역학이니 신기하고 알쏭달쏭한 현상들을 찾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결과를 목격할 뿐이다. 현상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동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이 모든 것들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현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터져 나올 뿐이다. 한 가지 희망은 꼬리의 끝에서 언젠가 제1 원인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다. 이런 희망을 품고 그들은 영원히 이어질 꼬리를 죽을 때까지 잡아 당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나의 세계, 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다. 나는 결국에 소설가가 되고 마는데, 그건 내가 재능이 있기 때문도, 열심히 습작을 하기 때문도, 수 백권을 책을 읽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나보다 먼저, 이탈로 칼비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도, 어쩌면 나는 그저 이탈로 칼비노의 그림자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늙은 크프우프크의(Qfwfq, 이 책 우주만화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버렸고, 


우주는 영원한 팽창을 시작해 버린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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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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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현대 물리학 입문서로서 전 세계 어떤 책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이 강력 추천했다고는 하나, 이 책은 확실히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다른 점이 있다. 


브라이언 그린은 너드 혹은 긱의 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사명감이나 의무가 아냐. 물리학 얘기라면 그냥 즐거운 거라고. 알아 들을 수 없는 표정을 하면 비유에, 그림에, 실험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낸다. 듣는 사람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지만 그 뜨거운 열정에 웬지 모를 충만함을 느끼는 게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특징이다. 


반면 닐 투록의 책은 '물리학 얘기'라기 보다는 '물리학에 관한 얘기'에 가까울 정도로 에세이 느낌이 나는게 사실이다. 구체적 설명은 존재하지 않아. 고로 쉽게 이해 가능한 부분은 물리학 역사에 대한 이야기거나 유명 과학자들의 일화 정도에 불과하다.


투록은 들어가는 글에서, 


이 책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 나는 물리학의 몇몇 가장 큰 아이디어들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균형 잡힌 역사를 전달하거나 중요성에 따라 적절히 배분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썼다. 닐 투록은 과학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이 책을 학술 서적으로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은 누락됐고 '우리 안의 우주'는 어려운 학술서적 보다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되버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과학이 우리 사회로부터 달아나려는 것을 막으려는 닐 투록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할 뿐입니다', '도덕과 사회요?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우리는 과학자입니다'. 투록은 이런 생각을 가진 과학자들에게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극적 몰락을 예시로 들며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는 과학도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과학자들 모두가 따뜻한 인류애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유년기의 영향이 큰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무려 1948년에 법률로 지정된 악질적 인종 분리 정책)' 정권에 저항하다 투옥된 정치범이었다. 아버지의 석방 후 탄자니아로 명망한 투록은 이후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낯설고 축축하고 음울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망명자 사회에 합류했다.(p.12)


1980년대에 이르러서도 남아공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봄은 왔다. 1993년,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는 붕괴됐다. 도저히 희망이 없어 보이는 최악의 세상 속에서, 끝내 희망을 보고야 만 인내의 경험은 그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긍정적 사고를 만들어줬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이렇게 탄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낭만주의조차 이 책을 최고의 물리 교양서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유는 앞서 기술한 바, 더 이상의 채찍질은 험난한 역경을 지나쳐온 저자에게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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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 국내 미출간 소설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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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글을 쓴답시고 망망한 백지 앞에 앉게 되면, 그 하얗디 하얀 종이가 사실은 날 통째로 집어 삼키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지옥의 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소설가는 이 지옥의 입에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사슬을 채워 나간다. 장갑도 보호장구도 없이 하는 고행을, 나는 언제나 경탄에 찬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위대한 일을 몇 십번이나 해 놓고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글에, 남들의 평가에 컴플렉스를 느꼈다. 몇 번이나 죽을 시도를 했다. 아쿠타카와 상 따위 못 받은들 좀 어때. 이제는 고리타분한 그 대가들의 비아냥 따위 그냥 웃어 넘기자고.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죽은 지 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절찬리 판매 중.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내 목숨을 대가로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빌고 싶다. 니체와 고흐와 다자이 오사무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살려내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 됐는지 알게 해달라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전부 우울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가 아니야. 대개가 그렇지. 자기 삶의 편린이 소설의 한 가락이 되고 마는게 소설가라는 인간들의 숙명이다보니,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산 다자이 오사무가 쓰는 소설, 게다가 이 남자는 사소설의 대가, 그 소설들이 다짜고짜 행복을 노래할 순 없잖아. 그건 자기기만이라고. 이래뵈도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번역서를 거의 다 읽은 내가 기억하기론 그에게도 밝고 경쾌한 책이 두 권 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쟁통, 귀여운 딸 아이에게 들려줄 심산으로 각색한 옛날 이야기인 '오토기조시'. 아무리 절망을 친구삼아 사는 남자라 할지라도,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담긴 주머니가 바로 삶이라는 걸 아는 남자라 할지라도, 초롱초롱 귀여운 눈망울로 옛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딸 아이에게 진실을 폭로할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물론 이 괴물같은 아버지는 몇몇 작품에 결코 개운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겨 두었다. 아이가 자라 세상을 좀 알고나면 비로소 느낄 숨겨진 비애같은 걸 말이야. 


그런데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는 진짜 달라. 정말로 다르다. 때는 일본의 패전 당시. 배경은 폐병 환자들이 모여 요양을 하는 '건강 도장'이라는 곳. 이것만 놓고 보면 아~ 또 죽음을 벗삼아 살아가는 남자, 그것을 찬미하지만 결코 자살할 용기는 없는 나약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책장을 몇 십장쯤 넘기다 보니, 이거이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와 놀라고 말았다. 


창작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럴만도 하다. 우선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아니다. 기무라 쇼스케라는, 다자이 오사무와 친분이 있는 한 남자의 일기가 그 바탕이 됐다. 기무라 쇼스케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기무라에게 일기 쓰기를 권한 것이 다자이 오사무였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기무라가 죽고 난 뒤 일기를 물려 받아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를 쓴 것이다. 







소설은 실로 경쾌하고 가볍다. 주인공 종다리(별명)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새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삐져나온 아침 햇살과 함께 연주되는 기분. 현실과는 뚝 떼어져 격리된 곳, 폐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세계는 고요한 심해로 침잠, 일종의 동면 상태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아. 사람이 있으면 사건도 있는 법이지. 그것도 젊은 남자와 여자 간호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은 언제 어디서곤 사랑을 꽃 피울 수 있는 능력일 거야. 사랑은 말이지, 정말로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황폐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만다니까.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니 섬세한 연애 감정을 이렇게도 잘 묘사하는 게 놀랄 일도 아니다. 종다리에게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 간호사가 둘이나 있다. 마아보와 다케. 종다리는 처음부터 다케씨에게 마음이 가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게 쑥쓰러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씨는 좋으나 거대하고 못난 여자다'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다케씨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 연애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숭고한 면이 있다. 반면 마아보의 사랑은 어린 여자 답게 더 적극적이고 발랄하다. 1940년대니 남자로선 그 발랄함이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종다리는 마아보를 차갑게 대한다. 그럴때 마다 마아보는 종다리의 같은 방 남자들과 일부러 큰 소리로 깔깔깔 잡담을 한다. 마음에 없다고 내친게 자신이건만 그 경쾌한 웃음 소리에 부글부글 속이 끓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아보는 어린 소녀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 육감이란 게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종다리가 다케씨에게 홀딱 반해버린 사실을 아는 마아보는 말똥같은 눈물을 뚝뚝, 그 귀여운 얼굴 위로 흘린다. 어린 소녀는 원래 도도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저 멀리 만년설 위에 홀로 핀 붉은 백합같지. 그런 소녀가 마음을 완전히 허물어 뜨리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어떨 것 같아?







소녀를 울린 남자에게도 대가는 있다. 다케씨의 결혼. 종다리는 속으로 울다 지쳐 잠에든다. 그러다 꿈을 꾼거야. 마아보의 눈물도, 다케씨의 결혼도 모두 꿈이라는.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잠이 깬 자기에게 다가와 옷을 갈아 입히는 다케씨를 보며 종다리는, 


"다케 씨, 축하해."


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케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네. 말없이 뒤에서부터 잠옷을 걸쳐 주고 그런 다음 잠옷의 소맷부리로 손을 넣어 어깨 부근을 꼬옥, 아주 세게 꼬집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네.(p.220)


역시 청춘의 모든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소설은 이처럼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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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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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상당수 틀린 주장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 미학자는 아니니까요.



진중권이 들려줘도 재미없어


책의 뒷표지,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다'는 말은 순 뻥이다. 고전 미학과는 천지차이, 현대 미학은 복잡 난해하다. 깊이 숨겨진 진리를 찾는게 찾기만 한다면야 더 보람 있겠지만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온통 미로를 헤매는 기분,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이유는 이 참에 나에게도 알쏭달쏭한 현대 미학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픈 욕망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이름 만큼은 알고 있어 여기저기 잘난척만 수두룩,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지식이다 보니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고 말거라는 공포심. 내 공부의 동기는 모두 이 공포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냈느냐? 글쎄올시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모르겠는게 이 현대 미학이라는 장르. 게다가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 이 분이 참 쉽고 재밌게 쓰시는 양반인데 도통 이 책에서만큼은 그 능력을 발휘해내지 못하신다. 무시무시한 번역문과 전문 용어가 두서없이 남발될 때는 이 분을 대단히 존경하는 나 조차 '자기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걸까?'라는 외람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변명을 좀 하면, 우선 번역의 문제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들은 당연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게 마치 재현을 포기한 현대 미술처럼 의미 전달을 포기한 문자 예술처럼 보인다.


둘째, 용어의 문제다. 예컨대 '숭고의 부정적 묘사'. 여기서 부정적 묘사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뭔가를 나쁘게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하다. 설명은 당연 친절하지 않다. 사실 이것들도 크게는 번역의 문제다. 아마 외국 철학자들의 용어를 내포된 의미가 아닌, 표면적 의미만을 따라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용문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고 미학가들이 사용하는 중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입문을 원하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현대미학의 보이콧, 재현의 포기


지금 난 현대미학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그림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어려운 설명을 늘어 놓으며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해도 현대미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위에서 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잭슨 폴록의 작품들




첫째, 재현은 저급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떡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렸다 한들 그게 실제 떡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재현은 필연적으로 '실재'와 '그림'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려진 것은 결코 실재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한계를 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요, 몬드리안의 파랑, 노랑, 빨강이며 잭슨 폴록의 혼돈의 페인트다.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둘째, 비판을 위해 예술은 사회에서(실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신병자같은 대통령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한다'(p.95). 예술은 그렇게 다른 상태로 머물러 끝까지 저항해 나간다. 예술의 비재현성은 곧 반면교사의 실천인 셈이다. 


셋째, 재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떡을 그린 그림은 '떡은 떡이다'라는 동어반복의 멍청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비재현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p.168). 회색 빛깔의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좀비들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느낌표 하나를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의미다.


넷째, 현대미술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 재현으로는 절대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놓고 이것이 바로 그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의 사기성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됐다는 의미 아닐까? 현대예술은 작품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그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ⅲ,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수용법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하이데거는 "이것이(그림) 말을 했다"라고 말한다. 작품이 직접 자신의 진리를 말해줬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님을, 이유는 없이 그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문제는 이 하이데거의 독단이 작품의 진리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얘기한다.'


하이데거의 수용법은 어딘지 모르게 거만함이 느껴진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어디 무서워서 미술관이나 갈 수 있겠는가?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컴플렉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하이데거의 한계가 있다. 현대미술은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물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진리는 어째서 단 하나의 진리를 지시하는가? '이것이 진리다'라는 말은 '이것'이 맞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맞다'는 말인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순간 현대미술은 다시 딱딱한 고전미술로 회귀하고 만다.


데리다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놀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진리는 결코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린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일부 문장 수정. p.142). 


나는 앞서 작품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 규칙에 얽매인 자, 차이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작품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장 보드리야르를 만나야 한다.


차이의 놀이, 좋다. 하지만 차이는 정말로 무한히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유의미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도 예술입네, 저것도 예술입네, 예술은 도처에서 피어나지만 그 중에 진짜 새로운 사건은 없다.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대예술을 암세포의 증식에 비유한다'(p272).


보드리야르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도 예술, 멸치 국물의 맛도 예술, 자동차도 예술, "예술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이어지는 현대예술이 저마다 무가치를 주장하며 두 사람을 따라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뒤샹과 워홀은, 어쩌면 이 세계 마지막 현대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뒤샹, 그리고 워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진중권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p.273)


우리 나라의 돈 많은 범죄자들이 현대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은 이 말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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