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6개월 전인 1941년 3월까지는 "유대인이 곧 제거되는 것은 당 고위직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고 총통의 자문관 빅토르 브라크가 뉘른베르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주장했으나 허사인 것처럼, 결코 당 고위층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특정한 제한적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결코 듣지 못했다. 이 같은 ‘특급비밀‘ 사안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하부 피라미드에서는 그가 첫 번째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이 소식이 모든당과 국가의 사무실, 노예노동과 관련된 모든 기업들, 그리고 군대의(말단에 이르기까지) 전 장교들에게 두루 전파된 이후에도 이것은 여전히 특급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비밀로 한 것에는 실질적 목적이 있었다. 총통의 명령을 명시적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한 명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비밀을 가진 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특별서약을 했다. (1934년 이래로 아이히만이 소속되어 있는 정보부 요원들은 여하튼 보안서약을 했다.)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돌격대로부터 오는 보고서를 제외하고 제거‘ ‘박멸‘ 또는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 (Aussiedlung)와
‘특별취급 (Sonder-behandlung) 등이었다. 이송에는 (거주지 변경‘
이라고 불린 특권층 유대인을 위한 ‘노인들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로가는 유대인을 포함한 경우는 제외하고) 재정착‘ (Umsiedlung)과 ‘동부지역 노동 (Arbeitseinsatz im Oste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이름을 붙인 것은 유대인이 실제로 게토에서 종종 일시적 재정착을 했고, 또 그들 가운데 일정 비율은 노동을 위해 임시로 부려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언어규칙에서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다. 예컨대 외무부 고위관료가 바티칸과 교환되는 모든 서신에 유대인 학살을 ‘근본 해결책‘ 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교묘한 작업이었는데, 왜냐하면 바티칸에서 개입한 슬로바키아의 가톨릭 괴뢰정부가 나치스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그의 반유대적 입법과정에서 ‘아주 철저하지‘못해 영세를 받은 유대인을 제외해버리는 ‘기본적 오류‘ 를 냈기 때문이다
- P149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그는 트레블링카에 있었던 미래의 일산화탄소 방을 마련하는 작업만을 보았을 뿐인데, 이는 수십만 명이 죽게될 동부의 여섯 개의 죽음의 수용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그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제국에 통합된바르테가우라고 불렸던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폴란드 말로는 헬므노)에 있었는데,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우츠(Lódz) 게토에 재정착한 3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살해된 곳이다. 여기서 일은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달랐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것이다. 아이히만이 본 것은 다음과 같았다. 유대인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옷을 모두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고는 트럭이 도착해서그 방의 출입구 바로 앞에 정차했고, 벌거벗은 유대인은 그 트럭으로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은 닫혔고 트럭은 떠났다. "(얼마나 많은유대인이 들어갔는지 저는 알 수 없었어요. 저는 거의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볼 수 없었어요.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비명 소리가 났고, 그리고…… 제가 뮐러에게 나중에 보고했을때 말한 것처럼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제 보고서가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량을 줄곧 따라갔고, 제가 평생동안 본 것 중 가장 끔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트럭은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로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치 그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함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P152

 그가 종종 지적한 대로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도 남을 만큼 증거는 충분했다. (아이히만이 소유하지도 않은 권력을 그에게 귀속시키려고 경찰심문관이 노력했을 때, "나에 대한 것은 이미 충분히 갖고 있지 않나요?" 라고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학살이 아니라수송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가 적어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법적, 형식적으로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흉악성을 판단할 지위에 있었던가(그가 의학적으로 건전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그가 법적으로 책임이 있는가)라는 것도 추가로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두 가지 질문은 이제 모두 그렇다고 답변되었다. 그는 수송이 이루어질 장소를 모색했는데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 이 모든 의문들 가운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마지막 질문 한 가지가판사들, 특히 주심 판사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유대인 학살이 자신의 양심에 어긋난 것이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이것은 도덕적 질문이었으며, 거기에 대한 대답은 법적으로 적합한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 P156

유대인 특별부대는 실제
학살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용되었고, 그들은 임박한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행위를 했으며, 유대인위원회(Joodsche Raad)와 장로회는 ‘귀결된 결과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협력했다. 아이히만의 경우 이 두 질문에 대해 자신의 증언으로 답했는데 그 답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한때 그는 자신의 유일한 대안이 자살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처형부대 부대원들이 심각한 처벌을 받지 않고서도 자신의 임무를 중단하기란 놀랄 만큼 쉬웠다. 그런데 그는 그 점에 대해 주장하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보고서에서는 "처형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이유로 사형을 받은 친위대 대원들은 단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재판에서는 피고 측 증인 폰 뎀 바흐 첼레브스키가 증언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른 부대로 전근을 신청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회피하는 것은 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개개의 경우 어떤 징계성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명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명령에 불복하자니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받을 것 같고, 복종하자니 판사와 배심원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질 것 같은"병사가 처해 있는 고전적인 ‘어려운 입장‘이 아이히만의 상황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친위대 대원이었기 때문에 결코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을 것이고 단지 경찰 또는 친위대 법정에 회부될 뿐이다. - P157

그의 양심은 살인이라는 생각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는 사람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생각에 저항한 것이다("나는 결코 돌격대가 학살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몰랐던 것은 동부지역으로 소개된 제국출신의 유대인이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모르고있었다" ), 이러한 양심은 과거 당의 일원이었고 러시아 점령지 총경이었던 빌헬름 쿠베라는 사람의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철십자훈장을 받은 독일계 유대인이 ‘특별취급‘을 받기 위해 민스크에 도착했을 때 격분했다. 쿠베의 진술이 아이히만의 진술보다는 더 상세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양심으로 번민했을 때 그 마음속에 무엇이 오갔는지에 우리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는 1941년 12월에 자신의 상관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분명히 강한 사람이고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울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나 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동물과 같은 토착민 군중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요. 이러한 종류의 양심이 저항을 한다면, 그 양심은 ‘내 자신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가진 사람들의 학살에 저항하는 부류의 것으로, 이는 히틀러의 통치기간을 지나서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 독일인들 가운데에는 ‘오직‘ 동부유럽 유대인만 학살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존재한다.
‘원시적인‘ 사람과 ‘문화적인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구별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독일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대인의 문화적 정신적 업적에 대한 바론(Salo W.Baron) 교수의 증언과 관련해 하리 물리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어떻게 갑자기 자신에게 떠올랐는지를 말했다.
"유대인이 만일 문화가 없는 민족이라면 그들의 죽음은 보다 덜 악한일이 되었겠는가? 아이히만은 인간 도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의 파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인간 도살자가 그 과정에서 문화도 또한 파괴했다면 그 죄는 더 무거운가?"  - P163

그러면 히틀러가 제거된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독일 군대는 ‘전쟁을 명예롭게 종결할수 있을 때까지‘ (이것은 알자스로렌과 오스트리아, 수데텐 지역의 병합을 의미) 계속 싸울 것이다. 독일 소설가 프리드리히 P. 레크말레체벤이 이들에 대해 내린 신랄한 판단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좋은 이유가 있다. 그는 독일이 붕괴되기 전날 밤에 집단수용소에서 처형되었으며 반 히틀러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절망 속의 한 인간의 일기‘에서 레크 말레체벤은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유감스러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조금 늦었군요. 신사 여러분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듯이 보였을 때 독일의 최고 파괴자를 만들고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당신들이었죠. 당신들에게 요구한 맹세를 주저 없이 하고,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전 세계의 비탄과 저주를 짊어진 이 범죄자의 비열한 돌마니로 자신을 만들어 버린… 사람들은 당신들이었죠. 이제 당신은 그를 배신했군요……. 지금, 파산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이때, 스스로를 위한정치적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파산해 가는 집을 배반하는구나. 자신의 권력 추구의 길에 방해가 된 모든 것들을 배신한 바로 그 사람들이."
7월 20일의 사람들과 아이히만이 개인적 관계를 맺은 증거 또는 그비슷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아르헨티나에서조차 이들을 전부 배신자요 악당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170

이들 이동 살인부대에는 모두 4부대가 있었는데, 각 부대는 대대 규모였고 총 인원은 약 3000명이었기때문에 무장 군대의 긴밀한 협조와 도움을 얻고 있었다. 사실상 이들의관계는 보통 ‘탁월했고 어떤 경우에는 ‘열렬했다‘ (heralich), 장군들은......자신의 일반 부대원이나 일반 병사들을 차출하여 학살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그들에게 희생된 전체 유대인의 수는 힐베르크에 따르면 거의 150만에 달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유대인에게 신체적 처형을 하라는 총통의 명령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명령, 즉 히틀러가 힘러에게 1941년 3월에 내린 ‘러시아에서 특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친위대와 경찰을 준비하라는 명령의 결과였다.
- P176177

최초의 가스 방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한 1939년 9월 1일자 포고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건설되었다. (가스학살을 ‘의학적 문제‘로 간주해야 한다는 세르바티우스의 놀라운 확신을 고무한 것은 아마도 이 같은 가스의 ‘의학적" 기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생각 자체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다. 1935년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제국 의학지도자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전쟁이 발발하면 이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전시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 포고령은 정신병자들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수행되어 1939년 12월과 1941년8월 사이에 대략 5만 명의 독일인들이 시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되었다. 이 시설에 설치된 죽음의 방들은 나중에 아우슈비츠에서 그랬던 것(샤워실 또는 목욕실로)과 똑같이 위장되었다. 이 계획은 실패작이었다. 주변의 독일인들에게 감추고 가스 사용을 비밀로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학의 본질과 의사의 임무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아직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저항이 있었다. 동부지역에서의 가스 사용(나치스의 용어로 하면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는 살인)은 독일에서의 가스 사용이 중지된 거의 같은 날에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안락사 계획에 고용된 사람들은 이제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시설들을 만들기 위해 동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들은 히틀러의 자문실 출신이거나 제국보건부 출신이었는데 그때부터 힘러의 행정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기만과 은폐를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 가운데 이처럼 히틀러가 첫 번째 전쟁을 벌이는 데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없었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 사람들의 최종목적지가 여하튼 분명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조금 반어적인 것이 아니었는가를 경찰심문관이 물렀을 때 아이히만은 이 질문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 P177

1944년 여름에 바바라아로 갔던 한 여성 ‘지도자‘.......그녀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 말했고, 여기에 대해 훌륭한 독일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가스를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오, 맙소사,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이 사랑스런 여성이허깨비가 아니라니, 나는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40대를 바라보는 노란 피부의 미친 눈을 가진 여성을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 이 바바리아 농부들이 죽음에 대한 그녀의 준비된 열정을 식혀주기 위해 호숫물에 빠뜨렸는가?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머리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다음 이야기는 핵심에 더욱 근접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도 당원도 아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1945년 1월,
러시아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지를 점령하여 연방으로 합병시키기 며칠 전 독일의 다른 변방인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한스 폰 렌스도르프 백작이 『동프러시아의일기』(Ostpreukssisches Tigebruch, 1961)에서 언급한 것이다. 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의사로서 돌보기 위해 그는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한 커다란 피난민 센터로 불려갔는데 그곳은 이미 붉은군대가 장악해 있었다. 거기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수년 동안
앓은 정맥류를 보여주면서 지금 시간이 있으니 바로 치료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에서 애써 설명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싶냐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들이 제국으로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나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않았다. 대부분의 실화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다. 한 목소리, 더욱이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 P180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심판할 자가 누구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그는 조심성 때문에 패망하게 된 최초의 사람도 최후의 사람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한 것처럼 그 이후로는 점점 더 쉬워지고 또 곧 일상적이 되어 버렸다. 그는 ‘강제이주의 전문가였던 것처럼 재빨리 ‘강제소개‘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유대인은 등록을 해야했고, 손쉬운 식별을 위해서 노란색 표지를 달도록 강요받았으며, 함께 집결해서 이송되었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통해 그때마다의 센터의 상대적 수용능력에 따라 동부지역에 있는 이곳저곳의 학살센터로 옮겨다녔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가 센터에 도착하면 그들 중 힘센 사람들은 사역하도록 뽑혀서 때때로 학살 장치를 가동하게 했고 다른 모든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처형되었다. 장애요인들도 있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외무성은 점령지 또는 나치스와 합병된 지역의 당국자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유대인을 이송하거나 죽음의 수용소의 수용능력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 무질서하게 허둥지둥 유대인들을 동부지역으로 소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다. (이것은 이 일에 대한 아이히만의 기억 그대로이다. 사실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법률 전문가들은 희생자들이 무국적 상태가 되도록 필요한 법적 조치들을 강구했는데, 이 일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했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어떤 나라도 그들의 운명에 대해 문제 삼지 못하게 되고, 또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국가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재무부와 국가은행은 유럽 전 지역으로부터 시계에서 금니에 이르는 엄청난 약탈물들을 받을 수 있도록 수단들을 강구했다. 이 모든 것들은 분류되어 프러시아 국가 조폐국으로 보내졌다. - P184

교통부는 필요한 열차편을 준비했는데, 철도 차량이 아주 부족할 때도 주로 화물열차가 준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운송 열차 스케줄이 다른 시간표와 충돌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은 등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작성했으며, 재산을 보다 손쉽게 탈취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장의
재산 관련 질문지들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집결지에
모여 열차에 탑승했다. 일부 숨거나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유대인 특별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 1943년 베를린에서 한 유대인목격자가 쓴 것처럼 "매일매일 사람들은 자신의 장례식장을 향해 이곳을떠났다."
- P185

......1만대 트럭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100만명의 유대인을 석방한다는 힘러의 제안에 대해 그가 카스트너박사와 협상......카스트너는 아이히만이에게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공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아이히만은 ‘진정으로 기꺼이‘ (herzlich gern)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일은 자신의 능력 밖이고, 또 자신의 상관들의 능력 밖이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물론 그는 유대인이 자신의 파괴작업에 대한 일반적 열정을 공유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그는 단순한 순응 이상의 것, 즉 그들의 협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사실상 상당한 정도로까지 협조를 얻었다. 이것은 빈에서의 활동에서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행정과 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희생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폴란드계 유대인은 독일인들을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만큼 거의본 적이 없었다." 이상은 펜도르프가 앞서 언급한 저술에서 한 말이다.)따라서 점령지에서 크비슬링 정부들이 형성될 때마다 중앙의 유대인사무실 조직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나치스가 괴뢰 정부를 세우지 못한 곳에서는 유대인의 협조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그런데 크비슬링 정부들이 통상 반대당에서 요원들을 차출한것에 반해 유대인위원회의 요원들은 항상 지역에서 인정받는 유대인지도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엄청난 권력이 주어졌다. 이것도 역시중부 및 서부 유럽에서 온 경우는 테레지엔슈타트로, 동부 유럽공동체출신인 경우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까지만이었다.
자기 민족을 파괴하는 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한 이러한 역할은 유대인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 - P187

모근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 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프로이디거의 계산에 따르면 유대인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절반은 목숨을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추산에 불과하지만, 이 추산치는 네덜란드에서 나온, 즉 네덜란드 국립전쟁문서연구소소장인 드 종(L. de. Jong) 박사에게서 내가 입수한 더욱 믿을 만한 수치와 이상하게도 일치한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재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 이 가운데 단지 519명의 유대인만이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돌아왔다. 이 숫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2만 내지 2만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1만 명의 유대인은 나치스를 탈출(이것은 유대인위원회로 부터의 탈출도 의미함)하여 지하로 잠적해서 살아남았다. 이것은 40 내지 45퍼센트에 해당한다.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내졌던대부분의 유대인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왔다.
예루살렘 재판이 세계의 눈앞에 그 진정한 차원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 장의 이야기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존경할만한 유럽 사회에서 발생한 나치스의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에 대한 가장 놀랄 만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도, 또 학살자들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해서도그렇다.) 아이히만은 나치 운동의 다른 요소들과 대비하여 항상 ‘좋은사회‘라는 관념에 의해 압도되었고, 그가 종종 독일어를 말하는 유대인지도층 인사들에게 보여주었던 공손함은 대체로 자기가 다루고 있는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 P197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질문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이히만이 이 일에 대해 마지막 진술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반복했다. "그 누구도 제게 와서 제가 의무를 수행하면서 한 어떤 일에 대해서 저를 책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뤼버 감독조차도 그렇게 했다고 주장 못하지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제게 와서 고통을 줄일 방도를 찾았습니다만 실제로 제가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뤼버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추구한 것은고통을 줄이는 것 이라기보다는 이미 나치스가 인정한 기존의 범주들에 따라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범주들은 애초부터 독일계 유대인에 의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특권적 범주(폴란드계유대인과 구별하여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일반적인 유대인과 구별하여 참전용사요 훈장 받은 유대인으로서, 최근에 귀화한 시민과 구별하여독일 태생의 선조를 가진 가족들로서 등등)를 수용함으로써 존경받는 유대인 사회의 도덕적 붕괴는 시작되었다.  - P204

그러한 책임(나치스가 ‘유명한 사람들을 익명의 대중에서 뽑아내려고 노력하는것을 돕는 것, 왜냐하면 이것이 그 규칙의 의미이므로)을 스스로 지는것은 ‘축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특별 케이스‘를 요구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자신이 비자발적으로 공조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모든 특별하지 않은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규칙에 대해 암묵적으로인정하는 것임이 살인 업무에 가담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명백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예외로 해달라는 요구를 받는 가운데, 그리고때때로 예외를 인정해 주고 그래서 감사를 받는 가운데, 자신이 하고있는 일의 합법성을 그 반대자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뤼버 감독과 예루살렘 법정은 정권의 반대자들만이 예외에 대한 요구를 처음으로 주장했다고 추정한 점에서 아주 잘못되어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하이드리히가 반제회의에서 명백히 주장한 것처럼,
테레지엔슈타트를 특권적 범주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위한 게토로 만든 것은 모든 측면으로부터 많은 협의를 한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테레지엔슈타트는 나중에 해외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고외부 세계 사람들을 속이는 데 기여했지만 이것이 그의 원래의 존재 이유는 아니었다. 이 ‘낙원‘ (아이히만이 적절히 언급한 것처럼, 이곳과 다른 수용소는 낮과 밤처럼 달랐다)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났던 끔찍한 살빼기 과정은 필수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모든 특권층에게 충분한 공간을 결코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제국중앙보안본부의 부장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내린 지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외부 세계와 연관이 있거나 중요한 인물을 아는 유대인을 이송시키지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동부지역에서 사라져버릴 경우 불편한 조사를 받게 될 사람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다.  - P206

반드시 독일 외부에 거주하는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힘러에 따르면 "8000만 명의 선한 독일인이 존재하며, 그들 각각은 훌륭한 유대인을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돼지들이지만, 이 특정한 유대인은 일등급이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 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모두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반쪽 유대인의 특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수천 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 받았는데, 이것이 친위대 내에서의 하이드리히의 역할과 괴링의 공군부대 원수인 에르하르트 밀히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하이드리히와 밀히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전범들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죽기 전에 참회를 했다. 체코 애국자들에 의해 입은 상처로 죽기까지 걸린 9일 동안 하이드리히가참회를 했고, 한스 프랑크는 뉘른베르크 사형수 감방에서 참회했다. 이는 불유쾌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하이드리히가 참회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배신한 사실이었다고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저명한 유대인을 위한 개입이 저명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 경우는 종종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히틀러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 중 한 사람이었던 즈벤 헤딘은 저명한 지리학자인 본 출신의 필리프존 교수를 위해 개입했는데, 그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형편없는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딘은
"독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필리프존의 운명에 달려 있을 것이다"라고 협박했는데, 이에 따라 (H.G. 아들러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대한 저술에 따르면) 필리프존 교수는 즉각 보다 나은 막사를 배정받았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저명한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다. 참전용사들과 다른 특권 계층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명한 유대인의 운명이 애도되고 있다. 어린 한스 콘이 비록 천재는 아니지만 그를 전쟁이 끝날 무렵 살해한 것은 더욱 큰 죄악임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이 아인슈타인을 이주시킨 것을 아직도 공공연히 후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 가운데 적지 않다.

이처럼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처럼 느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그는 무엇이든 느낄 필요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기초한 이땅의 새로운 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었으나, 피고 측도 판사도 이 문제에 대해 그를 심문하지않았다. ‘상부의 명령‘ 대 ‘국가적 행위‘라는 낡아빠진 구절이 끝없이 오갔을 뿐이었다. 이 구절들은 뉘른베르크 재판 기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토론 전체를 지배했다. 이는 전례가 전혀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전례가 존재하며, 또 그 전례에 속한 기준에 따라 재판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온건한 성격을 지닌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이러한 견해들에 분명히 도전을 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안할 만한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한 바를 수행한 것 외에도 그는 명령에 따라 (항상 ‘보호받을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맹목적인 복종, 또는 그가 ‘시체들의 복종‘ (Kadavergehorsam)이라고 불렀던 미덕과 악덕을 차례로 강조하면서 끝냈다. - P209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 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기가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것은 표면상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기능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문관은 이 점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라베 판사는 호기심에서였는지 아니면 아이히만이 자신의 범죄와 연관하여 감히 칸트의 이름을 거론한 데 대해 분개해서였는지 간에 피고에게 질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정언명법에 대한 거의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둑질이나 살인에는 적용될 수없다. 왜냐하면 예컨대 도둑이나 살인자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을 죽이는 권리를 부여하는 법적 체계에서 살아가기를 의식적으로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질문에 대해 그는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칸트의 원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또 그는 자기가 더 이상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어떤 것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법정에서 지적하지 못한 것은 이제 그 자신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 이 같은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으므로 기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여 읽었던 것이다.  - P210

칸트......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
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무의식적 왜곡은 그 자신이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사용할 칸트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가정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남게 되는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요구, 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원리(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뿐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 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보통 관찰자들에게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라고, 또는 완벽한 관료의 전형이라고 보인 철저함)의 대부분은사실상 독일에서는 아주 일반화된 이상한 관념, 즉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따르는 법의 제정자인 것처럼행위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상한 관념으로 그 근원이 추적될 수 있다.
그래서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라야 충분하다는 신념이나온 것이다.
독일에서 ‘어린아이의 정신 상태를 형성하는 데 칸트의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 사실, 즉 법은 법이고 예외는 없다는 점에서 아이히만이 칸트의 교훈을 따랐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000만 독일인들이 ‘품위 있는 유대인‘을 갖고 있었던 시절에 아이히만이 오직 두 번의 그러한 예외를 승인했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인정했다.
그는 반쪽 유대인인 자신의 조카를, 또 자기 삼촌의 개입에 따라 빈에서 한 유대인 부부를 도와주었다. - P211

아이히만에게 다가온 마지막 양심의 위기는 1944년 3월에 있었던 형가리로 가는 임무와 함께 시작 되었는데, 이때는 붉은군대가 카파치아산맥을 지나 헝가리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는 1941년에 히틀러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웃하고있는 나라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얼마간의 영토를 더 얻으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헝가리 정부는 그 이전부터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표명했는데, 이제는 새로이 획득한 영역에서 모든 무국적 상태의 유대인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반유대적행위는 무국적자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최종 해결책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었고, 사실상 그 당시 유럽에서 ‘서에서 동까지 샅샅이 뒤지려는 세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계획과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헝가리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다소 밀려 있었다. 무국적 유대인은 헝가리 경찰에 의해 러시아 인근지역으로 내몰렸고, 그 지역의 독일 점령 당국은 이들이 몰려오는 것에 반대했다. 헝가리인들은 육체노동이 가능한 수천 명의 사람들은 되돌아오게 하고 나머지는 독일 경찰대의 안내로 헝가리 군대가 학살하게 했다. 헝가리의파시스트 통치자인 호르티 제독은 일을 더 이상 진행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 P213

 (피고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렇게 부른 것처럼) 그의 진정한 히틀러에 대한 끝없고 과도한 경탄, 하사에서 제국의 총통이 된 사람에 대한 경탄이었다. 독일이 이미 폐허가 된 때 그의 내면에서 히틀러에 대한 경탄과 제3제국의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남기를 바라는 그의 결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의 며칠 동안, 그는베를린에 있으면서 그의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러시아인이나 미국인이 오기 전에 위조문서를 가지고 자기변호를 하려고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격렬한 분노로 바라보았을 때, 위의 두 동기가 함께 한차례 더 작동하고 있었다. 몇 주일 후 아이히만도 가명을 써서 여행을시작했는데, 그때는 이미 히틀러가 죽었고 이 땅의 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대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맹세에 구속받지 않았다. 친위대 요원으로서 한 맹세는 독일이 아니라 히틀러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군인들이 한 군대의 맹세와 달랐다. - P225

서부지역에서 동부지역으로 가는 모든 이송은 제국중앙보안본부의제IV-B-4부에서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 조직되고 조정되었다.
이 점은 재판기간 동안 전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을 기차에 태우기 위해서 그는 일반 경찰 조직의 도움이 필요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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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유대인으로부터 1931 ~ 32년도와 비교해 3배나 더 많은 기부금을1935~36년도에 모았다.) 이것이 반드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민가고 싶어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자존심의 문제였다. 《유대인 룬트샤 우》의 편집장 로베르트 벨치가 고안하여 그당시 가장 유행한 슬로건, 자부심을 갖고 착용하라, 노란별을!‘은 당시의 일반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1933년 4월 1일의 ‘불매일 (유대인이 하얀 바탕에 6각별 배지를 착용하도록 강요당하기 무려 6년 전)에맞서서 만들어진 이 슬로건이 담고 있는 논쟁의 초점은 ‘동화주의자를과, 새로운 혁명적 발전‘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즉 ‘언제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 (die ewig Gestrigen)을 겨냥했다. 독일에서 온 증인들은 상당히 흥분된 채 이 슬로건을 법정에서 상기했다. 매우 탁월한 언론인 로베르트 벨치는, 당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그 슬로건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최근에 말한 점을 그 증인들은 잊어버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구호와 이데올로기 논쟁과는 완전히 별개로, 오직 시온주의자들만이 독일 당국과 협상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그 몇 년 동안 평범한 사실이었다. 독일 당국이 유대인에 대해 주된 상대자로 삼았던 유대 신앙 독일시민중앙연합은 당시 95퍼센트의 조직된 독일계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회칙에 ‘반유대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을 주요 임무라고 명시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 단체는 정의상 갑자기 국가에 적대적인 조직이 되어버렸고, 만약 그들이 감히 그임무를 실제로 수행하려 했다면 박해받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몇 년 동안 히틀러의 정권 장악이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주로 ‘동화주의의 결정적인 패배로 보였다. 따라서 시온주의자들은 적어도 한동안 나치 당국과 어느 정도 범죄가 아닌 일에 협조할 수 있었다. - P119

아이히만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온주의자들이나 팔레스타인 담당유대인 기관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게슈타포나 친위대와 접촉하곤 하는 팔레스타인 밀사들이었다. 그들은 영국령의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의 불법 이민을 도와주려고 왔는데 게슈타포와 친위대가 이를모두 도와주었다. 
- P120

빈에서의 일어난 아이히만의 인격 변화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이 있든지 간에, 이 직책에로의 임명이 그의 출세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한다.
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7년과 1941년 사이에 그는 4번 승진했다. 14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는 하급중대 지휘관에서 최고중대 지휘관으로 승진했고, 1년 반뒤에 그는 상급대대 지휘관이 되었다. - P125

폴란드 정부가 먼저 이 꿈을 꾸었는데, 1937년에 많은 공을 들여 이 아이디어를 검토했지만 거의 3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죽이지 않고 그곳으로 배로 운송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가 그 꿈을 꾸었는데, 그는 프랑스 거주 외국인 유대인 20만 명을 프랑스 식민지로 수송하는 다소 온건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1938년에 이 문제를 놓고 독일 측 상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상담하기도 했다. 여하튼 아이히만은 1940년 여름 그의 이주사업이 완전히 중지되었을 때 400만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소개하는 세부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기획을 위해 그 다음해 러시아 침공이 시작될 때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소비한 것 같다. (400만은 유럽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들기에는 턱없는 숫자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300만의 폴란드계 유대인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인데 이들은 누구나 다 알듯이 전쟁이 발발한 첫날부터 학살되었다.) 아이히만과 그보다는 덜 광신적인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어느 누구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곳이 프랑스령이라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지역이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계획에는 전시이자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에 400만 인구를 수송할 선적 공간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항상 모든 서유럽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을 준비하는외투로 사용하려는 의도에서 수립되었다. (폴란드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데는 이러한 외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 P139

이러한 계산이 이루어진 것은 다양한 살상 설비들의 ‘수용능력‘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일부 죽음의수용소들 인근에 지사를 차려놓고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수많은 기업체들의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산업체들 외에도 파르벤(I. G.
Farben), 크루프 베르케(Krupp Werke), 지멘스-슈케르트 베르케(Siemens-Schuckert Werke)와 같은 유명한 독일 회사들이 루블린의 죽음의 수용소 인근과 아우슈비츠 내부에 공장을 세웠다. 친위대와 사업가들 사이에는 탁월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아우슈비츠의 회스는 파르벤의 대표들과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에 대해 증언했다. 노동 조건을 고려해 보면 분명히 노동을 통한 살인을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파르벤 소속 공장 한 곳에서 일한 대략 3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적어도 2만 5000명이 사망했다.) 아이히만이 관계된 한에서 볼 때 초점이 되는 것은 이동과 운송이 더 이상 최종단계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서는 단지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보류되었을때 아주 격분하고 실망할 좋은 이유가 된 셈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은 유일한 일은 1941년 10월에 있었던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의 승진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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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소설의 요괴는 민간 전래 요괴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외양 묘사가 구체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저지르는 악행도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최후를 맞는 모습도 독특합니다. 주변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캐릭터로서 살아 숨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고전소설의 요괴는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집니다. 식욕 같은 원초적 욕망에서부터, 재물을 갖고픈 욕망, 사랑받고 싶은욕망, 명예를 누리고 싶은 욕망,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고차원적 욕망까지 지닙니다. 또한 그 욕망에 오롯이 집중합니다.
- P4


이처럼 <전우치전>에 등장하는 여우 요괴 두 마리는 성욕에 사로잡혀 소중한 보물을 빼앗겨 버린 어리석은 존재다. 또 본의 아니게 인간에게 요술을 전수해 준 딱한 요괴이기도 하다. <전우치전>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여우 요괴는 성욕이 특히 강하다. 현대물에서 인간이나 가축의 간을 먹는 여우의 모습이 많이 부각되지만, 이러한 여우는 고전소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피와 살을 먹고 배를 채우는 여우보다는 구슬을 통해 남성 혹은 여성의 정기를 흡입하거나, 직접적인 성관계를 통해 정기를 얻는 여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요괴는 타고난 습성과 성품을 길들이기 매우 어렵다. - P25

여우 구슬과천서

한국의 구비설화에는 여우 구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대략적인내용은 여자로 변신한 여우 입속의 구슬을 남자가 삼킨 후에 특별한 능력을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볼 때, 여우 구슬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터득하게 하는 신묘한 물건이다. 그렇기에 전우치전>의 전우치도 여우 구슬을 삼킨 후 천리와 지리에 모두 등통하게 된 것이다.
중국 문헌에 나타난 여우 구슬은 그 효능이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서는 여우 구슬이 온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만드는 물건으로 나타난다. 당나라 사람인 유중애는 그물로여우를 잡아 바둑알처럼 둥글고 맑은 여우 구슬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는데, 그 이후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매우 애지중지했다. 여우 구슬이 인간 사이의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여우의 천서는 어떠할까. 한국 구비설화에는 남자가 여자로 변신한 여우에게서 천서를 얻어 내용의 일부를 익히던 중, 여우가 천서를 되찾아가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 P27


이와 비슷하게 중국의 태평광기에도 여우의 천서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의 도사 손증생이 여우 소굴에서 천서를 빼앗아 왔는데, 여우 무리가 찾아와 한 부를 필사하도록 허락해 줄 테니 전서만은 돌려달라고 한다. 이에 손증생은 여우에게 천서를 읽는 비법을 전수받고, 사본 한 부만을 간직한다. 그리고 그 시대 최고의 술사(術士)가 되는데, 황제인 현종에게까지 끝내 천서를
보여주지 않다가 처형당하고 만다. 비슷한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여우의 천서를 익힌 주인공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여우에게 화를 당하는 비극적 결말이보인다.
인간이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천서에는 대체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었을까? 한국 설화에서는 주로 몸의 형체를 바꾸는 둔갑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천서의 마지막 장에 쓰인, 옷고름을 숨기는 방법까지 채 익히지 못해 완벽하게 둔갑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둔갑해서 몸을 숨겨도 옷고름만은 보여서 결국 들키고 마는 것이다. 또한 천서를 통해 재물을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편 중국 설화에서는 천서를 통해 음양의 이치를 통달하고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도술은 얼마든지 착한일에 쓰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설화 속 주인공들은 그 도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다가 화를 당하곤 한다. 이는 천서가 애초부터 요괴인 여우의 책이고, 그 책에는 악한 일에 쓰는 삿된 요술이 기록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요괴의 책일지라도 인간의 것으로 승화시켜 선한 데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요괴의 강력한 요술에 빠지면 인간이 마음대로 절제하기 어려워서일 것이다. 
- P28

여우 꼬리의 개수

여우가 등장하는 고전소설 33편을 살펴보면 무려 18편의 작품에 꼬리아홉 달린 여우가 등장한다. 나머지 15편의 작품 속 여우는 꼬리가 1개, 3개,
5개, 7개로 다양하다. 이처럼 꼬리  아홉 달린 여우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신화 -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청구산(靑丘山) 혹은 청구국(靑)에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는 기록이 세 군데나 발견된다.
동쪽으로 3백 리를 가면 청구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아홉 개의 꼬리가 있으며, 그 소리는 마치 어린애 같고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다."
"청구국이 있는데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산다."
‘청구(靑丘)‘라는 지명은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동방, 곧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구미호가 산다고 언급한 실증적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우리나라와 구미호 사이에 깊은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고전소설에서 여우 꼬리의 개수와 여우의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
우리는 숫자 9를 완성과 성취의 의미를 담은 최고의 수로 여기곤 한다. - P41

의외로 보기 드문 먹보 요괴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본체가 돼지인 요괴는 다른 작품에도나온다. (금방울) , 〈이수문전〉, (최고운전)에는 금돼지가 등장하고, (김윤전), 〈명주보월빙〉, 〈조씨삼대록)에는 멧돼지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여섯 작품의 돼지 요괴는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잡식성이 아니다. 대부분 무언가 먹는 모습은 나오지 않고, 여인 납치나 인간을 괴롭히는 다른 악행을 벌이는 데 집중한다. 예외적으로 (김윤전)의 멧돼지가 머리 다섯 달린 귀신으로 변신해 행인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삼문취록>의 멧돼지처럼 인간의 음식까지 가리지않고 먹지는 않는다. 한편 돼지 이외의 다른 요괴에게도 잡식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흔하고 많을 것 같은 먹성 좋은 요괴가 삼문취록 단 한 작품에만 나오는 것이다.
흔히 요괴라면 당연히 인간의 장기나 혈육, 정기를 먹는다고만생각하기 쉽다. 물론 요괴가 가장 많이 먹는 것은 인간이다.  - P53

다만 몇몇 작품에서 인간에게 제사 음식을 풍성히 차리도록 요구하는 요괴를 발견할 수 있다. (보은기우록)의 백룡, (삼강명행록)의 교통, (명주보월빙)의 야차 등은 제사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괴롭히겠다고 백성들을 위협한다. 그런데 막상 제사 음식을 먹는 모습은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배를 채우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제사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고 공경하는 대접을 받고 싶었던 듯하다. 식욕보다 존중의 욕구를 더 중시한 요괴인 것이다. 그러한 다른 요괴들과 비교해 봤을 때, 〈삼문취록>의 멧돼지는그야말로 식욕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 P54

한편으로 올출비채는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요괴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인간 여성으로 변신하는 요괴들을 살펴보면 양반집의 처녀나 유부녀로 변신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렇기에 남성에게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틀에 박힌 여성 캐릭터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올출비채는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을 때려눕히는 것도 모자라 지극히 어려워해야 했을 관계인 도련님들에게까지 호통을 치며 꾸짖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여성 가장이다.
물론 올출비채와 같은 참신한 캐릭터는 ‘인간‘이라는 제약이 없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삼강명행록》은  중국 명나라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정씨 가문의 주요 인물인 정흡, 사씨, 정철의 여정을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은 ‘유교의 세 가지 강령인 충·효·열이라는 밝은 행실에 대해 적은 기록‘이라는 뜻이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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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2-02-2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
 

"내가 아닌 것이 되는 게 좋아요?"
"다시 원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안다면, "
"원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적은 없어요?"
가후쿠는 잠시 생각했다. 그런 질문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도로는 정체되고 있었다. 그들은 수도고속도로에서 다케바시 출구로 향하는 참이었다.
"그런다고 달리 돌아갈 데도 없잖아." 가후쿠는 말했다.
미사키는 그 말에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가후쿠는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어 모양새를 점검하고 다시 썼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타이어가 달린 대형 트레일러 옆에서 노란색 사브 컨버터블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유조선 옆에 떠 있는 관광용 소형 보트 같다.
"괜한 소리인지도 모르지만." 미사키가 조금 뒤에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좋아." 가후쿠는 말했다.
"가후쿠 씨는 왜 친구를 안 만들죠?"
가후쿠는 미사키의 옆얼굴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내가 친구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알지?"
미사키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두 달 가까이 날마다 차로 모시다보면 그 정도는 알죠."

- 드라이브 마이 카 - P32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건, 특히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뭐랄까, 보다 총체적인 문제야. 더 애매하고, 더 제멋대로고, 더 서글픈 거야."

-드라이브 마이카  - P37

 하지만 아무리 잘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드라이브 마이카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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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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