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유대인으로부터 1931 ~ 32년도와 비교해 3배나 더 많은 기부금을1935~36년도에 모았다.) 이것이 반드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민가고 싶어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자존심의 문제였다. 《유대인 룬트샤 우》의 편집장 로베르트 벨치가 고안하여 그당시 가장 유행한 슬로건, 자부심을 갖고 착용하라, 노란별을!‘은 당시의 일반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1933년 4월 1일의 ‘불매일 (유대인이 하얀 바탕에 6각별 배지를 착용하도록 강요당하기 무려 6년 전)에맞서서 만들어진 이 슬로건이 담고 있는 논쟁의 초점은 ‘동화주의자를과, 새로운 혁명적 발전‘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즉 ‘언제나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 (die ewig Gestrigen)을 겨냥했다. 독일에서 온 증인들은 상당히 흥분된 채 이 슬로건을 법정에서 상기했다. 매우 탁월한 언론인 로베르트 벨치는, 당시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그 슬로건을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최근에 말한 점을 그 증인들은 잊어버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구호와 이데올로기 논쟁과는 완전히 별개로, 오직 시온주의자들만이 독일 당국과 협상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그 몇 년 동안 평범한 사실이었다. 독일 당국이 유대인에 대해 주된 상대자로 삼았던 유대 신앙 독일시민중앙연합은 당시 95퍼센트의 조직된 독일계 유대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회칙에 ‘반유대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을 주요 임무라고 명시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 단체는 정의상 갑자기 국가에 적대적인 조직이 되어버렸고, 만약 그들이 감히 그임무를 실제로 수행하려 했다면 박해받았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몇 년 동안 히틀러의 정권 장악이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주로 ‘동화주의의 결정적인 패배로 보였다. 따라서 시온주의자들은 적어도 한동안 나치 당국과 어느 정도 범죄가 아닌 일에 협조할 수 있었다. - P119

아이히만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온주의자들이나 팔레스타인 담당유대인 기관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게슈타포나 친위대와 접촉하곤 하는 팔레스타인 밀사들이었다. 그들은 영국령의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의 불법 이민을 도와주려고 왔는데 게슈타포와 친위대가 이를모두 도와주었다. 
- P120

빈에서의 일어난 아이히만의 인격 변화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이 있든지 간에, 이 직책에로의 임명이 그의 출세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한다.
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7년과 1941년 사이에 그는 4번 승진했다. 14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는 하급중대 지휘관에서 최고중대 지휘관으로 승진했고, 1년 반뒤에 그는 상급대대 지휘관이 되었다. - P125

폴란드 정부가 먼저 이 꿈을 꾸었는데, 1937년에 많은 공을 들여 이 아이디어를 검토했지만 거의 3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죽이지 않고 그곳으로 배로 운송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가 그 꿈을 꾸었는데, 그는 프랑스 거주 외국인 유대인 20만 명을 프랑스 식민지로 수송하는 다소 온건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1938년에 이 문제를 놓고 독일 측 상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상담하기도 했다. 여하튼 아이히만은 1940년 여름 그의 이주사업이 완전히 중지되었을 때 400만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소개하는 세부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기획을 위해 그 다음해 러시아 침공이 시작될 때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소비한 것 같다. (400만은 유럽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들기에는 턱없는 숫자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300만의 폴란드계 유대인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인데 이들은 누구나 다 알듯이 전쟁이 발발한 첫날부터 학살되었다.) 아이히만과 그보다는 덜 광신적인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어느 누구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곳이 프랑스령이라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지역이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 계획에는 전시이자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장악하고 있었던 시기에 400만 인구를 수송할 선적 공간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항상 모든 서유럽 유대인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을 준비하는외투로 사용하려는 의도에서 수립되었다. (폴란드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데는 이러한 외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 P139

이러한 계산이 이루어진 것은 다양한 살상 설비들의 ‘수용능력‘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일부 죽음의수용소들 인근에 지사를 차려놓고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수많은 기업체들의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산업체들 외에도 파르벤(I. G.
Farben), 크루프 베르케(Krupp Werke), 지멘스-슈케르트 베르케(Siemens-Schuckert Werke)와 같은 유명한 독일 회사들이 루블린의 죽음의 수용소 인근과 아우슈비츠 내부에 공장을 세웠다. 친위대와 사업가들 사이에는 탁월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아우슈비츠의 회스는 파르벤의 대표들과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에 대해 증언했다. 노동 조건을 고려해 보면 분명히 노동을 통한 살인을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파르벤 소속 공장 한 곳에서 일한 대략 3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적어도 2만 5000명이 사망했다.) 아이히만이 관계된 한에서 볼 때 초점이 되는 것은 이동과 운송이 더 이상 최종단계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서는 단지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보류되었을때 아주 격분하고 실망할 좋은 이유가 된 셈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은 유일한 일은 1941년 10월에 있었던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의 승진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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