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破虜湖」를 통해서 본 오정희론

오정희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玩具占 女人」으로 등단한 이래 줄곧 서정적인 문체, 그리고 구성적 완결성을 바탕으로 아주 독특하게 여성의식을 소설화한 작가이다.

오정희에게 있어서 여성성(feminite)이란 그 “자신의 가장 정직한 생(生)의 조건이자 출발점”이다. *오정희․김혜순․우찬제, 『오정희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5, 80쪽 겉으로 보면 편안하고 안락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일상생활에서 의식(意識)의 잠을 깨워주는 이러한 소설은 삶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정희의 소설은 그 개별 작품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에 있어서 크게 몇 개로 나누어진다. 예컨대 여성 주인공의 독백과 회상 등을 통해 일상에서의 여성적 삶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는 작품들과 남편과의 시각차를 그려 가부장제의 모순 및 그 속에서의 여성적 위치를 문제 삼는 작품들, 그리고 유년기의 경험이 두드러진 작품들과 어떤 의미에서 제 3의 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추(老醜)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 등이다. *김경수, 《외국문학》봄, 1990, 147쪽.

오정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지향할 세계 혹은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상황에서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론적 세계의 현상으로부터 일정하게 공포나 불안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공포나 자기 소외의식은 오정희의 소설에서 두루 나타나는 심층의식이다.

「破虜湖」는 오정희가 남편을 따라 미국 뉴욕 주 올바니 시로 이주하여 2년여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하다가 1989년에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즈음 오정희는 ‘그동안 쓰는 기쁨과 고통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달렸다.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방법, 인생을 경영해 나가는 방법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80년대라는 우리 시대와 글쓰기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시대를 끌어안고 그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결을 가닥 잡아 나가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려운 시절을 방관자로 살고 있었다는 느낌, 또한 그러한 것에 부끄럽다거나 괴로워했다는 자기 토로 같은 것조차 간교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작품을 쓰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오정희․김혜순․우찬제, 『오정희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5, 50쪽
오정희 뿐만 아니라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인들 고통(苦痛)과 인고(忍苦)의 결정체가 아닌 것이 있으랴마는 「破虜湖」는 이러한 작가의 심경의 토로가 붙은 작품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사실 나는 오정희의 작품 중에 그에게 이상 문학상을 안겨준 「저녁의 게임」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破虜湖」가 위에서 언급한 ‘오정희적’인 성향이 많이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오정희론을 한 번 써보고자 마음 먹으면서 이 작품을 텍스트로 선택한 이유가 이것이다.

「破虜湖」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적인 반전과 혼란스러운 변화로 점철된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광주민주항쟁을 촉발시킨 신군부의 쿠데타로 시작되어 그 쿠데타의 주역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숨 막히는 언론탄압으로 시작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전례 없는 언론자유의 향유와 민주화로 막을 내렸다.
또한 1980년대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예컨대 반핵운동, 여성해방운동, 노동운동, 광부들의 파업, 농부들의 시위, 교사들의 참교육운동, 그리고 학생 데모 등은 바로 1980년대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현상이 되었다.
또 얼핏 모순되는 이야기 같지만, 독재정권 역시 1980년대의 다양성을 창출하는 데 일조를 했다. 즉 스스로의 정통성과 합법성의 결핍을 잘 알고 있었던 군사정권은 국민들을 달래고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일련의 우화적인 개방조치를 취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들은 한국 사회의 개방과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촉매의 역할을 했다. 예컨대 통행금지의 폐지, 해외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미스 유니버스대회, 아시안 게임, 그리고 88올림픽 같은 것들은 1980년대에 문화적 다양성과 정치적 민주화를 가져다주는데 상당한 공헌을 했던 획기적인 사건들이었다.

「破虜湖」는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작품은 미국에서 귀국한 30대 후반으로 보여지는 주인공 혜순이 남편의 친구와 함께 7년 전에 남편과 함께 가본 적이 있는 파로호에 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오정희의 소설의 구조는 첫째, 어떤 완벽성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암시적이고 또한 복합적인 구도와 힘들여 조탁한 듯한 문체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둘째, 오정희의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사연이 선(善)과 악(惡), 행복이나 불행처럼 단순하게 구분되고 파악되지 않은 채, 암울하고 착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허구, 일상생활의 범속함과 단조로움, 육체의 한계와 인간의 근원적 고독, 삶의 덧없음과 인간의 무력함, 삶과 죽음의 의미 등의 문제들은 섬세하면서도 대담하게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도 외출과 귀환의 반복이다. 오정희 소설의 인물들은 삶의 표면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현실에 살되 그들은 또 다른 세계의 무엇에 늘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삶은 불안정하여 어디론가 떠나버릴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들은 윤리적 규범이나 관습, 보편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거기에 매어 달림으로써 감정적 출혈과 욕구를 분출한다.

그 고요한 새벽, 잠든 용의 숨결처럼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는 호수와 말없는 소녀가 가 닿은 아득함이 그에게 불현듯 어릴 적 들었던 옛노래를 상기시킨 것일까. 보이지 않는 곳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환상과 기대로 자신의 앞에 놓인 막막함과 좌절감을 이겨보려 한 것일까. 그에겐 필사적으로 찾아낸 방법이었으리라.

주인공 혜순의 남편은 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이다. 대체로 언동이 눈에 띄지 않고 착실한 교사인 그에게 학교 당국이 편의상 우회적으로 붙인 죄명은 무능교사였다. 혜순은 남편이 별다른 이유 없이 해직되어 2년 동안 실직의 고통을 받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 데 동행한다.
혜순이 미국으로 남편을 따라나선 것은 ‘언제나 사람들은 이곳이 아닌 저곳,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유 없이 해고된 남편의 실직에 대한 불만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의 의미를 갖는다.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은 확실히 약속된 길, 미래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로 생각한 주인공은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이 외출한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미국으로 나가지만 견디지 못하고 귀환한다.


병언이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 혜순의 속에는 세상을 보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가 있지 않았던가. 자신을 떠나게 한 거지에의 환상, 가난에의 환상, 고독에의 환상, 그리고 그 간교한 절망에의 환상. 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자기를 걸어보는 방법 중 가장 비겁한 자기 기만의 하나. 언제나 사람들은 이곳이 아닌 저곳,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래서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을 미래의 땅이라 부르고 보이지 않는 물 속에 용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혜순에게 있어서 미국행은 어쩌면 잃어버린 존재를 찾아나선, 그리고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탐색하는 순례자의 길일런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거부당한 그녀는 4년여에 걸친 미국 생활에서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남편보다 먼저 귀국한다.
그녀가 미국에서 체험한 것은 유학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면서 자신만이 애국자임을 자처하거나, 햄버거집에서 일하면서도 흔해빠진 ‘박사’는 뭣하러 하느냐고 비웃거나, 한밤중에 텔레비전의 영화를 보며 걸려오는 음란 전화에 한심해진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남편처럼 ‘소심한 불평분자’가 반체제 인사 노릇을 하고 한국에 관한 거짓투성이의 글들이 진실을 위장한 ‘지하 총서’ 역할을 하는 허위적인 삶에서 자신의 진정한 언어는 어디에 갔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생선 가게에서 낮에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힘들어하는 남편도 ‘그 정도로 안정된’ 생활을 두고 귀국하려느냐고 하며 ‘아이들’과 함께 귀국을 거부하는 사실이다. 생선 가게에서 일하는 주제에 집 안에 손님을 불러들여 썩은 글들에서 주워 읽은 것을 근거로 시국토론이나 하고 있는 남편에게 혜순은 이렇게 절규한다.


우린 곧 마흔 살이 돼요. 실패하면 만회할 시간이 없어. 늘 불안하고 신경은 초긴장 상태야. 우린 점점 거지가 되어가요. 단지 돈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마음이 초라하고 남루해져 긍지와 자존심을 잃고 황폐해져가는 걸 느끼게 돼.

그녀가 미국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오정희의 여자 주인공들의 외출이 귀환을 전제로 한 것임을 감안할 때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귀환을 결심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이들과의 이별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런 귀환이다. 미국에서의 삶이 허풍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은 마음의 가난과 긍지의 상실을 실감하게 해서 그곳으로부터의 귀환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귀환이 이곳에서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귀국 후에 파로호를 찾아나선다.


평화의 댐 기초 공사를 위해 물을 뺀 퇴수지(退水地)에서 선사 시대 문화층이 발견되었다는 지방 신문의 기사와 함께 게재된 흑백사진―바닥을 드러낸 거대한 호수의 황량한 모습, 그 호수 뒤켠의 멀고 흐린 산의 능선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이를테면 ‘텅 빈 충만함’이라고나 할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었다. … 중략 … ‘고대사 규명의 귀중한 자료’라든가 ‘한강 문화 뿌리의 재조명’ ‘국내 최대의 구석기 유적’ 등등 학계와 저널리즘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갈증이었다.

그녀의 외출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외출은 그녀의 마음에 가난이 아니라 충만을 가져오고 정신의 갈증을 해갈하는 풍요의 의미를 갖는다. 선사시대의 유적들을 ‘조각나고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복원시키려는 노력’을 부단히 감행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변함없이 되풀이 되었고 새롭게 시작되었던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 속으로 걸어나가면 소음과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이 있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 소리지르고 싶어, 소리지르고 싶어, 힘찬 피돌기를 뚫고 터져나올 의미없는 부르짖음과 탄성이 준비되어 있던 때.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은 확실히 약속되어진 길, 미래의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다만 새로이 맞는 아침을, 문 밖의 세상을 더 이상 미래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없을 뿐이다.

그녀가 문 밖의 세상을 더 이상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의 광주민주항쟁의 체험과 그녀의 미국 생활에서 연유한다. 이 두 가지 체험은 그녀로 하여금 ‘말’의 무력함의 체험이다. 그녀가 문 밖의 세계를 미래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세쪽이처럼 시조새처럼 화석이 되어버린, 그리고 태어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말들’의 자각 때문이다. 말을 되찾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문학에서 구원들 찾고자 하는 것이다.
문학은 세상이나 삶이 몇 개의 단아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에 하기 힘들지만 거짓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판 삶에 대해서, 병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병에 대해서 정직한 의식을 갖게 한다. 그 의식은 그녀의 외출을 생산적이 되게 한다.
그녀가 귀국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자동촬영소에서 사진을 찍고 전철과 버스를 바꿔 타며 시내를 돌아다니고 신문과 복권을 사고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빛바랜 사진의 배경처럼 퇴색해 버린 자신의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삶의 회복을 통해서만 잃어버린 말을 되찾을 수 있고 폐허처럼 텅 비어 있지만 마음의 충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오직 그녀는 낯선 땅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살아야 한다는 짐승 같은 본능과 불안에 시달려왔고, 그 이전 십 년 동안은 중학교 국어 교사로서 단정하고 아름다운, 규범적인 시와 산문을 문학이라 가르치고 집과 일터를 바쁘게 오가며 여념 없이 살았다. 그 어간에 끼인 병언의 실직. 어디 소설이라는 허구가 끼어들 틈이 있었던가.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내보일 특별한 무엇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하며 ‘황폐감과 황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굳어져 가는 말들을 소설로 쓰기 위해 혼자서 귀국한다. 그리고 이천 매가 넘는 남의 소설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원고지에 옮겨 쓰는가 하면 소설을 쓰는 일이 자신의 뇌의 회백질 속에서 굳어가는 말, 말로써 표상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복수의 방법일까 회의하기도 한다.


마치 벙어리의 소리치려는 충동처럼, 혀가 굳어져가는 안타까움과 같은 뒤늦은 열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소설을 쓰고 싶어서 혼자서라도 돌아가겠노라고 당당히 말하게 한 걸까. 잃어져가는 말에 대한 복수일까. 사랑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인생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허접쓰레기 같은 넋두리들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나아가 글로 쓰겠노라고 생각하지. 그래, 뭘 쓰려고 하지?

오정희의 소설은 ‘텅 빈 충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여성적 넋의 노래이다. 그 충만함은 마치 돌에 깃들인 부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돌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여 마애불을 만드는 것과 같고, 선사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던 사람이 수만 년 세월 뒤에 흙을 털어서 돌에 새겨진 여인의 얼굴을 나타나게 하는 것과 같다.
‘바닥을 드러낸 거대한 호수의 황량한 모습’을 통해 ‘텅 빈 충만’의 이미지를 성찰하면서 새로운 삶의 인식론을 보여준다.


왼종일 집안에서 일을 하다가 끊임없이 외출하고 돌아오는 오정희의 주인공은 삶의 매 순간을 관찰하고 의식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주인공들이 사는 삶은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사는 삶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꿈을 꾸면서 이곳의 삶을 살아야 하는 모순된 운명을 깊이 성찰하고 그 모순을 철저하게 살고자 하는 그의 주인공들은 오늘의 여성의 조건,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조건을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들은 때로는 닭이나 고양이를 죽이는 것처럼 잔인한 행동으로 감추어진 욕망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표현하고, 때로는 남편이 아닌 남자를 마음의 남자로서 만나기도 하고,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현실을 그리워하며 끊임없는 외출을 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생명체처럼 부단히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은 도덕이나 윤리의 금지와 허용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새로운 삶의 조건에 대해 꿈을 꾼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정직한 삶의 방식이다. 작가는 그들의 느낌․생각․행동․언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 단단한 글의 구성이나 예리한 감각은 오정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높은 눈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공허한 삶을 살아야 하는 모순 속에서 일상생활을 더욱 철저하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주인공들의 삶은 감동 없이는 읽을 수 없다. 

오정희 소설의 묘사는 정밀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묘사의 대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방식이 중요하며, 그녀가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양식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의 존재로 인해서 그녀는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내려다보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그토록 충실하고자 하는 현실적 의무를 처연한 자세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정희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역시 오정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내요, 어머니요, 며느리의 입장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그녀의 주인공들의 삶에 공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정희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 작가도 결코 소설을 쉽게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묘사 하나, 단어 하나라도 조금만 소홀히 읽게 되면 우리가 읽고 있는 궤도에서 이탈하고 말게 된다. 이처럼 이탈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 이 작가의 완벽을 기하고자 하는 철저한 조형성(造形性)이라 하겠다. *오정희, 『한국단편문학 23』, 금성출판사, 1994, 594쪽 그리고 이 조형성은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긴장을 요구한다.
오정희의 소설미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소설적 긴장은,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강조하거나 과장함으로써 독자들의 순간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상투적인 수법을 벗어나서, 소설이란 하나의 탐구하는 명제를 실현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건을 과장하지 않는 오정희의 소설은 그러나 바로 그 일상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비수의 번득임을 우리에게 감지하게 하고 있다. 오정희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전율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상성 속에는 삶의 매 순간을 생성과 소멸로 엄격한 분위기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끈질긴 집념이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긴장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오정희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화자는 대부분이 여자이고 그 여자가 관찰하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 주제는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삶의 양면성이다

오정희는 자신의 문학관과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그 역할과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옛날부터 이제까지 줄곧 활발한 논의와 주장이 있어왔다. 나 역시 문학은 아름다움이라거나 구원, 위안이라거나 현실의 개선책이어야 한다거나 혹은 사람살이와 세상의 정체구조를 파악하기 혹은 반성이라는 각개 논의와 주장의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문학은 확고한 정의나 도그마에 매임이 없이 안에서의 우러남이 차고 넘쳐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 승한 터라 백가쟁론의 시대, 이 사람의 생각 저 사람의 논리를 빌어 어설픈 문학론을 펼치기도 민망한 탓이다. 또 글을 쓰기 위해 앉은 의자가 형틀처럼 두렵고 어려운 사정이야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어느 분인들 겪지 않는 일이랴. 이 세상 살아가는 누군들 간난함과 곤고함이 없으랴. 그러한 것들을 나만의 것이라 드러내는 것이 구차스럽고 엄살과 응석이 지나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책상 위에 원고지를 펼쳐 놓고 더듬더듬 한 칸씩 메워가며 문득문득 아득한 마음으로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는 나는 무한한 가능성과 내일을 담보로 해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 젊지도 않고, 경륜과 지혜를 논할 만큼 늙지도 않았다. 미물처럼 헤매이고 무수히 실패하는 노정에 있는 자이고 아마 평생 그러하리라는 예감이 더욱더 눌변과 머뭇거림으로 몰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정희․김혜순․우찬제, 『오정희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5, 50쪽

오정희의 소설의 대부분은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과 그 생활 속에서 섬세히 포착되는 삶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주제의 소설들은 작가 특유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사회적 단면을 포착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 오정희의 소설은 삶의 인과성을 통해 인간의 가능한 있을 법한 행위의 모델을 발견해내고자 한다. 그것은 미학의 총체적 통일성을 지향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미학적 차원의 창조적 삶에 대한 감동이다. 그것은 소설의 규범에 대한 관심보다 삶의 추적에 더 관심을 둔다.
정체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감의 모색을 지속하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간절한 그리움이 오정희 작품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실존의 문제, 그리고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의 올바른 위치를 잡으려는 일관된 노력을 오정희는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정희가 작품을 통하여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는 심층의 지향은 결국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이런 일관된 주장은 오정희의 앞으로의 작품에서도 여일하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오정희가 안고 있는 몇 가지 약점, 즉 거의 모든 문학행위를 단편으로 일관하고 있는 점이라든가, 문체에 기대어 전체를 끌고 나가는 것, 높은 상징과 몇 가지 패턴의 되풀이, 일인칭 시점의 빈번한 사용 등은 앞으로 호흡이 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정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 치밀한 구성으로 소설적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으면서 단어 하나에도 완벽을 기하고자 하는 철저한 조형성으로 우리 문단에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오정희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소설 ‘완구점여인’이 당선되면서 작가가 되었다.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제3회 이상문학상, 1982년 ‘동경’으로 제15회 동인문학상, 1996년 ‘구부러진 길 저쪽’으로 오영수문학상, 1996년 ‘불꽃놀이’로 동서문학상, 2003년 ‘새’로 독일 리베라투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가장 최근의 작품집으로는 2009년 『가을여자』이다.

***오정희는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작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작가론을 한 번 써보고 싶었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일에만 올인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머리가 더 녹슬기 전에 「신들의 주사위」로 황순원론을,「화장」으로 김훈론을 한 번 써볼 생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오정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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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5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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