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대중문화의 숲에서 태워버려야 할 책

그제 점심을 먹으며 몇 페이지 읽어본 책은 자신을 '미디어 키드'라고 지칭하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 '대중문화'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어서 그 흔한 문화비평서의 한 종류쯤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진지한 미디어 리뷰들로 채워져 있다. 한데, 그 미디어에는 '글'도 포함되고 저자가 말하는 '내 유일한 미디어'가 '글쓰기'인 걸 보면 제목의 '대중문화'는 두루뭉술이라 할 만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안녕! 프란체스카>, <프렌즈> 같은 드라마들도 리뷰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의미에서 북리뷰나, 영화리뷰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책의 용도는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루어지고 있는 미디어-텍스트들에 대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렇게 성격을 한정하면 책의 미덕이 도드라진다.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들을, 리와인드 시켜서 다시 읽고 보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이나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개성있는 소개, 마치 진득하게 사귀어온 친구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주는 듯한 정감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친구들'과 단번에 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 책 덕분에 한 '거물급'을 다시금 상기하게끔 됐으니, 곧 <분서>의 저자 이탁오가 그이다.

'태워버려야 할 책, 그러나 영원히 태우지 못할 책'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분서>의 리뷰는 책의 맨마지막 꼭지인데, 이 배치 자체는 물론 우연이 아니겠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한꺼번에 일어서게 만드는 글이었다. 가득 찬 절망을 선물하지만 가득 찬 희망을 동시에 선물하는 그런 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결국 울음과 웃음은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는 글이었다. 아직 그런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꿈을 아직 내버리지 않고 견디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11-2쪽)고 적었는바, 바로 그 '병주고 약주는 글'이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분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매서운 죽비처럼 쾌감 어린 고통으로 내 뒷목을 후려친 두 스승이 바로 루쉰과 이탁오였다." 먼저, 루신: "루신의 글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고독한 전투를 위한 '투창과 비수' 자체였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하찮은 핑계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하며, 삶이라는 토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한낱 글이란 삶에 맹독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탁오의 <분서>: "루쉰이 글에 대한 내 오랜 낭만적 허영을 한칼에 베어냈다면, <분서>(한길사, 2004)는 건조한 철학책이 한 사람을 종일토록 울게 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글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장르도 아닌 채로 글 자체의 에너지로 진검 승부하는 글쓰기. 그의 글은 일상과 현실에 대한 하루하루의 고뇌 자체가 철학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탁오의 <분서>는 철학이고자 하지 않는데도 철학이 되었고 차라리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이 되고자 몸부림쳤음에도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 되었다."(343-4쪽)

이전에 <이탁오 평전>(돌베개, 2005)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분서>의 완역본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그 이전에는 <평전>의 역자가 옮긴 단권짜리 <분서>(홍익출판사 1998)가 나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듯 '온몸으로 보여주는', 리뷰 자체가 명령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글을 접하게 되어 일단 <이탁오 평전>만이라도 먼저 사두었다(<분서>를 소장하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이런 '폐해'를 보건데, 서두에 적은 이 책의 '미덕'은 달리 '맹독'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이거 '대중문화의 숲'이 아니잖아!).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저자가 뿜어내는 '강추'의 추임새: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사람. <분서>는 앎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양이나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알고 죽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서러울 것 같아, 차마 멈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뿜어낸 사유의 기록이다."(345쪽) 이 정도면 가관 아닌가? 거의 투창과 비수를 들고서 '이래도 안 읽겠는가?' 심문하는 듯하다. 몇 문장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탁오와 그의 <분서>에 대해서 모른 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아마도 모든 책과 무관한 사람이 예외일 수 있겠다). 나는 두손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싱어송 라이터, 한대수'씨의 추천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정여울씨, 땅콩 베리 머치!"

07. 01. 25.  

P.S. '태워버려야 할 책'까지 집에 꽂아두면 식구들한테 더 혼날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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