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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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다크 나이트>를 히스 레져의 유작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진정한 유작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행히 히스 레져가 죽기 전에 영화를 끝마쳤고 그의 죽음으로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테리 길리엄은 영화를 반도 찍지 못한 상태에서 주연 배우가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손에 쥔다. 계속 가기엔 남은 길이 아득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와 버렸다. 감독은 기지를 발휘해 주연 배우 셋을 더 캐스팅한다. 영원한 캡틴 조니 뎁, 영국산 바람둥이 주드 로, 아메리칸 마초 콜린 파렐. 네 명의 배우는 파르나서스 박사가 여행하는 다섯개의 세상을 사이좋게 나눠 여행한다. 좋은 아이디어, 완벽한 배우, 처참한 실패.


'처참한 실패'에 대해선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저 말은 객관적 흥행 기준을 토대로 한 말이지 내 개인적 감상을 섞은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했다. 테리 길리엄은 이야기의 신이었고 나는 그의 신도였으니까.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보면 일군의 신도들이 나온다. 그들은 이상 야릇한 동굴(기억이 잘 안 난다)에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낭독한다. 단 일초라도 이야기가 끊기는 순간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때 악마 하나가 그들의 본거지에 쳐들어온다. 악마는 최고 성직자와 논쟁을 벌이며 이야기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일 거라고 도발한다. 당연히 성직자는 악마의 말을 무시한다. 그 와중에도 신도들은 계속 이야기를 낭독한다. 그 순간 악마가 모든 신도들의 입을 봉해 버린다. 공간을 지배한 침묵. 악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귀를 기울인다. 어때? 이게 세상이 멸망하는 소리인가? 천만에. 세상은 멀쩡하다. 악마가 맞았다. 너희들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거다. 악마는 패배를 자인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우두머리 성직자의 입을 열어준다. 그가 말한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군요. 이 세상엔 우리 말고도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크아!!!


내가 테리 길리엄의 신도였다면 테리 길리엄 본인은 이야기의 신도였다. 그와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신이고 우리 모두는 이야기를 믿는다. 성직자의 한 마디는 공간을 급속도로 수축시켜 이야기를 믿는 우리를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킨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고, 외롭지 않고,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국경시장>의 김성중이 우리들 사이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역시 이야기를 신으로 섬기는 것 같다. 게다가 그녀는 꽤 높은 등급의 성직자로 보인다. 여기에 실린 8개의 소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나눠 가져 하나씩 입에 넣고 삼켜야 한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말씀을 전하라."


세상이 팍팍해진 시기와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건 원인과 결과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혼합물일 수도 있다. 세상이 팍팍해져서 서사가 사라진 건지, 서사가 사라졌기에 세상이 팍팍해진 건지. 과거엔 아파트 한 동 조차 끊임없이 서사를 낳는 이야기의 보고였다. 103호의 누구는 점심에 짜장면을 먹다 체했고, 204호의 누구는 와이프가 던진 맥주병을 맞아 이마가 깨지고, 403호의 누구는 올해 딸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더라. 그들은 103호나 204호나 403호에 모여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시시콜콜 그런 얘기를 떠들었다. 이야기가 그들을 하나로 엮어줬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비인간적 주거 형태의 전형으로 지탄 받는 아파트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서사가 사라진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목구멍에 고여 있던 이야기를 스스로 뱉어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야기들은 종종 단순한 재기로 치부되곤 한다. 깊이가 없다는 취급. 입담이 좋다.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그걸로 끝. 문학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문학이란 그렇게 가벼운게 아니... Bull Shit이다.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여야 한다. 이야기가 없는 문학이야말로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문학이 죽어간 시기와 문학에서 이야기가 사라진 시기에 대해 말이다.


<국경시장>은 작가의 말까지 다 더해도 245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소설은 바다처럼 거대하다. 개인적으론 현실의 냄새가 덜 나는 것들이 훨씬 좋았다. 환상과 상상의 관능적 교접. 책 제목이기도 한 '국경시장'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쿠문'은 기묘한 이야기의 교과서고 '관념 잼'과 '에바와 아그네스'는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그 희뿌연 안개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필멸'은 로알드 달의 성인용 소설 같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 '한 방울의 죄'는 이 작가가 조만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소설을 한 권으로 엮어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낳게 한다.


김성중은 책의 말미에서 자신이 언제나 거대한 서사에 매료되어 왔음을 고백한다. 멜빌과 마르케스 같은. 그리고는 자신의 소설이 그에 닿지 못함을 자조한다. 욕심도 참 많다. 내 보기에 그녀는 이미 내해에 나가 돛을 올리고 순항 중이다. 수평선 너머의 대해가 코 앞인 것 같은데. 그 배에 나도 태워가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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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9-1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경시장을 읽은터라 끌리긴 하는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를 검색해보니 쉬운 영화는 아니네요. 그래도 추석 때 보게될 것 같아요.ㅎ 궁금한건 또 못참아서^^;;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한깨짱 2017-09-19 19:38   좋아요 0 | URL
그나마 대중적인 작품은 <12 몽키즈>인데요, 이 영화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영화는 아니에요. 매니아들의 영화긴 하지만 ㅋㅋ

에디터D 2017-09-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 몽키즈>는 오래전에 봤어요.ㅎㅎㅎ 오홋, 왠지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ㅎ

한깨짱 2017-09-24 09:40   좋아요 0 | URL
네 테리 길리엄은 고정 팬이 많은 훌륭한 감독이에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감독의 영화를 즐겨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