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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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정혜윤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침대와 책>이었다. 누군가가 순전히 책으로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읽은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책을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지, 어쩜 이렇게 인물과 사건에 예민하게 반응하 

며 느낄 수 있는지 그녀를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고, 가장 최근 책인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집은 건 순전히 그녀가 썼기 때문이다. 그녀가 쓰면 한 가지 책이 여러 

가지 책과, 여러가지 이야기들과 엮여 정신없게 풍부해지니까. 

  

       제목이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서점에서 본 제목을 떠올리며 '두번 진행된다는 게 무슨 의미지?'라고 생각 

했었다. 그녀는 '만약 우리에게 세계가 한번만 진행된다면(보이는 그대로만 보는데서 멈춘다면) 우리는 매 순간 과거의 자신 

이다. 확실히 우리는 한 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한 순간에도 과거와 미래를 산다.' 라고 했다. 솔직히 아직 

도 그녀의 '두번째'가 의미하는지가 '확'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 

이 우리를 살게하는 거라고 하는 것 같다. 고전과 엮어서 얘기하면,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과거와 미래, 두 번 살게 되 

는 게 아닐까 싶다. 

       

        민음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민음사의 세계고전시리즈에서 고전의 리스트를 뽑아낸 것 같다. 그녀가 고른 책 중에 내 

가 읽고 싶게 된 책은 <폭풍의 언덕>,<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984>,<주홍글자>,<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다. 책에  

실린 15편 중 나는 4권뿐이 못 읽어보았다. 그래서 저자가 써놓은 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은 게 아쉬웠다. 정혜 

윤씨의 책이 가진 장점은 그녀가 정말 감성이 예민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책을 보고, 글귀를 보아도 그녀가  

읽어내는 것과 내가 읽어내는 것은 다르다. 반면 단점은, 가끔 문장이 너무 화려해 본인에게 정말로 그 감정을 100% 느꼈 

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였든, 고전을 읽고 싶은데 무엇부터 읽을지 모르는 분이 읽어도 좋을 것  

같고, 그녀와 내가 느낀 게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도 좋을테고, 여기 나온 고전을 다 읽고 책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녀가 추천한 고전을 읽고, 다시 이 책을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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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친구들이랑 원작 하녀를 보았다. 나는 이번에 나온 전도연 주연의 2010년 하녀도 본 상태여서 원작은 얼마나  

   대단하길래 마틴 스콜세지가 꼭 복원해야 할 작품이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한 20명 정도 

   는 있어서 놀랬다.  

     

      내가 2010년 하녀에서 느낀 주된 감정이 '어떻게 저럴수 있어? 돈만 있으면 다야?'와 같은 억울함이었다면, 원작에서는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 모두 한심해보였고 특히 여자주인공의 사랑이 진정 사랑인지에 의아함이 들었다. 그녀가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는 이유가 그를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풍족한거 같지 않지만) 재산 혹은 배경이 탐났던 것인지도  

    난 잘 모르겠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내 것이라고 말해줘요" "당신은 영원히 내 것이야" 라고 할 때 나는  

    그 집착에 무서웠었다. 아무리 봐도 남자는 그녀를 사랑한 것 같지 않다. 그저 성욕때문에 관계를 맺고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살게 된 게 분명한것 같은데, 그녀는 그래도 남자가 좋단 말인가?  

    "그 남자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바보야!"라고 소리치고 싶었고, 넌 지금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그녀를 그 집에서 데려나오고 싶었다.  

  

      남자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볼때 그는 거의 여자를 혐오하는데, 왜 왜 왜 도대체 왜 그럴거면 처음에 실수를 했 

    냔 말이다. 다른 직장을 찾든가 그도 안되면 다른 곳으로 가든가 왜 부인을 냅두고 그녀와 같이 자러 방에 가는지 난 도무 

    지 이해가 안되었다. 그 모든 광경을 본 아이들은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마지막에 남자가 부인에게 와서 죽을 때, 난 부인이 통곡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의 눈 

     을 감겨주었을 뿐이다. 마치 당신이 차라리 죽어줘서 고맙다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거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힘은 사람  개개인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 욕망이 좋은 것 

      이면 좋겠지만, 왜 내가 보는 영화에서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상처줄 수밖에 없는 욕망들이 넘쳐나는지 모르겠다.   

      욕망이란 게 없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러면 삶이 너무 칙칙해질 것 같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욕망만 존재하는  

      사회는 불가능하고, 사람의 욕망이 모든 재앙과 불행을 야기하는 것 같아 난 그런 영화를 보면 착잡해지곤 한다. 

 

         씨네 21인가 거기서 읽은 것 같은데, 2010년의 하녀는 원작보다 계급 대립에 치중했다고 한다. 원작 하녀와 달리 2010 

       년 버젼에서는 가족이 상류층이며 하녀와 가족의 관계는 더더욱 관료적이다. 아마 원작 하녀 그대로 가져왔다면, 사람 

      들에게 충분히 이해도 못 받고  그저 그런 치정극에 불과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똑같은 영화 소재를 가지고도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시대의 힘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  그리고 원작 하녀에서  

      마지막에 남자주인공이 관객들에게 훈계를 하는데 그건 좀 에러였던 것 같다. 그거 때문에 다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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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를 나가면 카페가 넘쳐난다. 할리스, 스타벅스, 탐앤탐스, 엔젤리너스 등등... 

         최근들어 남자친구와 카페에서 같이 있은 적이 많다. 그는 시험공부를 하거나 할 일을 했고, 나는 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는 먼저 카페에 와서 할일을 하고 있었고, 돈이 없는 내가 음료를 굳이 사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자주 가는 카페에 나란히 앉아 몇 시간이나 있다보니, 결국 카페는 커피나 음료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찾아오는 게 맞는 거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 우리나라의 커피점은 '사랑방'역할을 한다고  

         했듯이)  그 수많은 사람들이 갈데가 없어 들어가는 곳이 카페이고 아이스크림 가게이다. 각각의 커피 체인점들이 

          자기네들은 커피가 아니라 '문화, 브랜드'를 판다고 하는 게 나름 일리가 있어 보였다.  

        

         누군가와 함께, 혹은 혼자 있을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갈 곳이 어디 있을까? 특히나, 혼자서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싶을때 갈 곳은 카페가 가장 적절해보인다. 그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커피산업 시장 

        과 맞먹는다고 볼 수 있을까. 카페 말고 다른 대안공간은 없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엔 wil방, 멀티방 등 게임,  

        노래방을 즐길 수 있는 방들이 생겼지만 '카페'만큼 강력한 것 같지는 않다. 

           

         요새 느끼는 고민(?)은  체인 커피점이 아니라 조그만 개인 카페에도 가고 싶은데, 그런 카페에 가서 오랫동안 앉아있 

         으면 눈치보일 것 같은 소심한 마음때문에 항상 던킨이나 그런 시끌시끌한데로 향하게 된다는 거다.   

         집이 아니라, 집 밖에도 '나만의 공간'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럼 신나게 왔다갔다 할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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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6-2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을 사야하는 세상이라는게 늘 마음이 아픕니다.

유지니아 2010-06-26 13:14   좋아요 0 | URL
'그늘'이라는 게 상점을 이용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어떨땐 정말 싫을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돈 내면서도 정말 좋은 장소가 있고 그렇네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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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2편에 계속 이어나가기로 하였다.  

p.70  그래, 상처받지 않기 위해, 냉소적인 것, 소위 쿨한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 그러나 그렇게 사는 인생은 상처는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더욱 황당한 것은 상처는 후회도 해 보고 반항도 해 보고 나면 그 후에 무언가를 극복도 해볼수 있지만 후회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의 공허는 후회조차 할 수 없어서 쿨(cool)하다 못해 서늘(chill)해져 버린다는 거지.

         1년 전 즈음에 이 글을 봤으면 어땠을까? 위녕처럼 상처받지 않는게 그래도 좋은 게 아니냐고 했을 거다. 지금 나는, 상처가 오면, 상처를 받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그 상처를 견디고 더 나아갈 수 있을지. 그 상처가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줄지.. 나도 비바람때문에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처럼, 깊이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상처를 받더라도 그 상처가 나를 너무나도 '쿨'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 

 

  p.80  엄마 친구가 그러더라. 인생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이 세 가지를 질문하면 된다는 거야. 네가 원하는 길인가? 남들도 그게 너의 길이라고 하나? 마지막으로 운명도 그것이 당신의 길이라고 하는가?

       남들이 나의 길이라고 안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내가 가게 될 길이 너무나도 시대를 앞서간 것이어서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그러나 내가 그런 삶을 살 것 같지는 않은..)     

 

 p.100  고통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 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릔 신부님)

       지금 고통받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고통스러워할 나날이 있을 것이기에, 이 글귀를 적어둔다.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자가 되어 이 글을 볼 수 있길.    

 

p.144   우선적으로 가장 강한 자들을 원할 것인지 아니면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봉사할 것인지는 우리가 내려야 할 진정한 사회적 선택이다. 이 선택이야말로 한 가정이, 한 종족이, 한 나라가, 또는 한 문화가 위대한지 또는 저급한지를 결정짓는 것이다.(피에르 신부)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생각하게 해본 구절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파이를 키워야 한다며 외치고 있으니(지배세력이),.. 나중에 더 어른이 되면 꼭 새겨놓고 살아야겠다. 그때 나는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 

  

 p. 164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열정>>

        모든 것의 끝에, 내 인생으로 대답을 하게 된다는 말.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전 생애로 답해야 한다는 게 중간고사, 기말고사 전범위 시험을 본다는 것처럼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 마지막에 서서, 나는 자신있게  "난 이렇게 살았어요! 행복하게, 내가 바라는 대로 살았어요!"라고 외칠 수 있을까? 한순간 한순간을 열심히 살라는 공지영의 목소리도 들린다. 나중에, 내 전 생애가 송두리째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고생해야겠다.

 

p.165    자네 영혼의 밑바탕에는 갈등, 자네가 아닌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보다 더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나도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든 자유자재로 감쪽같이 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졌을 때는 정말 부러웠다. 나도 그 주인공처럼 내가 원할때마다 내가 원하는 이미지, 성격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아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시련은 없다는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까. 현재의 자기를 인정하려면, 일단 현재의 자신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내가 두려운 건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p. 179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너의 성장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고, 너의 일의 윤활유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일을 방해하고 너의 성장을 해치고 너의 일을 막는다면 그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의 노예로 들어가고 싶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네, 이렇게 사랑할게요 공지영씨. 내 사랑과 상대방의 사랑이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삶의 기쁨이 되도록요.   

 

p.228    여성의 가장 큰 매력인 여성스러움을 왜 버리려 할까 (타샤 할머니) 

         사실 공지영씨가 한때 그랬다는 것처럼, 나도 여성적이지 않은 옷차림을 좋아하며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나 여자에요'하는 옷은 싫어한다. 다만 ,, 정도의 차이지만 이제 그 여성스러움에 대해 좀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왜냐면, 젊었을 때의 여성스러움은 나이들었을 때의 여성스러움과 차이가 있을 것이며, 다시 한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도 마음껏 발산하고(!)  

 

     이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다 썼다. 저자가 각 에피소드의 끝마다 수영을 하러 가야 한다며 (끝내 가지 않았지만) 늘어놓던 핑계(!)와  음,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가려던 수영장이 나중엔 슈퍼로 바뀌고 말았는데, 평소 생각에 대단해보이던 사람도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킥킥 웃을 수 있던 게 좋았다. 에필로그로 그녀의 딸, 위녕이 쓴 편지도 너무 좋았다. 이런 모녀가 있다는 것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흐뭇하다. 또, 장차 그녀가 글을 쓰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도 하게된다. 참- 읽으면서 따뜻한 책이었다.  

   자,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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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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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여쪽이 되는 책을 다 읽고나니 왜이렇게 노트에 받아적을 글귀가 많은지 모르겠다. 딸에게 전해주던 편지를 묶어서 낸 에세이라 그런지 '진심어린' 글이 묵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이 이 책을 읽은 모두의 감성을 건드리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게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책이 잠시라도 모두의 마음을 두드렸다면 그걸로 족할 것 같다. 이런 에세이를 읽는 재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삶을 한 번 되돌아보고 생각해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받아적은 글귀들로 이번 리뷰를 쓰려고 한다.       

 

   p.13   어떤 사람을 만나거든 잘 살펴봐. 그가 헤어질 때 정말 좋게 헤어질 사람인지를 말이야. 헤어짐을 예의 바르고 아쉽게 만들고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나며 그 사람을 알았던 것이 내 인생에 분명 하나의 행운이었다고 생각될 그런 사람.

    내가 이 글이 좋아서 적어놓으니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말했다. 난 동의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이별이 '좋게'이뤄질 수 있냐고 말이다. 두 의견 모두 맞는 것 같다. 다만 '좋다'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다른게 아닌가 싶다. 연인과의 이별 그 자체는 '좋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과의 인연을 나중에 떠올릴 때 '참 좋은 사람과 사랑을 했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좋게' 헤어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 말이 의미 있다고 본다.  

 

p.35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사는 것, 그건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 그것이 이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 용기가 있는지도 의문, 남한테 내가 바라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의문. 둘 다 하려면 얼마나 더 자라야 할까.  

     

p.37  넌 스무 해를 살았니? 어쩌면 똑같은 일 년을 스무 번 산 것은 아니니? 네 스무살이 일 년의 스무 번의 반복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p.38  여러분 대부분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살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몸이 살아지도록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삶이 아닙니다. (안소니 신부의 말)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뜨끔한 구절. 남들은 성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항상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은 내가 항상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난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살고 있다고 느끼는 때는 언제이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도전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자아실현을 위해 산다고 한다. 나는 ..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 것 같은 순간은, 자연의 냄새(여름냄새, 봄 냄새, 겨울냄새, 비 냄새, 풀 내음 등)를 맡을 때인것 같다. 그리고 좋은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다면 더 좋고. ...... 내가 느끼는 순간들은 이렇게 작고 보잘것 없는 것 같은데, 이게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진정한 순간들일까. 성취감이나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내가 유유자적하는 사람처럼 같이 보일뿐이다. 그들이 맞고 내가 틀린거?  그건 아니다. 그럼 뭘까. 더 생각해봐야겠다. 살아지는 내가 아니라 살고 있는 내가 되기 위해.

 

p. 38  위녕, 아직 젊은 너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어느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더구나. 그 이유는 반복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런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복이 일상이 된다면 삶은 권태로울 것 같다. 물론 그 권태로움 속에서도 조그마한 즐거움은 있겠지만. 삶이 쏜살같이 가지 않고, 천천히 내가 가는 속도로 가게하려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 말은 쉽다.    

 

 p.55 '아아 이런 때야'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읽으면서 속으로 '아-아--- 이런 때야---'라고 하게 한 구절.  '아- 아 이런 때야---'가 오면 꼭 소리내어 "아아---- 이런 때야!!"라고 말해야지!!! 그래서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게   

  

    p. 66   우정은 정적이지 않다. 우정은 마치 강물과 같아서 어떤 방향으로건 흐를 때만 의미가 있다. 언제나 발전하고 변화하고 넒어지고 새로운 경험을 흡수해야 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잉글랜드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친구는 결코 배타적인 소유물이 될 수가 없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친구를 나누거나 잃는 일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 해 한 해 살면서 점점 느끼는 것이다. 특정 시기의 특정 경험을 공유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친구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친구'라는 표현에 깜짝 놀랐다. 내 생각과 맞닿아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자칫 이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는 정이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 시절 친했던 친구와 대학생이 되고 나서까지 연락을 하고 잘 지냈지만 그때만큼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마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놓여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왜 너는 연락을 먼저 안하냐며 툴툴댔을 나는, 이제 한결 편안한(?) 너그러운(?)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게 되었다. 뭐랄까. .  그 친구가 진정 나와 인연이라면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그리고 문득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은 듯 하다. 물론 친구도 연락을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점이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뭔가 '특별한'게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친구를 나누거나 잃는 일. 잃은 적은 없지만, 나누는 경험은 해보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게 은근 학창 시절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친구를 나누는 일은 어쩌면 친구를 잃는 것 보다 더 마음이 쓰라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다른 친구와 함께 놀아야 하니 말이다. 소위 '쿨함'을 가장하는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도 친구를 나누는 일은 태연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친구로만 남아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다른 아이와 친하게 되면, 그 때의 쓸쓸함이란! (물론 이제는 그다지 연연하지도 않지만. 이 또한 쿨해보이려는 것일 수도..) 학창시절 맘에 드는 아이와 친해지기 위해 온갖 친절을 베풀고, 얘기를 쉼없이 하던걸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애를 써야했던 걸까 싶기도 하고 .. 그렇다. .  

     #리뷰 2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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