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9월 2일

어떤 의미에서, 논리에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야 한다. 이것은
‘논리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에 이미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대단히 심오하고 중대한 깨달음이다.
프레게는 말한다: 올바르게 형성된 문장은 항상 의미sinn 를 가져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가능한 모든 문장은 올바르게 형성된 것이고, 만약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구성요소 중 일부에 표의 Bedeutung 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했다고 믿을지라도 말이다.
- P29

정신적 삶을 위해서 비축하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한 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고, 두 시간 후에 죽을지도 모르고, 한 달 후나 아니면 몇 년 후에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죽음을 알지 못하며, 그것에 대항하거나 준비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존립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음과 아름다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삶이 스스로 멎는 순간까지.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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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산 때문에 주요 인구 분포지가 넓은 땅덩어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니 최근까지도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 나라 도로는 절반 정도만 포장된 상태다. 그래서 뭉뚱그려 이란 국민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소수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일명 파르시 Farsi라고도 하는 페르시아어는 이란 국민의 60퍼센트가 사용하는 공식 언어다. 그러나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족), 아르메니아인 모두 각기 고유 언어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아랍인, 체르케스인, 그리고 반유목 생활을 하는 루르족 같은 여러 소수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지아어를 쓰는 마을도 있는데 대략 8천 명의 유대인이 사는 이 작은 공동체는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까지 그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 P71

특히 쿠르드족이나 아제리족처럼 비교적 큰 집단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이 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늘 강력한 중앙 집권과 억압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 집단을 통제해서 어떤 지역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임자들의 이런 정책 기조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쿠르드족은 국가의 공격적인 동화 정책에 맞서 자체 문화를 고수하는 산악지대 사람들의 가장 전형적인 표본이라 하겠다. 이란 정부가 소수 민족에 대한 통계를 명확히 밝히기를 꺼리다 보니 이들의 정확한 수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을 참고해서 추정해 보면 쿠르드족은 이 나라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략 850만 명정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16퍼센트 정도 차지하는 아제리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이다. 이들 대다수는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정착촌과 인접해 있는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쿠르드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민족성, 언어, 독립적 기풍, 그리고 시아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그들 대다수가 수니파라는 사실때문에 수세기 동안 중앙의 당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말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 소규모 쿠르드족 지역들이 독립을 선언한적도 있으나 중앙 정부가 정국을 장악하자 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 이란 혁명‘이 벌어지자 또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란군은 3년에 걸쳐 이들을 진압한 적이 있다. - P72

이란이 세계에서 4번째로 원유 매장량이 많고 천연가스도 2번째로많은 사실만 두고 보면 이 나라는 굉장히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아바단의 정유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전쟁 이전의 생산량을 겨우 회복한 상태다. 또 이란의 화석 연료 산업은 비효율적인 걸로 악명 높은데 국제적인 경제 제재로 인해 첨단 기자재를 들여오기가 어려워진 현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란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 해외 전문가들의 수 또한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이란산 연료를 구입하려는 국가들 또한 많지 않다.
이란에게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은 뭐니 뭐니 해도 에너지다. 주요 유전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와 맞닿은 지역에 있고,
좀 더 작은 유전들은 내륙의 콤근처에 있으며, 가스전은 주로 부르즈 산맥과 페르시아만 쪽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orman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요 수출로 중 하나가 된다. 이곳이 이 나라가 개방된 해양 항로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데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4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든 선적 항로의 폭은 3킬로미터를 겨우 넘는 정도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그 사이에 3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두고 있다. 이란에게 이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 P74

현재 약 3천5백만 명이 사는 이 나라에는 1세기 전에는 대략 2백만 명이 살았다. 그들 대다수는 유목민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지대다. 이곳에는 석유와 모래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를 20세기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킨 것은 다름 아닌 화석에너지원이었다. 석유야말로 이 나라가 주요 동맹국이자 보호국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기도 하다. - P147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이 부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극단적인 브랜드인 해석을 수출하는 이 나라를 석유에 목말라하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게 해주고 있다. 최근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왕이나 석유 갑부가 아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가 조금씩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검은 원유밖에 없는 국토, 다루기 힘든 국민들, 정통성 시비에다 안팎의 적들에게까지 시달리는 사막 국가의 왕조는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나라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대화다.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이 시도는 중동의 보다 넓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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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들은 부상했다가 쓰러진다. 동맹들은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나폴레옹 전쟁 (1797-1815년) 이후에 맺어졌던 유럽의 합의는 60여년간 이어졌다. 히틀러가 꿈꾸던 천년제국은 고작 10년을 웃돌았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에 어떤 식으로 <힘의 균형>이 바뀔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적, 지정학적 공룡들이 여전히 국제정세를 부여잡고 뒤흔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EU의 각 나라들, 또 인도처럼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 강국 등이그들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나라들이라고 간과할 수는 없다. 지정학은 동맹을 끌어들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 세계 질서에서 강대국들은 반대편 못지않게 그들 편에 설 약소국들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은 터키나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같은 나라에게 미래 권력을 향해 전략적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현재는 그 만화경의 조각들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어서 완전히 제자리를 찾지는 못하고있지만 말이다. - P13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외교정책과 국방 문제에 이르렀을 때 이 나라의출발점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그러했듯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그 나라의 면적과 위치는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덕분에 외부의 침략에는 안전했지만 정치적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광범위한 장거리 교역망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 항로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 게다가 주요 우방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P24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다. 이것이 훗날 개척전쟁 (FrontierWars, 1788-1934년)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2천 명의 식민지 주민들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추정한다.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 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단됐는데 그때까지 소위 <도둑맞은 세대 >가 10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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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천2백 년 전에 중국의 진시황제는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사람들한테 사형 명령을 내렸다. 아스텍 사람들은 15세기에 멕시코 계곡을 정복했을 때 과거 국가의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고, 1620년대에 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 사람들의 모든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다.
20세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공식 역사가들에게 도전한 사람들은 투옥과 망명과 사형을 당했다. 30년 전만 해도 스페인 역사가들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시 폭격 사건을 파헤치거나헝가리 역사가들이 1956년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이런일은 최근까지도 계속돼 왔다. 그리스의 내 친구들은, 제1차세계대전 전에 그리스가 어떻게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는지를 정부와 다르게 설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방 공업국에서는 노골적인 국가 탄압이 비교적 흔치 않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더 은밀한 방식으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책을 쓰고 있는 지금 신노동당 정부는, 학교에서 영국의 역사와 업적을 강조해야 하며 위대한 영국인들의 이름과 연대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기성 지배 세력의 의견에 가장 가까운 역사가들이 명예 학위를 차지하는 반면, 그 의견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지 못한다. ‘타협‘은 여전한 ‘출세 방법‘이다.
최초의 파라오 시대(5천 년 전) 이후로 지배자들은 자신과 선조들이 이룩한 ‘업적‘을 나열한 것을 역사로 내세워왔다.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도시와 기념물을 세웠고, 번영을 가져왔고, 위대한 업적과 군사적 승리를 이룩했으며, 반대로 ‘악한 인간들‘이 세상에 온갖 나쁜 것을 퍼뜨려왔다는 식이다. 최초의 역사 문헌들은 군주와 왕조의 이름을 나열한 것들로서, ‘왕들의 목록‘이라 불린다. 40년 전까지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족보를 배우는것이 역사 수업의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 신노동당(그리고 야당인 보수당)은 이런 교육을 부활시키려는 듯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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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천2백 년 전에 중국의 진시황제는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사람들한테 사형 명령을 내렸다. 아스텍 사람들은 15세기에 멕시코 계곡을 정복했을 때 과거 국가의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고, 1620년대에 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 사람들의 모든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다.
20세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공식 역사가들에게 도전한 사람들은 투옥과 망명과 사형을 당했다. 30년 전만 해도 스페인 역사가들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시 폭격 사건을 파헤치거나헝가리 역사가들이 1956년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이런일은 최근까지도 계속돼 왔다. 그리스의 내 친구들은, 제1차세계대전 전에 그리스가 어떻게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는지를 정부와 다르게 설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방 공업국에서는 노골적인 국가 탄압이 비교적 흔치 않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더 은밀한 방식으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책을 쓰고 있는 지금 신노동당 정부는, 학교에서 영국의 역사와 업적을 강조해야 하며 위대한 영국인들의 이름과 연대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기성 지배 세력의 의견에 가장 가까운 역사가들이 명예 학위를 차지하는 반면, 그 의견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지 못한다. ‘타협‘은 여전한 ‘출세 방법‘이다.
최초의 파라오 시대(5천 년 전) 이후로 지배자들은 자신과 선조들이 이룩한 ‘업적‘을 나열한 것을 역사로 내세워왔다.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도시와 기념물을 세웠고, 번영을 가져왔고, 위대한 업적과 군사적 승리를 이룩했으며, 반대로 ‘악한 인간들‘이 세상에 온갖 나쁜 것을 퍼뜨려왔다는 식이다. 최초의 역사 문헌들은 군주와 왕조의 이름을 나열한 것들로서, ‘왕들의 목록‘이라 불린다. 40년 전까지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족보를 배우는것이 역사 수업의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 신노동당(그리고 야당인 보수당)은 이런 교육을 부활시키려는 듯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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