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 개관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줄리오 두에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집중된 1차대전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주목하면서, 지형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임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공군력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했다. 두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곧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두에는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 '전략폭격'의 효시가 된 생각들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두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군력에 의한 적의 핵심지역(vital centers) 무력화를 강조했다. 두에는 심지어 "군사목표보다 공업목표를 중시해야 하며, 적국의 도시에도 인정사정없이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군사작전의 핵심 파괴 대상이란 적 병력이 아니라 오히려 적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이었다."(28)


# 전략폭격과 전술폭격

1.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 :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적의 주요 도시나 생산시설, 정치·군사의 중추부 등을 파괴하는 폭격작전

2. 전술폭격(tactical bombing) :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관 임명은 영국 공중폭격정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정부와 공군은 공중폭격 결과의 미미함에 대해 국내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공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처칠은 공중폭격 여론에 내몰렸다.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2년 초 영국정부와 공군은 마침내 과감한 해결책을 뽑아들었다. 영국정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좀더 솔직하고 군사적으로는 좀더 효율적인 '지역폭격'이라는 공중폭격정책을 제시했다. 지역폭격은 '목표구역폭격'(target area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하게 분리된 다수의 목표를 단일 목표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즉 군수공장이나 항구, 철도조차장 같은 군사 용도 시설과 주변 주거구역 등 시가지 '전체'를 하나로 묶어 군사목표로 간주해 일정 지역을 통째로 융단폭격하는 방식의 폭격작전이다."(35)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유럽에서와 동일한 정밀폭격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공군과의 공조 속에서 지속되었던 유럽에서의 정밀폭격과는 달리, 일본 군사·산업시설을 향한 정밀폭격은 그 효율성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945년 1월, 헨리 아널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태평양지역에서의 국면전환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 배치된 미공군 부대들을 전면 철수하고, 모든 B-29기들을 마리아나기지에 집결시켜 하나의 지휘통제 아래 둘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정밀폭격을 주장하던 헤이우드 한셀을 대신해 커티스 르메이를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공군의 전략폭격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 된 르메이는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민간지역 무차별 폭격작전의 상징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40-1)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의 대만·조선·중국의 저항세력을 향해 무차별폭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는 1920년 간도출병 당시의 조선인 거주지 폭격과 1930년 대만에서 발생한 항일무장봉기 우서(霧社)사건 진압시 공중폭격 등을 들 수 있다. 간도출병이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남동부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이 급증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제19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등을 간도에 투입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鮮支人,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칭)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7-8)


"일본군은 1910년대 이래 다양한 공중폭격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는 선진적인 항공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0년부터는 일본산 비행기 시대를 열었고,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武漢)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一夜)」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 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48-9)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전후 수립된) 합동참모본부의 비상전쟁계획은 유럽지역 적극공세와 극동지역 전략방어라는 큰 틀 속에서 '공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소련에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은 이러한 전쟁계획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소련 주변부 공군기지 확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945~46년 중국 서부지방과 이탈리아의 공군기지들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상황과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해 중국의 공군기지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탈리아 또한 소련 공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합참의 계획에서 빠지게 되자 합참은 새로운 지역들을 미군 전쟁계획의 주요 거점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947년 합참은 일본과 류큐열도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한 주요 공군기지로 선정했다. 더불어 미국의 여러 주요 인사들은 류큐열도에 위치한 오키나와를 극동지역 전략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1-2)


1948년 6월 8일 벌어진 독도폭격사건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실들을 짚어보면 "우선 냉전 초기 독도폭격훈련은 소련과 북한을 향한 미군의 '위력과시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독도폭격사건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 중 하나는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에 관한 부분이다."(78-9) "2차대전기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현재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도폭격사건이 2차대전 종료 후 불과 3년 뒤에 발생했다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처럼, 독도폭격사건 2년 후에 발발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아시아인을 향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결코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불과 5년 전 극동지역에서 무차별 대량폭격을 수행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무대를 고스란히 한반도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


제2부 북폭


"1950년 7월 7일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황은 겉보기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7월 5일 북한군은 오산에서 미 지상군과 최초로 교전하여 그 병력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 서술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도부는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대 소련 문서에서 보듯,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지도부는 소련대사 앞에서 자신의 불안과 당혹감, 좌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소련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전쟁 초기 북한지도부의 불안과 좌절의 표면적 원인은 전쟁 초기부터 본격화된 미공군의 북한지역 대량 폭격 때문이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식민지기(期) 경험을 통해 획득한 다양한 공중폭격 관련 지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86-7)


4장 정밀폭격


북한지역 공중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1950년 7월 8일 창설된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전쟁 초기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도·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즉 한강에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북한군 수송망을 차단하고, 북한군 병참보급에 도움을 주는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폭격기사령부의 주임무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지역 폭격 목표는 거의 모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폭격기사령부는 북한지역 출격 이전에 목표물을 구체적으로 배정했는데, 대부분은 평양, 원산, 흥남, 함흥, 청진, 나진, 성진 등 북한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대도시지역에 국한된 이유는 폭격사령부의 작전 자체가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이라는 2가지 작전개념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104)


# 차단작전(interdiction) :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 도로, 철로,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전쟁 초기 양측의 목표물 인식은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미 극동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이라는 폭격정책에 따라, 원산의 조선정유공장·조차장·선착장 등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폭격기의 타깃이 5년 전 일본 본토 폭격 당시처럼 도심의 민간지역을 향한다고 주장했다."(117) "원산은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달가량 지속된 폭격에 의해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산지역 민간인 주택 수백채와 북한주민 수천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미공군은 전쟁 발발시점의 폭격정책에 따라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모색했으나, B-29기를 이용한 고공폭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했다는 미공군 측 주장과, 도시지역 전반에 무차별 폭격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19-20)


# 그 외의 폭격 지역 : 흥남·평양·청진·나진·함흥·겸이포·성진


"한국전쟁 초기 B-29기의 폭격양상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포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물을 향해 투하하곤 했다. 이런 경우 조종사와 폭격수는 매우 세밀한 목표물 판단근거를 지녀야 했는데, 실상 그들은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갖추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고,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요했다. 실상 B-29기는 굳이 레이더폭격이 아닌 주간육안폭격을 수행한다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주변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B-29기의 높은 '오폭률' 때문이었다."(144)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146-7)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1939년 일본군의 충칭폭격을 목격하고 에드거 스노우가 표현한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50년 9월 9일 9일 『로동신문』은 미공군의 평양폭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높이 솟았던 선암리 교회당과 고아원 및 기타 문화시설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연 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들을 부르는 비통한 목메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며, 구호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진 벽돌을 헤치고 어린이와 늙은이들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폭격 현장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은 김리익은 다음과 같이 미국을 향한 증오를 표현했다. "우리는 원쑤들의 이 만행을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골수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152-3)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한국전쟁기 제5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기본적으로 미공군의 일반적 전술항공작전 개념 속에서 작동했지만,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컨대 공군의 보편적인 전술항공작전은 크게 제공권 장악, 전선지역 차단, 지상병력 화력지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미공군은 일반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가장 중시했고, 다음으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차단작전을 중시했으며,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은 이상의 작전이 완수된 후에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는 이러한 단계설정이 상당정도 와해되었다. 북한 공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제공권 장악을 단기일 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상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차단작전보다 전선의 지상군에게 직접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근접지원작전(Close Air Support)이 중시되기 일쑤였다."(170)


"한국전쟁 초기 매우 불안정했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속에서 속출했던 미공군의 유엔지상군 공격 사례들은 명백히 '오폭'으로 분류 가능한 사건들이지만, 당시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이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수많은 임무보고서들은 미공군 전폭기들이 전술항공작전에서 전선 인근의 촌락들을 애초부터 타깃으로 설정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근리사건조사반은 노근리사건 발생을 전후한 시점의 미공군 전폭기 임무보고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 속에 해당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대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들 대부분이 남한의 도시와 농촌, 혹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 행렬을 향한 전폭기의 무차별적 공격이 일상적인 임무인 듯 너무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180-1)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과거 2차대전기 상당수의 미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인종우월주의, 군국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숭고한 성전(聖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지원한 공군 조종사들은 달랐다. 조종사 선발, 교육, 임무브리핑, 작전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들은 오히려 탈색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조종사 개개인의 전투 동기부여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일본군의 진주만공격, 미군포로 학대 등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종사들은 개인적 출세와 성공과 같은 원인들에 이끌려 매일 조종간을 잡고 있던 셈이다."(188-9)


"개인적 성공이라는 목표 외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요했던 비행 동기부여 요소는 '동료들의 압력'이었다. 조종사들은 일단 공격을 위한 진입대열에 서면 동료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투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공격을 중단시킬 권한은 대개 전투경험이 풍부한 편대장만이 갖고 있었다. 편대원들은 용맹한 편대장들의 통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출세나 동료들의 압력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였다. 2차대전기 조종사들에게 강조된 파시즘의 축출 같은 정치적 구호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완전히 논외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그저 정찰병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무감각하게 임무 구역 내에 폭탄을 소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들은 자신의 타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작전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며, 왜 그 같은 공격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되묻는 경우가 없었다."(190-1)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업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셔우드의 인터뷰 분석결과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192-3)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유도에 의한 공중폭격은 전폭기의 전술항공작전 수행에서 가장 원칙적·보편적으로 활용되는 폭격절차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통제관의 유도에 의한 폭격은 목표물 발견이 힘든 전폭기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성격 규명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정찰병의 유도에 의해 공중폭격을 실시하는 경우, 일단 공격지시가 하달되기만 하면 모든 전폭기 조종사는 공격지점의 적 병력이나 민간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이 직접 작성한 수많은 임무보고서와) 전쟁 중 실시된 조종사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은 연료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공격지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반문하지 않고' 공격을 실시했다."(198)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적 '시험폭격'에 대해 증언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대낮에 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력을 찾아내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전폭기 내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미공군 조종사들은 점차 적 병력이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점차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지역 시험폭격'에서 민간인 거주지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수의 조종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육감'(hunch)에 의존해 남한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적 병력을 찾아내 살상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네이팜탄 투하나 기총소사로 인한 시험적 공격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5-7)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B-29기를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차단작전에만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지상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B-29기를 남한의 지상군 '교전지역'까지 불러들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지상군의 수세상황에 맞서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을 매우 강조했다. 특히 파병시기가 가장 빨랐던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7월 9일 맥아더는 B-29 중폭격기 전부를 출동시켜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 B-29기들의 근접지원작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낙동간 북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주변에 병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3일 극동공군사령관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 '전부'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하라고 지시했다."(229-30)


"극동공군은 1950년 7월 한강 남안을 따라 최초로 폭격선을 설정했는데, 이 폭격선이 유엔군 후퇴와 함께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 공격시에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의 남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없는 공격의 범위는 남한지역 전반에 걸쳐 점차 확장되었다." "(열차, 차량, 탱크, 병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남한지역 교량 공중공격은 필연적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길을 떠난 민간인들이 피난행로의 병목과도 같은 교량에 대거 운집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전선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유엔 지상군과 공군은 피난민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교량을 폭파하곤 했다."(238-40)


제4부 초토화정책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맥아더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발언은 실제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을 명령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래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되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 상공에서 현실화되었다. 1950년 겨울, 유난히 추웠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268-9)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대는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바로 그날,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둥(지금의 단둥), 장전하구, 지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각각 신의주, 삭주, 만포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3병단 예하 4개 군 12개 사단을 포함해 총 병력 26만명에 달했다. 애초 이들은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방침은 유엔군의 북한지역 전진 방식에 조응하여 급속히 변경되었다." "모든 유엔군 부대들은 성과달성을 위해 마치 국경선까지 경주대회라도 하듯 정신없이 전진하면서 적에게 자신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중국군은 이렇듯 고립된 상태로 접근해오는 유엔군 부대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각개격파"해나갔다.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중국군을 만난 미군과 한국군은 여지없이 그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282)


"(초토화정책을 결정한) 맥아더는 (만주 국경 8킬로미터 이내 지역을 폭격에서 제외한) 합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력과 물자가 유엔군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합참 명령의 즉각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합참에게 보내는 다른 전문을 통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궁지에 몰리거나 여태까지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협박했다. 결국 합참은 "기존에 계획했던 신의주 표적과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하는 국경 인근 북한지역 폭격을 허용한다"고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국경지역 폭격을 허용하는 전문에거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러나 해당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민간지역 폭격에 신중해야 한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290)


11장 불타는 눈밭


"(2차대전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인 반면, (한국전쟁기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넓은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 매개체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다. M-76 내에는 '굽'(goop)이라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다.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 덩어리로 변한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으레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섭씨 1980도까지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킨다. 신의주폭격 사진에서 유난히 하얗던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증명한다."(303-4)


"미공군은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후, 화염이 수일 동안 불탈 수 있도록 (도시주민들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를 쏟아부으면서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진화작업의 방해를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의 도시 전지역에 대한 시한폭탄 투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0년 8월과 11월 극동공군은 남북한 도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던 것이다. 작전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다. 북한주민들은 기총소사 및 시한폭탄이 두려워 소이탄의 화염을 감히 끌 엄두를 못 냈다."(307-8)


"제12전폭대대 F-51 전폭기편대들의 임무보고서는 중국군 개입 이후 미공군 전폭기들의 작전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폭기 편대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부분의 전폭기 임무보고는 회항 직전의 마을 폭격에 대한 묘사에서 "공격"(attack)이나 "폭격"(bomb)이라는 표현 대신 "소진"(expend)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했다. 전폭기들은 탑재한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붓고 난 후에야 기지로 돌아왔다."(312)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953년에 접어들며 미공군은 더이상 값어치 있는 목표물을 찾아낼 수 없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향해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민간지역을 향한 대량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장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위 '항공압력전략'이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대부분 토굴생활로 어렵사리 살아가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무고한 민중들에게는 또다시 커다란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폐허 아래 지하 토굴마저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은 모든 북한주민들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정전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 대표들은 공히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폭격을 견뎌내야 했던 북한주민들에게 2년의 협상 기간은 그저 비인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간에 불과했다."(336)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사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정전협상이 시작된 후 1년여의 기간(1951년 6월~52년 6월)을 철도차단작전의 시기로 정리한다. 실제 이 시기 북한지역 철도차단은 미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 중 하나였다. 38선 인근의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열차는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북한이 화물과 여객 수송에서 (각각 90퍼센트와 62퍼센트를)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과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철도부설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철도건설에서 군사적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항만집중적이고 남북종단적 성격을 띤 철로를 건설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일본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도 주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39-40)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 및 교량 복구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스트랭글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쌔처레이트작전으로 대표되는 미공군의 집중적 차단작전은 사실상 '기계와 인간의 전투'에 다름없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 자체가 1차대전기의 참호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의 사활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은 일본과 남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보충병력, 물자, 무기를 어려움 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으로 인해 후방에서 또다른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북한주민들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야간 철도복구와 노무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상당수가 밤낮을 바꿔 살아야 했다."(347)


13장 항공압력전략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북한지역 폭격피해에 대해 직접 보고했던 1952년 7월은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의 북한지역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상이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극동공군은 차단작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소위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이 시기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은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제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359) "(랜돌프와 메이오는 '항공압력전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철도와 노반을 가장 낮은 수위에 배치했다. 동시에 중요 목표물 리스트를 새로 작성했는데, 그 첫번째는 "보급품"(supplies)이 제시되었고, "후방의 병력과 인력"(rear area troops and manpower)과 "도시와 마을의 건물들"이 주요 타깃으로 추가되었다."(361)


"극동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공산측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타깃으로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의 수력발전소들은 일본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수립한 당대 최고 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전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해냈다." "1952년부터 미공군 정보보고서들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지하시설을 통해 재건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극동공군은 지하갱도를 따라 재건된 북한 산업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산업시설 직접 파괴가 아닌 동력원 파괴가 좀더 효율적인 작전으로 부상했다. 동력이 없는 암흑 속에서 북한의 생산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력발전소의 파괴는 어느새 극동공군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363-4)


"1950년대 미공군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의 묘사를 인용했다. "공산군의 마을 보급품 집적소(supply dumps)와 '예전에 건물들이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눈 덮인 공터'에 대한 딘 장군의 묘사는 이 같은 보급품(supply), 병력(personnel), 통신센터(communication centers) 파괴의 실질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딘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폭격피해의 대상을 그저 "소도시"(towns)와 "마을주민"(villagers)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수많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후 미공군은 여전히 북한의 도시와 농촌 폭격을 보급품 집적소, 병력, 통신센터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었던 미공군의 비인도적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가 전후 미군의 공식 역사에서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382-3)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6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장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


1절 조봉암의 피해대중론과 농민


"조봉암은 제헌국회 초기부터 인민에 대한 권력의 횡포를 경계하였다. 그는 헌법제정시 경찰이 하고자 하면 어떤 구실로든지 양민을 구금할 수 있어 신체의 자유가 없는 상태이므로 그에 대한 제한은 오직 현행범에 국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1952년 8·5정부통령선거에서 제시한 10가지 정견에서 네번째로 "억지로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만들려는 죄악적인 파쟁을 근절할 것"을, 여섯번째로 "독재적 경향이 빚어내는 질식 상태에서 모든 국민을 해방시키고 관권남용을 방지함으로써 민폐를 일소하고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것"을 내세웠다. 이 두 조항에서 조봉암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극우반공독재에 의하여 반대파가 공산당으로 몰리고 있고 인민이 질식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었다. 네번째도 그러하거니와, 여섯번째의 독재적 경향이라는 것도 우회적 표현일 뿐, 극우반동독재를 가리킨 것이었다."(535-6)


"〈피해대중은 단결하라〉는 구호는 평화통일 구호와 함께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 결과가 말해주듯 극우반공세력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더욱이 그들은 직접 피해대중을 양산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피해대중의 단결,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의 주장은 평화통일론 다음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진보당 내에서도 (구호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식의) 동요가 있었다." "사상검사 오제도는 조봉암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쓴 글에서, 진보당이 강령에서 매판자본을 비판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지적한 것은 북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과 같고, 조봉암이 1956년 11월 진보당 발당대회 개회사에서 진보당은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대중의 전위대라고 표현한 것은 북의 노동당 규약에서 조선로동당은 조선노동대중의 이익의 대표이며 옹호자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539)


"농민들이 가장 시달린 것은 군관계나 경찰에 대한 부담이었다는 점을 특히 유의하여야 한다. 군·경 관계자나 관공리, 유력자들, 각종 형태의 백수건달들이 권력을 믿고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사복을 채우거나 '생활비'를 조달한 방법이 정부수립 이후 기부금 또는 잡부금으로 통칭되었다는 점도 잡부금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예산상의 이유 못지않게 이 부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잡부금의 징수대상이 주로 농민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많이 거머쥐었건 적게 가졌건 '힘센 자'들은 각종 위협에 떨고 있는 농민들을 주대상으로 하여 잡부금을 거두었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농민들이었지만, 무서운 세상을 목도하였던 그들은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짜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정약용의 '애절양(哀折陽)'은 조선후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산골 대통령'(지서 주임을 가리키는 말) 앞에 농민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548)


2절 학살


# 학살 : 전투원 혹은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총기 소지자가 비전투원 곧 민간인을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살해한 행위


1 인민군, 빨치산(무장대), 좌익단체 소속원에 의한 학살


"북한은 남한점령정책의 일환으로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도모하였다." "시·군 내무서-면 분주소(分駐所)-리 자위대로 이어지는 정치보위국 산하 치안조직은 숙청의 핵심부서였다. 주요 대상자는 악덕 지주, 경찰, 공무원 등과 전향하여 보도연맹 간부로서 좌익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은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한 면단위 '인민재판'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으나, '즉결처분'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후퇴시에는 정치보위부에서 처형을 결정하였고, 입산하여 제2전선을 조직한 후에는 당이 직접 판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숙청과 학살의 자행은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생존한 보도연맹원이나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가족의 보복이 그러하였다. 인민군 남하 이후 보도연맹원과 그 가족들은 경찰은 물론 그 가족과 반장, 구장까지 인민재판에 부쳐 공개'처형'하였다."(562)


"경기도 고양군 금정굴 사건은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보복학살의 악순환이 일어난 사건이다. 금정굴 양민 대량학살극은 9월 20일경 우익계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인 태극단 동지회원 38명을 '처형'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들은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되었는데, 내무서원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하여 죽창으로 이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곧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와 수복이 되자 이제는 치안대, 경찰, 태극단에서 대대적인 좌익색출에 나서 수백 명에서 1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잡아다 9월 말부터 12월까지 금정굴에서 학살하였는데, 어린아이와 여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좌익가족이 많았던 것으로 유족들은 증언하였다. 금정굴 발굴에서 1995년 10월 6일 지하 15m 지점에 이를 때까지 유골수가 모두 1,500여 점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는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 150점이 포함되어 있어 희생자의 규모를 가늠하게 하였다."(566)


2 군·경찰·우익청년단체·우익인사에 의한 학살


1. 제주 4·3 학살

2. 여순사건 등에서의 학살

3. 전쟁 직후 형무소 수감자,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

4. (인민군을 가장한) 나주경찰부대의 학살

5. 미군에 의한 학살

6. 수복 후 주민집단학살 (거창양민학살 등)


"놀라운 것은 (제주 4·3 학살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을 가져오게 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법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이 억압적 조치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하였던 대통령령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경부터 준비하여 6월 5일에 발족되었다. 오제도의 말을 빌면, 이것을 기획한 것은 오제도 등 사상계 검사였고, 이들이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과 김준연 등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실시한 것이었다. 일제가 준전시통제에 들어가면서 1936년에 공포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7년에 만든 '사상보호단체'인 대화숙(大和塾), 1938년에 출범한 시국대응전선(全線)사상보국연맹 등을 상기시키는, 수십만 명의 인권을 철저히 통제하는 조직을 법도 없이 만들었다는 것은 법 위에 군림하는 파시즘적 국가관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602)


3절 학살의 원인과 책임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 데는 누적된 관행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것과 깊숙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해방 후 경찰과 청년단원들한테 만연하였던 '테러의 습성화'와 (공권력이 테러를 방조·조장하는 차원을 넘어 테러와 구별되지 않는 '공권력의 테러화'를) 들 수 있다. 여운형은 해방된 지 3일밖에 안 된 8월 18일에 해방의 정치공간을 특징짓는 테러를 당하였고, 그 후 십수 차례의 테러를 당하다가 비명에 갔는데,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테러는 1945년 12월 29일 반탁투쟁의 와중에서 좌익계의 대변지인 조선인민보사에 대하여 자행되면서부터 있게 되었다. 초기 반탁투쟁기에 테러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는 1946년 1월 7일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등 4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중대한 합의사항 두 가지 중 하나로 이 문서 후단에 쓰여 있는, 테러행위를 절대 반대하고 테러단체가 자발적으로 해산할 것을 요망한다는 것에 잘 집약되어 있다."(656)


"한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여순사건 발생에 대하여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담화를 내고 내각을 개조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지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더러 공산당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신상태와 11월 5일 발표한 담화의 정신상태를 비교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 특히 여학생이 여수에서 어느 정도 좌익에 가담하였는지는 증언에 따라 엇갈리지만, 설령 무기류를 들고 좌익편을 들었다고 하여, 인정(仁政)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을 무시하더라도, 왜 어린아이 또는 여중생이 가담하였는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노대통령으로서 어린아이, 여중생들에 대하여 타이르는 대신 남녀·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하여 불순분자는 제거하라고 지시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지시가 김종원 같은 장교들한테 내려갔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승만은 생각지 않았을까. 한국인은 무서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고 있었다."(668)


# 담화 내용 : 〈그 중에 제일 놀랍고 참혹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앞잡아기 되어 총과 다른 군기(軍器)를 가지고, 살인, 충화(衝火)하는 데 여학생들이 심악(甚惡)하게 한 것과 ·····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한국전쟁기 학살과 관련해서 먼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전쟁 초기 패전의 문제이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으면서도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큰 책임을 저야 한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의심을 사 절실히 군비증강이 필요한 시기에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거의 경찰력이나 다름없는 군대를 만들도록 제한하게 하였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에 걸맞게 군대를 정비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낙루장관' '지당장관'으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 김구 살해의 배후로 자주 지목되어온 인물인데, 국방에 대해서는 아주 무능하였다. 총참모장 채병덕 또한 김구 암살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승만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였지만, 군 지휘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휘체계가 문란하였고, 군대훈련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부패 속에 입을 것,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매질과 기합에 시달려 사기가 저상되어 있었다."(668-70)


"주민집단학살이 일어날 수 있는 소인은 미군정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이용하여 미군정에 비판적이거나 미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여러 단체 또는 정치세력을 억압하였다. 그리고 극우적 정치세력은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승만의 경찰통치는 이러한 미군정의 경찰에 의한 강권·억압통치를 그 인원과 함께 그대로 상속받은 것이었다. 커밍스가 이승만의 억압통치는 한·미 공동작품이었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평이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의 억압과 횡포가 한국인들의 거센 원성과 각종 소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군·경이 포함된 친일파를 부분적으로라도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한민당·이승만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4개월 만에 간신히 통과시켰을 때, 군정장관 딘 소장은 이것을 공포하기를 거부하였다."(692-4)


"미군정이 1945년 9월 한국에 설치되자마자 친일파, 그 중에서도 악질 친일경찰을 대거 등용하여 활용한 것도, 극우청년단체의 테러를 묵인하고 방조한 것도, 제주도에서의 미군 최고 지휘관인 브라운 대령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하고, 미군이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지시하고 방조한 것도, 유럽전선 예컨대 프랑스, 독일이나 이탈리아전선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독일이나 이탈리에서 나치나 파시스트를 연합군의 보조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미국정부가 제주도 주민집단학살, 한국전쟁기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미군·미군정·미국정부 일부 관계자들의 이와 같은 비인간적, 반문명적 사고이다. 그것은 미국 등 연합국이 뉘른베르크나 도쿄 재판에서 보여주었던 정신적 자세를 한국에서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해서도 명백히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709-10)


4절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의 형성


"극우반공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는 학살, 테러, 감옥, 고문 격리로부터 산출된 공포의 산물이었다. 폴 뢰쾨르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사건들에는 공포가 결부되어 있다"라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용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그것을 목도하고 들은 바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경남 거제도 앞 지심도에서 총알을 퍼부었는데도, 경찰이 쏜 총알에 보도연맹원 3~4명씩을 묶었던 철사가 끊어져 살아남은 이학근은 항상 입버릇처럼 "겪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를 모른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한 공포는 학살당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과 친지의 것이기도 하며, 그 현장 부근에 있었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언젠까지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후자를 '기억의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713)


"피해의식은 사회의식이나 가치관을 굴절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역전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가 학살당하는 등 극우반공세력 또는 극우반공체제로부터 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모순되게도 더 극단적으로 극우적 행태를 보이고, 극우반공세력의 일원이 되고자 하며, 극우반공체제 수호에 앞장서기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717) "'기억의 공포'를 새롭게 해주고, 억울하고 불법적인 학살행위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공포가 따라다니는 것을 실감케 하는 것이 연좌제였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한 사람이라도 '좌경세력'이나 '불온분자'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으로 지목되면 집안에서건 마을에서건 따돌림을 받고 격리되어야 했다. 경남 남해의 보도연맹원들은 한밤중이건 농사일이 바쁜 대낮이건 지서에서 소집하면 수시로 달려가야 하였으나,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실려 있다. 불평 그 자체가 바로 빨갱이임을 확인시켜주는 분위기 때문이었다."(719)


"국가보안법이 경직되게 운용되던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일종의 국가보안법체제라고 할 만한 현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근현대사에 대하여 무지를 강요한 일이었다. 국가보안법체제에서는 북에 대해 사실을 아는 것이 범죄가 될 수 있었다."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서 이적표현물이라는 조항, 곧 북을 이롭게 한다는 조항을 확대해석하면 걸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지고 있는 사회·인문과학서적도 그러하였고, 정부 비판도 그러하였다. 과거의 기록물을 지니고 있는 것도, 해방 전후사를 증언하는 것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친일파나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연구도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전에 현대사는 물론, 근대사 연구가 제대로 안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고, 다른 이유들도 대개 그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인은 자신의 근현대사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725)


5절 부역자 문제, 인민군 점령 및 군·경에 의한 피해와 극우반공체제


"전쟁 전이나 그 후도 성격이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쟁이 절호의 기회나 되는 것처럼 전쟁기에 극우세력의 권력남용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산·자산 축적은 부분적 현상을 넘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한 단면으로 극우의 재산축적 메커니즘이었다. 사상검사였던 엄상섭 의원이 경찰이 치안비용 명목으로 주민의 재산갹출을 강요하여 불응하면 빨갱이라는 죄명을 붙여서 함부로 체포, 감금한다고 지적한 것도 하급단위에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김광준 의원은 좌익계 가족이라 해서 토지 등 재산을 빼앗고, 토지이전 등기에 응하지 않으면 좌익이라 해서 구타하고 죽이는 일도 있는데, 모 경찰서장은 그것이 위법행위임을 확신하지만 적법적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적법적으로 처리하면 서장이 빨갱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또 자리를 유지해나가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었다."(760-1)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테러가 반은 어용 관제단체, 깡패 등에 의존하여 거칠게 자행되었고, 거친 동원체제였는 데 비해, 군부의 정보장교들이 주도한 정보 정권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테러는 막강한 조직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행사되어 훨씬 더 제도화·조직화되었으며, 그만큼 세련되고 빈틈이 없었다. 국가의 동원력 또한 그러하였다. 행정국가 또는 과대성장국가가 주도한 극우반공체제는 이승만 정권 시기보다 더욱 잘 작동되었다." "이 시기 극우반공체제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강화된 '사상범'의 전향 강요,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 등과 같은 류의 '간첩단'사건, 긴급조치, 사회안전법의 역할도 유의하여야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반공교육이 사회와 교육기관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 반공교육은 북진통일운동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아 감성에 강한 자극을 주는 정의적(情意的) 충동이 중심을 이루었다."(805-6)


"학살과 관련된 양 극단의 대조적인 현상(적개심 고취와 공포의 침묵)은 박정희 사적 권력의 영속, 곧 유신체제 영속을 위한 기제로 작동되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한 예가 될 수 있겠지만, 무지와 왜곡의 집적화·체계화 현상은 한층 뚜렷해졌다. 해방 전후에 부모가 무슨 일을 하였으며 어떤 이유로 학살당하였는지 자식조차 모르는 사회가 되었고, 왜 자신이 극우적 반공이데올로기의 맹신자가 되었는지 반문해볼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봉암이 그랬던 것처럼 희생자-피해대중의 눈으로 진실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든가 희생자-피해대중과 연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현기영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이질의 세계였다. 한국인은 현대 역사가 실종된 역사상실의 시대에 잡초처럼 모래알같이 그렇게 살았다. 그만큼 자아로부터 소외된 불구적이고 분열된 삶이었다."(8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조봉암의 정당조직 활동과 대통령선거


1절 한국전쟁기 정당조직 활동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이 시기(1951년경)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것이었다. 조직면으로는 그가 중시한 원내의원들도 상당수를 조직대상으로 하여 끌어들이는 작업을 벌였지만, 무엇보다도 농민과 노동자층을 당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이 주목된다. 신당을 조직하는 데 농민이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195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농민조직으로 농민회의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또 조봉암의 '자유사회당 비밀서클'과 관련 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중도파나 혁신계, 족청계 인사들도 있었지만, 노동계와 농민단체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을 정당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등 좌익정당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노동자 농민정당을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조봉암 신당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봉암의 신당은 조직면에서도, 표방한 논리에서도 짜임새가 갖추어져갔지만, 이승만의 탄압으로 신당 창당은 불가능해졌다."(45-6)


# '대남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을 비롯한 실무진들을 옭아매는 방식으로 탄압


"조봉암이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였을 때 이시영과 신흥우도 후보 출마를 포명하였다. 민국당 측에서는 조봉암의 단독대결이 야측을 대표하게 만들고, 조봉암을 키워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야측에서 나오는 후보가 없어서 자신이 나선 것이라면, 이시영이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봉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처음부터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제3세력으로서 크게 제약을 받아오던 조봉암이 그러한 기회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일후보 소망을 깬 것만 해도 용서받기 어려웠을 터인데, 극우반공체제 하에서 이승만 같은 사람과 대결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정치생명,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생명마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조봉암은 돌이키기 힘들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정치이념과 야망이 그 길로 가게끔 하였다."(58-9)


"김성주는 1953년 6월 25일 헌병총사령부(헌총)에 연행되어, 9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김성주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봉암 등과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제도로서는 구미식을 택하나 경제적으로는 자유경제체제를 버리고 계획경제를 수립하려 한 것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죄목은 1952년 8·15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더욱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4월 16일 김진호 중령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김성주를 헌총 취조시로 끌고가 고문을 하다 사망하자 헌총 취조관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암매장되었다. 김성주는 19세 때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46년에는 평안청년회와 그 후신인 서북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극우반공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것은 조봉암과의 관련 때문이었다."(77-9)


2절 범야신당운동과 진보당추진위원회


"1954년 11월 27일에 표결된 '사사오입' 개헌안은 이승만 권력의 절대화를 초래하였다. 그와 함께 도시화 현상 속에서 늘어나는 도시민, 그 중에서도 교육받은 층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사사오입개헌을 연결시켜 생각하였고, 그것은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강한 반이승만·반자유당 정서를 증폭시켰다. 또한 이승만의 무소불위의 행위에 위협을 느낀 야당계 의원들은 대동단결된 거대 신당을 만들기 위해 결집하였고, 이로 인하여 은퇴중인 조봉암을 다시 정치의 장으로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만들려던 신당이 가능하게 되는 역설을 가져왔다. 사사오입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번복 주장된 지 2, 3일만에 야당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였고, 호헌동지회에서는 신당을 강력히 추진하기로 하였다."(82) "후에 이 신당 결성의 주류가 되는 보수세력은 민주당을 조직하였고, 그것의 대항세력이 되는 대동혁신세력의 일부가 진보당 결성에 참여하였다."(86)


# 보수파가 조봉암 합류를 결사반대하면서 통합 신당 무산


"호헌동지회가 분열된 원인은 헤게모니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오랫동안 쌓였던 감정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당의 주도권 문제에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며, 그리고 휴전협정 체결시의 포로석방 문제에 대한 조병옥의 이승만 비판 등으로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계속 수세에 몰려 당의 실권을 신익희 등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러한 당내의 조류에다 장면을 중심으로 한 원내자유당 흥사단계가 들어오고, 호헌동지회 내 민주대동파가 조봉암과 함께 들어오면, 조병옥, 김준연 등의 한민당 정통파는 당의 운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많았다. 민국당은 계속 위축되어 신당이라는 인기있는 새 말로 갈아타야만 정치생명이 살아날 수 있었지만, 새 당의 영도권에서 밀려나서는 안되었다. 당의 주도권 문제는 다음해인 1956년 정부통령 선거 후보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96-7)


3절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신익희 후보의 사거 다음날 민주당은 "다시 대통령후보를 지명하여 싸우고 싶으나 법적 불비로 그 길이 두절되었고, 본당 이외의 대통령후보자는 그 정치적 행상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서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은 후일로 미룬다"고 성명하였다." "민주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익희 지지표가 조봉암 쪽에 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나왔다. 5월 9일 김준연은 "대통령후보자인 조봉암 씨를 지지할 수는 도저히 없으므로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천명하였다." "같은 날인 5월 10일 장면 부통령후보는 "대통령후보 없이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이 명분상 불합리한 일이라고 일부에서는 말하나, 우리나라의 헌법상 부통령의 직위는 대통령을 보필하는 것만이 그 임무의 전부가 아닌 만큼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도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피력하였다."(126-8)


"신익희가 5월 5일 사거하였으므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 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려 하였지만, 선거방해로 할 수가 없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쭃겨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 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 폭행을 당하여 실신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11일경부터 잠적하여 일체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5월 17일 선거결과가 확정될 무렵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 한 신문은 이 무렵 진보당 당본부가 선거운동을 멈춘 것 같았고, 간부들 얼굴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적한 분위기였다고 보도하였다."(146)


"5·15선거의 부정에 대하여 가장 충격적인 증언을 한 사람은 4년 후에 치러진 3·15정부통령선거의 주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최인규의 자서전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 이상이 조봉암한테 투표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5·15정부통령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잇달아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3·15선거에서 이승만은 그의 소망대로 단일후보가 되었으며, 정국이 경색되어 장면 후보의 부통령 재선은 아주 어려웠는데도 상식을 초월한 부정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자존심의 심각한 상처, 장면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맛보았던 자유당의 낭패감과 위기의식, 5·15선거가 총체적으로 보여준 민심 또는 '민의', 이승만과 자유당 스스로가 느꼈던 비도덕성과 열패감은 모두 다 5·15정부통령선거와 연결되어 있다."(153-4)


"1956년 8월 8일에 실시된 시·읍·면의회 의원선거와 시·읍·면장 선거, 8월 13일에 실시된 서울특별시 및 도의회 의원선거는 5·15선거 이후 치러진 첫번째 선거였는데, 부산·경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이 시의원 등에 입후보 등록조차 못할 정도로, "관념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천하의 이목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공공연히 대담하게 자행"되었다. 9월 28일에는 부통령에 취임한 지 겨우 한 달이 넘은 장면에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회에서는 자유당에 의하여 한편으로는 부통령의 계승권을 말살하기 위한 개헌방안이 모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對장부통령 경고안이 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당분간 몸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조봉암의 경고대로) 장면 부통령은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피격당하였다." "총을 쏜 범인의 배후에는 자유당 간부와 이익흥 내무부장관, 김종원 치안국장이 있었고, 김종원은 법정구속되었다."(165-6)


4절 진보당 창당


#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발당대회 개최


"진보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잔혹한 테러를 사주하거나 방조하였다. 진보당의 조직활동은 그야말로 칼날 위를 걷는 형극의 길이었다. 진보당에 대한 테러나 탄압에 민주당은 침묵을 지켰고, 언론도 조금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공적 사회적 조직이나 기구가 진보당한테는 없었다. 진보당은 창당되고 얼마간은 사무실조차 얻기가 어려웠다."(199) "진보당과 당원들에 대한 탄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이 극악했는데, 백주에 테러, 납치, 감금, 매수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의 터전을 짓밟아버리기 일쑤였다. 신문광고란에는 거의 매일같이 강압과 조작에 의한 진보당 탈당성명이 끊일 새 없었다. 전남도당 결성대회에 즈음하여 일어난 심야의 가정침입 테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진보당원으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대단한 용기, 때로는 가족 전체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203)


"자유당, 민주당의 선거법 협상도 조봉암-진보당의 활동을 옥죄었다. 이른바 협상선거법은 선거공영제를 채택한다는 구실 밑에 선거운동을 전반적으로 제한하였다." "조병옥과 민주당이 자신을 지켜주고 키워준 『동아일보』 등 언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야당에게 불리한 선거법을 자유당과 합작하여 통과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투개표에서 참관인 권한을 확대하고 야당도 비율에 따라 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게 한 것은 민주당에게는 유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불리하였다. 선거운동 관계 부분은 권력을 업은 자유당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준 반면, 민주당에게도 불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특히 악랄한 규정이었다. 이 선거법은 진보당 등 혁신계를 봉쇄하는 데, 그리고 무소속 당선을 막는 데 유리하게 되어있었다. 급속히 민심이 이반되어가고 있는 자유당을 부축해주어 기존의 극우정당 일변도로 의회를 편성하려는 민주당의 야합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204-5)


"1958년 1월 초순 치안국 자문위원 홍원일이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하고 권대복과 함께 조봉암을 찾아가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자신도 진보당 탄압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기붕이 출마할 서대문구에 입후보하겠다는 성명을 신문에 내라고 권유하였다. 이기붕 출마 에정지구에 입후보하겠다고 하면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간부 중 일부가 그 문제는 상무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해서 상무위원회 소집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있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하겠다고 전하였다.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206)


"진보당에 대한 여론재판 또는 언론 테러는 사건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민당 재건사건에서보다 훨씬 길고 또 심하였다. 먼저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전날인 1월 11일, 서울지검 조인구 검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의 남침 구호로 단정하여 엄단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조의 인삼이 든 상자를 받을 때 그 속에 든 괴뢰의 지령문을 보고 불태워버렸다느니, 조봉암 집 비밀장소에서 불온문건을 찾아냈다느니, 김일성 지령 실천을 위한 7인위원회를 구성한 사실을 장건상, 김성숙 등이 증언하였고, 조봉암도 간첩과 접선하여 야합한 사실을 시인하였다느니, 또 박정호, 김경태, 정우갑 등 14명의 간첩이 진보당 확대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조봉암과 직접 협의를 하였다느니, 박정호, 장건상도 진보당의 비밀당원임이 드러났다느니 등등으로 연일 보도하였다."(208)


1958년 7월 2일 유병진 재판장은 불법무기 소지 혐의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2심 재판은 1·4후퇴 때 월남하여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 등의 주선으로 판사로 복직된 김용진이 맡았다. 10월 25일 재판장은 양명산이 1심 판결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정하였던 것을 2심 재판에서 대부분 부인하였는데도 1심 재판에서의 진술을 인정하여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 3년 내지 2년 징역을 선고하였다. 재판장은 앙명산 피고인이 2심에서 부인한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의 기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자체가 문제시되었고,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까지도 무시하고 공소사실에도 없는 '혁신정치의 실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 등도 유죄의 증거로 내세웠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주심 김갑수 대법관)은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주요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213-5)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이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에 이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정책은 그것을 교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정책에서도 미국의 자유주의와 대립되었으며, 민족자주의 지향은 미국의 대한정책과 충돌할 수 있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조봉암은 가족과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 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기도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된 나를 처단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 수가 있겠느냐. 과히 상심하지는 말아라."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상고심을 맡았던 재판부가 다시 재심을 맡았고, 1959년 7월 30일에 기각되었다.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고 준비중인 7월 31일 오전, 4월혁명을 8, 9개월 앞둔 시점에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0이었다."(218)


# 동아시아 냉전 체제를 교란할 수 있는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경제정책 그리고 민족자주 지향에 대한 우려


2장 조봉암-진보당의 평화통일론


3장 사회민주주의와 1950년대


2절 조봉암-진보당과 사회민주주의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자료는 한결같이 소련을 비난하고 미국을 옹호하였다. 특히 조봉암이 1954년에 쓴 「우리의 당면과업」에서나 1955년에 쓴 「내가 본 내외정국」에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던바, 그것은 그 이후의 것과 약간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반소 친미의 입장은 진보당 강령에서도 확연하였다. 「우리의 당면과업」과 「내가 본 내외정국」은 후자가 더욱 심하지만 냉전적 사고가 적잖이 들어있다. 전자에서 조봉암은 "미국의 존재는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의 원천이 되고 있으나, 크레믈린의 세계침략의 야망은 날이 갈수록 도를 가할 것이며, 그 자들의 평화의 '탈'은 내부정리와 전쟁준비를 위한 시간 쟁취에 불과한 것"으로 일축하였고, 나아가 후자에서는 미국을 "세계 자유진영의 모범적인 기사로서····· 공산침략을 격파하고 공산당 모략을 분쇄하고 공산권 내의 인민들을 해방시킬 세계 자유진영의 선봉대"로 위치지었다."(368)


"조봉암은 스탈린과 그의 일당이 북한괴뢰로 하여금 불의의 침략전쟁을 도발시켰고, 그리하여 크레믈린의 충복인 북한 공산도당은 좌익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야기하여 그들의 괴뢰성과 민족반역성을 완전히 폭로하였다고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진보세력으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게 하였고,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였다. 곧 우리 민족은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쓰라린 생활경험과 처참한 전쟁의 심각한 체험과 무능 부패한 사이비 민주정치하에서의 곤궁한 생활경험을 통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곧 사회적 민주주의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사상적 결론 내지 확신에 도달하였고, 이 강토에다 민주적 평화적으로 사회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유엔 및 반공 서방세계의 영도자인 우리의 위대한 맹방 미국과 긴밀히 제휴 협력하여 국제공산주의의 무력적 위협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369)


# 그 외에도 제3세계가 주도하는 반둥회의에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 주창


3절 사회민주주의 경제정책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극우보수세력도 공산당으로 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성수, 김준연, 조병옥 등 민국당 간부들을 군과 경찰에 잠입하였다는 조작된 남파간첩과 연결지으려던 1950년 4월에 있은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은 너무나 치졸한 작품이었다. 치졸성은 1952년 5, 6월에 발표된,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의 하수인들을 검사로서 취조하였고,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종원 등을 대한민국정부혁신 전국지도위원회라는 국제공산당사건 등으로 몬 것이나, 같은 시기 그와 유사한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국당 간부 못지않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이승만 일민주의의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도 자유당 내에서의 족청계 숙청의 여파로 1954년 6월 부산 민병대훈련 강조기간 기념대회 축사에서 대한민국이 부패하였다는 등의 연설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피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다."(448-9)


4절 결핍성 국가에 대한 대안-근대적 국가의 형성을 위하여


조봉암은 '봉건성'을 '전근대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비민주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파악한다. "해방 후 봉건성이 온존한 것은 식민잔재 또는 파행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통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자주독립의식, 그것과 표리관계에 있는 근대적 인간의식, 시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거나 말살하기 위하여 동화정책·황국식민화정책을 군국주의 파시즘 주입과 병행하여 강행하였다. 그와 함께 향교나 명륜회, 그 밖에 봉건적 유지층의 보호 육성책 등을 통하여 충효사상, 숭조사상, 경로사상 등 봉건적 덕목을 장려하였고, 식민통치와 대립되지 않는 한 봉건적 인습이나 인간관계를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수신 교과서는 물론 역사 등의 각종 교과서도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봉건 덕목과 군국주의 덕목을 주입시키는 데 비중을 두었다."(459)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킬 인적 요소를 쇠잔시켰다는 점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은 일제강점하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적었고, 중등교육을 받은 숫자는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의 중등교육 이수자 숫자와 비슷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한국에 있었던 몇 안되는 공립전문학교에 한국인은 20~30%밖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행정면에서건 전문기술자로서건 간부직 지휘자급에 있었던 자들이 소수였고, 친일파들은 근대적 시민의식, 인간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해방 후 한국을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제약이 되거나 역작용을 하였다. 반면 뛰어난 품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들의 다수는 사회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던바, 인적 자원이라는 면과 연결지어 생각할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전문자질을 갖추는 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460)


"경제의 파행성 못지않게 근대적 국가를 갖추는 데 심각한 어려움은 정치와 행정에도 있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관기확립과 행정빈곤의 해결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후도 비슷하였지만 1950년대에 한국의 행정은 한 사람을 정점에 두고 관기가 흐트러진 채 부패, 무능, 직권남용, 아부, 정실이 상호 사슬을 이룬 사인(私人) 대 사인의 관계로 처리되는 거대한 사적 권력체계였다. 한국의 관료는 전문직 관리계층으로 조직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집권세력의 수족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와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 봉건적 관습의 잔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존민비였다. 조봉암이 말한 대로, 관존민비 사상은 실제 면에서 강력히 작동되고 있어 대민봉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관료들은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며 어느 곳에서나 오만하고 존대한 태도를 보였고, 일반서민들은 관료를 두려워하였다."(468)


"공무원 사회에 관존민비, 부정부패, 직권남용, 아부, 무능, 정실이 만연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종극이 지적한바 인플레에 의한 물가고등과 박봉에 있었다. 특히 경찰직과 같이 민원에 직결된 하급직책은 봉급이 아주 낮아 부정한 짓을 하라고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보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무원, 특히 경찰관수를 대폭 줄이고 예산낭비를 줄여 공무원의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자유당과 민주당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하였다. 인허가에서 원조물자, 원조달러의 배분, 융자, 귀속재산 불하 등에 관리의 자의가 개재하기 쉽다는 것도 이와 같은 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것 또한 진보당과 민주당에서는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하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유해무익한 간섭·허가제도를 일소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인허가제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과대한 중앙집권화와 관료조직의 비대화도 그와 같은 풍토를 조성하였다."(472)


5절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기반의 제약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조봉암이 말한 바대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대한노총은 대체로 극우 성향이 강한 데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의 영향하에 놓였고, 1952년 조선방직쟁의 이후에는 더욱 어용화되었으며, 자유당의 '기간조직'이자 외곽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조봉암의 진보당에는 민련 등 중도우파가 꽤 많이 들어왔지만, 대한노총 내 중도우파 또는 혁신파 간부들이 전쟁 때 의문의 죽음을 하거나 실종된 것도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의 참여가 적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진보당이 진보당 정책 중 '노동문제'에서 노동운동이 부패한 관료와 자본가들에 의해 농단되고 있고, 노동조합이 그들의 어용단체화하고 있는 현상을 시급히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동문제에 대하여 원론적인 주장을 한 것에 머문 것은 기본적으로 진보당이 노동운동이나 노동조직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489)


# 농민조직도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에 예속된 상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7장 '한일협정'과 '월남파병' /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도 당당했고, 그 과정을 아예 반(半) 공식화했다. 65년부터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은 김성곤은 재벌들에게 돈을 거둬 박정희에게 갖다 바치는 역할을 했다. 김성곤이 거둬들인 자금 명세서는 박정희가 직접 결재를 했다. 돈을 거두는 건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에서 무조건 10%를 정치자금으로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 발주 공사가 워낙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재벌들은 10%를 떼이면서도 서로 하겠다고 경쟁을 벌였고 박정희의 대리인인 김성곤에게 10%의 돈을 바치면서도 〈앞으로 이런 기회를 자주 달라〉는 식으로 고마워했다. 그래서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었다고 말썽이 날 일도 없었다. 그런 관행은 장려되었고, 전 관료 체제에 확산되었다." "북한의 존재는 늘 〈누구를 위한 경제개발인가?〉라는 질문으로 표상되는 남한의 빈부격차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17-8)


"로스토우는 58년에 낸 『경제성장의 제 단계: 반공산주의선언』에서 모든 사회를 전통적 사회, 과도적 사회, 도약 과정에 있는 사회, 공업화 과정을 통한 성숙사회, 고도의 대량소비 단계에 달한 사회 등 5단계로 구분하고, 과도적 사회와 도약단계의 사회에서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했다. 로스토우의 경제발전 단게설이 후진국 지도자들에게 던져주는 매력은 저개발 국가도 선진 국가처럼 발전할 수 있으며, 그것도 서구 선진 국가들이 수백 년을 통해 달성한 경제 번영을 저개발 국가들은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다는 '도약이론'이었다."(20) "이후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정책고문을 맡은 로스토우는 박정희의 성장주의 정책을 칭찬하면서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본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한일회담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22)


# 로스토우의 경제단계설(박태균 요약)

1.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적 팽창을 막을 수 있다.

2. 저개발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미국과 선진 제국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3.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 계획은 절대로 자기완결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

4. 자립 계획은 거부되어야 하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철저히 편입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5. 이를 위해 외자 적극 도입, 수출주도형 발전, 불균형 성장론 등이 경제개발 계획에 도입되어야 한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된 64년 3월 6일부터 15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지만, 65년 6월 22일 오후 5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이나가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한일합방 등 구조약에 대해서는 〈are already null and void〉라는 표현으로 합의했다. 유병용은 〈구조약의 무효시점을 '이미'라고 애매하게 기술한 것은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강변하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며 〈한국이 '이미'의 시점을 1910년으로 해석해 식민지 지배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 지배는 합법적이었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서도 〈양국 간의 긴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인 일〉이라는 외상 명의의 성명서 한 장으로 끝내고 말았다."(27-8)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되었으며,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도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되었다.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 버렸다. 정신대·사할린 교포·원폭 피해 등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은 62년 9월 〈독도는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밖에 안 된다. 폭파라도 해 버리자〉고 주장했고, 외상 오히라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는 역제안을 해 논란거리를 남겼다. 조인 직전인 65년 4월에도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문서를 보내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28-9)


#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통과


"8월 13일 월남 파병 동의안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101, 반대 1, 기권 2표로 통과되었다. 파월한 2만여 명의 전투부대에는 해병 청룡부대를 모체로 하여 창설된 해병 제2여단과 육군 수도사단이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선정되었다. 10월 12일 여의도에서 30만 군중 환송 대회가 열렸다. 아직 마포대교가 부설되기 전이었는데, 정부는 이 행사를 위해 급히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가교를 설치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파병의 명분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론과 더불어 '도미노 이론'이었다. 박정희는 환송 연설에서 〈우리가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동남아세아 전체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 보장도 기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대한 남아론'이 가세했다. 박정희는 파월 장병들을 '화랑의 후예'라고 부르면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라고 말했다."(53-4)


8장 '정경유착'과 '한미유착' / 1966년


"1966년 5월 24일, 부산세관은 삼성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천 259포대(약 55톤)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던 걸 적발하였다. 당시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에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주요 원료였다. 부산세관은 1천 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매겼다."(79) "『중앙일보』는 9월 19일자 사설 〈재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재벌과 밀수를 등식적으로 규정한다든지 심지어는 재벌과 밀수, 그리고 정부가 일련의 관계를 갖는 함수관계에 있는 것처럼 여론이 비등되고 있는 데는 논리의 비약과 사회체제의 부정이란 측면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사고가 굳어질 때 파생될 문제를 그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동양텔레비전과 동양라디오까지 나서는 등 삼성 비호에 전 '중앙 매스컴'이 총동원되었다."(82-3)


"(미국의 추가파병 요구에 부응한) 제4차 파병안은 3월 20일 국회를 통과하였다. 제1야당인 민중당 대표 박순천은 66년 9월 베트남을 시찰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탄손누트 비행장에 내려 베트남 땅의 높은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접근하면서 비옥한 베트남의 땅이 눈 아래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역사상 침략만 받았던 우리 민족이 수천만 리 남의 나라 땅에 군대를 파견한 위업에 가슴의 고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비옥한 땅이 우리의 것이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나 하고 생각하였다.〉 여아가 죽이 잘 맞았다. 66년 10월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는 〈우리는 이제 새 시대 새 역사의 무대에서 영광스러운 주역〉으로 〈과거의 인종과 굴욕에서 탈피, 어엿한 주권 성년국가로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97-8)


9장 '정치 공작'과 '국가 테러' / 1967년


"67년 4월 29일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였다. 이건 호남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체적 국부의 증대에는 어떤 기여를 할 망정 지역균형발전은 영영 불가능한 '구조'를 만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업은 영남, 농업은 호남〉이라는 구도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농업 생산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마저도 영남에 더 투자했다. 68년 현재 시설사업이 완성된 수리조합이 영남에는 72개소, 호남은 23개소였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의 인사 정책이 연고와 정실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쿠데타 하듯이 통치했다. 쿠데타란 믿을 수 있고 배짱이 맞는 사람 위주로 꾸미는 게 아닌가. 박정희의 인사가 연고 위주로 흐르다보니, 모든 행정이 연고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이후 수십 년 간 지속될 지역 갈등의 씨앗을 심게 된 것이다."(145-7)


# 호남선 복선화는 2003년 12월 8일에야 완료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늘 그 점이 아쉬웠다.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부터 늘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권의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서 3선 개헌은 이미 66년부터 거론되고 있었다. 그간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 짓고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에게는 3선 개헌의 성패를 결정짓는 '전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이 자행되었다.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수법들이 되살아났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온갖 부정에 더하여 이른바 '야당 토벌작전'까지 도입되었다. 신민당 전국구 후보 10번 김재화는 재일동포 실업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총선 일주일을 앞두고 김재화를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150-1)


선거 결과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었지만, "선거 과정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공화당은 부정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였다. 이게 또 야당 내에 분란을 일으켰다. 야당이 타협파와 비타협파로 양분된 것이다."(153) 타협파인 신민당 대변인 김대중이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안한다는 보증을 받을 것과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것을 조건으로 타협을 모색하자고 설득하자 유진오는 그 제안을 승낙했다. "김대중은 신문과 방송에 그걸 흘려 크게 보도되도록 했다. 그러자 비타협파인 강경파가 불만을 터뜨렸다. 강경파에 다시 설득된 유진오는 〈대변인의 말은 당의 의견과 다르다〉고 부정했다."(155)


"(국회의원직에 연연하던) 야당은 부정선거가 앞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법률을 제정한다는 수준의 타협안에 동의해 선거 169일 만인 11월 29일 등원했다. 김대중의 개탄이다. 〈얻은 성과는 전혀 없었다. 3선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나 지자제를 실시한다는 약속도 얻을 수 없었다. 여당이 앞서 제시한 타협안에서 후퇴한 탓에 아무 소득도 없이 모처럼의 기회를 허망하게 놓쳐 버린 것이다. 나는 이 나라의 정치를 망쳐 독재정치를 초래한 것에 야당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협정 문제에 이어 이번에도 거의 실현 불가능한 '선거 재실시'를 요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한일회담 절대반대' 주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러한 야당의 불행한 체질이 이번에도 일을 그르치게 했다. 강경론과 극한투쟁이란 공허한 명분주의로 야당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독재정권을 돕는 결과를 몇 번이나 초래했는지 모른다.〉"(155-6)


"1966년 10월 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이유는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당시 시청 맞은편엔 중국인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은 슬럼지대였다. 그 주변도 1930년대 이전에 지은 일본 적산가옥의 연속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TV 카메라가 30만 군중의 모습을 보여줄 때에 그 배경까지 잡히고 말았다." "〈건설은 나의 종교〉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서울시장 김현옥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렸다. 김현옥이 무허가 판자촌을 헐어내고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세운(世運) 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훗날 크게 쇠락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그때엔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요 입주자가 되었다."(166-7)


"흐루시초프의 실각 이후 나타난 북한과 중국과의 갈등은 북한의 유일체제 수립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북한은 새로운 소련 지도부의 정책을 흐루시초프 시대의 정책과는 달리 본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이를 〈흐루시초프 없는 흐루시초프주의〉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65년 베트남전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이 사회주의 진영의 공동대응을 모색하자는 제의에 대해 북한은 찬성했으나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적 자세'를 이유로 거부한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전쟁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기회주의' '중간주의' '절충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무원칙한 타협의 길'을 택하고 있으며 〈두 걸상 사이에 앉아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북한은 중국의 태도를 '편협한 교조주의적 행태'라고 반격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문화혁명은 중국 공산당을 더욱 교조화 시켜 북한에 대해서도 중국 노선에 따를 것을 집요하게 강요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90)


"그러나 북한의 자주노선엔 큰 희생이 뒤따랐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 중단으로 재정구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국방비가 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이팝(쌀밥), 고깃국, 비단옷,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꿈이 날아갔다. 게다가 북한이 자주노선에 집착하는 가운데 벌어진 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북한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북한 내 강경파는 '모험주의'도 불사했다. 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제56함 당포호가 동해에서 북한의 포사격을 받아 침몰함으로써 승무원 79명 중 28명이 실종됐고, 51명이 구조됐으나 구조 후 1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급기야 북한은 68년 청와대 습격, 미 군함 푸에블로호 나포, 삼척·울진 게릴라 침투, 69년 4월 15일 미국의 EC 121형 정찰기 격추 등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형 사건들을 잇달아 터뜨리게 된다."(195-6)


10장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 1968년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틀어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 한 가지를 들라면 그건 바로 적대적 공존관계라는 점일 것이다. 북한의 강경 호전파와 남한의 강경 호전파의 이해관계는 같았다. 어느 한쪽의 호전파가 긴장을 고조시키면 다른 한쪽의 호전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서로 몰래 만나 짜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양쪽은 돕고 사는 관계였다. 그렇게 돕고 살다 보니 점점 서로 닮은 꼴이 되어갔다. 이종석은 그런 관계를 '거울영상효과'라고 부른다. 〈박정희 정권은 자주, 자립, 지위, 주체, 국방·경제 병진 건설 등 60년대 북한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말들을 60년대 말부터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 형성 뒤에는 더욱 일반화해서 사용하였다. 1968년부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는 구호가 제창되었으며, 이는 곧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라는 정부 지표로 나타났다.〉"201)


"62년 5월 10일에 공포된 주민등록법은 이후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1·21 무장공비 침투 사태가 모든 걸 바꿔 놓고 말았다. 68년 5월 10일에 통과된 1차 개정안은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하여,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이로써 6·25 때 발급되었던 시민증과 도민증은 자동 폐지되었다. 반공 교육은 물론 반공법 적용도 강화되었다. 68년은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들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세상〉이었다." "남한 사회가 그렇게 경색되게끔 도운 최대의 협력자는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 역시 그런 분위기를 내세워 북한 사회를 옥죄는 쪽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게 '적대적 공존관계'와 '거울영상효과'의 결과였던 것이다."(213)


"홍윤기는 박종홍이 주도하여 성안시킨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권력의 결격 사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보완하여 그 권력 활동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 〈우선 헌장은 당시 비교적 자유방임 상태였던 초·중·고등학교 국민교육의 연장을 확신 있게 규제할 수 있는 권위를 도덕적 형태로 정립시켜 교육자, 피교육자, 학부모를 하나로 묶는 통제체제를 구축할 정신적 구심력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던 대중동원이 선거자금 살포 차원을 넘어 교육적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 또한 헌장 선포자로서 (중후한 권위를 부여받은) 박정희는 더 이상 정치나 경제에서 성공한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교육의 지도자로서 정신적으로 내면화한 이미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역사적으로 헌장의 제정과 실현은 명백히 유신쿠데타의 정신적 전주곡이었다.〉"(238)


"언론의 치열한 상업성 추구는 박정희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유도하였다. 67년 당시 일반 자금의 대출 금리가 25%였을 때 신문들은 18%의 낮은 금리로 대출 특혜를 받았으며, 신문용지에 대한 수입관세에서도 신문들은 일반 수입관세 30% 대신 4.5%의 관세율을 적용 받았으며, 저리의 차관 도입이라는 특혜까지 누렸다. 주태산에 따르면, 〈어떤 신문사는, 사설에서는 차관 망국론을 언급하면서도 뒤로는 일본의 차관 도입으로 호텔을 지으면서 '빨리 인가를 내달라'고 기획원에 압력을 넣어 관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 신문사는 바로 『조선일보』였다. 박정희와 가까웠던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천만 불의 상업차관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들여왔다."248-9)


11장 독선·독단·독주의 정치 / 1969년


"1968년에 벌어진 일련의 북한 도발 사건으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까지 했던 박정희는 새해를 맞으면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시 요새화계획'을 발표했다. 그 계획 중 하나는 평화시에는 교통시설로 사용하고 전시에는 30~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로 쓰기 위해 남산에 1,2호 터널을 뚫는 것이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싸우면서 공부하자〉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학생들이 국가 방위에 자진 참여하는 기본자세 확립과 심신의 연마 및 집단행동능력 배양의 목표〉를 내세워 군사교육(교련)을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건 곧 3선 개헌을 하자는 말이기도 했다.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또다시 총대를 메고 69년 1월 7일 〈단군 이래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계속 집권시키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55-6)


"박정희 정권은 무력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던 건 아니었다. 무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금권(金權)이었다. 박정희는 엘리트층 인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씀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거나 적어도 저항만은 하지 않게끔 하였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돈질을 엘리트층 내부에선 '불우이웃 돕기' 수준의 선행으로 여겨지거나 박정희의 인정과 도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었다. 훗날 박정희 옹호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박정희로부터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박정희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도 거액의 정치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박정희는 숙청된 쿠데타 동지들에게도 생활비를 대주었으며, 야당 인사들에게도 격려금을 주었다. 푼돈이 아니었다. 박정희를 다시 보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322-3)


"1969년 9월 13일,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었다." "본회의 약 2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경 국회의장 이효상의 세 번째 정회 신호로 공화당 의원들은 모두 본회의장에서 퇴장하고 신민당 의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장을 빠져나온 공화당 의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각 상임위 단위로 몇 개의 호텔에 투숙하였다. 14일 새벽 1시, 지휘 본부로 지정된 반도호텔에 모인 당의장 윤치영 등 지휘부는 2시 정각에 국회 제3별관에 모이라고 알렸다.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 3층에 있는 특별위원회실에 집결해서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자 국회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탕탕탕 책상을 쳤다."(328-9)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월 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돈과 밀가루를 퍼붓기 시작했다. '밀가루 대통령'에 이어 '밀가루 헌법'을 탄생시키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 정권이 유권자 매수를 위해 쓴 돈은 1천 500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개헌 지지 유세를 위해 전국을 돌던 김종필은 10월 6일 공주에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내비치면서도 마지막 협박을 하였다. 그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을 경우 그에 따르는 사회적 혼란과 국가위신 추락 및 국민이 원치 않는 또 한번의 군의 정치 참여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측근 의원들에게 개헌 찬성을 종용했다〉면서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며 개헌안에 대한 찬성을 유도했다." "마침내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되었다."(330-1)


"박정희의 권력 중독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다. 69년까지의 경제성장률은 매우 높았고, 이는 3선 개헌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 경제는 69년부터 심각한 불황국면에 접어들었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이 68년 달러 위기에 봉착하여 한국으로부터 경공업제품 수입 규제조치를 취하고 차관의 원리금 상환 압박이 가중됨과 동시에 신규 차관 도입이 어려워진 것에 기인하였다." "노동계급은 60년 11.8%에서 70년 24.1%로 팽창하였지만,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궁핍이었다. 67년 광산노조의 광화문 시위, 68년 전매·철도노조 쟁의 및 조선공사 쟁의, 69년 면방 쟁의, 조선공사 쟁의, 부두노조 쟁의 등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점점 대규모화되고 격화되었다." "박정희는 그 위기를 70년대부터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로 돌파하는 노선을 걷게 된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자살이 말해 주듯이, 노동자들에겐 저항의 길조차 막혀 버렸다."(3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병영국가의 건설 / 1961년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하였다. 물론 일시적인 이벤트로서의 포퓰리즘이었다. 법치(法治)니 인권(人權)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들도 많았지만, 이 당시의 한국 사회가 그걸 따질 수준이나 조건이 아니었기에 그마저도 박수를 받았다. 법을 밟고 서 있는 군사정권으로선 아주 쉬운 일이었다. 민심이 불만을 느꼈을 법한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4·19를 촉발시킨 데에 책임 있는 자유당 사람들과 그 시절의 부정축재자들,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까지 '용공'의 올가미를 씌워 감옥이 미어터지도록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13) "5월 23일에 사람들을 가장 감동시킨 건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정화' 방안의 발표였을 것이다. 이 조치의 결과, 전국 916개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39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이 남게 되었다."(15-6)


"군사정권의 청교도적 접근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440명의 뚜쟁이를 체포하고 4천 411명의 매춘부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보기에 화끈했고, 수입 사치품들을 수거해 불태우는 데엔 10년 먹은 체증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또 군사정권은 도시 엘리트의 상류생활을 비난함으로써 풍요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군사정권의 공무원들은 청교도적인 모범을 보여야 했다." "5월 29일 서울시 교육감은 과외수업과 교내외의 특별학습을 금지시켰다. '금지'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다방에도 (커피와 양담배 판매 불허라는) 사실상의 금지령이 떨어졌다." "6월 5일 치안당국은 떠돌이 고아들을 체포했는데 그 수가 보름 동안 1만여 명에 이르렀다. 6월 10일 내무부 산하에서만 첩을 둔 축첩(蓄妾) 공무원 510명이 쫓겨났다. 또 이날 최고회의는 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고리채법을 공포했다."(17-9)


"5·16 쿠데타 한 달을 맞아 『경향신문』 6월 16일자는 한 면을 〈빛나는 혁명 한 달의 일지〉라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했다. 이 특집의 서문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 ····· 동안에 혁명정부가 이룩해 놓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비록 짧은 한 달이나마 10여 년에 걸쳐 쌓인 부정과 부패는 깨끗이 씻겨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들은 박정희의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언론플레이'에도 호응하였다. 『조선일보』 6월 27, 28일자엔 박정희의 특별기고 〈지도자도(指導者道)〉가 실렸다. 이 글에서 박정희는 〈우리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다〉고 진단했다. 이 점에 관한 박정희의 '철학'은 시종일관 '한국인은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는 일본인들의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제2의 천성을 하루아침에 고칠 순 없으니 앞으로 강력한 타율을 행사하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었다."(32-3)


"이상우는 5·16 군정은 '군인의 정치'인 동시에 '대학교수의 정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군정 동안은 군인과 대학교수라는 두 개의 아마추어 그룹이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했던 시기였다. 군인들은 앞장을 서고 그 뒤에서 교수들이 머리를 제공했다. 대소의 국가정책으로부터 정당조직 새 헌법 제정 등 모든 작업이 '고문' '자문' '기획위원' '정책위원' 등등의 타이틀로 층층이 구축된 대학교수 그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인과 교수들의 아마추어 세력의 의해 추진된 국가 정책은 많은 실적과 함께 시행착오를 남겼다. 그리고 '어용'이라는 달갑잖은 풍조를 낳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4·19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들의 상당수가 쿠데타 정권에 참여하거나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사 사무엘 버거는 훗날(66년)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쿠데타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좋은 일이었다고 느꼈다〉고 썼다."(40-1)


"군사정권은 61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각급 지방의회를 해산하였다. 52년 4월 정략적 음모로 탄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걸음마 단계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지방의회가 탄생 9년 1개월 만에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군사정권은 6월 6일 비상조치법 20조에 의거하여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및 인구 15만 이상인 시의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 지방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다. 9월 1일자로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읍·면제를 폐지했다. 군사정권은 지방자치뿐만 아니라 농협이나 농지개량조합의 조합장 선거 등 자치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모조리 폐지하였다. '정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박정희와 그 일행의 확고한 소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를 낭비로 간주했다. 빈 자리의 상층부는 모두 군인들로 채워졌다."(54-5)


"기존의 정치를 대체한 건 중앙정보부였다. 1961년 6월 10일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법은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으로서 대형(大兄)이 지배하는 병영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병영국가란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가 하는 식으로 국가안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그 목표 완수를 위해 〈폭력의 전문가들이 대거 국가의 전략적 엘리트로 등장〉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중앙정보부는 그런 '폭력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으로 그들은 폭력의 기획에서부터 행사까지 모든 걸 전담하는, 정부 위에 존재하는 비밀 정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부장 김종필을 비롯하여 쿠데타 주체인 육사 8기생들의 독무대였는데, 이게 나중에 중앙정보부 자체가 치열한 권력투쟁의 무대로 변질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55)


"61년 7월 17일 조직된 경제재건촉진회는 한 달 후인 8월 16일 박정희가 지명한 이병철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경제인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68년 3월 28일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훗날 이병철은 자신의 묘석에 다른 이름이나 단체의 일을 한 것은 다 쓰지 않더라도 이 단체의 회장을 지낸 것은 새기도록 미리 밝혀두었을 정도로 이 단체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첫 번째 과업은 군사정권이 부과한 벌금에 대한 협상이었다.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벌금을 현찰로 납부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공장을 지어 주식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이게 받아 들여졌다." "이는 군사정권이 '부정축재 처벌'에서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공장 헌납은 당초 금액의 5%에 불과한 벌금 지불로 둔갑하였다. 벌금은 깎이고 또 인플레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었다."(80-1)


4장 구악(舊惡)을 뺨친 신악(新惡) / 1962년


"박정희는 1962년 2월 3일 열린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울산의 건설은 빈곤의 역사를 떨치고, 민족의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의지가 깃든 우리나라 공업화라는 거대한 작업의 첫 출발입니다. 서독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민족 부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신라의 영성'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겠다는 것일까? 군사정권의 방식은 군사작전식이었다." "경제와 사회를 군사작전의 대상으로 삼는 군사문화엔 명암이 있었다. 군사문화는 '명령의 효율성에 대한 과신'과 더불어 '정치의 전쟁화'를 꾀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건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화끈하고 신속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군사문화는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126-8)


"박정희는 62년 4월 29일 기자회견 석상에서는 〈자율적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부패 언론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경고했다." "6월 28일 군사정권은 새로운 '언론정책'을 내놓았다. 이 정책은 언론자유와 책임,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언론기업의 건전성, 신문체제의 혁신, 언론정화 등 5개 항의 기본 방침과 20개 항의 세부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사정권은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요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신문발행 요건이 까다로워져 사실상 신규 언론사의 출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하루에 두 번을 내던 조석간제가 조간 또는 석간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루에 한번 신문을 내는 단간제로 바뀌었고 일요일자 신문발행이 금지되었다."(145) "1962년 10월 13일 (살아남은) 신문들은 한국신문발행인협회를 만들어 신문 면수나 구독료, 광고료 등을 담합 결정하는 카르텔을 형성하였다."(148)


"군사정권이 언론을 강력 통제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63년에 치러질 대선을 염두에 두고 62년 1월부터 비밀리에 정당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그건 바로 '부정부패'였다. 증권·워커힐·새나라·빠찡꼬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었다. 이건 언론이 침묵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신당인 민주공화당은 1963년 2월 26일에 창당되지만,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지게 된 건 62년부터였다. 워낙 가공할 부정부패라 덮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4대 의혹 사건은 박정희와 김종필의 합작품이었지만, 그 모든 책임은 김종필에게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다. 나중에 김종필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외유를 떠나게 되고, 그가 떠난 지 2주일 만인 63년 3월에 수사결과를 발표해 15명을 구속하지만, 그건 '정치 쇼'였다."(152)


# 4대 의혹

1. 증권 파동 :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주가조작 사건

2. 워커힐 : 워커힐 공사자금의 상당부분을 횡령한 사건

3. 새나라 자동차 : 일본산 소형차를 무관세로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긴 사건

4. 빠찡꼬 : 빠찡꼬 기계 수입 및 영업 허가 과정에서 돈을 챙긴 사건


5장 '권력투쟁'과 '색깔전쟁' / 1963년


"박정희는 10·15 대선 때까지 번의(飜意, 생각을 뒤집어 마음을 달리 먹음)에 번의를 거듭함으로써 〈변덕스러운 박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민주공화당 창당 대회 다음 날인 63년 2월 27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정치를 민간인에게 넘기고 대통령 출마를 않겠다는 이른바 2·27 선서라는 것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또 한번 감동시켰다. 박정희는 2월 27일 시민회관에서 3군 참모총장과 재야정치인 앞에서 자신의 민정 불참을 선언하는 이른바 2·27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3천여 명의 방청객이 현장에서 지켜보고 방송으로 중계된 선서식에서 박정희는 또 눈물을 흘렸고,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군정이 종식되는 것처럼 흥분했다." "박정희의 눈물이 처음부터 의도된 '정치 쇼'였는지 그건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눈물로부터 20일이 지난 후에 '군정 4년 연장'이 나왔기 때문에 그리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178-9)


"박정희가 분야별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집필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혁명 기간에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인데, 그러한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이는 부패 일소, 민생고 해결,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과도기 단계에서는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달성할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국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교체 가능한 용어였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종국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세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04-5)


"공화당(박정희)은 〈새 일꾼 바로 뽑아 황소같이 부려보자〉, 민정당(윤보선)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 잡자〉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10·15 대선은 사상 논쟁이 지배한 선거였다." "9월 23일 박정희는 방송연설에서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며,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의 확립 위에 외국의 주의·사상·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말했다. 9월 24일 윤보선은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220-1)


"박정희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주장하면서 사실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진상을 아는 왕년의 극우 인사들이 굳게 침묵하였거나 오히려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이다. 원용덕이나 윤치영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는 한국의 극우가 색깔보다는 '힘의 관계'에 더 민감하다는 걸 말해준다." "윤보선 측이 색깔 공세에 맛을 들인 반면, 박정희 측은 영남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수법을 썼다. 박정희는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 등 개혁주의 메시지를 강조한 반면, 영남 지역에서는 지역성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민정 이양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 주변에 경북 출신, 특히 경북고(전신은 대구고보)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몰려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박정희 측은 지역감정 선동과 더불어 윤보선을 '귀족'으로 몰고 박정희를 '서민'으로 부각시키는 민중주의 전략도 구사하였다."(225-7)


"'보수야당' 대 '진보여당'의 대결 구도는 지역주의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한의 진보 및 민족주의 세력은 쿠데타에 지지를 보내거나 적어도 저항은 하지 않았으며, 이 같은 호의적 태도는 63년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 민중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박현채 같은 이도 1963년에는 박정희에게 투표했다. 심지어 쿠데타권력에 의해 투옥 중이던 혁신계 인사들마저 면회 온 가족들에게 박정희를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집요한 색깔 공세는 이미 박정희가 저지른 '혁신계 죽이기'마저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는 윤보선 측의 색깔 공세에 대해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한다〉고 분노했지만, 빨갱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탄압하는 건 이제 곧 박정희의 특기로 자리 잡게 된다. 또 박정희를 지지했던 혁신계 인사들은 곧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236-7)


"수출산업 육성에서 한국이 비교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건 싼 노동력뿐이었다. 정부가 기업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계속 싼 임금을 그대로 묶어주는 것이었고, 군사정권은 이에 적극 응했다. 군사정권은 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을 그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 버렸다." "값싼 노동력만 있다고 수출산업 육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는 차관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일본은 아직 국교 수립이 안 된 상태였다. 군사정권은 경제사절단을 서독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요청했다. 4천만 달러의 상업차관 제공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지급보증이었다. 이 문제는 서독에 인력수출을 하여 그들의 3년간 급여를 서독은행이 코메르츠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255-6)


# 1977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총 1만 2천여 명 파견


6장 '민족 신앙'에서 '수출 신앙'으로 / 1964년


"4·19를 어떻게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의미의 투쟁'으로서 사실상 '권력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문제는 4·19 직후부터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5·16 주체세력은 4·19의 좋은 이미지만을 차용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4·19를 '4·19 의거'로 격하시키면서 그 수준으로만 묶어두려고 하였다. 그들의 4·19 이용은 '4·19 마케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4·19 찬양 수사(修辭)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지만, 그건 반드시 5·16의 '판매'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281-2) "박정희는 63년 9월 1일에 낸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4·19=5·16"이라는 등식이 "4·19<5·16"으로 바뀐 셈이다."(284)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무기 삼은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64년 3월 들어 한일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밝혔지만, 그런 강행 의지만큼이나 강한 야당과 학생들의 반발이 폭발하고 있었다. 야당, 사회·종교·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은 3월 6일부터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구국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3월 24일, 4·19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발생했다." "이후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고등학생 및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투쟁은 미국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외교계의 실력자인 조지 케넌은 『뉴욕타임스』 64년 3월 25일자를 통해 〈우리는 이제까지 한일 양국뿐 아니라 자유세계 전체의 큰 이익이 될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희망하여 왔다〉고 말하고 한국의 반일 학생운동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289-90)


"3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김종필의 귀국 조치와 함께, 그간 야당이 백지화를 요구해온, 한일회담 타결의 핵심으로 간주되던 비밀문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였다. 이는 62년 11월 12일에 중앙정보부 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작성된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한일회담 타결의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제공할 돈의 액수를 밝힌 것이었다.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공여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 등이었다. 이 메모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요구해 온 청구권을 포기시키는 해결방식이었으며, 어업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상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철폐하는 것에 합의한 것이었다. 이 메모는 자금 제공의 명목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아 쌍방이 각자 그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청구권'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했다."(291)


"6월 3일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는 김종필 화형식이 거행되었고, 훈련을 마치고 군가를 부르며 학교로 돌아온 ROTC 후보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였다. 오후 4시경, 경찰 백차와 트럭을 탈취한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거리를 장악했다. 서울시내 몇 개의 파출소들은 시위대의 투석으로 박살이 났다. 시위대는 청와대 앞의 최후 저지선까지 위협하였다. 이날 밤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8월 3일 하루 동안 시위대 200명이 부상당했고, 1천200명이 체포되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에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 등 모두 348명이 구속되었다." "7월 27일 38세의 이동원이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동원은 김종필에 이어 '제2의 이완용'이라는 매도에 굴하지 않고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맹활약을 하게 된다."(300)


"(근본적인 언론 통제책을 모색하던)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공화당은 계엄 해제 다음 날인 7월 30일에 (언론윤리요강으로 보도내용을 심사하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 악법 반대 투쟁 과정에서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하였지만,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압력 강화로 이탈자가 속출하였다." "박 정권은 8월 31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가로막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 특혜나 협조를 일제 배제키로 결정했다. 그 결과로 바로 그날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대구매일신문』 등 이 법의 시행에 반대한 4대 신문에 대해 정오부터 1시간 동안 정부부처와 산하 금융기관, 각급 행정관서들이 신문구독을 중지토록 행정 압력을 가하였다. 박 정권은 신문구독 중지와 아울러, 은행융자 제한 및 기존대출자금 회수, 신문용지 가격의 차별대우, 극장협회와 기업체들에 대해 광고게재 중단 압력, 취재활동 제한 등 모두 다섯 가지 보복조치를 취하였다."(309-11)


"개발독재 체제하의 시장은 새로운 전장이었다. 공정하고 법이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었다. 폭력과 협박과 온갖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연고와 정실이 난무했다. 빽과 줄이 총동원되곤 했다. 63년 3월에 이루어진 군부의 '알래스카파'(함경도 출신) 숙청과 함께 백남일, 함창희, 조성철, 이용범 등 재계의 알래스카파 역시 몰락했다. 60년 12월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오른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토벌'시에 한꺼번에 휩쓸려 현대건설까지 존폐의 기로에 섰다. 현대건설의 사주인 정주영은 강원도 출신인데도 '토벌' 대상에 오른 건 건설업계의 정치 싸움 때문이었다. 아마도 정주영은 '범 이북파'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미 자유당 시절부터 권모술수에 찌든 재계에 5·16 쿠데타는 한 수 더 높은 권모술수를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 박정희의 고향인 영남 연고 재벌이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3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