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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7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네, 그렇습니다. 마침내 소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20년간 헤매던 미로에서 드디어 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문을 나서는 순간 햇빛이 쏟아져 내려 질끈 두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뜨자 내 앞에 거대한 이야기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로를 헤매는 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거기 그렇게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오열하는 슬픔이라기 보다는 바위처럼 묵직한, 차가운 슬픔을 안고 나는 무덤을 올랐습니다. 무덤은 생각보다 크고 높았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나 놀라울 정도였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이라도 쐬면 이 무거운 슬픔이 조금이라도 씻겨져내릴까 싶어 저는 정상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 한번 무겁고 차가운 슬픔이 가슴을 쿡 찔러왔습니다.
발 밑에서 희미하게 꿈틀대는 작은 진동을 느낀 건 바로 그 때였습니다. 저는 죽어서 힘이 다한 물컹한 이야기들을 손으로 걷어 내며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야기 한 다발을 발견해드랬죠. 이야기는 거의 죽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자 숨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흐물거리던 몸체가 단단해지고 창백했던 얼굴에 신선한 광채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진동은 발 밑을 찌릿찌릿하게 만들 정도로 커져있었습니다. 저는 흥분한 마음에 주변의 시체들을 걷어내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냈죠. 그 순간 이야기는 크게 기지개켜듯 더미 속을 뚫고 나와 하늘에 강렬한 빛 한 줌을 토해내더니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거대한 진동과 함께 형형색색의 이야기가 솟구치더니 앞서 날아간 이야기가 그려 놓은 빛의 통로를 따라 어느 하나는 바다로 또 하나는 강으로 또 다른 하나는 숲으로, 산으로, 그리고 저 너머 무지개 속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들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제가 큰 상실감을 느꼈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니 슬픔이라니요? 오히려 행복했죠. 즐거웠습니다. 이야기들이 아무리 멀리 날아갔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꼭꼭 숨어 있다고 한들 그들은 모두 제 세계 안에 있습니다. 지금 제 노트에는 이야기들이 날아가면서 뿌려놓은 편린들이 빽빽히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단서로 꼭꼭 숨어버린 이야기를 찾아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강한 확신에 온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위 이야기는 모두 내가 경험한 실화다. 나는 이 소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를 읽고 비로소 내 머리 속에 빅뱅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불쌍한 과학자들은 빅뱅이니 양자역학이니 신기하고 알쏭달쏭한 현상들을 찾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결과를 목격할 뿐이다. 현상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동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이 모든 것들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현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터져 나올 뿐이다. 한 가지 희망은 꼬리의 끝에서 언젠가 제1 원인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다. 이런 희망을 품고 그들은 영원히 이어질 꼬리를 죽을 때까지 잡아 당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나의 세계, 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다. 나는 결국에 소설가가 되고 마는데, 그건 내가 재능이 있기 때문도, 열심히 습작을 하기 때문도, 수 백권을 책을 읽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나보다 먼저, 이탈로 칼비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도, 어쩌면 나는 그저 이탈로 칼비노의 그림자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늙은 크프우프크의(Qfwfq, 이 책 우주만화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버렸고,
우주는 영원한 팽창을 시작해 버린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