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대형 Y문고엘 갔다.  귀여운 책, 탐나는 책, 눈길 안 가는 책, 저건 왜 나왔나 싶은 책, 미운 책들이 빼곡히 채워진 대형서점은 언제나 흥분을 준다. 여기 저기 눈길 닿는대로 새로 나온 녀석들 중엔 어떤 고운 녀석이 있을까도 보면서.........엊그제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란  책을 다 읽어서 그런지 왜 이리 국어관련 책들이 눈에 쏘옥 들어오는지.........이것 저것 살펴보니 이렇게 저렇게 우리말을 다듬어 둔 책들이 꽤 많다.

나름 취향에 따라 두 권을 메모했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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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이 지구에서 전쟁, 전투 또는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해가 있을까! 인간은 땅위에 발을 디디며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왔다. 따라서 전쟁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이 적나라하게 폭발하는 역사의 축소판으로 관심이 대상이 된다. 저자는 2차 대전 즉 히틀러로 인해 전쟁에 대한 탐구욕을 갖게 되었다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고른 10개의 전투(전쟁)가 담겨있다. 10개의 전투는 원칙에 대한 무관심, 승리에 대한 집착, 콤플렉스와 자신감부재, 열정과 책임감 상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실패에 대한 감정적 대응, 기술발전에 대한 무지, 사적 감정에 대한 집착, 정보에 대한 긴장감 결여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대한 무관심의 예이다. 읽다보면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변수는 정작 '우연'과 '불확실성'이 함께 한다는 거다.

전략의 아버지 클라우제비츠는 말했다. "전쟁에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지도자의 능력이고, 우연과 불확실성은 어떤 전쟁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탕가전투(1914년 11월 5일)는 좋은 사례이다. 탕가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지역에 있는 도시규모의 지역이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지역을 수비하는 포르베크대령(1차 대전 사상 가장 뛰어난 전술가 중 하나로 평가됨)은 인도에서 보내오는 친독일계의 정보를 통해 영국의 공격을 감지하고, 몇 안되는 독일교관으로 1천명의 원주민을 훈련시킨다. 그가 훈련시킨 부족은 잔인한 전쟁부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의 모습을 갖주게 되었다. 한편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자부심으로 빛나는 에이트킨 소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인도용병으로 주축을 이룬 병사를 함대에 실었다. 불행하게도 이 부대는 제대로된 훈련은 커녕 서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도부대는 기관총을 너무 비싸고 병사를 게으르게 한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다.(기관총은 1898년 아프리카에서 광신적 종교집단과 싸우던 영국인이 개발했으며 일명 맥심이라 불림) 1914년 11월 2일 탕가 앞 바다에 나타난 에이트킨 소장은 정찰도 없이 망그로브 늪지대에 부대를 상륙시키고, 4일에는 사전정찰도 하지 않고 진격을 한다. 결과는 3백명의 영국병사의 시체뿐. 그 와중에도 시내에 진입한 구르카부대(네팔에 사는 용맹한 부족으로 반월도를 주로 씀)는 반격하는 원주민병사들과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른다. 이때 가장 중요한 요소-불확실성이 등장한다. 늪지는 죽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데, 나뭇가지에는 시가모양의 바구니들이 빽빽하게 매달려 있다. 이 바구니에는 무서울정도로 공격적이고 거대한 크기의 아프리카벌을 치려고 걸어둔 것인데, 포격소리와 총탄으로 인해 벌집을 쑤셔 놓은 현상이 된 것이다. 벌통에서 쏟아져 나온 성난 벌들은 영국군을 공격했고, 그들의 화가 다 풀린 후에는 사상자가 독일군 70명, 유럽인 15명, 원주민 병사 54명인데 비해 영국군은 800명이 죽고 800명은 다치거나 행불자가 되었다. 패배한 영국함대는 몸바사로 돌아갔다.

이 책에 기록된 전투를 읽다보면 죽어간 군인이나 민간인이 숫자로 쓰인다. 그들은 전투시엔 일종의 무기가 되어 선다. 얼치기 지도자는 그들의 죽음을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자위하고 그 뒤에 숨는다. 지금도 우리사는 세상 어디에선 총성이 나고 폭탄이 터진다. 그리고 우리땅도 외면하고 싶지만 엄청난 무기들이 맞서고 있다. 현명하고 성실한 그리고 패배에서 교훈을 거두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다.

덧붙인 글-읽다보면 화도 나지만, 다 읽고 나니 실패만큼 소중한 선생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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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이 쓴 '세계 10대 소설과 작가"(1973년 판)을 헌책방에서 간신히 구했답니다. 조그만 문고판이고 세로쓰기에 한자들이 등장하시기에, 눈을 부릅뜨고 한자를 곱씹어가며(그럼에도 못씹어먹은 한자를 5개 발견-서문에서)읽어야만 했답니다. 서머셋 모옴은 서문에서 자신이 어떻게 이런 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는지 단단히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저기서 왜?라고 따진 모양입니다. 사실 다들 나름의 리스트가 있을터이니 모옴씨의 주장을 비난하진 접고,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신 이 분의 글에 이런 책들이 등장합니다.

1. 오리스 게스트(헨리 한델 리처드슨)      2. 늙은 아내 이야기(아놀드 베네트)

3. 클레브의 부인들(라파이예트 부인)      4. 모비딕        5. 오만과 편견       6. 보봐리부인

7. 돈키호테    8. 클라리사 하로우(사무엘 리처드슨)     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마르셀 프루스트를 찾아서(앙드레 모로와)        11. 현대의 소설(H.G.웰즈)          12.미들마치

13. 대사들       14. 데이비드 커퍼필드        15.성          16. 신에로이즈(장 자크 루소)

17. 위험한 관계(라크로)         18. 감정교육            19. 트리스트램 샌디            20.캉디드

21. 폭풍의 언덕            22.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23. 전쟁과 평화             24. 카르멘

25. 질 브라스 얘기(르 사아쥬)         26.몬테크리스토 백작            27.아라비안 나이트

아는 책들도 있고, 읽은 책들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책들도 있네요. 책 속에서 책을 만나는 일 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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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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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대중문화의 숲에서 태워버려야 할 책

그제 점심을 먹으며 몇 페이지 읽어본 책은 자신을 '미디어 키드'라고 지칭하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 '대중문화'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어서 그 흔한 문화비평서의 한 종류쯤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진지한 미디어 리뷰들로 채워져 있다. 한데, 그 미디어에는 '글'도 포함되고 저자가 말하는 '내 유일한 미디어'가 '글쓰기'인 걸 보면 제목의 '대중문화'는 두루뭉술이라 할 만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안녕! 프란체스카>, <프렌즈> 같은 드라마들도 리뷰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의미에서 북리뷰나, 영화리뷰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책의 용도는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루어지고 있는 미디어-텍스트들에 대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렇게 성격을 한정하면 책의 미덕이 도드라진다.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들을, 리와인드 시켜서 다시 읽고 보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이나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개성있는 소개, 마치 진득하게 사귀어온 친구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주는 듯한 정감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친구들'과 단번에 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 책 덕분에 한 '거물급'을 다시금 상기하게끔 됐으니, 곧 <분서>의 저자 이탁오가 그이다.

'태워버려야 할 책, 그러나 영원히 태우지 못할 책'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분서>의 리뷰는 책의 맨마지막 꼭지인데, 이 배치 자체는 물론 우연이 아니겠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한꺼번에 일어서게 만드는 글이었다. 가득 찬 절망을 선물하지만 가득 찬 희망을 동시에 선물하는 그런 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결국 울음과 웃음은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는 글이었다. 아직 그런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꿈을 아직 내버리지 않고 견디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11-2쪽)고 적었는바, 바로 그 '병주고 약주는 글'이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분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매서운 죽비처럼 쾌감 어린 고통으로 내 뒷목을 후려친 두 스승이 바로 루쉰과 이탁오였다." 먼저, 루신: "루신의 글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고독한 전투를 위한 '투창과 비수' 자체였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하찮은 핑계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하며, 삶이라는 토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한낱 글이란 삶에 맹독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탁오의 <분서>: "루쉰이 글에 대한 내 오랜 낭만적 허영을 한칼에 베어냈다면, <분서>(한길사, 2004)는 건조한 철학책이 한 사람을 종일토록 울게 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글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장르도 아닌 채로 글 자체의 에너지로 진검 승부하는 글쓰기. 그의 글은 일상과 현실에 대한 하루하루의 고뇌 자체가 철학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탁오의 <분서>는 철학이고자 하지 않는데도 철학이 되었고 차라리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이 되고자 몸부림쳤음에도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 되었다."(343-4쪽)

이전에 <이탁오 평전>(돌베개, 2005)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분서>의 완역본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그 이전에는 <평전>의 역자가 옮긴 단권짜리 <분서>(홍익출판사 1998)가 나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듯 '온몸으로 보여주는', 리뷰 자체가 명령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글을 접하게 되어 일단 <이탁오 평전>만이라도 먼저 사두었다(<분서>를 소장하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이런 '폐해'를 보건데, 서두에 적은 이 책의 '미덕'은 달리 '맹독'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이거 '대중문화의 숲'이 아니잖아!).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저자가 뿜어내는 '강추'의 추임새: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사람. <분서>는 앎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양이나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알고 죽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서러울 것 같아, 차마 멈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뿜어낸 사유의 기록이다."(345쪽) 이 정도면 가관 아닌가? 거의 투창과 비수를 들고서 '이래도 안 읽겠는가?' 심문하는 듯하다. 몇 문장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탁오와 그의 <분서>에 대해서 모른 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아마도 모든 책과 무관한 사람이 예외일 수 있겠다). 나는 두손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싱어송 라이터, 한대수'씨의 추천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정여울씨, 땅콩 베리 머치!"

07. 01. 25.  

P.S. '태워버려야 할 책'까지 집에 꽂아두면 식구들한테 더 혼날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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