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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 ㅣ 국내 미출간 소설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글을 쓴답시고 망망한 백지 앞에 앉게 되면, 그 하얗디 하얀 종이가 사실은 날 통째로 집어 삼키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지옥의 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소설가는 이 지옥의 입에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사슬을 채워 나간다. 장갑도 보호장구도 없이 하는 고행을, 나는 언제나 경탄에 찬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위대한 일을 몇 십번이나 해 놓고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글에, 남들의 평가에 컴플렉스를 느꼈다. 몇 번이나 죽을 시도를 했다. 아쿠타카와 상 따위 못 받은들 좀 어때. 이제는 고리타분한 그 대가들의 비아냥 따위 그냥 웃어 넘기자고.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죽은 지 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절찬리 판매 중.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내 목숨을 대가로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빌고 싶다. 니체와 고흐와 다자이 오사무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살려내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 됐는지 알게 해달라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전부 우울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가 아니야. 대개가 그렇지. 자기 삶의 편린이 소설의 한 가락이 되고 마는게 소설가라는 인간들의 숙명이다보니,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산 다자이 오사무가 쓰는 소설, 게다가 이 남자는 사소설의 대가, 그 소설들이 다짜고짜 행복을 노래할 순 없잖아. 그건 자기기만이라고. 이래뵈도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번역서를 거의 다 읽은 내가 기억하기론 그에게도 밝고 경쾌한 책이 두 권 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쟁통, 귀여운 딸 아이에게 들려줄 심산으로 각색한 옛날 이야기인 '오토기조시'. 아무리 절망을 친구삼아 사는 남자라 할지라도,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담긴 주머니가 바로 삶이라는 걸 아는 남자라 할지라도, 초롱초롱 귀여운 눈망울로 옛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딸 아이에게 진실을 폭로할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물론 이 괴물같은 아버지는 몇몇 작품에 결코 개운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겨 두었다. 아이가 자라 세상을 좀 알고나면 비로소 느낄 숨겨진 비애같은 걸 말이야.
그런데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는 진짜 달라. 정말로 다르다. 때는 일본의 패전 당시. 배경은 폐병 환자들이 모여 요양을 하는 '건강 도장'이라는 곳. 이것만 놓고 보면 아~ 또 죽음을 벗삼아 살아가는 남자, 그것을 찬미하지만 결코 자살할 용기는 없는 나약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책장을 몇 십장쯤 넘기다 보니, 이거이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와 놀라고 말았다.
창작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럴만도 하다. 우선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아니다. 기무라 쇼스케라는, 다자이 오사무와 친분이 있는 한 남자의 일기가 그 바탕이 됐다. 기무라 쇼스케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기무라에게 일기 쓰기를 권한 것이 다자이 오사무였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기무라가 죽고 난 뒤 일기를 물려 받아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를 쓴 것이다.
소설은 실로 경쾌하고 가볍다. 주인공 종다리(별명)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새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삐져나온 아침 햇살과 함께 연주되는 기분. 현실과는 뚝 떼어져 격리된 곳, 폐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세계는 고요한 심해로 침잠, 일종의 동면 상태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아. 사람이 있으면 사건도 있는 법이지. 그것도 젊은 남자와 여자 간호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은 언제 어디서곤 사랑을 꽃 피울 수 있는 능력일 거야. 사랑은 말이지, 정말로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황폐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만다니까.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니 섬세한 연애 감정을 이렇게도 잘 묘사하는 게 놀랄 일도 아니다. 종다리에게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 간호사가 둘이나 있다. 마아보와 다케. 종다리는 처음부터 다케씨에게 마음이 가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게 쑥쓰러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씨는 좋으나 거대하고 못난 여자다'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다케씨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 연애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숭고한 면이 있다. 반면 마아보의 사랑은 어린 여자 답게 더 적극적이고 발랄하다. 1940년대니 남자로선 그 발랄함이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종다리는 마아보를 차갑게 대한다. 그럴때 마다 마아보는 종다리의 같은 방 남자들과 일부러 큰 소리로 깔깔깔 잡담을 한다. 마음에 없다고 내친게 자신이건만 그 경쾌한 웃음 소리에 부글부글 속이 끓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아보는 어린 소녀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 육감이란 게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종다리가 다케씨에게 홀딱 반해버린 사실을 아는 마아보는 말똥같은 눈물을 뚝뚝, 그 귀여운 얼굴 위로 흘린다. 어린 소녀는 원래 도도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저 멀리 만년설 위에 홀로 핀 붉은 백합같지. 그런 소녀가 마음을 완전히 허물어 뜨리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어떨 것 같아?
소녀를 울린 남자에게도 대가는 있다. 다케씨의 결혼. 종다리는 속으로 울다 지쳐 잠에든다. 그러다 꿈을 꾼거야. 마아보의 눈물도, 다케씨의 결혼도 모두 꿈이라는.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잠이 깬 자기에게 다가와 옷을 갈아 입히는 다케씨를 보며 종다리는,
"다케 씨, 축하해."
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케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네. 말없이 뒤에서부터 잠옷을 걸쳐 주고 그런 다음 잠옷의 소맷부리로 손을 넣어 어깨 부근을 꼬옥, 아주 세게 꼬집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네.(p.220)
역시 청춘의 모든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소설은 이처럼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