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이슬람 민족인 로힝야는 오래전부터 라카인주에 정착해 불교 중심의 미얀마 문명과 공존해왔다. 일부 로힝야 난민과 관련된 기사에 달리는 다음과 같은 댓글은 사실이 아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 사람이 아닌 방글라데시 출신의 무슬림 불법체류자다." 이는 미얀마 정부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내용일 뿐이다.
1885년부터 미얀마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이 수탈한 비옥한 아라칸(현재의 라카인)의 농토를 경작할 목적으로 방글라데시 동부(치타공) 지역 주민의 이주를 장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사이의 국경이 확정되기 이전으로 두 지역을 오가는 데 법적 제재가 없었다. 로힝야 사람들의 일부 조상이 방글라데시 이주민일 수는 있어도, ‘불법‘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 영국 식민 지배 당시에는 이처럼 국외에서 미얀마 전역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로힝야 사람들은 자신들만 문제 삼는 것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사람들을 ‘벵골인‘이라고 부른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미얀마 내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로힝야는 1948년 미얀마 독립후 다른 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던 과거도 있었다.
하지만 196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이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부정하면서 삶의 뿌리가 흔들렸다. - P75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쓴 1899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수단은, 1956년 독립했지만 북쪽 아랍계 무슬림과 남쪽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독립 후 수단의 불안 요소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수단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의 끊임없는 개입이다. 이 때문에 수단은 독립 후에도 이집트와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 P93

둘째는 수단 내 이슬람 종파 간의 잦은 세력 다툼이다. 주로 수단 북부에 살고 있는 아랍계 무슬림 인구는 수단 인구의 75%를 차지했는데, 그들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었다. 셋째는 흑인계 주민들의 반정부 활동이다. 수단 남부 지역 3개 주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수단 인구의 25%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북수단의 아랍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보통 수단 내 갈등을 ‘북부 아랍계 무슬림‘과 ‘남부 아프리카흑인 기독교도‘의 구도로 단순화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사실과거리가 멀다. 더글러스 해밀턴 존슨 Douglas Hamilton Johnson은 《수단내전: 원인, 실상 그리고 평화 The root causes of sudan‘s civil war》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단 내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하다. 20년 넘게 내전이 지속되면서 남과 북 사이의 명확한 경계선은 사라졌고, 내전은 수단을 넘어 주변국으로까지 번진 지 오래다. 수단 내전은 무슬림이 무슬림을 상대로, 아프리카 사람이 아프리카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이다. 이렇게 수단 내전에는 여러 요인이 서로 맞물려 있다. 한때는 국제적인 원인과 동아리카의 정치 질서에서 내전의 원인을 찾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단 내전이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내전의 근본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존슨은 남부 지역에 살았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토속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북수단의 이슬람 개종 요구에 반발심을 가진 남수단 주민들 가운데 비교적 많은 수가 기독교로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수단 아프리카계가 모두 기독교도인 것처럼 설명하면 안 된다. 오히려 종교를 내전에 이용한 측면을 봐야 한다. - P94


‘주니의 아버지 이름은 ‘로넬 나니 차크마‘다. 로넬의 고향은 김포에서 3700킬로미터 떨어진 방글라데시 치타공이다. 로넬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그들은 산악 지대인 치타공에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치타공에서 살아온 차크마, 마르마, 트리푸라, 텅창갸 등 11개소수 부족 75만 명을 통틀어서 ‘줌머‘라고 한다. 전체 인구가 1억6000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줌머의 사전적 뜻은 ‘화전농을 하는 사람들이다. 치타공은 인도,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는 방글라데시 남동쪽에 있다.
영국은 1947년까지 인도반도를 지배했지만 줌머가 사는 치타공까지는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의 주류인 벵골인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줌머인은 대부분 불교를 믿으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줌머인들의 치타공은 영국 식민 지배가 끝나고 파키스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파키스탄 정부는 1962년 치타공 중심에 있는 카르나풀리강에 캅타이댐을 지으면서 치타공의 가장 비옥한 경작지 40%를 수몰시켰다. - P132

이 과정에서 줌머인 10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되었다. 줌머인은 강압 정책을 펼치는 파키스탄에 맞서 벵골인들과 함께 싸웠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결과로 1971년 12월16일,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독립을 맞았다. 하지만 줌머와 함께 독립을 쟁취한 방글라데시는 줌머인들의 치타공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 P133

방글라데시 정부는 무슬림 벵골인들에게 치타공으로 이주할 것을 장려했다. 1978~1984년 치타공으로 이주하면 1가구당 6000평의 농토를 주고, 식량도 무료로 주었다. 이 기간에 무슬림 벵골인 40만 명이 이주했다. 1979~1997년에 무슬림 벵골인 이주민과 방글라데시 군대는 15회 이상의 대량 학살로 인종 청소를 시도했다. 이 기간에 민간인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줌머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전세계를 떠도는 줌머 난민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인도에 20만 명, 미얀마에 2만 명이 살고 프랑스와 일본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미얀마의 로힝야난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는 방글라데시가 한편으로는 줌머인을박해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치타공 지역에는 방글라데시 무장군인 3만~4만 명이 배치되어 군사적 긴장감이 높다. - P134

‘난민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난민은 무조건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난민 역시 ‘보통의 사람‘임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 체류 중인 난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앞으로 한국에서도 난민 범죄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난민에 의한 강력 범죄가 발생해 ‘난민 혐오‘의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의 사건으로 전체 난민에게 ‘잠재적 범죄자‘라는 혐오의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 P180

불평등하고 불안한 우리는 혐오의 말에 잘 휘둘린다. 혐오의말은 계속해서 세상을 가른다. 우리와 그들, 정상과 비정상으로,
난민과 국민을 갈랐던 문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르고, 다음에는 성소수자, 그다음에는 이주 노동자, 모든 외국인,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 장애인, 여성…………. 문장으로 세계를 나누는 사람들은 저쪽이 아닌 이쪽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계속해서 나누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좁게 만들 뿐이다.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없다. - P181

예멘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잦은 분쟁으로 치안이 불안했고, 좀처럼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과는 1985년 공식 수교를 맺었다. 한국은 1990년대부터 예멘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추진했다. 예멘은 1839년 남예멘이 영국 식민지가 된 뒤 남북으로 나뉘어 분단을 경험했지만, 1990년 5월 통일을 맞이했다.
예멘은 통일된 뒤에도 경제적 번영은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국제정치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1991년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전개된 ‘걸프 전쟁‘에서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연합 요청을 거부하고 이라크의 편에 섰다가 곧바로 유엔의 경제 제재 조치를 받았다. - P188

 사우디아라비아는 100만 명에 가까운 예멘인을 추방했다. 해외 노동자의 송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예멘의 취약한 경제구조는 이러한 압박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한국은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예멘의 한국 대사관을 철수했다. 2001년에는 주한 예멘 대사관도 폐쇄되었다. 국가 간의 공식 교류는 단절되었지만 민간 단위의 교류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예멘은 통일 이후에도 안팎으로 치안이 불안했다. 북예멘과 남예멘은 권력 배분과 통치 방식을 놓고 갈등했다. 1994년 5월,
통일 후 4년 만에 남예멘이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북예멘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무력으로 통일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남예멘의 분리 운동은 이어져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예멘 남부 주민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멘 북부에서는 2004년부터 후티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이 지속되었다.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발생한 민주화 혁명, 이른바 ‘재스민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예멘은 거대한 혼돈의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다. 예멘 국민은 대규모 시위로 33년동안 장기 집권한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을 축출했다.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Abdrabuh Mansur Hadi 부통령이 과도정부의 수반 역할을 맡았다. - P189

축출된 살레 대통령은 후티 반군과 연합해 재기를 꾀했다.
2014년 9월,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지원을 받는 살레---- 후티 반군이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수도 사나 점령에 성공했다(살레전대통령은 2017년 12월 4일, 이해관계가 엇갈린후티 반군에 피살당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되었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후티 반군은 이듬해 정부가 제안한 헌법초안을 거부하고, 하디 대통령을 항구도시 아덴으로 내몰았다.
2015년 3월에는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정부연합군이 이란 세력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시작하면서 확전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3년 넘게 지속되면서 1만 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은 840만 명이 예멘 내전과 기근으로아사 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했으며, 예멘을 ‘세계 최대 인도주의위기 국가‘로 규정했다. 전쟁을 피해 예멘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도는 피란민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2017년 여름에는 설상가상으로 역사상 최악의 콜레라가 발병했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예멘에서 100만 명이상이 콜레라에 걸렸고, 2000명 넘게 콜레라로 숨졌다고 보고했다. 이브 지역에서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디프테리아까지유행하면서 수십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후티 반군의 지배를 받았던 이브 지역의 에브라힘 집 바로 옆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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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그 어떤 언론도 카슈미르 주민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카슈미르에는 언론사가 있지만 자율적으로 보도할 수 없다.
‘어떤 보도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카슈미르 관점에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모두 ‘침략자‘다. 그들에게 카슈미르는 서로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놀이터‘다. 하지만 이 싸움은 단순히 인도와 파키스탄의 알력 다툼이 아니다. 양쪽 카슈미르에 사는 2000만 동포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전쟁이다.
카슈미르는 유엔이 인정한 독립 국가이지만 카슈미르 사람들은 카슈미르 땅에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폭력이 없는 평화적인 저항도 용인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1000명 넘는 사람이 인도군이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쏜 고무탄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300명이 넘는 ‘순교자‘가 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카슈미르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바쳤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카슈미르의 목소리는 미약하다. 인도와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 그들의 이익을위해 이용하려고만 한다. 선거철이 다가오는 인도에서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빌미로 표몰이를 한다. - P50

노웨어 맨, 아미르의 고향 발루치스탄은 19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영국 지배하의 발루치스탄은 1935년과1945년 대규모 지진을 겪은 뒤 194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해체되면서 자치권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1948년 3월 파키스탄이 강제로 들어와 불법 점령했다고 발루치스탄 사람들은 주장한다. 발루치스탄인들의 삶의 터전은 세 조각으로 찢겨 주변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편입되었다.
발루치스탄은 파키스탄 4개 주 가운데 석유와 천연가스, 각종광물과 해양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지만 주민들은 이 자원의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마실 물조차 부족한 사람이 즐비하다.  - P54

파키스탄 정부가 모든 자원을 통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발루치스탄사람들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발루치스탄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은 1948년부터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70년이 넘도록 싸우고 있다.
이러한 저항에 파키스탄 정부는 강력한 무력으로 맞서고 있다.
발루치스탄에서 2011년부터 2016년 말까지 사법 절차를 거치지않고 죽임을 당한 뒤 버려진 주검이 1000구가 넘는다. 발루치스탄의 인권 단체 ‘실종 발루치인의 목소리VBMP‘는 직접 조사한 죽음만 1200건에 이르고 파악하지 못한 죽음까지 포함하면 훨씬많을 것으로 본다.
파키스탄 정부의 70년이 넘는 무력 탄압에 주민들의 독립 의지도 꺾인 탓인지 2012년에 발루치에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주민의 다수는 분리·독립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직37%만이 발루치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민의 대다수인 67%는 독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발루치스탄 영토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누리기를 바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비옥한 영토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차별받고 있으며, 경제적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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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폭스콘 공장노동은 감시, 비밀주의, 의미 없는 반복, 남 좋은 일, 대인관계 축소를, 보험 판매는 정확히 그 반대를 의미했다. 자유, 개방성, 유용한 지식, 기업가 정신, 대인관계 확장 등등 자원노동과 서비스노동을 비교할 때도 그와 나는 엇박자를 탔다. 내가 봤을때 무임노동인 자원노동이든, 임금노동인 보험 판매든 공공의 책임을 ‘윤리적‘ 시민과 수익성 사업 섹터에 각각 떠넘긴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쭤메이는 둘 간의 공통성을 ‘존엄‘과 ‘돌봄‘이란 단어로 집약했다.
당시 그의 위챗 앨범은 보험회사에서 직접 제작했거나 유통하는 각종 콘텐츠로 가득했다. 가족애, 사랑, 우정, 연애, 결혼, 건강 등 다양한 주제의 포스팅이 미묘하게 보험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오프라인에서 쭤메이는 내게 보험을 사기로 생각하는 대중의 편견을 우려했고, 온라인에는 보험의 ‘이타성‘을 환기하는 콘텐츠를 꾸준히 공유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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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최저생활보장 제도를 1990년대 말 도시에서 처음 시행했을 때, 이들 다수가 노동자가 아닌 수급자로 재등장했지만 말이다. 질문거리가 많았다. 인민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도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빈곤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할까? 사회주의 독트린을 고수하는 나라에서 국가는 사회주의 대표 계급의 빈곤화에 어떻게 개입할까? - P75

도시는 개인이 각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분투하고, 결혼----출산양육을 통해 노동력을 원활히 공급하고,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부강이 일체화되는 ‘대중유토피아‘ (벅모스 2008)의 공간이었다. 도시 질서를 위협하는 자격 없는 국민 인민에 대한 통제 역시 한국과 중국에서 비슷하게 등장했다. 사회적 빈곤은 유기적 사회질서구성을 위한 기술들을 고안해내기 위한 개발구역으로, 이 새로운사회질서는 지금까지 특정한 형태 없이 존재해온 사회적 삶의 영역들을 관리 아래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로카치 2014 245-246)정부는 부랑인이나 소매치기, 성매매 여성을 사회문제로 보고, 이들의 문제를 습속 탓으로 돌리면서 대대적인 지도와 통제에 나섰다. - P85

 이들을 시설(한국)이나 수용소(중국)에 감금한 채 의식 개조와 노역을 강제하거나, 정착 이주 사업을 통해 국토를 개척할 임무를 맡겼다.(김아람 2021 박해남 2021 추지현 2021 디쾨터 2016) 군사정권 시기 도시하층민을 부랑인이란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갖은 학대와 노역을 일삼은 일명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에야 공론화되면서 피해 생존자들의 진실 규명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사회명랑화사업‘의 일환으로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하고, 이들의 강제노역, 강제집단 결혼, 성폭행 등 인권유린을 방조한 역사는 최근에야 서산개척단 사건‘으로 알려지며 진상 규명이 시작되었다. 서산개척단의 공식 명칭은 ‘서산자활정착사업‘이었고, 형제복지원은 자활의 기치 아래 모범 표창을 휩쓸며 운영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자활이 없는 노역"이 정부의 보조금과 민간 복지시설의 수익사업을 결합한 ‘자활사업‘을 가능케 했고,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수용자들의 ‘사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소준철 2021: 193) 의존할 대상을 곁에 두지 못한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멀리 쫓겨나거나 안에 감금된 채 의존의 혐의를 받고 ‘자활‘을 강요받았던 셈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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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동서고금의 현상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를 ‘빈곤‘이란개념으로 문제화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빈민the poor"
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엽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인클로저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남루한 사람들의 무리와 그 집합적 삶의 양태를 ‘사회‘라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영역으로 새롭게 포착하고, 빈곤과 빈민을 (종교적•개인적 문제가 아닌)‘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 P28

의존이 인간의 생존과 실존에 있어 고유한 양태임에도 우리는 어째서 이를 말하기 꺼리거나 특정한 상황에만 적용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빈곤은 어째서 ‘의존‘ 의존성‘ ‘의존적‘과 같은 표현들이가장 명시적인 부정성을 띤채 범람하는 현장이 되었을까?
역사적으로, 빈곤에 대한 경멸과 노동에 대한 찬양은 동전의 양면인 경우가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독교적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던 중세 유럽에서도 흑사병으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이들의 노동 회피를 문제 삼는 정책이 등장했다. - P68

 노동을 기피하고 부랑 생활을 일삼는 경멸스러운 ‘걸인‘과 노동력을 상실하여 기독교 윤리에 따른 자선으로 구제받아야 할 ‘빈민pauvre‘이 14세기 중반 프랑스 국왕 칙령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홍용진 2016 : 75-77) 오늘날까지도 공공부조 체계를 갖춘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능력의 유무에 따라 수급자를 관리하는 제도나, 노동 의지에 따라 자격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분하는 관행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살면서 ‘어떤 의존을 하는가‘를 묻기보다, 노동을 척도로 의존이나 자립이냐‘를 판별하는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이때 노동이 갖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든, 경제적인 생산관계에 편입된 노동
‘밥벌이‘가 가능한 노동이 의존과 자립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노동 의지에 따라 다른 형태의 빈민 통치가 작동했다는 점은, 빈곤이 단순히 부에 대응하는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품행의 심사장이었음을 뜻한다. 조반나 프로카치는 이 점에 주목해 18-19 세기 유럽에서 사회적 빈곤에 관한 문제의식이 등장하는 과정을 살폈다. 당시 유럽에서 부의 증대에 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고전적 정치경제학은 빈곤을 풍요의 대응물로 취급하면서 ‘빈곤의 정치‘가 갖는 유용성에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 반면 주변화된 영역이던 사회경제학은 빈곤을 자본주의 메커니즘이나 소유권과 연결하기보다 사회유대의 붕괴, 제도의 미비,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 문제화하면서, 문제의 진단과 처방을 둘러싼 일련의 지식과 통치 기술을 고안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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