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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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다크 나이트>를 히스 레져의 유작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진정한 유작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행히 히스 레져가 죽기 전에 영화를 끝마쳤고 그의 죽음으로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테리 길리엄은 영화를 반도 찍지 못한 상태에서 주연 배우가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손에 쥔다. 계속 가기엔 남은 길이 아득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와 버렸다. 감독은 기지를 발휘해 주연 배우 셋을 더 캐스팅한다. 영원한 캡틴 조니 뎁, 영국산 바람둥이 주드 로, 아메리칸 마초 콜린 파렐. 네 명의 배우는 파르나서스 박사가 여행하는 다섯개의 세상을 사이좋게 나눠 여행한다. 좋은 아이디어, 완벽한 배우, 처참한 실패.


'처참한 실패'에 대해선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저 말은 객관적 흥행 기준을 토대로 한 말이지 내 개인적 감상을 섞은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했다. 테리 길리엄은 이야기의 신이었고 나는 그의 신도였으니까.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보면 일군의 신도들이 나온다. 그들은 이상 야릇한 동굴(기억이 잘 안 난다)에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낭독한다. 단 일초라도 이야기가 끊기는 순간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때 악마 하나가 그들의 본거지에 쳐들어온다. 악마는 최고 성직자와 논쟁을 벌이며 이야기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일 거라고 도발한다. 당연히 성직자는 악마의 말을 무시한다. 그 와중에도 신도들은 계속 이야기를 낭독한다. 그 순간 악마가 모든 신도들의 입을 봉해 버린다. 공간을 지배한 침묵. 악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귀를 기울인다. 어때? 이게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인가? 천만에. 세상은 멀쩡하다. 악마가 맞았다. 너희들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거다. 악마는 패배를 자인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우두머리 성직자의 입을 열어준다. 그가 말한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이 세상엔 우리 말고도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크아!!!


내가 테리 길리엄의 신도였다면 테리 길리엄 본인은 이야기의 신도였다. 그와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신이고 우리 모두는 이야기를 믿는다. 성직자의 한 마디는 공간을 급속도로 수축시켜 이야기를 믿는 우리를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킨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고, 외롭지 않고,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국경시장>의 김성중이 우리들 사이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역시 이야기를 신으로 섬기는 것 같다. 게다가 그녀는 꽤 높은 등급의 성직자로 보인다. 여기에 실린 8개의 소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눠 가져 하나씩 입에 넣고 삼켜야 한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말씀을 전하라."


세상이 팍팍해진 시기와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건 원인과 결과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혼합물일 수도 있다. 세상이 팍팍해져서 서사가 사라진 건지, 서사가 사라졌기에 세상이 팍팍해진 건지. 과거엔 아파트 한 동 조차 끊임없이 서사를 낳는 이야기의 보고였다. 103호의 누구는 점심에 짜장면을 먹다 체했고, 204호의 누구는 와이프가 던진 맥주병을 맞아 이마가 깨지고, 403호의 누구는 올해 딸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더라. 그들은 103호나 204호나 403호에 모여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시시콜콜 그런 얘기를 떠들었다. 이야기가 그들을 하나로 엮어줬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비인간적 주거 형태의 전형으로 지탄 받는 아파트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목구멍에 고여 있던 이야기를 스스로 뱉어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야기들은 종종 단순한 재기로 치부되곤 한다. 깊이가 없다는 취급. 입담이 좋다.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그걸로 끝. 문학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문학이란 그렇게 가벼운게 아니... Bull Shit이다.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여야 한다. 이야기가 없는 문학이야말로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문학이 죽어간 시기와 문학에서 이야기가 사라진 시기에 대해 말이다.


<국경시장>은 작가의 말까지 다 더해도 245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소설은 바다처럼 거대하다. 개인적으론 현실의 냄새가 덜 나는 것들이 훨씬 좋았다. 환상과 상상의 관능적 교접. 책 제목이기도 한 '국경시장'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쿠문'은 기묘한 이야기의 교과서고 '관념 잼'과 '에바와 아그네스'는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그 희뿌연 안개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필멸'은 로알드 달의 성인용 소설 같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 '한 방울의 죄'는 이 작가가 조만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소설을 한 권으로 엮어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낳게 한다.


김성중은 책의 말미에서 자신이 언제나 거대한 서사에 매료되어 왔음을 고백한다. 멜빌과 마르케스 같은. 그리고는 자신의 소설이 그에 닿지 못함을 자조한다. 욕심도 참 많다. 내 보기에 그녀는 이미 내해에 나가 돛을 올리고 순항 중이다. 수평선 너머의 대해가 코 앞인 것 같은데. 그 배에 나도 태워가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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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9-1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경시장을 읽은터라 끌리긴 하는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를 검색해보니 쉬운 영화는 아니네요. 그래도 추석 때 보게될 것 같아요.ㅎ 궁금한건 또 못참아서^^;;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한깨짱 2017-09-19 19:38   좋아요 0 | URL
그나마 대중적인 작품은 <12 몽키즈>인데요, 이 영화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영화는 아니에요. 매니아들의 영화긴 하지만 ㅋㅋ

에디터D 2017-09-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 몽키즈>는 오래전에 봤어요.ㅎㅎㅎ 오홋, 왠지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ㅎ

한깨짱 2017-09-24 09:40   좋아요 0 | URL
네 테리 길리엄은 고정 팬이 많은 훌륭한 감독이에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감독의 영화를 즐겨봤으면 좋겠습니다.
 
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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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릴러 소설을 찾던 중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농장에서 죽음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닐 터였고, 검정 파리들은 차별하지 않았다. 파리들에게 동물이든 사람이든 시체라면 별 차이가 없다.

(p. 10)


첫 문장을 신경 쓰는 장르 소설 작가라면 믿어봄직하다. 문장에 신경을 쓴다는 건 구성의 단단함에도 민감할 확률이 높으니까.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에서 배운 걸 떠올려보자. 미스테리 스릴러의 첫 번째 규칙. '명백한 사건이 등장해야 한다.' 이번에도 자살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자살한 남자는 죽기 전 자기 집에 들러 아내와 아이를 샷건으로 날렸다. 그리고는 트럭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끔찍한 친족 살해. 조그만 시골 마을이 통째로 들썩인다.


지문은 확실하고 동선은 명백하다. 살인이 벌어지기 전 남자의 트럭이 마당에 들어서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여기서 잠깐. 두 번째 규칙을 떠올려 보자. '실체가 아닌 속성을 기술하라.' CCTV에 찍힌 건 남자의 트럭이지 남자가 아니다. 트럭은 남자에게 속한 구성물이기는 하지만 그 연결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트럭은 누구나 운전할 수 있다. 평균 정도의 지성만 갖춘 작가여도 당연히 CCTV에 운전자의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고 쓸 것이다. 이로써 작은 의혹이 성립된다(물론 진짜 뛰어난 작가는 CCTV에 찍힌 이 명확성 마저도 배반할 뭔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제 이 사건에 의혹을 품는 사람, 주인공이 등장해야 한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범인의 아버지 혹은 동생? 범인의 관계자라는 점은 이 사건을 파고들어야 하는 동기를 명확히 해준다. 또 그 관계성 때문에 범죄를 비난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게 확실하다.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매우 좋은 구성이다. 만약 주인공을 범인의 어머니로 정한다면 이야기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아들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엄마의 눈물어린 분투. 하지만 그 진실이 엄마 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을 때 그녀는 어떤 입장을 취할까? 모성애는 그 어떤 추악한 범죄도 초월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가 어떨지 궁금하다면 봉준호의 <마더>를 참고해보는 것도 좋다.


결론만 얘기하면 <드라이>의 주인공은 범인의 옛 친구다. 그는 범인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죽마고우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마을에 타살로 의심되는 자살 사건이 벌어지고, 주인공이 용의자로 의심되면서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경찰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한때 살인 용의자로 의심됐던 남자가 죽마고우의 살인 사건을 파헤친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복잡한 진실의 실타래를 하나 더 엮어 넣는다. 과거에 벌어진 살인 사건의 진범이, 바로 이번에 자살한 친구라는 의혹을 풍기는 것이다.


수십년 전 벌어진 살인의 흔적이 끈질기게 달라 붙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엉킨다. 이제 이야기는 두 개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과거 사건의 진범은 누구였을까? 자살한 그 친구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남자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의 살인은 친구를 과거 사건의 진범으로 오해한 누군가의 복수극일까? 이로써 이야기는 천개의 고원을 향해 달려간다. 의혹은 폭발하고 진실은 오색 꼬리를 살랑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진다.


작가의 영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완벽한 배경. 무대는 끔찍한 가뭄으로 고통 받는 호주의 깡촌이다. 시골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은 흰 벽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처럼 끝까지 남아 사람을 괴롭힌다. 이 기억은 흔히 텃새라는 힘으로 변해 공권력도 무용하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게다가 그들은 오랜 가뭄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다. 박해자의 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 또 가뭄이라는 설정이 가진 중의성에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뭄은 진실을 드러내는 열쇠다. 왜? 모든 사물들은 극한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깡마른 강은 물로 가려 보이지 않던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바짝 마른 나뭇가지는 숨겨왔던 선명한 주름을 보여준다. 진실을 벗기는 폭력적 빛의 강림.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는 건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가 아니라 눈을 가린 손틈을 비집고 파고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이게 데뷔작이라 믿을 수 없다는 평가들은 이렇듯 첩첩이 쌓인 노련한 구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개의 긴박함이 떨어지는 건 아쉬움을 넘어 지루함이 되곤 한다. 하나씩 단서가 발견될 때마다 뇌의 주름이 쫄깃해지는 느낌이 없다. 그 느낌이 바로 미친듯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데, 그냥 맨 뒷페이지를 열어 누가 범인인지 확인만하고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확실히 문제다. 게다가 줄줄이 늘어선 단서가 가리키는 방향과 실제 범인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차는 클라이막스의 해방감을 방해하는데 완벽한 역할을 수행한다.


<드라이>를 영화로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나다를까 소설은 이미 리즈 위더스푼의 퍼시픽 스탠다드에 판권이 팔려 영화화가 확정됐다고 한다. 누가 감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디악>의 데이비드 핀처라면 소설의 빈 곳을 완벽하게 채워줄 것 같다. 가뭄에 찌든 누런색 들판이 이미 *핀처의 시그니쳐 라이팅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하나같이 색이 바랜듯 누리끼리한 색조를 유지한다. <조디악>, <하우스 오브 카드>,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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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비린내 - 해양생물학자가 우리 바다에서 길어 올린 풍미 가득한 인문학 성찬
황선도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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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좋아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건 내 DNA에 각인된 거라 내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해는 말아야 하는게, 결코 비린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비린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비린내가 아니라 물고기를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잡는 것도 좋아하고 먹는 건 더 좋아한다. 찜, 탕, 구이 다 훌륭하지만 역시 최고는 날것이다. 물고기를 날것으로 먹지 않는다는 건 물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날것. 탱탱한 식감에 입안 가득 스며드는 촉촉한 기름의 감칠맛. 많은 사람들이 날것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육고기가 부위별로 다양한 맛을 내듯 물고기들도 서로 다른 맛을 지녔다. 도미는 달고 농어는 원시적 생명력을 지녔고 광어는 기름지고 전어는 고소하며 우럭은 쫄깃하다. 날것이 싱겁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활어를 즐기기 때문이다. 활어는 고기의 맛이 우러나지 않기 때문에 맛이 싱겁고 주로 탱탱한 식감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 초장을 찍어먹는 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선어의(숙성육) 경우 고기가 가진 고유의 풍미가 잘 우러난다. 광어 양식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선 이제 싸구려 횟감으로 통하는 광어지만 이것도 잘 숙성시켜 먹으면 "이게 진짜 광어의 맛이구나!" 할 정도로 눈이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광어는 백김치에 싸먹어도 참 맛있다.


사실 바다에서 나는 건 당연하게도 물고기 뿐이 아니다. 각종 해조류, 멍게, 해삼, 개불, 소라, 고둥,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조개들. 아마 조개는 날것보다 구이가 맛있는 거의 유일한 바다 생물일 것이다. 석쇠에 올려 놓고 굽다보면 뚜껑이 열리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조개들.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멍게와 해삼 개불은 생긴게 끔찍해 안 먹는 사람들도 참 많은데 이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생선회보다 더 즐기는 경우도 많다. 개불은 신기할 정도로 단 맛이 나는데 잘못하면 비릴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멍게하면 씁쓸한 맛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단맛이 강하고 향이 기가막힌 해산물이다. 해삼은 뭐, 그냥 맛있다. 식탁 위에 올라왔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씹어 삼켜야 한다.


이렇듯 나는 물에서 나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물과 물고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회식에선 늘 육고기파와 싸움을 벌이지만 소수인탓에 억울한 패배를 씹어삼켜야 한다. 아무튼 물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도 물고기가 나왔다 하면 무조건 본다. 각종 다큐에서 생생정보통, VJ특공대, 내고향6시, 남도지오그래피, 한국기행, 한국인의 밥상, 극한직업까지, 물고기를 다루는 순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물고기에 대한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를 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린내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됐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수산 자원을 관리하는 공무원, 물고기 박사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연구하고 보존, 재생, 육성하는 일을 해왔다. 그탓에 책은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들 즉 어떤 물고기는 무슨 맛을 내고 언제나 제철이며 어떻게 먹어야 좋은가에 대한 내용보다는 물고기 놈들의 생태, 산란, 크기, 특징을 다루면서 자신이 경험한 업무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물고기들의 역사적 유례나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뭐 그래서 딱 마음에 드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물고기를 식재료가 아닌 자원으로 다루는 사람이니까 이런 접근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종류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쉬운 대중서를 표방했는지 우리가 익히 아는 녀석들이 등장한다. 좀더 다양한 물고기, 다양한 조개, 다양한 바다 생물을 다뤄줬다면 더 좋을 뻔 했다. 크기나 산란, 생태에 대한 얘기도 몇몇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닥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해양 생물 중에는 상황에 따라 암, 수를 자유로이 바꾸는 녀석들이 있다는 건 신기했지만.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물에서 나는 놈들을 먹어왔다. 야생의 육고기 보다는 수렵과 채취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고기를 먹는다는 건 사실 우리 DNA에 새겨진 태초의 흔적을 되짚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언제나 황홀하고, 흥분되고, 침이 고일정도로 행복한 맛의 경험을 동반한다. 나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싶은 욕구가 생기는데 물고기도 마찬가지.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 마음, 아마 여러분도 이해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가벼운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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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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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약력을 읽어보자. 그는 KAIST에서 원자핵 및 양자 공학을 배웠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론화학을 전공해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왕성한 필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색다른 소재를 다루는 인간미 있는 글을 써왔다. 이상은 알라딘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쌓은 전문지식이 방대한데다 머리도 좋아 소설까지 쓰는 사람들이 있다. 번뜩이는 소재를 찾아내고 그 위에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튀어나온 부분은 깍아내고 토대에 논리의 땜질을 더해 기울어진 곳을 바로잡는다. 아마도 이들에게 소설 쓰기는 논문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과 인간을 너무 도식적으로 다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소설은 일종의 지적유희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발가 벗기는, 세상을 꼭대기서부터 바닥까지 한 방에 꿰뚫어버리는, 뜨거운 뭔가가 부재한다는 말이다.


이제 <토끼의 아리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 것이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 책은 세상을 겉핥고 있다.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다. 인간의 모순적인, 다양한 속성이 공존하는 완전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이마에 '악'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악'만을 연기한다. 이마에 '선'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선'만을 연기한다. 이 짜여진 극본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플롯, 참신한 소재 혹은 넋을 놓고 읽게 만드는 입담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문장에도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쁜 연구 생활 틈틈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지은 소설을 웹진에 발표하고, 출간까지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존경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절로 올라가는 건 아니다.


차라리 하드 SF였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바닥을 잘 몰라 순진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 SF도 대중화 되지 않은 나라에서 하드 SF라니. 책 뒤에는 작가가 각 소설을 쓰게 된 경위가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소설을 의뢰한 단체의 편집 의도에 맞춰 소설을 써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잡지는 이러이러한 독자들이 주로 찾아보니 이러이러한 소설을 써주세요. 대중적인 이야기를 위해 작가 본인의 욕망을 상당히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가에게 나의 평은 대단히 억울하게 들릴 것이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나 또한 결과만을 보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의 아리아>는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인공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이되 책장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된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체념한 듯 무기력해 보이지만 사실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의 초연함을 통해 분노 너머에서 기다리는 일말의 희망을 손에 쥐길 원했을 것이다. 대실패였다. 나는 화가 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싶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시전했고, 그렇게 쟁취한 힘과 경험을 토대로 바닥부터 새로운 삶을 쌓아 나간다.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맥주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연작 소설을 썼고, 그 중 한 편이 이 책에 실리기도 했지만, 고작 한 편으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좋았던 소설은 <박승휴 망해라>였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배짱 있는 제목을 내 소설에 붙이고 싶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소재가 아주 좋았다. 태양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 86년. 사람들은 서기 제도를 폐기하고 잔기(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하는 연도 표기 방식. 잔기 86년은 멸망까지 86년이 남았다는 뜻)를 사용하게 된 인류가 한 걸음 씩 다가오는 멸망을 기다리며 사는 내용이다.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를 너무 대충 써먹었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SF, 범죄 느와르 등 장르 소설에 지속적으로 도전 중이다. 사람들이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게 대부분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 앞서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실패를 토대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보석을 나에게 나눠주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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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n 2017-09-26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한 기회에 들어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양력‘은 ‘약력‘이라 수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깨짱 2017-09-26 17:10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이런 실수를...

2017-10-0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7-10-08 10:1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고 계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서 건방 떠는 거에 비하면 제 소설은 한참이나 수준이 낮은 저급한 것들이죠. 저급하기 싫은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몇 년 째 고생 중입니다.
 
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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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가장 완벽한 재구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함이 엄습했다. 왜 하필 그렇게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을 선택한 걸까? 결코 쉽지 않을텐데, 잘해봐야 이런 저런 소리를 들을 게 뻔할텐데, 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안이 아니라 그렇게 재미 없는 희곡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라는 생각에서 였다.


여기서 <햄릿>을 읽어본 사람 손? <맥베스>는? <리어왕>은? <오셀로>는? 솔직히 말해보자. 이 고전들이 정말 재미있었나? 근대 영어를 가장 아름답게 사용한 사람, 이야기의 원형, 갈등의 아버지, 고뇌의 창시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명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그의 작품을 읽어 보자. 나는 요즘 이야기들이 전부 셰익스피어의 아류이며 그저 그가 한때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요즘 이야기들이 훨씬 재미있다. 그런 의미에서 <넛셸>을 <햄릿>의 완벽한 재해석이라 부르는 건 뭔가 억울한 면이 있다. 재해석이라 하면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해 보이지 않나. 아무리 잘해도 원작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작가라면 셰익스피어와 비견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하며 연신 고개를 숙일 수도 있지만 이언 매큐언쯤 되는 작가에게 이게 칭찬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넛셸>은 <햄릿>보다 이천만 배 더 재미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성인이 아니라 뱃속에서 시작한다. 그의 To be or not to be는 유령이 출물하는 음침한 성에서가 아니라 양수가 가득찬 따뜻한 세계, 엄마의 자궁에서 발화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의 소멸을 걱정하게 된 아이. 이름도 없는 이 아이가 바로 햄릿의 환생이다.


뱃속에서 뭘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야기의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이는 모든 걸 듣고 모든 걸 경험한다. 태교를 왜 하나? 아이는 엄마가 와인을 마실 때 자신도 얼큰하게 취해 더 달라고 탯줄을 당긴다. 아이를 위해서 그만 마셔야지? 젠장, 도대체 누구를 위한다는 거야? 자기만 기분 좋게 취해서 침대로 돌아가겠다는 엄마를 끈질기게 졸라댄다. 그러면 한 잔만 더 마셔볼까? 엄마가 먹는 건 아이도 먹는다. 엄마가 듣는 건 아이도 듣는다. 엄마가 감각하는 건 아이도 감각한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일 음모를 속삭이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아이는 작은 아버지의 성기가 밤새도록 뻔질나게 엄마의 자궁을 들락날락하며 자신의 정수리를 자극하는 걸 감각한다. 이 치명적 불륜과 음모를 아이는 어떻게서든 좌절시켜야 한다. 그런데 무슨 수로? 여전히 우유부단한 햄릿, 설령 결심을 한다 하더라도 칼 한자루 손에 쥘 수 없는 이 미물이 어떻게? 햄릿의 미간에 꽂힌 고민의 주름은 뱃속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언 매큐언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일 이년 전에 읽었던 소설 <이노샌트>의 작가였다. 그때는 그냥 뭐랄까, 사람들이 숭상해 마지 않는 사랑의 힘. 그런 걸 눈 깜짝 하지도 않고 박살내는 통념 도살자이자 지독한 회의주의자인 줄만 알았는데 <넛셸>을 읽고 나니 보통 작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하다. 문장력, 구성, 위트, 유머. 내가 좋아할 만한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다.


어쩌면 <넛셸>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내려간 소설일 수도 있다. 대작가의 소설치고는 분량도 짧고 스케일도 작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너져가는 700만 파운드 짜리 고택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뇌의 지박령 햄릿처럼. 그런데도 소설은 지루함을 모른다. 아이가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는 공간의 제약을 초월한다. 엄마와 작은 아버지의 어리석은 음모는 인간의 욕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나는 이언 매큐언이 <넛셸>을 필두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전부 다시 써줬으면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이상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트라우마에 갇혀 재미도 없고 읽히지도 않는 문장을 손에 들고 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독서에 대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걸 의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독서는 의무로 하는 게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1000권을 선정한다 하더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퉤, 뱉어버리고 나한테 맞는 걸 찾아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독서는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이언 매큐언이 고전을 모조리 박살내 <넛셸>과 같은 보석으로 다시 빚어내주기를. 그가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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