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의 아리아
곽재식 지음 / 아작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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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약력을 읽어보자. 그는 KAIST에서 원자핵 및 양자 공학을 배웠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론화학을 전공해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왕성한 필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색다른 소재를 다루는 인간미 있는 글을 써왔다. 이상은 알라딘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쌓은 전문지식이 방대한데다 머리도 좋아 소설까지 쓰는 사람들이 있다. 번뜩이는 소재를 찾아내고 그 위에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튀어나온 부분은 깍아내고 토대에 논리의 땜질을 더해 기울어진 곳을 바로잡는다. 아마도 이들에게 소설 쓰기는 논문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과 인간을 너무 도식적으로 다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소설은 일종의 지적유희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발가 벗기는, 세상을 꼭대기서부터 바닥까지 한 방에 꿰뚫어버리는, 뜨거운 뭔가가 부재한다는 말이다.


이제 <토끼의 아리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 것이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 책은 세상을 겉핥고 있다.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다. 인간의 모순적인, 다양한 속성이 공존하는 완전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이마에 '악'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악'만을 연기한다. 이마에 '선'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선'만을 연기한다. 이 짜여진 극본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플롯, 참신한 소재 혹은 넋을 놓고 읽게 만드는 입담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문장에도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쁜 연구 생활 틈틈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지은 소설을 웹진에 발표하고, 출간까지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존경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절로 올라가는 건 아니다.


차라리 하드 SF였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바닥을 잘 몰라 순진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 SF도 대중화 되지 않은 나라에서 하드 SF라니. 책 뒤에는 작가가 각 소설을 쓰게 된 경위가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소설을 의뢰한 단체의 편집 의도에 맞춰 소설을 써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잡지는 이러이러한 독자들이 주로 찾아보니 이러이러한 소설을 써주세요. 대중적인 이야기를 위해 작가 본인의 욕망을 상당히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가에게 나의 평은 대단히 억울하게 들릴 것이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나 또한 결과만을 보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의 아리아>는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인공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이되 책장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된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체념한 듯 무기력해 보이지만 사실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의 초연함을 통해 분노 너머에서 기다리는 일말의 희망을 손에 쥐길 원했을 것이다. 대실패였다. 나는 화가 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싶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시전했고, 그렇게 쟁취한 힘과 경험을 토대로 바닥부터 새로운 삶을 쌓아 나간다.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맥주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연작 소설을 썼고, 그 중 한 편이 이 책에 실리기도 했지만, 고작 한 편으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좋았던 소설은 <박승휴 망해라>였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배짱 있는 제목을 내 소설에 붙이고 싶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소재가 아주 좋았다. 태양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 86년. 사람들은 서기 제도를 폐기하고 잔기(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하는 연도 표기 방식. 잔기 86년은 멸망까지 86년이 남았다는 뜻)를 사용하게 된 인류가 한 걸음 씩 다가오는 멸망을 기다리며 사는 내용이다.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를 너무 대충 써먹었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SF, 범죄 느와르 등 장르 소설에 지속적으로 도전 중이다. 사람들이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게 대부분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 앞서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실패를 토대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보석을 나에게 나눠주는 것도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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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in 2017-09-26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한 기회에 들어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양력‘은 ‘약력‘이라 수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깨짱 2017-09-26 17:10   좋아요 0 | URL
헉... 감사합니다. 이런 실수를...

2017-10-0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7-10-08 10:1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고 계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여기서 건방 떠는 거에 비하면 제 소설은 한참이나 수준이 낮은 저급한 것들이죠. 저급하기 싫은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몇 년 째 고생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