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치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박태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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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은 왜 실패했는가─〈맥아더는 완고〉했고, 〈하지는 순진〉했다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1973년 버치는 한 연구자로부터 미군정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답장에서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은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갖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 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18-9)


2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구애─〈잘 도망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미군정은 왜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그를 미군정이 주도하는 정국 구상에 끌어들이려 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소련군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남한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김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운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28-9)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굿펠로에서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왔던 '좋은 친구'였다. 미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 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 정치 고문으로 1946년 5월 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 "미군정은 정치공작을 통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조선인민당에서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도록 지원했지만, 그를 따라나간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공작이 여운형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되지 않았고, 미군정의 지시에 대해서도 제대로 응하지 않자,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비리(친일행위를 찾는 작업에서 시작된)를 찾아서 그의 대중적 영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29-31)


3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찾아라


"1946년 8월 2일 버치는 「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주한 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행한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 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그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조사관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32, 36, 39)


4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서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와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의 눈에는 여운형이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나 의열단과는 다른 인물로 비추어졌다. 사실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의열단 지도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비밀결사로 '건국동맹'을 만든 것 외에 그가 다른 정치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역시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친일의 혐의를 받는다면, 그가 총독과 대화하면서 '자치'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운형이 주장했던 자치는 소위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자치와 다른 맥락이었다. 그의 주장은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에 총독부가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43-4, 49)


5 〈내가 테러리스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귀국 초기 이승만의 독촉중협에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여했다. 미군정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정치인들은 이승만이 분열되어 있는 정치 세력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참여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한국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쟁범죄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수립될 국가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56)


"이승만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축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돈을 벌었던 친일 부역자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경찰과 청년단이었다. 그런데 후자는 미군정에게 가장 큰 고민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활동을 자행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수 우익의 정치 세력들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부합될 수 있었지만, 미군정으로서는 불법적인 테러를 자행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이승만은 청년단이 다치게 한 사람들은 좌파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애국자'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버치에게 〈당신은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좌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좌파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버치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57-8)


6 이승만의 귀국을 막아라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이 귀국할 즈음인 1947년 4월 19일 버치 문서의 제목은 「이승만의 외교적 성공」이다. 이승만이 국내외적으로 '실패'했던 4.19혁명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이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 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그 당시 TV는 아예 없고 라디오도 몇 대 없었던 상황에서 '팩트 체크'를 통해 대중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버치 문서에 있는 이승만 관련 문건들에서 1945년 이전 그와 함께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승만의 배신과 거짓,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교포들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렇게 견원지간이 되었는가?"(68-70)


7 이승만과 김구─문제는 돈이었다


"버치는 1948년 1월 13일 작성한 문서 「이승만과 김구」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질투, 허영심,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그들의 배경과 현재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노여움이 나오는 가장 분명한 이슈는 돈 문제다. (···) 1945년 가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현금이 없었다. 반면에 김구에게는 1억 8백만 엔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국민당의 선물이었다. (···) 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78-9)


8 내조의 여왕인가, 국정농단의 기원인가─프란체스카 여사


"버치의 문서에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이승만이 1946년 말 미국으로 날아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을 때였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이승만에게 국내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보수 우익의 지도자인 김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하지 사령관과 김구의 좋지 않은 관계와, 김구와 김규식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했다. 김규식이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김구는 김규식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로 선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서 〈분홍색은 없고 빨갱이라고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발표한 공동성명 5호에 대해서도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86-90)


9 강용흘을 아시나요


"1946년 강용흘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일파들이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강용흘은 또한 미군정 아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찰을 꼽았다." "강용흘이 보기에 해방 정국에서의 암살 사건에 경찰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들은 모두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2-6)


10 현직 경찰은 왜 장덕수를 죽였을까


"1947년 12월 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의 시기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게는 보수 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102)


11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1년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김구 암살


"암살자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정치가들의 암살범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출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안두희는 출옥 이후에도 호의호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덕수의 암살범은 현역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암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버치)는 김성수에 대한 암살 시도와 장덕수의 암살이 11월 30일 이승만의 늦은 동의의 결과였다고 보며, 김성수의 정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이승만이 알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114)


"장덕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남은 지도자는 이승만과 김구밖에 없다." "그런데 김구가 친일경찰과 관료, 그리고 자산가들을 보호해줄 수 있었을까? 1948년 1월 22일 문서를 보면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김석황의 편지를 〈이승만을 위하여〉 신문사에 공객한 것은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수사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기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승만은) 김구의 정치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희망 섞인 말을 했고, 더 이상 잠재적 중요성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계속 남아 있는 사실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귀한 지위에 위협이 되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실행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20-1)


12 미군정이 믿는 구석은 경찰, 경찰이 믿는 구석은 이승만


"친일경찰들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로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을 경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김규식 역시 공정한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될)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는 경찰 문제가 있었다." "둘째로 경찰들의 불법적인 행위였다. 특히 경찰의 힘을 이용한 (민간인들의 재산) 강탈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 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25, 127, 131)


13 '한민당 코트'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정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 총파업에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가장 충성심이 강한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과 1953년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작전을 세울 때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이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132)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참여했다. 해방 정국을 호령했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독립당, 국민당 등은 개인적인 참여를 제외하고 정당 차원에서는 모두 불참했다. 한국민주당이 이 선거에서 프리미엄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기대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을 미군정이 뼈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 시기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미국에 우호적인 의원내각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민주당의 참패였다. 득표율은 12.17%에 그쳤으며 전체 200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정당도 아니었던 독촉국민회가 55석, 무소속이 85석을 얻었다. 한민당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다수당이었지만, 전체 의석에 2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를 주도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한민당은 일제에 협력했으며, 동시에 자산가들이 그 중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36-8)


# 한국민주당 코트 : 좋은 털을 목에 두른 코트를 말한다. 즉 부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14 이승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경찰과 청년단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통해 근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장에 편입되었던 자본가와 상인들이 한편에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조선시대 이래로 계속되고 있었던 지주와 소작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살고 있는 지역이 달랐던 사람들이 원하고 있었던 사회는 같을 수 없었고,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141)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는 사회구조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제도를 적용한다면, 결정적인 키를 쥐는 것은 비도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형태의 정부 구조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 선출을 좌우할 비도시 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큰 것이었다." "미군정의 지방 정세 보고에 의하면 1947년 가을이 되면 비도시 지역은 거의 이승만 지지 세력에게 장악되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한국의 운동장은 미군정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방국 중 신생독립국가에 대해서 내용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강조하고 있었던 미국이었기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지방의 상황은 보통선거 실시라는 조건 하에서 미군정 역시 손쓸 수 없는 결정적 조건이었다."(142, 146-7)


15 서북청년단이 못마땅했던 미군정


"서북지역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리울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니콜스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150, 155-6)


16 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1947년 9월 버치에게 건의서를 올린 권태석은, (충청도에서 벌어진)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마도 해방 직후 대부분 지역에서 이런 갈등과 테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훗날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은 '부역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역 사회는 재편되었고, 이는 결국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167)


17 우익의 정치자금은 어디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은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을까? 1차적인 자금의 재원은 미군정이었다. 특히 해방 직후 강력한 좌익 세력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운동장의 기울기를 우익 측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원이 필요했다." "두 번째 자금 조달 방식은 반半강제로 이루어지는 모금이었다. 이는 특히 1946년 말 이승만의 미국 방문 시 이루어졌다. 1947년 2월에 작성된 「이승만 펀드」 를 조사한 미군정의 결론은 모금이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찰이나 청년단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셋째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자산(적산)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적산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한국 정부로 이양되었다." "새롭게 수립되는 정부의 재정과 재건에 필요한 자산들은 이렇게 정치자금으로 전환되었고 불법 정치자금의 부담은 모두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그만큼 비싼 가격에 물품을 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봉이었다."(169, 173-5)


18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


"미군정은 1947년 지방을 조사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여론조사를 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답변한 것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65명)였다." "절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부족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던 비료와 석탄이 끊긴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음식의 확보'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것은 과연 해방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북한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에 곡물 세금이 70%에 달한다는 것, 반탁운동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 김일성의 암살 등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과 관련된 관심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무엇을 희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구체적 내용을 떠나 북한의 개혁에 대한 소식은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178-9)


19 미군정이 발간한 『당신과 한국』


"미군정에서 발간한 짧은 한국 소개 책자인 『당신과 한국』은 미군정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자에 콜레라나 홍수 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46년 7월 이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미군정의 통치가 실패한 것을 자인하게 되기 때문에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책임이 미군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조선 자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미 본토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의 소개말은 한국인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일부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도 보이지만, 미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감정에 대한 그의 평가 역시 솔직한 것이었다.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외국군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던 한국인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의 빛이 날아들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소식이었다."(191)


20 해방 후 최초의 복권, 올림픽 복권


"한국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 또 하나의 이벤트는 1948년의 런던 올림픽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나 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몇 종목에 참가하고 몇 등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독립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는 낭보가 1946년 12월 미국으로부터 날아들었고, 다음해 6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조선체육회를 승인했다. 반면 1940년 올림픽을 개최하고자 했던 일본은 독일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1940년 올림픽에 사용하려고 마련했던 차를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이 해방 이후 사용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런던 올림픽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후원권'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복권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1등 당첨금 1백만 엔은 당시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192-7)


21 장군의 아들인가, 테러리스트인가


"버치가 김두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버치가 받은, 김두한의 활동과 관련된 보고서는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버치는 김두한과 그의 그룹들이 러치 군정장관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법부와 경찰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버치는 김두한을 체포함으로써 미국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나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지 사령관에게 미군정이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서 정부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김두한은 풀려났다." "버치가 김두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김두한이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만들어진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문서에 김두한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203, 207-8)


22 여운형의 죽음과 친일 경찰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버치는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김구를 왜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메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버치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배후는 김구가 아니었다. 경찰은 암살이 발생할 때마다 김구가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문제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모든 혐의의 화살을 김구에게 향하도록 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모두 미군정의 〈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부터 소련과의 타협보다 미국에 우호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이 미국의 정책이요, 미군정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대처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단지 하나의 쇼가 아니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있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미군정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214, 217)


23 미군정이 만들려고 했던 정부─해방 직후 최초의 헌법 초안


"1947년 6월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가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거의 합의에 다다랐다. 조선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할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냈으며,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조선임시정부의 구성을 위한 법령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7년에 미군정이 만든 임시조선정부의 '헌장(charter)' 초안에는 비록 신탁통치 또는 후견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내용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권한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진행된 반탁운동과 정치 공작, 그리고 수많은 테러 행위들과 여운형의 암살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 다가온 기회를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19, 227-8)


24 농지개혁으로 혁명을 막아라


"미군정이 농지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한 것은 1947년 12월이다. 그것도 전체 농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토지에 국한되었다. 버치는 이러한 농지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는 농지개혁의 원칙은 '국가의 권력 및 적절한 법적 절차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문제로 인한 광범위한 빈곤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협할 경우 국가는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상금을 지급하면서 농지를 수용하고 재분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소이며, 한국 사회에서의 농지개혁을 위한 노력은 미국의 '의무'라고 못 박았다. 미군정 통치하의 남한을 안정화하고, 미군정이 떠나더라도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버치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은 결국 1950년 농지개혁을 통해 실현되었다."(233-4)


25 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 그리고 내각책임제의 실패


"미군정 통치 과정은 '통역 정치'라는 말이 나타날 정도로 통역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중요한 보직에 임명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의 대학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들만이 미군정의 중요 인사와 통역없이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초기 군정청에서 중요한 문제를 통역했던 이묘묵은 절대 권력자로 보였으며, 조병욱의 경무부장 임명도 이묘묵이 선교사 설립 학교 출신이자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수 우익 내에서 라이벌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시작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유학한 이후 1945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김구는 그나마 정규 과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말 그대로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버치가 김규식이나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239)


26 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김규식


"미군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사실은 김규식이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 정치인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주로 좌익 계열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으로 약칭)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반탁운동에 반대하면서도 오히려 반탁운동의 리더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의원의 부의장이었다. 민주의원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여 미군정이 만든 기관이었고, 민전은 좌익이 이에 대응해서 만든 기관이었다.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은 미군정이 민주의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여운형이 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247)


"일찍이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우 합작을 위해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온건 우파의 핵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 6월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김규식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뒤로 물러서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직접 요청했다." "문제는 김규식이 임시정부 내에서 부주석으로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반탁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내에서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가 민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보수 우익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에 김규식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출하여 김규식의 지도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버치의 문서를 보면 미군정 정치고문단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들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는 나머지 45명의 민선의원 중 대부분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는 점이었다."(248-9)


27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실질적인 권력인 미군정과 대립했지만, 이승만은 미군정이 한반도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까지 날아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미군정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규식이 1948년이 선거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직은 이승만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만약 김규식이 나섰다면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규식에게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이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김규식처럼 평화통일을 희구했던 사람들에게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258-9, 264)


28 버치가 평가한 미군정과 해방 한국


"전체적으로 보면 버치가 소장하고 있었던 문서들, 그리고 한국을 떠난 이후 버치에 의해 작성된 편지들을 통해 보면, 미국 본국의 소극적 지원과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한국인들의 태도, 특히 미국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의 비협조, 그리고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이 미군정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의 중도파 정치인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버치는 그들에게 사무실과 집을 제공해주었고, 경찰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친일 문제와 극우 세력의 테러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버치도 좌우합작위원회가 실패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잡자 결국 이승만에게 항복했다. 버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이승만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초보 정치 전문가로서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승만은 그러한 버치의 태도에 만족해했다.〉"(269, 274-5)


29 현재 한국 사회의 기원을 찾아서─미군정기의 역사


"한국 현대사의 전 과정에서 가짜 뉴스는 계속되어 왔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 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기득권 주류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스로가 기득권자인 언론은 합리적인 정치인들을 빨갱이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핑크'로 묘사했다. 아니면 철저하게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테러라는 최후의 수단이 등장했다."(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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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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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한국 현대사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귀국한 임시정부 계열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미군정 초기(1945년 9월~12월)에 진정한 의미의 반탁운동을 주도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 계열이었다. 이들은 루스벨트가 1943년 이래 국제적으로 합의하고, 국내적으로 공식화한 대한정책(다자간 국제 신탁통치)을 무산시키는 한편, 그 대안으로 미군정 예하의 과도정부 형태를 출범시키려 했다. 이는 미국 자료에는 정무위원회, 전한국국민집행부, 통합고문회의로 표현되었고, 한국 현실정치에서는 독촉중협으로 구체화되었다. 즉 정무위원회 계획의 현실정치 구현이 독촉중협의 건설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좌우한 실질적인 동력과 모멘텀은 1945년 말 반탁운동이 아니라 미군정 초기 미군정 주도의 반탁운동이었다는 점이 이 책의 주요한 결론에 해당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주인공들에 의해 운명과 경로가 결정된다. 해방직후사 역시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중대한 결정이 이뤄진 것이다."(23-4)


1장 폭풍: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권력의 창출


"여운형에게 일제의 패망은 수년 전부터 예견된 대사변이었고, 기다리고 준비했던 해방의 순간이었다." "여운형은 1943년 8월 10일 조선민족해방연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1년간의 준비 끝에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발족시켰다. 건국동맹은 두 가지 특징을 지녔는데, 하나는 명칭이고, 다른 하나는 조직 활동이었다." "건국동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제 패망 뒤 건국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 그 이후에 다가올 건국이라는 민족적·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준비했다. 국내에서 이러한 정세관을 갖고 전국적 규모로 투쟁하고 건국을 준비한 곳은 건국동맹뿐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이라는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대책과 준비가 있었으므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바로 조직되고 운영될 수 있었다. 즉 건준은 누군가의 선물이나 우연으로 급조된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선구적 정세관과 투쟁의 결과 해방과 동시에 발족한 기구였다."(39-40)


"해방 이후 여운형과 건준이 주도하는 정국이 확연해지고, 총독부를 매개로 한 치안유지회 참가가 무산되자, 송진우 등 한민당 계열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무고하기 시작했다. 송진우 측은 여운형과 건준이 향유하고 있던 해방정국의 권력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송진우 측은 해방 직후 여운형의 반복적인 협력 및 합작 제안도 거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해방정국에 임했다. 해방 후 한민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은 여운형이 〈친일정권 수립을 음모한 공산주의자〉라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었고, 그 중심인물은 바로 송진우와 총독부의 사전교섭설을 가장 크게 선전한 김준연이었다." "해방 후 한민당의 세가지 길은 여운형을 친일파이자 공산주의라고 공격하는 것, 자신들이 중경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미군정의 신뢰를 얻어 고위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53-4)


"여운형과 건국동맹 측의 입장은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주체적 입장에서 타협한 후 정권 수립 및 건국 준비의 길로 나아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건준이 해방 공간에서 기여한 최대의 공로는 한국인이 해방을 절감할 수 있는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해방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보장했다는 것이다. 즉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정치범 2만여 명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며, 수많은 한국인이 이 대열에 합류해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 행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제지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한국인에게 진정한 해방의 날은 8월 16일이었다. 여운형과 건준의 공로는 한국인이 일제의 패망이 한국의 해방임을 실감할 수 있는 직관적 광경을 만들고, 한국인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요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한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해방의 공간이었다."(55)


# 여운형과 총독부가 협의한 5개 사항

1. 정치범 및 경제범을 석방한다.

2. 서울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한다.

3. 건준의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간섭하지 않는다.

4. 학생 훈련 및 청년 조직을 허용한다.

5. 각 사업장의 노동자 협력을 허용한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준이 네 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회고했는데 공산당원인 극좌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의 우익, 여운형을 무조건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이었다. 송남헌은 건준이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 안재홍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 이영·최익한·정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 박헌영·이강국·최용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한 정치단체였다고 보았다. 즉, 제2차 건준은 여운형 중심의 비공산주의적 좌파 혹은 사회주의적·좌파적 원로 세력(건국동맹), 장안파 및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안재홍과 한민당 중심의 우익 세력의 결합이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세력이고, 공산주의 세력을 장안파와 재건파로 나누고, 우익 세력을 안재홍 등 중도우파 세력과 한민당 등 우파 세력으로 구분하면 다섯 가지 세력이 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여운형 개인의 추종자들이 포함된 것이다."(107)


# 건준 발족 직후(8.18~25) 벌어진 상황

1. 건준이 실질적인 행정권 이양의 주체로 부상하자 총독부 측은 교섭을 빙자한 공작을 펼쳐, 건준에 대한 개입과 개편, 방해와 폐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다.

2. 송진우 등 우익 측은 유지들을 동원한 수적 우세를 통해 건준의 실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으며, 이는 건준을 무력화하려 했던 총독부와 이해가 일치했다.

3. 엘리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재건파 조선공산당원들은 해방 후 학생, 근로 대중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우익 계열의 건준 잠식을 방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 이 와중에 여운형은 테러를 당해 와병 중이었다.


"해방 후 중망(衆望)을 모으던 건준은 왜 방향을 갑자기 전환해서 인민공화국을 급조(9월 6일 창건)하게 되었을까? 첫째, 미군 진주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공을 창립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여운형 등 건준 지도부는 (인공을 창립하면서) 미군 진주에 대비해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1번으로 인민위원에 지명했으며, 인공 조직을 구성할 때도 이승만을 주석에 선임했다." "즉 인공의 창립은 해방 직후 건준 및 좌파세력이 갖고 있던 정국의 주도권을 연장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절충할 만한 인민 총의의 집결체〉를 조직함으로써 미군과 갈등 없이 정권을 인수받고, 정식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안으로 구상되었다. 부정확한 정보가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취한 확실한 선례를 따라서 남한에 진주할 미군에게 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을 인정받고자 한 시도였다.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생각해봄직한 방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너무 낙관적이고 주관적인 정세관에 입각한 판단이었다."(155-6)


"둘째, 우익의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에 맞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가능성이다. 건준은 해방 직후부터 중경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는 한민당 계열 및 안재홍과 대립하고 있었다. 건준 장악에 실패하자 우익의 대부분은 9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조직했으며, 인공 창립 이후에는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중경임시정부 지지를 전면에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한 후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이런 맥락에서 인공의 급조는 우익의 임정 봉대(奉戴)노선을 부정하고, 정부에는 정부로 맞서기 위한 노선이었다. 특히 여운형 자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의 주역이자 임시정부 창립 구성원(1927년 상해에서 체포됨)이었지만, 명실상부하지 않은 임시정부 형태보다는 독립운동가 정당 형태를 주장한 바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연안독립동맹, 김일성 빨치산 그룹 등 다양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접촉면을 확보함으로써 현실적 접근을 강조한 것이다."(156-7)


"셋째 이유는 건준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사적 자기발전 과정이란 건준 주체 측의 설명이었다. 1946년 『조선해방연보』는 건준이 갖고 있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자기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공을 창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건준의 지도부가 지닌 유약성, 투쟁적 전진성의 미흡으로 정견과 행동이 통일되지 못했기에, 〈인민에게 주권을 두는 인민정부 수립을 위한 비상방법으로 임시인민대표대회를 건준의 지정·추천으로 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본질상 건준을 계승한 것이므로 건준의 역사적 사명은 그 종언을 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좌익계에서는 인공의 수립이 민족통일전선의 자기강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인공의 수립으로 건준 내부에서 갈등하며 길항하던 좌우익의 정권 수립 방략이 대외적으로 폭발하며 중경임시정부 지지 진영과 인공 진영이라는 진영 대결, 정부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58-9, 163)


"9월 14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부서 책임자가 결정되었다. 여운형은 인민의 지도자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조직적 결정은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수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0개의 정부 직위는 주석, 부주석, 국무총리, 14부, 3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정부 인사 5명(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신익희), 한민당 인사 2명(김병로, 김성수), 재북 인사 1명(조만식) 등은 모두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선임이었으며, 이름만 걸고 대리자가 직을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당사자들은 명의를 도용당하고 실권을 빼앗기는 모양새였다. 이미 인민위원, 후보, 고문 등의 발표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되었고,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인공을 주도한 재건파 조선공산당 측은 무모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결국 건준이 인공으로 재편된 후, 인공은 거의 사면초가였다. 창립 직후부터 인공은 미군정과 우익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고 거부당했다."(164-7)


"이로써 인민공화국은 물론 이를 주도한 재건파는 남한 정계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우익 인사들의 명의를 도용했다는 즉각적 항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으며, 모든 정파가 인공 수립 자체를 공박하며 비판했다. 해방 공간에서 건준이 가졌던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입장은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입장으로 역전되었다. 인공 측은 미군정에 승인을 요청하고 '국' 자 삭제 요청을 거부하는 한편, 귀국한 이승만 등을 찾아가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애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군정의 승인을 받아야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할 수 있고, 누군가가 취임해야 명실상부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다. 인공 스스로 권위와 정통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승인과 협력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인공과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하는 공식 지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하지의 지령에 따라 부여, 유성, 옥구, 남원 등지에서 인민위원회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173-5)


"12월 12일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민족통일전선의 진전과 임시정부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는데 임시정부가 인공의 간부직을 거부한 것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왕가적·전제적·군주적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좌우가 반반씩 세력균형을 이루어 합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조선인민당 역시 이 시점에서 인공과 임시정부를 동시에 해체·합작하여 좌우연립정권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945년 말에 이르러 인공은 최초의 목표였던 민족통일전선으로서 임시혁명정권이라는 스스로의 규정과는 다른 지점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인공의 전신인 건준에 대해서도 한민당 등 우익 진영의 부정적인 평가와 비난이 고조되었다. 김종범·김동운은 당시 여항(閭巷)의 설을 인용해 건준이 지방은 물론 재경 선배 및 동지들과의 제휴·협동을 기피하여 통일전선에 일대 지장을 초래하고 수많은 당파의 족생(族生)과 난립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177-8)


2장 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의 영향력: 일본군·통역·윌리엄스의 역할


"남한은 태평양전구에서 진정한 의미의 군정이 실시된 유일한 지역이자, 사전 준비 없어 점령한 지역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지침을 확보하지 못한 24군단과 10군의 G-2는 8월 내내 류큐에서 생포한 한국인 전쟁포로 700여명에 대해 강력한 심문을 진행했지만, 서울-인천-부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와 한국 정치 문제에 대한 '질 낮은 정보'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1945년 8월 19일 태평양전구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이었다." "합법적 주권 정부가 있던 일본과 식민권력이 붕괴한 한국의 상황은 전적으로 달랐지만, 고위급 정책은 두 지역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이미 기능이 정지되었고, 건준과 인공이 총독부 권력을 대체하고 있던 상황에서 총독부 관리의 유입은 한국인들이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첫 번째 조치가 식민권력의 유지와 온존이라고 공표한 것은 주한미군에 가해진 최초의 신뢰 타격이었다."(201-4)


# 「작전명령 4호의 부록 8」

1. 군정이 모든 사태를 장악하거나 한국인으로의 대체가 확보될 때까지 일본 정부기구와 관리는 필요할 때까지 이용될 것.

2. 개인의 권리와 재산에 대한 문제는 국제법 원칙을 준수할 것.

3. 모든 한국인은 명백히 그들이 적국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민으로 취급할 것.

4. 카이로선언에 기초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인들은 완전 독립하게 될 것.


"최초에 한반도 점령 임무를 맡은 것은 미 10군이었는데, 8월 11일 갑작스레 하지 주장 예하의 24군단으로 변경되었다. 24군단과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은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적어도 40회 이상의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 메시지 교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일본군 17방면군이 제공한 정보는 남한에 상륙하는 하지에게 현지 상황에 대한 생생한 초기 정보를 제공했고, 그가 한국·한국인·한국 상황을 바라보는 최초의 시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때 일본군이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첫째, 소련군의 38선 이남 점령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둘째,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들에 의한 유혈 사태·무질서·폭동·파업 등의 혼란 상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7방면군이 강조한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폭도〉는 총독부가 소련군 진주를 전제로 여운형·안재홍과 타협한 결과 만들어진 건준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6-7, 210)


"오다 야스마는 영어에 능통하고, 선교사의 추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17방면군의 공식 통역이었으므로, 미24군단 수뇌부와 접촉면이 넓었고, 초기 몇 달 동안 신뢰를 받으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다 야스마는 『주한미군사』에 열다섯 차례나 인용된 유일한 일본인이다. 미24군단은 오다 야스마를 통해 많은 통역사를 확보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통역으로 이묘묵을 추천한 일이었다." "오다 야스마가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임하던 시기, 이묘묵은 1934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이후 학감과 도서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1년 이후 연희전문학교 학감·학교장으로 이사회에 관계했다. 이묘묵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속되어 사상전향을 한 후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섰다. 이묘묵의 친일행적은 연희전문학교 동료 교수인 갈홍기와 함께 1938년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하는 사진이 『경성일보』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다."(213-6)


"미군은 9월 8일 제물포에 상륙했고, 9월 9일 일본군 항복식이 개최되었다. 상륙 사흘째인 9월 10일 오후 5시 30분 연합군 기자단 환영회가 명월관에서 개최되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한 24군단 고위 장교들과 군사실 요원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묘묵은 『코리아 타임스』 편집장 자격으로 참석해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그 유명한 악의적 연설을 했다." "명월관 연설 이후 이묘묵은 하지 중장의 개인 통역이자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미군정기의 대표적인 문고리 권력이 되었다." "『코리아 타임스』는 한민당, 연희전문학교, 기독교계 인사들이 미군정의 요직으로 등용되는 출발점이었다." "이들을 필두로 미군정을 통한 일제 권력의 불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과 같은 권력 획득의 순간이었으나, 해방 한국을 기대했던 한국인의 희망과 염원이 근저에서부터 붕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218-21)


"해군 군의관이었던 조지 윌리엄스는 1907년 4월 7일 인천에서 태어나 (감리교 선교사인) 부친 프랭크 윌리엄스를 따라 충남 공주 등에서 15년 동안 거주한 적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주둔 미군과 동행한 후, 하지의 개인 고문으로 3개월간 일하면서 윌리엄스가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상황과 구조는 미군 진주 이후 한국 현대사가 당면한 총체적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열쇠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하지가 '정치고문'으로 배치된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하지의 자문에 응하는 것, 둘째, 하지를 대신해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미군정이 하는 일을 전달하는 것, 셋째, 미군정 고위직에 적합한 한국인을 수배하는 것 등이었다." "하가(Kai Yin Allison Haga)는 윌리엄스에 의해 초기 미군정이 한국 내 기독교 그룹, 교육받은 엘리트, 선교사 사회의 의견과 필요에 경도되었으며, 한국의 우익, 특히 기독교 엘리트들이 미군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27-31)


"윌리엄스는 진주 직후 한국 정치를 한민당과 인공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민당이 보수적이고, 평화를 애호하며, 미국이 한국 정부를 건립하는 데 협력하길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당 강령의 첫 항에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에 감사를 표현하는 항목이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가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독해하는 기본적인 문맥은 한민당의 주장을 그대로 복제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친일 문제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한국인은 충분히 친일적이며 충분히 친생존적이어서 그만큼 전쟁 노력에 협력해야만 했다〉고 발언했다. 그의 발언은 해방 직후 악질 친일파들이 주장하던 국민공범론, 식민지 환경론 등과 동일한 것이다. 조병옥이 친일경찰을 두둔하며 입에 달고 살았던 친일(pro-Jap)이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pro-Job)이었다는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234-7)


3장 미군정의 총독부·인공·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


"미군정 진주 이후 가장 중요했던 양지의 정치적 결정은 총독부 관리 유임과 해임, 인민공화국 부정과 해체, 임시정부 지지 및 주요 인사 입국의 추진이었다. 보다 중요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음지의 정치적 결정은 주요 직책에 대한 정실 인사(권력 불하)였다." "미군정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선의 통로는 고문회의의 조직이었다. 고문회의라는 조직 형태는 한민당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945년 9월 22일 〈명망과 식견을 구비한 인사로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행정과 인사에 자문케 할 것〉을 건의했고, 이것이 수용되었다." "고문회의는 일제 시기 어용기관이었던 중추원의 재판이었는데, 좌파는 인민공화국의 약화를 우려했고, 우파는 임시정부의 약화를 우려했다. 한국인들의 열광적 환호도 없었다. 고문회의는 조직되자마자 실패임이 분명히 드러났고, 미군정도 이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회의 방식은 미군정 초기 권력으로 향하는 중심적인 통로가 되었다."(318-20)


"『주한미군사』의 설명에 따르면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7만 5,000명의 한국인 관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전 직을 유임시키거나 신규 임용한 것으로 대부분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말까지 이뤄진 7만 5,000명의 신속한 임명은 친일 관리만으로도 충원될 수 없는 규모였는데, 적절한 자격시험이나 배경이 검토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잡이 충원과 추천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최소한 5만 명 내외가 어느 날 갑자기 관리로 임용되었으며, 어떠한 자격심사나 배경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중앙과 지방에서 이뤄진 유일한 절차는 고문회의 및 각 부서별 고문회의의 추천과 투표를 통한 결정 과정이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고위 공직과 하위 공직을 막론하고 친일파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행정 경험이 있는 총독부 출신 친일관리와 행정 경험이 없는 그 밖의 친일파와 무자격자들이 공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유일한 자격 요건은 한민당의 추천과 미군정의 승인 절차 뿐이었다."(325-6)


"특히 미군정은 (질서 유지 명목으로) 공권력의 핵심인 경찰 및 내부행정 인력을 급속하게 수직적으로 강화했다." "일제하의 경찰이 억압적인 국가 물리력으로 잔인하고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게 중론인데, 미군정하에서는 1946년에 2배, 1948년에 3.4배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에 쏟아진 '경찰국가'라는 비난은 공정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새로 만든 정책이라기보다는 미군정으로부터 비롯된 유산이자 관성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경찰 간부 중 친일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데, 1946년 말 경위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퍼센트인 949명이 총독부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에 이르면 경찰 관련 3만여 명을 제외한 관리 수는 14만 9,549명으로 폭증했다. 친일 관료들은 일제 식민정책에 봉사한 경력 때문에 친일파 처단과 식민지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공동의 이해로 통합되었고, 해방정국의 혁명적 요구에 맞섰다."(326-8)


"미군정기 한민당, 기독교 계열, 서북·흥사단 계열은 동일한 지향을 가진 집단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일 뿐 내용적으로는 동일성을 유지했다. 일제시대 기호와 서북의 대결,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동지회와 흥사단의 대립, 흥업구락부와 동우회의 대결 구도는 유명했는데, 미군정이 들어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북·흥사단·동우회의 지도자 안창호가 사망한 이후 서북 계열은 지도자를 상실한 상황이었고, (노년의 외로운 우익 지도자로 그려진) 이승만은 귀국 후 국내 지지 기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양자는 대결보다는 협력을 선택했고 인공·여운형·좌파에 반대하고 친미·반공 노선을 추구하며, 미군정의 권력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지도자 안창호를 잃은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이승만을 구심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서북·흥사단 계열은 미군정기 권력을 추구하면서, 사실상 이승만 중심의 한국 정치구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347-8)


"나아가 한민당의 핵심 인물이자 한국 우파의 중심인물인 김성수, 송진우 등은 1910년대 이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수직 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는 해방 후에도 동일하게 작동했다."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연로한 이승만이 곧 종이호랑이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서 권력이 자신들에게 이양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포장하고 대표하는 일종의 정치적 대리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의 총아였던 이승만은 자신을 뒷방 노인네 취급하려 했던 한민당과 서북·흥사단 계열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들을 배척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군정기 행정권력을 향유했던 한민당과 흥사단 계열은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원치 않는 야당으로 배척되었다. 이들은 권력의지라는 측면에서 이승만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348)


4장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


"정치적 경험이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던 하지는 〈좋은 교육을 받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라 미군정 통제하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면 모든 한국인이 격렬히 반대하는 신탁통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5년 10월 이래 주한미군사령부 정책문서들은 이 구상을 '전한국국민집행부' 혹은 '정무위원회' 등으로 호명했으며, 그 실체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중협)였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과 중도파를 이승만 아래로 끌어들이고, 귀국하는 임시정부까지 여기에 통합시킨다는 정치공학적 구상은 주체들의 정치적 욕망과 이질적 지향을 고려한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유치한 공상 수준이었다. 또한 이를 전시 회담에서 각국 수뇌부가 이룬 국제적 합의를 파기하고 대안으로 제시하기에는 설득력이 전혀 없는 사무관급의 탁상공론이었다. 나아가 이 구상은 강경하고 공격적인 반소·반공 노선에 입각한 발상이었기에 국제회담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355-7)


"역사의 진실은 아이러니한데, 임시정부가 귀국한 직후 미군정이 심혈을 기울였던 정무위원회(=독촉중협)는 실패로 귀결되었고, 하지의 일급 참모 송진우는 암살되었으며, 반탁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 세력은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 등 미군 수뇌부는 한민당을 신뢰하면서, 비현실적인 임시정부 지지·귀국·활용 정책을 추진했는데, 막상 귀국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기대를 저버렸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운용하는 장기판의 말이 되기보다는 독자적 행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지지 기반이 아니라 가장 뼈아픈 배신의 비수가 되었으며, 몇 개월 동안 미국 정부의 공식 대한정책을 부정하고 대안으로 구상했던 정무위원회는 실패했다.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된 한국에 대한 결정은 원래 예상했던 신탁통치 계획이라기보다는 '임시 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라는 복잡한 함수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지는 반탁을 고무하다가 미군정 자체를 전복시킬 뻔했다."(378)


"태평양전쟁기 이승만은 한국에서 이미 잊힌 존재였다. 그가 명성을 떨친 것은 사반세기 전인 1919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시기였다." "3·1운동기에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지했던 재미 한인들은 이미 노령이 되었으며, 새로 태어난 2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새로 등장한 재미 한인사회의 지도부는 사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합리적 인물들이었다. 직업적 독립운동가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1943~44년 이승만 중심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 내 한독당과 민혁당의 대결, 워싱턴에서 이승만과 한길수,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회의 대립은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와 전쟁부의 한국 문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였던 탓에 자치 능력이 없는 데다 중경과 워싱턴의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되어 있는 것도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 독립이나 임시정부 승인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의 인식이었다."(380-1)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백악관, 국무부, 전쟁부, 국회의원 등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청원을 벌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것처럼,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명성을 추구한 방식이었다. 미 행정부를 향한 이승만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미 군부와 공작기관인 COI와 OSS는 이승만을 주목했다." "1941~42년 시점에 OSS가 김구-이승만 간의 무선연락을 중개하자,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미 군부 및 공작기관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미국 내 위상이 높다고 과대평가했다. 이는 1943~44년 재미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외교 행태를 비판하며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논쟁이 벌어졌을 때 김구와 임시정부가 국민회 등 재미한족연합회의 의견을 배척하고 이승만을 재미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 군부 및 공작기관들은 해방 후 이승만의 조기 귀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했다."(381-2)


"이승만의 귀국 과정, 귀국 직후 '민족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고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지의 태도와 후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945년 11월 독촉중협 조직, 1946년 2월 민주의원 조직, 1946년 중반 이승만의 남선순행, 1946년 11월 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모두 하지 등 미군정 수뇌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의 명성, 독촉중협·독촉국민회·민주의원 등의 조직, 정치자금의 조성 및 운용 등에서 미군정의 도움이 미치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미군정은 대한경제보국회의 불법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으며, 도미 외교자금의 불법적 강제모금과 불법적 환전 및 사용을 묵인했다." "1946년 말 이승만이 도미 외교 과정에서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 후에야 양자의 관계는 파열되었고, 하지는 배신의 쓴맛을 보았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군정의 탄압과 반대에 맞서 싸운 반공의 십자군인 것처럼 선전했지만,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9386-7)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이승만은 눈가림으로라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독촉중협을 결성해야 한다며 나라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지 않고 외국의 손에 있으니,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신탁 문제를 방어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송진우 등은 모스크바회담에서 미국 주도의 한반도 신탁통치 계획이 상정되고 결정될 것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미군정 계획의 적극적인 실행자이자 협력자였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임시정부의 참여 여부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조직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독촉중협에 흡수한다는 계산이었다. 즉 임시정부 절대 지지를 내세우며 시작한 독촉중협이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순간, 이승만은 군정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민의 대표기관인 독촉중협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임시정부는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1)


"모스크바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논의되고 결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과 한민당 두 세력은 모스크바회담의 결정문이 공개되기 직전에 일련의 반탁 성명과 소련 일국 신탁통치 주장을 펼쳤다." "12월 27일 한민당 기관지인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소련1국에 의한 단독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모스크바 공동성명서가 한국 시각으로 12월 28일에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발표되기 만 하루 전에 나온 이 보도에는 인명과 지명을 제외하고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도 12월 29일 오후에야 워싱턴과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모스크바 결정서 원문을 볼 수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보다 이틀 앞서 모스크바 결정서를 볼 수 있는 한국인은 없었다. 허위, 왜곡, 날조로 점철된 이 기사는 곧 한반도를 (아이러니하게도,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하는) 반탁운동의 거센 소용돌이로 이끌었다."(406-7)


남은 말: 1946년 5월의 대분기


"1946년 5월은 미군정기 한국 현대사를 재편하는 중요한 대분기였다. 정치적으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 여운형에 대한 회유와 공작, 김규식에 대한 점증하는 신임과 좌우합작운동 지지 등을 분명히 드러냈다. 정판사 위폐사건을 필두로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이강국, 이관술,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정판사가 입주한 조선공산당 본부는 몰수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는 정간되었다. 1945년 진주 직후 상황을 살피고 현상 유지에 집중하던 때와 달리 진심이 담긴 미군정의 총공세였고, 조선공산당에 대한 적대감과 분쇄 의지를 명백하게 표출한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중도파 여운형을 박헌영 및 조선공산당과 분리시키기 위한 정치공작도 병행했다. 1945년 하반기 이래 이미 정치적 난관에 처했던 여운형은 38선을 넘어 평양의 김일성, 김두봉과 소련군 사령부를 방문함으로써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좌우합작·남북연합 노선의 출발이었다."(412-3)


"한편 이승만-한민당-미군정의 기축적 동맹은 탄탄하게 유지되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한민당이 중심이 된 경찰, 행정관료, 우익 청년단체 등의 열광적 지지를 받으며 남한을 순행했다." "이승만이 남한 각 지역을 방문하는, 소위 남선순행에 발맞춰 우익 청년단은 좌익 정당과 사회단체를 폭력적으로 공격했고, 경찰의 방관 속에 지방 사회에서 좌우 세력 균형은 역전되었다. 이승만의 남선순행 전후에 벌어진 이러한 전국적 현상을 통해 대중은 미군정과 경찰·공권력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누그를 배격하고 있는지를 직관적이고 물리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이승만은 1946년 6월 남한의 최대 우파 대중조직이던 독촉국민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1946년 초반 반탁운동으로 고조되었던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에 대한 지지를 떠올려본다면 믿기 힘든 승리였다. 김구는 자신이 이승만 다음의 제2인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우익 진영의 서열이 분명하게 정리되었다."(413-4)


"1946년 말이 되자 모든 것이 명징해졌다. 미군정하의 행정권력은 한민당의 수중에 들어갔고, 정치적 지배력은 이승만이 행사하고 있었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이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민주개혁을 앞세우면서 실질적인 단독정부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1946년 말에 이르러 남한은 대혼란, 북한은 대건설의 현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울처럼 상대방을 비추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남북에서 각각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좌우, 남북, 미소라는 세 층위의 갈등과 압력이 중층적으로 쌓이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예견할 수 없었지만,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누구에게는 이제 끝이 보이려는 참이었고, 누구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고, 누구에게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행위 주체들에 따라 시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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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의 기원 - 조선, 제도와 빈곤 경북대학교 학술총서 11
김희호 지음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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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의 제도는 신분제인 노비제와 고공제, 조세제도, 농업경영방식과 지주제, 화폐제도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생산성과 임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는 아직 소득의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어서 소득과 빈곤의 수준을 대용할 수 있는 거시적 지표로서 생산성과 임금 등 생계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임금은 노동 생산성의 지표로서 조선 후기 생산성 하락의 원인을 찾아보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18-20세기 초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 임금과 생계비를 비교하고, 이 시기 조선 백성의 빈곤 수준을 가늠해 본 것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생산성과 임금의 하락을 가져온 제도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선행 연구와 다른 시각을 보일 수 있다. 이 책의 연구 방법과 결과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기존 사학계의 연구 결과들을 무시할 의도는 없다. 이 책은 20세기 초 일제의 식민지침탈에 대한 원인을 제도적 측면에서 찾아보고, 반성과 성찰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6-9)


제1부 신분제와 임금, 생계비


1장 고공제와 실질임금


"조선 후기 고공의 경제적 성격은 임금 등 대가를 받고 일하는 임금 노동자였다. 1680년 처음 제정된 고공법은 조선이 고공(雇工)이라는 신분을 새로 규정하여, 고공 문제를 신분제의 틀 안에서 관리하는 제도이다. 고공법은 신분제 틀 안에서 계약기간과 임금 등을 법으로 정하여 그 기간 동안 고공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에 대한 기준은 고용계약 기간이 1년 이상 장기적이고, 고용계약을 위반하여 도망하는 경우 사적, 공적 형벌을 통해 노동을 강제하는 규정이 있는지 여부이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은 적합한 직업이나 작업장에서 숙련도와 생산성이 더 나은 노동자의 재배치를 통한 경제 효율성을 제한하였다. 또한, 고용계약 기간의 장기화로 임금을 초기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였다. 노동 이동성의 제약으로 노동의 체계적 분업이 불가능했으며 생산성도 점차 하락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농업생산성과 임금의 하락 원인을 신분제에 의한 노동 이동성 제약에서 찾고자 한다."(16)


# 고공 : 형법상 노비보다 1등급 정도 상위 신분이며,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사회적 신분으로 양반, 중서인, 양인, 천민 등 누구나 고공이 될 수 있었다. 


"1731년 노비제가 종천제에서 종모종양제로 변하면서 노비인구는 줄어들었고, 노비의 도망은 급증하였다. 18세기 이앙법의 확산으로 농업생산에서 3-9월 사이에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시적 노동력이 더욱 필요해졌지만, 노비는 농한기인 10-2월까지 일하지 못하고 쉬는 날이 더 많았다. 지주들은 농업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노비보다 농사철에만 집중적으로 고용이 가능한 고공을 선호하였다. 처음 우리나라 고문헌에 나타난 고공은 의식주와 임금을 받고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2년 주인집에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일시적 노동자였다. 고공계약은 고공과 지주가 서로 대등한 노동관계를 전제로 계약기간과 임금을 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으며 노동하는 자를 천하게 대하는 예속적 노동관계가 일반적이었다. 고공은 경제적으로 대등한 노동관계이지만, 예속적 관계를 강조하던 신분제 사회의 규범과 맞지 않았던 이질적 계층이었다."(19-20)


# 종천제 :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도 노비가 되는 제도, 종모종양제 : 부친의 신분 여부와 관계없이 오직 모친의 신분을 따라서 그 소생이 신분 노비가 되는 제도


# 고공제의 변화 양상

1. 고공법(1680) : 묵시적으로 1-3년 계약 기간, 고공기간의 장기화로 노동 이동성 제약이 높아 고공의 도망 급증, 고공기간과 임금 규정 미비로 분쟁 심화

2. 고공정제(1783) : 5년 이상의 장기 계약으로 노동 이동성 제약 증가, 노비만 고공 신분으로 등재

3. 화고제(1833) : 일일 단기계약 규정(단기고공 일반화), 노동 이동성 제약 소멸, 임금 노동시장 활성화


"18-19세기 토지생산성이 하락하는 추세에서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1680년 고공법에서 장기고공은 단순노동을 사용하는 농업생산에 투입되었는데, 단순노동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방식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강제노동방식에서는 노동생산성이 한계에 도달하면 고공이 더 이상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 하는 파레토 안정상태(pareto-stable)에 도달한다. 강제노동방식에서 지주가 고공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적으로 일을 시키면 고공의 태업과 도망으로 오히려 생산성이 하락한다. 이에 따라 주인의 노동관리비용(monitoring cost)은 증가하였다. 장기고공의 생산성 하락으로 지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노동보다는 보상인센티브 방식을 채택하였다. 보상인센티브에서 지주들은 장기고공보다는 이동이 자유로운 일시적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일일 노동계약제(labor contract)를 택하였다."(41-2)


2장 노비제와 생산성


"1731년 노비제가 종천법에서 종모종양법(이햐 종양제)으로 전환되면서 노비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성리학의 국가지배철학으로 사회에서 신분노비에 대한 도덕적 회의가 파급되었다. 국가는 노비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노비를 직접 호적대장에 기록하여 관리하여, 국가 조세와 군역의무를 부과하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노비는 자기성장 노력으로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과 시도를 하였으며, 가장 온건한 저항수단이 도망이었다. 노비의 도망이 늘면서 양반지주의 감시비용이 증가했고, 노비 대신 임금노동자인 고공의 사용이 늘어났다. 도망갈 수 없어서 남아 있던 노비는 태업과 파업을 통해서 주인의 강제노동에 저항하였다. 결국, 18-19세기 노비제에서 노비의 생산성을 크게 하락하였으며, 감시비용은 반대로 증가하였다." "이 장에서는 18-19세기 조선의 생산성 하락 원인을 제도적 원인, 즉 신분제인 노비제의 변화에서 찾고자 한다."(45-6)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전쟁피해로 국가재정이 악화되고, 양민 감소로 재정수입도 줄어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 양천(良賤)이 호환되다가 영조 7년(1731)에 종양법(從良法)이 제정되었다. 종양법은 부친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친의 신분이 노비이면 그 소생이 노비가 되는 것이다. 종양법은 노비제도가 와해되는 1894년까지 유효하였으며, 노비인구를 급격하게 감소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는 정부의 도덕적 자산으로서 왕권(영조)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고 양반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노비제의 전환으로 노비의 국가에 대한 신공 축소, 사노비의 신공 수취 금지, 공노비 추쇄 금지, 사노비의 속량기회 증가, 노비에 대한 체형 금지, 죄인 자손에 대한 노비 연좌제 폐지, 채무노비 금지 등 정책이 발표되었다. 18세기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였다. 순조는 1801년 공노비를 폐지했으며, 고종이 1894년 사노비마저 해방시켜 노비제를 완전히 철폐하였다."(50-1)


"18-19세기 조선에서 흥미로운 노동형태는 유민과 빈농층 가운데 일부가 자기 자신이나 자녀를 스스로 매매(=自賣)함으로써 노비신분으로 전락하는 자매노비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매노비는 일반노비에 비해 그 매매 숫자가 적고 나이도 어리며, 또한 아주 헐값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전체 노비매매에서 자매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는 18세기 말 이후 신분제의 해체와 정부의 부세 수탈 강화, 부의 양극화로 인해 유민과 빈농층이 증가한 사실과 관련이 깊다." "노비매매서류에서도 자매노비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자매노비의 목적이 18세기 가사노동으로 시작되었다가, 19세기 중후반 노비가 사라지면서 생산노동력을 대신한 까닭으로 보인다. 자매노비의 생사노동력 역할은 자매노비의 남성 비율이 높아지고, 장년층이 많다는 점 이외에 자매노비의 가격이 급격히 높아져서 일반노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71-2)


"18-19세기의 중요한 점은 실질매매가격으로 추정한 노비의 생산성은 1801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하락하다가, 공노비 폐지 이후 다시 증가하는 U자 모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비도망이 증가하면서 노비생산성도 하락하였지만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노비생산성도 점차 회복하였음을 알려준다. 18-19세기 노비제는 노비이동성을 극단적으로 제약하였으며, 노비도망도 증가하였다. 노비의 감시비용과 낮은 생산성은 노비의 실질가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노비의 도망과 생산성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보이지만, 노비생산성은 실제 임금노동자인 단기고공의 생산성보다 크게 낮았다." "실질노비가격은 일고의 실질임금보다도 32% 정도 낮았으며, 실질노비가격과 실질임금의 차이는 1801년 공노비가 폐지되는 시기 전후에 가장 컸다. 단기고공의 실질임금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지만, 실질노비가격에 비해 높아서 노비도망과 노동 이동성 제약이 노비 생산성을 얼마나 하락시켰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75-8)


3장 생산성과 임금의 비교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소작농과 고공은 농업경제에서 자기 토지가 거의 없고, 생계수준이 낮아서 고리대 이자가 높은 경우 항상 도망갈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단기고공이나 소작농에게 식량이 부족한 춘궁기인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인 가을에 현금이나 곡식으로 되돌려 받는 신용 수단인 환곡과 고리대는 신용위험을 고려해서 35-50%로 매우 높았다. 이 시기 유럽의 이자율은 10-15%였다. 경상도 대구 달성우씨가의 추수기에서 나타난 연간 고리대 이자율은 1731년 노비제가 종양제로 전환된 이후 50%로 높았으나,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35%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리대 이자도 하락하였다."(79-80)


"양반지주는 토지생산성이 떨어지면 이앙법과 퇴비의 사용, 수리시설 개선 등 새로운 농업기술을 도입하거나, 토지 면적당 노동력 투입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농업기술은 일정 기간 고정적이어서, 지주들은 토지 면적당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노동 집약도를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였다. 실제 18-19세기 경상도 칠곡과 예천에서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일고와 작인의 일인당 토지 경작면적이 줄어들었다." "18-19세기 지주제에서 지대가 감소하고 지대 수취율이 하락하자 양반지주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강제노동을 시키는 노비제의 한계보다는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임금 고용계약제를 택하게 된다. 1883년 화고제 이후 단기고공인 일고가 확대되었으며, 고공의 도망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일고들은 지주들에게 경제적, 신분적 예속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노동력보다 자유롭고 생산성이 높았다. 농업경영방식에 관계없이 계절적으로 농번기에 일고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82-7)


제2부 조세제도와 지가, 토지분해


4장 토지소유계층의 변동과 지가


"1590-1900년 동안 전라도·경상도 양반가의 전답매매명문(田畓賣買明文)을 살펴보면 양반층의 논과 밭에 대한 순 매입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민의 토지매도는 18세기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조세의 토지세화, 정액화와 더불어 지방관이 추가적인 잡세를 상민의 토지세로 떠넘기면서 토지를 보유한 상민층의 부담이 가혹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토지세의 부담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상민층이 토지를 팔고 다른 양반지주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거나 다른 도시지역으로 이동하여 임금노동을 하는 것이다.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조세의 토지세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18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데 반해 토지매입은 1651-1690년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상민층이 보유하고 있는 순 토지규모가 감소하였다. 시기별로 상민층의 토지해체 과정은 양반층의 토지집중 과정과 정반대의 행태를 나타내고 있어서 양반층의 토지집중이 상민층의 토지분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8-12)


"1700년을 기준으로 전라도·경상도 지역 모두에서 지가 상승은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양반층의 토지 실질가치는 1700년 기준 양적인 토지소유규모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 양반의 토지집중이 단순 토지소유규모의 집중뿐 아니라 실질자본의 집중을 나타내고 있다. 양반의 토지집중과 상민의 토지분해는 훨씬 더 심각한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다. 1691-1700년의 양반층의 토지자산의 실질가치가 토지규모보다 더 크게 상승하여 실질 토지자본의 축적이 18세기 초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의 토지는 분해되었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가정하고 있는 토지의 하향분해현상이 계층별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양반층의 토지소유규모 증가는 주로 상민층의 토지매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토지의 하향분해보다는 토지의 양극화 현상이 일반적이었다."(119-21)


5장 조세의 토지세화와 상민층의 토지분해


"전세는 전통적인 전결(토지)에 부과되는 조세이다. 1444년에 공법(貢法)을 시행하여 토지비옥도와 거리에 따라 1결당 4-20두씩 차등하여 결세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방관청에서 흉년에도 불구하고 1결당 10두의 과중한 전세를 부과해서 백성의 원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1635년 인조는 영정법을 발표하고, 기후조건에 관계없이 전세를 지역에 따라 1결당 4두(특정 지역은 6두)로 고정하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토지에 대한 세금이 높아지고 토지보유비용이 크게 증가하면서 상민층이 토지를 매도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민층과 그 가호에게 부담했던 조세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조세수입원도 불확실해졌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전에 상민의 호 또는 사람에 부과했던 세금을 조세수입이 확실하고 고정적인 토지에 부과하면서 조세를 토지세로 전환하였다. 양반 지주의 토지세와 잡세는 자주 소농과 작인에게 떠넘겨졌으며, 소농은 자기 토지세 증가와 더불어 지주의 토지세까지 부담하였다."(123)


"1760년(영조 36) 비총제는 그해 토지세 징수에 대해 조세대상 토지의 실결(實結)을 통해 지역별 총액을 확정하는 방법이다. 징수근거가 되는 경작지의 실결과 재해지의 재결(災結)을 결정하는 연분(年分)에 올해와 비슷한 작황을 보이는 과거 생산을 비교해서 그 작황을 조정하였다. 하지만 실제 토지세 징수액은 지난해와 유사하게 결정되었는데, 이는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호조에서 각 도의 농사형편을 참고하여 이와 상당한 이전 해의 수세총액과 비교하여 그해의 각 도 감면세를 정하는 비총법(比摠法)을 채택하였다. 전세의 납기는 조선 전기의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전세의 정액화를 가져왔다. 지방관은 조세징수액을 높이기 위해서 조세를 감액하기보다는 증액하거나, 고정적인 정액세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흉년으로 토지 수확량이 크게 감소한 경우에도 토지세는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조세의 정액화는 상민층에게 추가적인 준조세의 역할을 하였다."(125)


"18세기 말 조선의 사회제도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민층의 토지에 부과되는 토지세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대동법 이후 전세뿐 아니라, 공납과 대동미, 군역 등 모든 조세가 전결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조세의 토지세화로 인해 상민층의 토지매도는 급증하였다. 이외에 특별세와 전세부가세 등을 지방관이 임의로 과세하였으나 이 또한 주로 양반보다는 상민층에 전가되었다. 결국, 18세기 말 조세의 토지세화는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상민층의 대규모 토지분해와 노비도망으로 세수재원이 부족해지면서 안정적인 재원마련을 위해 중앙정부는 조세재원이 불확실한 공납과 대동법에 의한 가호별 조세, 군역과 부역 등 사람별로 부과되던 조세도 모두 전결을 대상으로 토지세로 전환했다." "18세기 말 토지세 증가와 지방관의 민고와 환곡, 고리대도 상민층의 토지보유비용을 증가시켰다. 고리대와 환곡을 사용했던 농민들은 토지세와 더불어 추가적인 생계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다."(141)


제3부 지주제와 이윤, 고리대 이자


6장 농업경영방식과 생산이윤


"소농의 생산이윤을 추정하기 위한 자료는 18-19세기 소농의 구체적 사례를 전하고 있는 박문수와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문헌을 사용하였다. 이들 문헌에서 소작료는 50% 수준이었으며 소작소농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비용과 결세를 부담하였다. 먼저, 15%의 전세(田稅)와 군역·환곡의 부세, 생산 종자비용은 10%였다. 또한 소농이 노동주체로서 계속 일을 하고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생계소비량이 필요한데, 조선 후기 진휼곡 자료를 활용하여 이 시기 최저 생계비는 수확량의 10-15% 정도로 추정하였다. 식량이 부족하고 빈곤했던 소작농들은 생계를 위해 봄에 고리대를 빌려서 가을에 갚았는데 연리 50%였다. 특히 소작농들에게 고리대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이자에 대한 현물대납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봄 춘궁기 때 소작농에게 생계를 위한 돈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기에는 원금과 이자를 곡물로 갚게 하여 단순 이자율에서 화폐가치의 하락분까지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추가적인 생산비용이 되었다."(150-1)


"토지세인 결세(結稅)는 처음에 지주가 부담했지만, 18세기 후반 이후 점차 소작인에게 전가되었다. 토지생산량 역시 감소하면서 지주는 소작농에게 결세뿐 아니라 종자비용도 부담시켰고 소작농은 기존에 비해 수확량의 10-20%의 추가 부담이 발생하였다. 김건태(2004)는 18세기 후반 소작인의 수입은 두락당 생산량의 감소, 1인당 경지면적의 축소, 지주제 관행의 변화 등으로 인해 18세기 초반에 비해 대략 40% 감소하였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조세의 정액화로 인해 토지세인 결세가 실제 생산량보다는 과거 생산량을 기준으로 징수되었다는 점이다. 실제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줄어드는 경우 조세 부담이 실제보다 커지므로 그 생산량의 차이는 준조세로서 소농의 생산비용을 상승시켰다." "한번 채무를 지게 되면 소농의 생산이윤이 -11%로 감소되어 적자에서 벗어날 확률이 줄어들었다. 소농은 기후조건과 상관없이 농업생산으로 지속적 흑자를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152-5)


7장 병작제와 임금노동, 고리대 이자


"노비처럼 강제노동을 사용하는 지주는 직영지 경영방식을 선호하며, 단기고공을 사용하는 지주는 병작제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농업생산방식과 노동양식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이는 조선 후기 소농경영방식이 자본주의 형성의 내재적 조건이라는 기존 연구 결과에 의문을 제시한다." "중요한 점은 소농경영 자체가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카무라 사토루가 지적했듯이 생산력 강화 과정에서 소농경영을 하는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도시가 흡수하여 자본주의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농경영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소농은 거의 적자경영이었으며, 토지가 분해되고 있었다. 농촌의 잉여노동력의 존재는 생산력 강화의 전제조건이 아니며 단지 자본의 축적과 확산에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소농경영방식이 조선 후기에 최적생산방식이었다면 소농경영이 고공노동을 이용한 병작경영을 대체하여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168-9)


# 병작제 : 경작인이 독립 소경영을 하고 지주는 농업경영에서 분리된 채 경제외적 강제를 통해 지대만을 수취하는 형태


"단기고공인 일고는 토지가 없는 무산자였으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주체였다. 이들은 스스로 가족을 중심으로 소농경영을 하였고, 지주의 병작지를 임차하여 지대를 지불했다. 이들은 매년 고리대에 의존하여 봄 춘궁기에 식량을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고리대를 갚았다." "신용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농업경제인 조선에서 이자율은 농업생산을 통해 최저 생계비를 유지할 삶의 수준을 담보로 신용위험을 고려하여 높게 책정(35-50%)되었다. 18-19세기 고리대는 조선 후기 노비와 고공의 도망이 빈번해지면서 사회적 믿음과 사회적 신용자본이 붕괴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용과 금융의 기능이 축적되지 못하고 시장발전을 저해하였다." "1801년 공노비 폐지 이후 사회적 신용과 사회적 자본이 점차 형성되면서 고리대는 20-35%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1801년 이후 노동 이동성 개선과 일고의 사용 확대는 실질임금의 인상뿐 아니라 신용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170-1)


제4부 화폐제도와 물가


8장 화폐제도와 물가, 교역조건


"조선은 1625년부터 적극적인 동전의 유통정책을 시도하였으며, 동전의 주전(鑄錢)에 대한 논의도 지속되었다. 명목화폐인 동전을 만들려는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603년(선조 36) 6월에 영의정 이덕형은 〈우리나라는 화폐로서 단지 미·포를 사용하기 때문에 농사는 병들고 국가는 가난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전을 유통시킴으로써 응급한 국가 경비에 충당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자고 하면서 동전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623년에 인조는 경기도에만 시행하던 대동법을 강원도에도 시행하였고, 1625년(인조 3) 10월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는 문제를 거론하였다." "최명길과 김육은 동전유통을 개성으로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김육은 효종의 신임을 토대로, 자신이 추진하여 성과를 거둔 대동법에 의한 공납의 일부를 돈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하여, 대동법과 행전법(行錢法)을 결부하고자 하였다."(188-9)


"17세기 초부터 의욕적으로 추진된 조선의 화폐정책은 1656년 중단되었다가 1678년 상평통보가 주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7세기 초 동전 유통정책이 계속 실패했지만, 동전 사용의 유용성을 점차 백성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시장거래에서 면포와 은화가 교환수단으로서 한계를 가지면서 명목화폐로서 동전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초기 상평통보의 유통은 서울과 인근 지역에서만 통용되었지만 동전주전의 확대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전유통량은 18세기 초에 500만 냥을 넘었으며, 이는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의 80%에 가까운 130만 석 정도를 살 수 있었다. 18세기 초 국내 동광 개발이 부진하여 동전원료를 일본의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일본 동의 수입량도 급감하여 동 원료 공급난이 심각하였다. 동 수입 제약은 이 당시 전황[錢荒, 동전 부족]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었다. 1731년(영조 7) 전황이 극심하고 동전가치가 품귀해지자 33년 만에 조선은 동전을 다시 주조하였다."(191-2)


"동전유통으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자 조선 사회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 신분제의 사회질서가 조금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즉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농업·광업·수공업의 생산력 증진, 상민과 소농의 토지이탈, 고리대의 성행과 농촌사회의 분화, 사회적 부의 불공평한 재분배, 사회경제적 윤리로서 성리학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전 유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화폐 가치관이 나타났다. 이익은 동전의 기능과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국토가 좁아서 재화 운반에 큰 어려움이 없고 농민이 스스로 밭을 갈고, 길쌈하는 자급자족적 농업에서 동전유통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선은 1727년 대동포, 군포, 노비신포를 종래 동전과 면포로 반씩 거두는 것을 모두 면포로 거두게 하였다. 또한 부상대고와 관청, 군영에서 동전의 퇴장을 금지하였다. 동전가치가 귀해지면서 부상대고들은 동전을 퇴장시켜서 고리대업을 통해 높은 이익을 취했다."(198-9)


# 부상대고富商大賈 : 많은 밑천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


9장 화폐의 품위저하와 디플레이션


"13-16세기 유럽 국가들은 국왕의 법에 따라 금화와 은화 등 법정주화의 제작을 독점적으로 관리했으며 주화의 무게와 형태, 금과 은의 함유량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왕실의 재정수입을 확충하기 위해 주화의 무게와 함유량을 줄여서 주전비용을 절감하거나, 주전이익을 높이는 주화의 품위저하(debasement)를 시도하였다." "유럽에서 주화의 품위저하로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금과 은의 무게단위로 유통되었다면, 화폐량의 변화가 없어야 하는데 실제 대규모 화폐량이 증가하였다. 이는 품위저하의 퍼즐이라고 한다. Rolnick et al.(1996)은 주화의 품위저하 퍼즐을 가져온 원인으로서 구 동전과 신 동전이 무게단위가 아닌 동일한 액면 가치(by-tale)로 유통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는 경우 구 동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구 동전의 구매력을 보전하기 위해 새로운 동전으로 전환하며 이때 화폐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214-5)


"Velde et al.(1999), Sargent and Smith(1997)는 구 주화와 신 주화가 동일한 액면 가치로 동시에 유통되는(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는 사람들이 정보 비대칭성으로 인해 두 주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구 동전의 품위저하 퍼즐은 구 주화와 신 주화가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될 수 있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론적으로 동전의 무게와 품질을 하락시키면 동일한 동전 원료를 사용해서 더욱 많은 동전을 주전할 수 있으므로 화폐량은 일반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조선에서 동전 품위저하는 화폐량을 증가시키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초기 화폐경제의 특성인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에 있다. 전황과 동전의 가치 안정화 정책은 구 동전과 신 동전이 같은 액면 가치를 가지고 동시에 유통되는 경제환경을 제공하였지만, 동의 수입제약, 높은 주전비용과 동전을 천시하는 성리학 지배이념으로 상평통보는 간헐적으로 주전되었으며, 전황은 지속되었다."(216)


# 조선의 주전이익률은 재료비와 연료비, 공임, 운반비 등을 고려하면 거의 0에 가까워 동전주전에 대한 적극적인 인센티브조차 없었다.


"조선 후기 전황비율은 1678-1750년 0.5-3.6% 수준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화폐공급이 증가하면서 1750-1820년 30-40%, 1820-1865년 60-80%로 증가했다." "동전이 세금으로 납부되고 다시 시장으로 환류하지 못하고 정부와 상인에 의해 퇴장되는 비중도 거의 80%에 달하고 있다. 동전의 마모와 손실률이 25% 정도라고 가정하면 동전퇴장으로 화폐유통속도는 1과 유사했거나 그보다 작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 후기 미곡과 면포 등 상품화폐의 사용비중도 크기 때문에 화폐유통속도는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황의 경제적 원인은 시장거래량이 확대되는 데 반해 동전주전이 제약되는 것 때문이지만 동전의 퇴장 등 다른 요인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전황으로 화폐가 귀해지면서 지주나 상인층들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화폐를 퇴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다시 전황을 가속화시켰다. 이같은 전황과 디플레이션은 상민과 소농을 분해했으며, 신분제를 해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239-40)


제5부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경제궁핍


10장 식민지 화폐개혁과 인플레이션, 환율


"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재정비하고 경복궁을 재건축하는 데 소요되는 거액의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악화인 당백전을 주조하였다. 1866년(고종 3) 11월부터 6개월 동안 1,600만 냥을 주조하였다. 당백전은 이전에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소재가치는 5-6배이지만, 액면 가치는 100배가 되는 고액전이었다. 당백전의 발행으로 거액을 일시적으로 왕실재정에 충당할 수 있었지만, 당백전은 실질가치가 액면 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악화(惡貨)였다." "국내 화폐시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으로 무역결제통화로서 일본 은화를 비롯한 중국 마제은(馬蹄銀), 멕시코 은화, 러시아 루블 은화 등 여러 종류의 외국 화폐가 유입되었다. 외국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문제는 상평통보와 외국화폐의 상대적 가치, 즉 상평통보의 환율(한전비가)을 일정하게 정하지 못해서 환율도 급변했다. 조선화폐의 남발과 외국 화폐가치에 대한 혼란으로 물가 급등과 많은 사회적 문제가 나타났다."(247-8)


"1865-1910년은 근대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시기이며, 일본 주도 화폐개혁은 조선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식민화가 되기 전에 이미 화폐적으로 식민화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본화폐의 유통이 합법화되면서 조선에서 일본화폐의 유통비중이 30%를 넘어섰고, 시장과 경제를 화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화폐개혁은 식민지 화폐의 단위를 변경시키거나,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거나, 또는 옛날 화폐를 환수하는 화폐정책을 말한다. 1876-1910년 사이 식민지 화폐개혁은 모두 일곱 차례로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 일본이 주도한 세 차례 화폐개혁은 1891년 신식화폐조례, 1894년 신식화폐발행장정, 1904년 화폐조례칙령, 즉 화폐정리사업이다. 1894년과 1904년의 화폐개혁은 각각 일본이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했던 시기였다. 일본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일본 불환지폐의 유통을 확대해서 청일·러일 전쟁 경비를 조선에서 조달하는 불순한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246-7)


# 일본 주도의 식민지 화폐개혁

1. 신식화폐조례(1891) : 일본화폐의 유통을 법적으로 허용하기 위한 조치로서, 빈번한 화폐개혁은 조선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 조선상인과 백성들에게 손실을 안겨주었고, 반대로 화폐개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상인들은 가치가 오른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무역과 유통에서 큰 이익을 보았다.

2. 신식화폐발행장정(1894) : 모든 당오전과 평양전을 일문전으로 통합하고, 백동화를 대규모로 발행하였다. 또한 금 태환이 안 되는 일본 지폐의 유통을 합법화하여 청일전쟁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여기에 화폐위조에 대한 처벌규정을 제거하여 일본인들에 의한 대규모 백동화 위조와 밀수를 조장했다.

3. 화폐조례칙령1호(1901) : 명목적으로는 금 본위제도와 중앙은행의 도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다. 화폐단위를 푼, 전, 냥에서 원 단위로 통일했다. 또한 일본의 금 본위제도 실시로 인해 부족한 금을 조선에서 대규모로 반출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4. 화폐정리사업(1904) : 일본 제일은행권을 법정화폐로 지정하고, 조선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했다. 이에 따라 백동화를 조세로 수취하는 조선정부와 백동화를 기반으로 어음을 발행하던 조선 객주와 상인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미곡을 구매한 일본상인들은 많은 무역차익을 얻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유통시켰고, 한전비가는 일본상인들에게 유리하게 점차 하락하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대와 금 본위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부의 원천으로서 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일본의 조선 금 수입액 비중은 1904년 일본 전체 금 수입액의 41%에 달했다. 일본이 조선 금을 매입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쉬운 방법은 일본화폐의 사용과 한전비가 하락이었다. 동일한 일본화폐를 사용해서 이전보다 싸게 조선 금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금 분석소의 설치, 금광 개발 등 정책적으로 조선의 금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 조선에서 한전비가의 하락과 별도로 조선 금을 국제시세보다 30% 이상 싸게 구입하는 가격수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국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위해 일본은 자국 또는 식민지에 획일적인 경제제도의 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일본 주도 식민지 화폐개혁은 국가 자본축적을 위한 필수적인 화폐침략이었다."(267)


"무역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탈이윤은 공정한 무역과정에서 등가 교역조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상이윤을 초과하는 이윤을 말한다. 이때, 정상이윤은 같은 시기 정상 이자율인 8-10% 수준을 말한다." "일본상인의 유통과 무역이윤의 크기를 직접 추정해 보면, 일본주도 화폐개혁이 조선에 가져온 경제적 수탈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본상인의 미곡 무역이윤율은 무역운송비(15%)를 제외하면 8.4%로서 정상이윤에 가깝다. 하지만, 일본상인의 유통이윤은 거간과 객주의 중간 수수료율 18.14%와 한전비가 하락률 -9.3%를 고려하더라도 연평균 33.15%로서 상당히 수탈적이었다. 같은 시기 조선의 대일 교역조건은 1880년 기준 50-60%에 그쳐 악화되었으며, 대일 무역은 부등가 교환이었다. 이러한 일본상인의 무역과 유통 초과이윤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은 인플레이션과 한전비가 하락 등 식민지 화폐개혁으로 인한 화폐적 요인이었다."(286-7)


"이러한 일본의 무역수탈과 식민지 화폐개혁에 반대하는 의견들은 무역의 상호이익원리를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일본상인들이 미곡과 금 무역에서 유통이윤이 발생했지만,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통해 상호이익과 교역조건개선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즉, 교역조건의 개선효과는 조선의 미곡 생산가격은 아주 낮았지만,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이전보다 미곡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게 되며, 수출가격의 개선효과로 인해 경제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국가의 교역조건은 등가조건으로 교환될 때 100을 기준으로, 교역조건이 100 이상으로 개선되면 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미곡의 교역조건은 1880년 대비 50-60%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점차 개선되었지만 1905년 이후에서야 100에 근접하고 있다. 즉, 초기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미곡무역에서 불리한 부등가교환이 발생하였으며, 조선의 교역조건은 개선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294-5)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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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2016 개정증보판
허수열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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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문제의 제기


"'(식민지) 개발론' 연구 역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나 수탈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이른바 '수탈론'과는 달리 개발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개발론'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이 공업화에 성공하여 '중진국' 내지 선진 자본주의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생긴 것이다. 즉 한국의 성공적 공업화의 '역사적 배경' 혹은 공업화의 '경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사회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초석이 놓여졌고, 그것이 해방 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성장사학에서 이러한 개발적 입장이 가장 확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한국사의 입장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러한 개발이 조선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이 책은 민족문제야말로 식민지 조선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개발론'과 생각을 달리 한다."(23-6)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은 급속한 개발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고, 조선인들의 경제적 처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또 개선될 전망도 없었으며,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에 의한 민족차별이 구조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민족별 소득 불평등은 다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악화할 것이고, 이것은 소득 분배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즉 민족별 경제적 격차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고, 식민지체제가 존속하는 한 확대재생산 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극단적이고 구조적인 민족별 경제적 불평등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에 발생하게 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해방과 더불어 이 개발의 유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바로 그 의미에서 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개발 없는 개발(development without development)'이었다."(28, 34)


제2장 농업개발


"1910년대 조선의 농업은 구한말 시대에 도달했던 농업상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조선의 농업을 검토해보면, 조선왕조 말기의 농업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이 시기가 왕조 붕괴기로 국가적 차원에서는 농업개발을 위한 노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지면적, 관개시설, 품종개량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국가가 공권력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게 된다면, 조선의 농업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급속히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이루어진 조선의 농업발달이나 해방 후 한국의 농업발달이 그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1920년대의 산미증식(갱신)계획에 의한 관개시설의 확충과 1920년대 후반 이후의 비료투입의 증가 및 1930년대의 다수확품종의 도입 등에 의해 미곡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56)


"일제 시대의 농업개발은 상당한 정도의 농업생산량 증산을 이루었다. 미곡의 경우에는 52.3%, 밭작물의 경우에는 31.2%가 각각 증산된 것으로 계산되었다. 이러한 증산은 경지면적 혹은 재배면적의 확대, 우량품종의 보급, 관개시설의 확충, 비료투입의 증대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시대 식민지적 농업개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농업개발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식민화의 과정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의 중심축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농업개발 과정에서 보다 비옥한 토지를 점점 더 많이 집적해갔다. 일본인 수중으로 토지가 점점 더 많이 집적·집중됨으로써,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 중에서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는 몫도 크게 늘어났다. 농업개발 과정이 진행되면서 민족별로 농업소득의 분배상태는 더욱 불평등해져 갔기 때문에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민들의 경제적 처지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79-80)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은 1910~15년간 및 1928~35년간에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1916~28년간 및 1935~42년간에는 변화가 매우 완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 1910~1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급증은 동양척식(주)의 회사소유지의 확대에 의한 바가 크다." "1928~35년간의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의 1910~15년간의 급증과는 원인을 달리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시기는 대공황의 시기였다." "요컨대 1920년대 말 이후의 공황 과정에서 농가의 경제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고 차입금 상환압박이 컸던 일부 지주들이 경쟁적으로 토지를 방매함으로써 이 시기에는 대규모로 토지소유권 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적 곤란 때문에 토지를 염가로 방매할 때 자금력이 좋은 일부 일본인들이 그 토지를 대량으로, 또 염가로 사들임으로써 1928~35년 간에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이 급증했던 것이다."(85-90)


"191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에 걸쳐 소작농 호수가 급증하고 자소작농 호수가 급감하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자작농 호수는 50만 호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자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70만 호 정도로 크게 줄어들고, 반면 소작농 호수는 100만 호 정도에서 150만 호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격심하였다. 그리하여 농민분해가 일단락되는 1930년대 초가 되면 자소작농 호수는 소작농 호수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1915~32년간의 불과 17년 만에 자소작농 호수는 31% 감소하고 소작농 호수는 64% 증가해, 전체 농가의 53%가 소작농이 되어버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격렬한 농민 분해가 있었던 것이다. 산미증식(갱신)계획으로 대표되는 일제시대의 농업개발 정책은 농업생산의 증가와 동시에 수많은 조선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궁박 상태에 놓이게 만든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06-7)


"1942년의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서 일본인 농가 호수와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0.17% 및 0.19%로 극소수였다. 이 극소수의 일본인들이 조선 전체 논 면적의 16.9%와 조선 전체 밭 면적의 4.6%를 소유함으로써, 민족별로 극심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농업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경지의 극단적인 불평등한 소유관계, 그리고 소작제도라는 생산관계에 의한 농업경영, 이 두 가지가 바로 식민지적 농업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남한의 미곡 생산량 혹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본격적으로 증가하는 시기는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70년대 후반기 사이의 20여 년간이었다. 농업혁명이라고 할 만한 놀라운 성장이 공업의 본격적 발전에 선행하면서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70년대가 되면 숙명처럼 여겨지던 '보릿고개'가 사라지게 된다. 일제시대의 미곡 생산량의 일시적인 증가는 마치 찻잔 속의 폭풍과 같은 것이었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126-8)


제3장 공업개발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직후 채택한 산업정책은 조선을 순수 농업지대로 묶어두려는 것이었다. 회사령(1911~20년)으로 조선에서 근대적 대공업이 발흥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나, 해외 유학과 고등기술교육을 규제함으로써 조선인의 기술발전을 억압하려 한 것에서 병탄초기의 정책의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그러나 1916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기가 도래하면서 조선의 공업발전을 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규제는 한결 느슨해지는 한편, 기업설립 활동을 활발해졌다. 그 결과 회사령은 공식적으로는 1920년에 철폐되지만 1916년경부터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 후 1920년대 말까지는 조선총독부가 공업발달을 저지하는 정책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이 공업개발을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세웠던 것도 아니다. 이 시기의 산업정책은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부문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조선의 공업은 주로 영세중소자본의 속출을 특징으로 하게 된다."(132-3)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재벌로 성장하는 일본질소비료(日窒)의 조선 진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일질 이외의 일본대자본의 조선 진출도 상당히 활발해진다. 미쓰이(三井) 계통의 남북면업(南北綿業)·군시제사(郡是製絲)·동양제사·소야전시멘트, 미쓰비시(三菱) 계통의 조선중공업, 니치멘(日本棉花) 계통의 조선면화·전남도시제사, 카네보(鍾紡) 계통의 종연방적(鍾淵紡績), 카타쿠라(片倉) 계통의 편창제사, 동척(東拓) 계통의 조선연탄, 아사노(淺野) 계통의 천야시멘트스레트 등의 14개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때 진출한 대자본의 대부분이 1930년대에도 조선공업발달을 주도해가는 자본계통이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일본대자본의 조선진출은 1930년대에 들어 한층 가속화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이 보다 적극적인 공업 육성정책(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133-4)


"일제시대 산업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히 제2차 산업이 발달한 것만이 아니고 제2차 산업 내부에서는 경공업을 제치고 중화학공업이 더욱 급속히 발전함으로써 공업구조가 한층 고도화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40년에 조선이 도달한 중화학공업의 비중 51.6%는 전간기에 선진 주요 공업국이 도달했던 수준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높은 수준이었다." "1930년대에 조선의 공업구도가 급속도로 중화학공업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조선의 자원, 특히 전력 자원에 대한 재인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질소비료(주)는 부전강에 댐을 건설하여 20만kW의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거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이용하는 유안공장을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했다. 전기를 이용해서 공중 질소를 고정하고,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와 산소를 얻고, 질소와 수소를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얻어 유안을 생산하는 암모니아합성법(전해법)에서 전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이자 동시에 공업 원료이기도 했다."(153-6)


"일제 말 조선에 투하된 공업회사자본은 모두 일본인 회사자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에 대한 동양경제신보사의 추계에 의하면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은 5%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95%는 일본인 공업회사의 것이었다. 1942~45년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인 공업회사 자산의 비율은 더 증가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기간의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염두에 둔다면 그 비율은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당시의 조선의 공업회사 자산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 공업회사 자산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해방 당시 조선의 5,300개 일본인 회사 중에서 0.4%에 해당하는 23개의 일본인 대공업회사의 자산이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43.1%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조선전력과 일본질소비료, 압록강수력발전, 일본제철 등의 4개의 회사 자산만으로도 조선 전체 일본인 회사 자산의 1/4을 조금 넘는 25.6%나 되고 있다."(177, 180)


"일본인 근대적 대공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공장수의 1%도 되지 않는 62개의 공장에서 전체 공장생산액의 29%를 생산하고 있었다. 둘째, 이들 업종은 대체로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노동자 1인당 생산액이 다른 업종에 비해 월등한, 자본집약적 생산기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넷째, 공장당 노동자수가 평균 422명으로 그 밖의 공장의 35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토착공업과는 판이한 이런 특징들 때문에, 생산과정은 대체로 자기완결적이었고, 따라서 일부 원료조달 부문(예컨대 정어리 기름 등)과 일부 제품 가공업(예컨대 시멘트 벽돌이나 기와 등)을 제외하면 조선 내의 다른 자본, 특히 조선인 자본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었다. 1930년대에는 바로 이들 업종의 생산액이 비약적으로 증대함으로써 조선의 공업생산액이 급증하고 공업구조가 고도화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 일본인 대공업과 조선인 공업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188-90)


"조선에서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지만, 그 전조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군수공업 육성은커녕 공업 육성의 의도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기였다. 즉 조선의 공업화는 군수공업이라는 동기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업화를 군수공업화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역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는 군수공업화이기 때문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모든 자원이 전쟁이라는 목적에 합치하도록 통제된다는 가장 큰 특징이 있고, 따라서 군수공업육성이 가장 중요한 산업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이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 육성이라는 계기를 강조하는 것이 무리이듯이, 중일전쟁 이후의 공업화에서 군수공업육성이라는 계기를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군수공업화를 논외로 하고는 공업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종래의 군수공업화 강조론은 타당하다."(205-6)


"1943년 10월에 공포된 '군수회사법'에 따라, 조선에서는 제1차 및 제2차 두 번에 걸쳐 100개 회사가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 조선인 회사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과 백낙승의 일본무연탄제철 둘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회사였다." "회사수는 100개사로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 군수회사로 지정된 회사의 자산이 일본인 회사 자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9%나 되고 있다." "조선의 공업은 일제 말기로 다가갈수록 군수공업화의 성격이 짙어지고, 1944년 단계가 되면 조선의 광공업은 완전히 군수공업화의 체제로 재편성된다. 생산이 전체적으로 괴멸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생산역량을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비군수품 생산부문은 노동력, 원료와 자재, 자금 등에서 심한 제한을 받았고, 평화산업 관련 기업은 통폐합되거나 강제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획득된 생산역량은 군수회사에 집중되었는데, 조선에서 이 군수회사라는 것은 거의 완전히 일본인 자본에 의한 것이었다."(236-7)


제4장 근대교육과 기술의 발전


"조선의 근대적 교육은 갑오개혁(1894) 이후 사범학교, 중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농상공학교, 소학교 등의 관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5년경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에 의해 근대적 교육은  또 한번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근대교육운동은 민족교육의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자주독립', '문명개화', '내수외학', '아는 것이 힘이다' 등의 슬로건 아래 추진되었다. 각지에 학회, 교육회 등이 조직되는 한편, 학교건설·운영운동, 민중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 이에 따라 병탄 직전인 1910년 3월에는 2,146개소의 보통학교에 10만 명을 상회하는 조선인 학생들이 제적하게 된다. 이 숫자는 해방 당시의 조선인 학생수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5년 남짓한 사이에 근대교육기관의 수가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은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근대교육을 확대해나갈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41-2)


"그러나 일제 말기의 민족별 학력구조를 살펴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 1944년 5월의 인구조사 결과보고를 보면, 일본인의 73%는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불취학자는 27% 정도 되지만, 불취학자 16만 명 중에서 14만 명은 11세 이하이기 때문에 실제 불취학자의 비율은 2.9%에 불과하다. 여기에 소학교 초등과 중퇴자 1.3%를 더해도 4.2%에 불과하다." "반면 조선인의 경우에는 학력 수준이 매우 낮다. 불취학률이 86%에 달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11세 이하를 제외하더라도 불취학률은 54%에 이른다. 한편 일본인의 경우와는 달리 소학교 초등과 졸업 이후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거의 중단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일본인은 전체 조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에 불과했지만, 소학교 고등과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수는 조선인보다 많았다. 중학교, 전문학교 및 대학교 졸업자수는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250-1)


"1930년대 후반 조선인 기능자 양성은 급박한 전시체제로 어쩔 수 없이 종래의 방침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그렇게 높은 수준에 있지 않았다. 1946년 11월, 남한에는 약 9천 명의 숙련노무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학력은, 소학졸이 거의 7할에 육박하고 중학졸 이상은 3할 남짓하기 때문에, 결코 높다고 하기 어렵다. 한편 이 숙련노무자수를 1943년의 조선인 기능자수 40만 명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격차가 있다. 1943년의 경우는 남북한을 합한 숫자인 반면 1946년은 남한만의 숫자이고, 해방직후의 산업생산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양자간의 이 엄청난 격차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결국 1943년의 기능자 속에는 1946년의 숙련노동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기능수준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일제 말기 조선인 노동자의 질적 성장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한계를 갖는 성장이었다."(263-4)


제5장 불평등과 차별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이 감소경향을 가지면서 또 상당히 불안정하게 변해간 반면에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적어도 1940년까지는 1.1석을 오르내리는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불안정과 일본의 1인당 미곡소비량의 안정이 무역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키무라 미츠히코는 미곡, 보리 및 대두의 소비에서 얻어지는 조선의 1인당 일일 섭취 칼로리를 계산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칼로리 섭취량은 1918년이 정점이고 그 뒤로 계속 감소하여 1936년에 최저점에 도달한다. 그 뒤 다시 약간 증가하지만, 1918년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키무라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1인당 곡물소비량은 결코 증가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시대는 아직 엥겔계수가 매우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1인당 곡물소비량의 동향은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거나 혹은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게 해준다."(275-7)


"현재의 한국과 같이 독립된  경우에 있어서는 국내총생산이든 국민총생산(GDP)이든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같은 식민지경제의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에 대한 추계로부터는 조선인의 경제상태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 예컨대 차명수의 추계에서처럼 1912~37년간의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4.1%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조선인들의 소득, 소비, 투자 등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끄집어낼 수 없다. 기껏해야 1인당 소비라든가 1인당 투자와 같은 평균적인 개념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족별로 소득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면, 이런 평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키무라의 계산과 같이 만약 일본인들의 평균 소득이 조선인의 10배라고 가정한다면, 1940년의 경우 조선에 거주하던 70만 명의 일본인들의 소비능력은 조선인 700만 명의 소비능력과 비슷할 것이다. 결국 평균적 개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279-80)


"일제시대의 조선인 노동자 중 일부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불숙련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생존수준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임금수준이 일제 말기까지 변함 없이 지속되었다. 전체 노동자수의 15% 정도 되는 숙련노동자만 생존수준 이상의 임금을 받았던 것으로 된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도시하층민, 노동자 등의 생활수준을 검토해보았을 때 그들 대중의 경제적 처지가 생존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제시대에 조선경제가 고도성장했고 또 공업화를 통해 공업제품의 조선 내 소비가 급증했다는 거시적 제지표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에 개선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조선인 경제에서는 아직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대적 경제성장이란 인구증가가 계속되는 조건 하에서 1인당 생산량이 지속적 성장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291-3)


"학력에 의한 차별은 오늘날의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광범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당시의 일본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만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이 학력에 의한 차별의 본질은 학력주의로 위장된 민족차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내의 인구 중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지만,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 내에서는 초대 총독 이래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으려는 방침이 관철됨으로써 고등교육기관의 확충이 지지부진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이 공학하는 학교의 경우에는 민족별 쿼터제를 도입하여 조선인의 입학기회를 원천적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굳이 민족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선 내의 여러 직장에서 학력을 기준으로 직원이나 사원을 모집하게 되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309)


제6장 연속과 단절─개발의 유산


"해방 당시 조선에는 일본의 해외자산 총액 218.8억 달러의 24%에 해당하는 52.5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고, 그중 남한에는 총액의 10.5%에 해당하는 22.8억 달러가 소재하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남한지역에 남겨졌던 일본인 자산은 만주나 '기타 중국(북, 중, 남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지역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다." "일본인 기업자산의 북한지역 편중은 공업자산에서 한층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공업을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양분하여 비교해보았을 때, 경공업부문에서는 남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중화학공업부문에서는 북한지역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해방과 그것에 수반된 남북분단을 전제로 한다면, 해방 후의 한국경제를 일제시대와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단절적인 측면이 더 강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의 하나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한국경제가 다시 가난한 농업국으로 바뀐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318-21)


"남한지역에 남겨진 물적 유산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방 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첫째, 해방 후 남한은 식민지적 분업구조의 붕괴에 따라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 결과 해방 직후에는 약간 남아 있던 비축 원자재가 소진되어가면서 원료부족으로 휴업상태에 빠지거나, 심각한 조업단축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둘째, 전시체제 기간 동안 생산시설은 각종 통제에 의해 군수산업과 관련 있는 산업부문이 여러 가지 정책적 보호와 지원에 의해 비대해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 물적 유산은 군수산업부문에서 평화산업부문으로의 구조전환을 통해 비로소 남한 경제의 부흥이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이들 물적 유산 중에는 일제 말기에 부품확보가 어려워 조악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거나 이미 노후화되어 해방 시점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결합되어 해방 직후에는 많은 생산시설이 그냥 녹슬어가게 되었다."(322-5)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해방 직후 남한에 남겨졌던 물적 유산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다시 그 50.5%가 파괴되었다." "일본인 물적유산의 한국전쟁 이후의 잔존가치는 조선전체 일본인 부동산자산의 4.9%, 조선전체 일본인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10.6%, 남한에 남겨진 공업부문 부동산자산의 39%에 각각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제시대의 공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일본인 공업자산과 한국전쟁 이후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의 크기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는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1960년까지 약 30억 달러가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1960년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은 미국의 대한 원조액의 약 1/7 정도에 불과한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요컨대 물적 유산이라는 측면에서만 한정하여 평가한다면, 해방 후 남한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공업자산이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화에서 한 역할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327-9, 334)


종 장 개발 없는 개발


"이 책은 실증이 가능한 것만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각종 제도적 개혁 같은 것은 논의하지 않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도입된 각종 근대적 제도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의 형성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많은 부정적 측면을 수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평가하기 어렵다. 수량화하여 다루기 어려운 것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남북분단과 민족갈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많은 조선인 기업가들은 정부와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해방 후의 잣대로 평가하면 친일파 혹은 예속자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철도가 깔리고 도로가 뚫리고, 전화와 전기가 들어오고, 많은 공장과 저수지가 생겼으며 또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가 발전한 것만 보고 일제시대를 문명화의 시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시대는 더 없는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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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쓴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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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


"독립운동의 1세대가 전통 학문을 익혀 구시대 안목에서 망국의 변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2세대는 어려서 전통 학문을 익혔으나 청년 시절 격변기를 맞아 신문명을 수용하면서 구시대와 신시대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1세대의 독립운동이 전통적 의식과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2세대는 근대적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간 주체들이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 국외 한인사회 등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2세대였다. 3세대는 어려서부터 신학문과 신사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독립운동에 접목해 그 폭과 깊이를 더했다. 3세대는 3·1운동에서 만세운동의 전위를 담당했으며, 1920년대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 이후 2세대와 함께 독립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다. 4세대는 1940년대 전시체제를 강요받던 상황에서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을 벌였던 학생들을 비롯해, 광복군 등 1940년대 국외 독립군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이었다."(15)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은 '일제 침략에 맞서 나라를 되찾는 것'에 초점을 맞춰 투쟁사로서의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독립전쟁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것만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자유를 파괴한 일제의 퇴치를 위해 독립운동이 무엇을 했는가라는 본질적 문제에 마주치게 된다." "한용운은 「조선 독립의 서」에서 인류가 추구할 최고의 가치로 '자유와 평화'를 설정하고, 이는 인류의 권리이자 의무라 정의했다." "윤봉길 의사도 자신의 의거를 단지 〈한국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멸망하는 날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개한 것〉이라고 표명한 바 있었다. 한국의 독립은 일본과 한국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종말과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일로 인식한 것이다. 즉 한국의 독립운동은 반인류적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한 평화운동이었고 인도주의운동이었다."(24-5)


1강 일제강점기 통치의 성격과 특징


"1910년대 일제의 통치 정책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물론 한말에도 토지사유권이 확립되어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불충분했을 뿐 아니라, 토지에 농민층의 여러 권리가 딸려 있었다. 그런데 이를 모두 무시한 채 토지사유권에서 지주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농민의 권리를 모두 배제했다. 이로써 일제는 토지 점유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러일전쟁 이후 많은 토지를 집적하고 있던 일제 자본의 토지 점유를 합법화했다. 일제는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고 있던 농민들의 관습상의 경작권·개간권·도지권·입회권 등은 철저히 부정하고 오로지 지주의 사유권만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많은 농민의 토지는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거나 지주의 소유지로 바뀌었다. 결국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분화·몰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34-5)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된다. 이는 1918년 8월 일본 내에서 일어난 '쌀 소동'을 잠재워 식량과 쌀값 문제를 안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자신들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수리시설 확충을 통한 토지개량사업과 품종개량 및 비료 사용을 통한 농사개량사업을 병행했다. 일제는 많은 자본을 토지개량사업에 투입했지만, 저리 자금의 융통, 수리조합의 설립 등이 대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민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산미증산계획은 계획 자체의 부진에도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평균 생산량과 반출량을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평균치와 비교하면, 생산량은 1472만 석에서 1713만 석으로 241만 석이 증가했지만, 반출량은 295만 석에서 725만 석으로 430만 석이나 증가했다. 이는 생산량 증가분보다 더 많이 반출한 것으로, 수탈 성격이 강했다."(40)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한국인의 반대와 저항을 억누르면서 한국을 인적·물적 자원의 병참기지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하는 국가총동원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그 때문에 지하자원의 개발과 군수공업 건설 등 전 부문에 걸친 생산력 확충과 증산이 강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전시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고 전쟁 비용을 확보하고자 한국인들에게 저축을 강요했다. 이렇게 회수된 자본들은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일본 독점자본에 배분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자 일제는 철저히 일본인화를 꾀하는 민족말살정책, 즉 '황민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관제 운동이 실시되었다. 1938년 〈거국일치〉, 〈견인지구〉, 〈진충보국〉, 〈내선일체〉라는 4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이를 확대·개편하여 1940년대부터 실시된 '국민총력운동'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황민화 정책은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절정에 달했다."(47-9)


# 일제의 식민 통치의 변화

1. 1910년대 : 헌병경찰통치(무단통치), 토지조사사업, '회사령'(1910년, 허가제)

2. 1920년대 : 민족분열통치, 고등경찰통치(문화통치), 산미증식계획, '회사령' 폐지(1920년), 일본 자본가 진출

3. 1930년대 : 민족말살정책, 병참기지화 정책, 국가총동원령


2강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1910년대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는 1905년 이후 국내외에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의병운동·구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존왕주의적 충군애국 의리에 토대를 두었고,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이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고, 의병운동은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통한 전통적 전제군주제 국가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라 할 수 있다. 구국계몽운동은 서구적인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한 자강이 국권 회복의 방법이라는 인식하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국권 실추의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으로 민족의 내부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었다. … 구국계몽운동에서 추구한 미래의 국가상은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입헌군주제였다. 다만 당시는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과 황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권을 부정하는 공화주의 이념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했다."(52-4)


"3·1운동이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에 미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전 민족 제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3·1운동에 청년·학생층과 농민층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의 등장은 공화주의 이념 정착을 가능하게 했고 1920년대 이후 '민중'의 존재와 역할이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둘째, 3·1운동은 국제 사조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의 증가, 문화통치하에서의 제한된 자유 등은 서구신사상의 폭발적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 급진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 등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신국가 건설 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만세시위라는 방법을 택했다. 이러한 운동 방법은 군사적 무력에 의한 독립전쟁 이외에 새로운 운동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진압에 의해 폭력투쟁의 방법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만세시위 방법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56)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공합작, 국내의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이 나타났다. 이는 방법론상 독립운동 조직을 정당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과 궤를 같이했다." "민족유일당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운동 진영은 경쟁 관계에 있던 공산당 조직에 필적하며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은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한국국민재건파·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통합한국독립당 등 파벌에 따라 이합집산 했지만, 정당을 결성해 활동했다." "민족주의의 우익적 경향을 대표한 한국국민당은 물론이고, 좌익적 경향을 띠었던 민족혁명당도 삼균주의를 기본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초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전선체 역할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건국강령'에서 삼균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채택했다."(61-3)


# 삼균주의 : 조소앙이 체계화한 이론으로, 수직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균등을, 수평적으로는 정치·경제·교육상의 균등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에 토대를 둔 민주공화국 건설을,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시를 통해 균등 사회의 건설을 지향했다.


"3·1운동 이후 유입된 무정부주의 사상은 유교적 의려 정신이나 민족주의적 의분과 친연성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1923년 의열단 명의로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이다. 신채호가 작성한 이 선언문은 먼저 자치론·참정권론 등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국내 문화운동가들의 실력양성론의 타협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외 독립운동 진영의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민족혁명은 '민중의 폭력적 수단'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만이 방법이라 역설했다. 「조선혁명선언」에는 독립운동이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사회구조도 변혁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타도 대상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 외에 특권 계급, 경제적 약탈 제도, 사회적 불평등,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거론하면 독립운동이 곧 신사회 건설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64-5)


"1925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조직화한 사회주의운동 진영은 정치적 독립과 사회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민족해방'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1930년대 전반에는 노농 소비에트 건설론이 제기되었으며, 토지혁명 과정에서 빈농 우위 원칙이 견지되면서 노동계급의 주도권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좌편향적 노선에 반대하면서 여전히 민족협동전선론적 입장을 견지하던 집단도 있었다. 여운형·배성룡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좌편향적 노선을 따르지 않고 민족적 현실에 적합한 운동 노선을 정립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전후로 국외 사회주의운동계는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발전적으로 변모했던 민족주의 세력의 국가건설론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에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서로 연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67-70)


3강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1910년대는 비밀결사 투쟁의 시기였다. 잔여 의병 활동과는 별도로 망국 후 유림과 의병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3·1운동기에는 만세시위를 방략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등장했다. 비밀결사는 시위를 조직화·대중화하고 격렬한 항쟁을 주도하는 데 앞장섰다." "연해주에서는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한흥동 건설에 나섰다. 이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전쟁론을 실현시키기 위한 독립군 기지 개척운동이었다. 특히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념해 1914년 10월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는 무장투쟁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1917년 12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인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멸설과 순종의 주권포기설을 근거로 국민주권설을 주장하며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 이미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정부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된 사실은 임시정부의 탄생과 향후 1920년대 민주공화 정체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다."(73-5)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럿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직된 것은 3·1운동으로 고조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논의해 마침내 상하이로 통합 정부를 수립한 것도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결과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계는 좌우합작과 민족전선 통합에 노력하고 결실을 이루어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수립은 부분적이나마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향후 민족유일당 결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통합 임시정부 체제는 1921년 1월 이동휘가 떠나고, 1923년 1월 시작된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면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말았다. 향후 독립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면서 임시정부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망라해 창당된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옹호를 선언한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77-8)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침공해 꼭두각시로 만주국을 수립하고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친일 만주국 수립은 우리의 독립운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결국 만주 독립군은 망국 후 20여 년간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된 곳을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던 김구는 1931년 12월 임시정부의 특무 조직으로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로 말미암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황민화와 민족말살정책에 대응해 강렬한 국학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1930년대 전반기에 문화와 학계가 정비·발전되고, 1934년 조선학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은 주목된다. 국학민족주의는 국어학·국문학·역사학이 핵심을 이루며, 문화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문화운동은 일제의 민족 말살에 대항해 민족 보전을 추구한 독립운동이었다."(80-2)


"1940년대 전반기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중국 관내의 임시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 세 그룹이 지역 기반과 이념을 달리하며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며 비로소 정부 조직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의 연합은 독립운동계에 좌우 연합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1942년 화베이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었다. 이 동맹은 화북조선청년연합이 조선의용대의 화베이 진출을 계기로 발전적으로 개편한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투쟁 단체이다. 조선의용군은 이 동맹의 당군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아 항전했으며, 후에 중국공산혁명전쟁과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여운형이 국내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조직해 이끌고 있던 비밀결사였다. 조선건국동맹은 8·15와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다."(83-4)


4강 한말 국권회복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의병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일제의 대토벌작전에도 살아남은 의병 부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국내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투를 이어갔다. 이들을 전환기 의병이라 한다. 1910년 전후 함경도·강원도 등지의 의병진은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북간도와 서간도,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유인석·홍범도·이진룡 등이다. 이들은 그곳에서 활동 중인 이범윤·안중근 등과 연합했다."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는, 1907년 4월경 안창호 등이 주도해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대표적이다." "신민회는 점차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훗날을 기약하자는 온건파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만주에 광복군을 조직해 일본과 결전하자는 급진파로 갈라졌다.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3년 5월 흥사단을 조직했고, 이동휘 등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마련해 독립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95, 99-100)


5강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


"광복회는 1915년 7월(음) 풍기광복단·독립의군부·조선국권회복단 등 계몽운동과 의병전쟁 계열의 단체와 인물들이 연합해 조직되었다." "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강령을 천명하고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활동 거점 설치,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결성 초기에는 일제가 거둬들인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우편 마차를 공격하기도 했고, 일본인 소유의 중석광을 공격해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 부호 서우순을 상대로 한 '대구권총사건'이 실패하는 등 자금 모금은 원활하지 못했다. 광복회는 친일 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경북 칠곡 부호 장승원과 충청도의 친일 면장 박용화, 전라도의 서도현을 처단했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체포를 면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 주비단과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119-20)


6강 3·1운동


"1883년 공식적으로 국기의 지위를 획득한 태극기는 각종 행사에 등장하면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10년 국망으로 국기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태극기가 1919년 3·1운동을 통해 애국·애족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국권 상실의 현실을 각인하고 독립의 사명을 일깨우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후 3·1운동 기념식 등 각종 기념식에 태극기가 등장했고 임시정부의 모든 행사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도 태극기가 등장했다." "「애국가」는 조선·대한제국에서 국가(國歌)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한 바 없었다. 애국가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갈 무렵, 애국창가운동의 일환으로 민간에서 널리 불리던 노래로,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했다. 3·1운동의 확산과 함깨 「애국가」도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민의례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다."(144-5)


7강 1920년대 국내 독립운동


"191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은 토지조사사업, 농사단체 조직, 품종 교체 등 주로 수탈에 적합한 식민지 농업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1920년대는 수탈 농정이 한층 강화된 시기였다. 일제는 육지면장려계획, 산미증식계획, 산잠백만석증수계획을 통해 이른바 삼백(三白)의 증산에 본격 착수했다. 산미증식계획이 일본 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면, 면화·양잠 정책은 일제의 외화 획득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층 강력한 농업 지배기구가 필요했고, 그 결과 조직된 것이 '농회'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1920년 들어 노동운동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고, 1924년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탄생했다. 이 단체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은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 성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154-5, 159)


"사회주의사상의 확산은 계몽적 수준에 머물던 청년운동에도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주의사상은 식민 통치의 부당성과 모순을 사회과학적인 기준에서 깊게 성찰하도록 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혁신적 주장을 하도록 이끌었다." "1924년 4월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청총)은 민족문제에 대해 과거와 같은 타협적 민족운동을 배척하고 '혁명적 운동'과 협동한다는 방침을 제시해, 민족운동 세력과 손잡고 대중선전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2월 9일 조직된 조선학생회 역시 교양적이고 계몽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러한 문화운동 노선 역시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학 과정에서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요구하며, 그것을 대신할 민족교육 이념으로 '조선인 본위 교육'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민족의 해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단결투쟁은 독립 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162-3, 166, 169)


8강 1930~1940년대 국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일제의 탄압에 의해 사실상 해체된 조선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에서 제시한 '12월 테제' 지침에 따라 당을 재건해야만 했다. '12월 테제'는 종래 공산당이 부르주아 및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심각한 파벌 투쟁과 연속적인 대량 검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종래의 분파 투쟁을 근절하고 노동자·농민(혁명적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을 기초로 당을 재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그룹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하면서도 반일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연대하지 못했다. 즉 재건그룹들은 계급 대 계급 전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 친일 요소와 반일 요소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비혁명적'이라 판단되는 세력은 모두 민족개량주의로 매도하고 '적'으로 선포했다. 박헌영이나 이재유그룹 역시 난징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해 노농 대중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했다."(184-5, 188)


"일제 말기 파쇼적 총동원체제가 조선인 전체에 대한 인적·물적 수탈 강화로 치닫자, 반파쇼 저항운동이 소극적 거부에서 적극적 반대 투쟁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학생이나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이 가장 큰 탄압을 받았지만, 학병이나 징병·징용 등 강제 동원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들이 계속 생겨났다. 저항운동의 주체나 형태도 다양해져 노동자·농민의 '국민징용령' 반대와 농민동맹운동, 신사참배 거부와 조선어학회사건 등 종교·문화 운동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은 일제 말기 국내의 최대 항일 단체였다. 일본에서 미군기의 도쿄 공습을 목격한 여운형은 미국·영국의 전쟁 준비로 일제가 급격히 패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년간 조선민족해방연맹을 통한 준비 작업 끝에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동맹은 민족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구성원을 규합해 중앙조직을 구성하고, 각 도별 지방조직을 꾸려나갔다."(193, 196)


9강 한국 독립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


"1923년 1월,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임시정부의 지역적·인적 한계를 극복하고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출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민족주의진영은 서북파와 기호파 등 지역에 따라 나뉘었고, 북경파는 반임정 자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진영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에 호의적인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반임정 입장을 견지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분열했다. 창립 당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임시정부 고수파의 고집 역시 회의의 성공을 막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3년 6월에 종료된 국민대표회의는 목표로 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과 최고 기관 수립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회의를 거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이 모색되었다.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데 '정부'의 형식에 대한 고민이 제기되고, 새로운 대안이 모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당'을 수립하자는 대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204)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와 만주 지역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 독립운동을 통일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유일당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은 독립운동 추진 주체로 정당을 상정했다. '정당으로써 국가를 통치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이 목표였다. 좌우파가 연합해 정부가 아니라 정당을 조직하되, 민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에 접어들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통일전선 결성 원칙에서 좌우가 의견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파가 중앙집권적 독립당 결성을 추진했다면, 좌파는 노농 대중의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혹은 혁명적 통일전선의 결성을 주창했다." "민족유일당 결성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임시정부를 운영할 조직으로 정당이 결성되었다는 성과를 남겼다. 종래 임시정부가 정부의 형태만 있을 뿐 참여 정당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향후 운영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었다."(207-10)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결성에 참여한 단체는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이었다. 의열단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점을 고려하면, 새롭게 창당한 민족혁명당은 좌우합작의 민족통일전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고수파를 포용하지 못했고, 좌우의 사상적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잔존해 있었다." "결성 직후 분열된 민족혁명당은 1941년 12월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사회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요인으로는 이념의 공유가 있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개인이나 특정 계급에 의한 독재를 배격하는 민주공화국 건설, 정치적·경제적·교육적으로 균등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균등사회 실천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민족혁명당의 지향과 공유하는 바가 많았다. 1940년대 진행된 임시정부 중심의 좌우합작은 이런 공유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것이었다."(210-4)


10강 국내외 여성 독립운동


# 여성 독립운동가들

1. 윤희순 : 초기 을미의병 당시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2. 안경신 : 투탄(投彈)·자살(刺殺)·사살(射殺) 등의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해 활동함

3. 남자현 : 1920년대 중반 사이토 총독 암살을 계획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1933년 주만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죽이려다 체포되어 순국함

4. 정정화 :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해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삶을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헌신함

5. 박차정 :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교양 교육을 담당했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역임함

6. 오광심 :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 소속으로 한중 연합 항일전에 참가했고,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지복영·조순옥·신순호·민영주 등과 함께 광복군으로 복무함


11강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만주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의 인재 공급처이자 독립전쟁의 최전선이었다. 20세기 전후 의병 세력들이 역량을 펼치던 곳이며,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이주 한인들에게 근대 교육과 민족 교육을 동시에 실시하던 지역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각종 무관학교 성격의 민족 교육기관을 설치해 인재 배양의 요람으로 각광받았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과 다음 해 성립된 만주국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만주국의 경찰과 군대에 맞서 쌍성보·경박호·대전자령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1934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을 접고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공백이 생기자 사회주의 세력은 표면적으로 유격전을 내세워 저항했다.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까지 산악을 중심으로 이주 한인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265)


12강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8년 8월 말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칼미코프의 백군에 맞서 하바롭스크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소비에트 적군은 처참히 패했고, 한인사회당 적위군도 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해 9월 4일 하바롭스크는 백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그러나 1922년 10월 25일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면서 5년간에 걸친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공로를 세웠고, 또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다. 내전에서 보여준 한인들의 공로와 희생은 이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7년 하반기부터 연해주 전 지역의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키라는 명령이 모스크바로부터 내려왔다. 원동(극동) 지역에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1937년 9월 초순부터 두 달 여 사이에 약 17만 2000명의 한인들이 연해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났다."(282-7)


13강 중국 관내 지역의 독립운동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역량을 통일하고자 다시 임시정부로 결집했다. 먼저 1940년 5월 광복진선의 3당은 해체를 선언하고 한국독립당을 출범시켜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삼았다. 이어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 뒤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조선의용대도 1942년 7월 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입했다. 재편된 한국광복군의 사령은 지청천, 새로 증설된 부사령직에는 김원봉이 선임되었다. 정치 세력도 임시정부로 집결했다. 1942년 10월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인사들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의정원은 좌우연합정부 구성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10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공포하고 부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에는 한국독립당의 김구,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출되었다."(308-9)


"한편,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과 결별한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세력은 1938년경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했다. 1941년 국민당 지역에서 항전하던 조선의용대원들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던 중 화베이 지역에 머물렀는데, 이곳에서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대장정에 참가한 무정 등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을 조선해방이 관건으로 인식했다. 1941년 1월 팔로군 전방 사령부의 소재지 산시성 진둥난 타이항산에서 항일 단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해 활동했는데, 그 지도자가 무정이었다.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원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 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고, 조선의용대 출신의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삼았다. 그 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조선의용군을 결성하고, 무정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선의용군이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을 펼치면서 화베이 지역은 한인 공산주의자 세력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309-10)


14강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 27년간의 역사는 침체와 고난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해 간 굴절의 역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긴 시간동안 한민족을 대표하며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임시정부'라는 정부 형태는 1917년 '2월혁명' 뒤의 러시아나 폴란드의 임시정부처럼 단기간에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임무를 마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27년이라는 유례없이 긴 시간 동안 존속했으니 그동안에 영고성쇠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임시정부에 대해서 '발생 가치'와 '역할 가치'로 구분해 평가해야 한다는 선학의 주장은 건국절 시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 경철할 만한 선견지명으로 여겨진다. 임시정부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된 그 자체는 '발생 가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독립운동의 구심점 구실을 다했는가'라는 '역할 가치'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313-4)


"1919년 4월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나타난 독립에 대한 전 민족의 열망과 의지가 결집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라는 점에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임시정부는 모두 여섯 차례의 헌법을 통해 1919년 대통령중심제, 1925년 내각책임제, 1927년 관리정부 형태, 1940년과 1944년의 절충식정부 형태 등 권력구조의 형식이 변천했다. 이렇듯 여러 정부 형태를 경험한 것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다만 해방이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해 임시정부가 새 조국 건설과 직접 연결되지 못했고,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환국할 수 없어 외지적 종결의 역사를 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1948년에 수립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치를 천명함으로써 역사적 명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참조해 제정됨으로써 임시정부가 지향하던 이념을 수용했다."(330-1)


15강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에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으로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을 해산하고 활동을 금지했다.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 산하 수청지방총회는 1912년, 만주지방총회는 1914년 이후 활동이 봉쇄되었다. 시베리아지방총회는 1917년까지 활동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1915년과 1918년 두 차례에 걸친 파쟁을 겪으며 하와이 한인 사회가 분열되었다. 당시 하와이지방총회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활발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1915년 이후 이승만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박용만 계열은 갈리히연합회를 조직하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후일 대조선독립단으로 개편)로 양분되었다. 그 결과 미주 한인 사회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 계열로 삼분되었고, 10여 년간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기능했던 국민회는 이후 북미·멕시코·쿠바 한인 사회로 범위가 축소되었다."(339-40)


"재미 한인 사회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약 100만 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이로 인해 미주 한인 사회는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국민회는 특파원 파견과 지방회 조직을 이용해 '애국금'이라 불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설치 직후부터 재미 한인 사회의 재정 장악을 시도했다. '애국금' 수합 업무는 국민회에서 주관했는데, 구미위원부가 독자적으로 '공채표'를 발행해 자금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로 국민회와 구미위원부 간에 마찰이 일자, 임시정부는 재정 증대를 기대하여 1920년 3월 국민회의 애국금 수합 업무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에 자금 모집을 위임했다. 이 결정으로 국민회는 외교에 이어 재정권마저 구미위원부에 빼앗겨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는 모집 재정의 18% 정도만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나머지는 구미위원부 유지에 사용했다."(343-4)


16강 일본·동남아 지역의 독립운동


# 일본 내의 의열단 활동

1. 양근환 : 1921년 참정권 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에 온 친일파 민원식을 처단했다.

2. 박열 : 1923년 일본 황태자 결혼식 때 투탄 의거를 준비하다가 검거되었다. 일제가 관동대지진의 와중에 그 책임을 재일 한국인에게 돌리기 위해 이를 대역(大逆)사건으로 꾸며냈다.

3. 김지섭 :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 학살에 항의하는 뜻으로 일본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 투탄 의거했으나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4. 이봉창 :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왕 마차 일행을 향해 투탄했으나, 위력이 적어 실패하고 말았다.


#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 활동

1. 홍콩 : 박은식이 독립운동의 소식을 알릴 《향강잡지》를 발행함(1913년)

2. 싱가포르 : 홍명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고무농장을 운영함(1914년)

3. 타이완 : 신채호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된 위폐를 교환하다가 체포됨(1928년)

4. 필리핀 : 여운형이 '반제국주의 연대'를 연설한 뒤 일본 영사의 항의로 억류됨(1929년), 안창호가 한인을 대규모로 이주시켜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려고 시도함(1929년)

5. 인도네시아 : '고려독립청년당' 3명이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뒤 자결함(1944년)


17강 보론: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추계한 조선의 실질농업생산액은 1911~1918년간에는 34.6%나 증가한 반면, 1918~1926년간에는 2.0%로 거의 변화가 없다. 1911~1918년간은 토지조사사업 기간으로 일제가 조선의 토지 자원에 대한 조사에 주력하던 기간인 반면, 1918~1926년간은 1920년부터 시작되는 산미증식계획 기간이 포함된다. 토지조사사업 기간의 실질농업생산액 증가율이 본격적인 농업개발 기간을 포함하는 1918~1926년간의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농업생산에 투입되는 경지면적은 간척과 개간에 의해 증가할 수 있는데, 두 통계 모두 1911~1918년간보다는 1918~1926년간에 훨씬 더 많이 증가했다. 관개면적의 경우에도 그렇다. 동물질·식물질·광물질 등의 각종 비료 소비량도 1918~1926년 사이에 월등히 많이 투입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농업 지원 자금 역시 다르지 않다." "1918~1926년에 비해 1911~1918년의 증가율이 더 높았던 유일한 요인은 우량품종 보급률이다."(379-80)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농업통계에 대해 의문을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었는데, 그 기간에 경지면적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이루어졌다.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경지면적은 실제보다 상당히 과소평가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정확한 실측에 의해 바로잡히면서 조선총독부의 경지면적 통계는 1918년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는 간척이나 개간에 의한 경지면적 증가는 미미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의 경지면적 증가는 모두 부정확한 측량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이고, 실제 경지면적이 그렇게 많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다. 이렇게 경지면적에 대한 통계가 불완전했는데, 재배된 작물의 생산량 통계가 정확할 수 있겠는가?"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실질농업생산이 급증했다는 기간은 조선총독부가 그 부정확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수정했던 기간(~1917년까지의 통계치)과 정확히 일치한다."(383)


"식민지근대화론(주익종의 주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1인당 GDP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1인당 소비도 크게 증가했고, 생활수준도 매우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1912~1932년 중에 실질 소비지출의 연간 증가율은 3.28%였고, 1인당 실질소비지출은 같은 기간 중 1.68배로 증가했으며, 그 연간 증가율은 1.94%였다고 한다." "육소영은 1910~2013년간의 식품수급표를 사용해 1일 1인당 칼로리·단백질·지방·무기질·비타민 등의 섭취량을 계산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1918~1952년간에는 감소 추세였고, 1953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0년대 이후가 되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평균 신장(키)도 증가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내놓고 있지만, 영양 섭취량이 감소했다면 신장이 증가했다는 주장은 더는 성립하기 어렵다."(391-2)


"식민지 조선 경제에서는 민족별로 생산수단에 현저한 격차가 존재했고, 이에 따라 소득분배 역시 민족별로 불평등했다. 이 소득분배의 민족별 불평등은 다시 민족별 생산수단의 격차를 확대하고, 다시 민족별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한층 더 악회시키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이것이 식민지적 경제구조이고, 이것은 식민지 체제가 지속되는 한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업 발전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대자본에 의한 근대 기업이 비지적(飛地的)으로 설립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공업은 더욱 이중구조화되었다. 그 성격은 일본과 조선, 그리고 조선 내에서는 남한과 북한, 민족별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현저한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식민지적 경제구조하에서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점차 배제되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전환되어 갔는데, 민족 차별과 학력 차별로 인한 식민지적 고용 구조로 인해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최저변을 형성했다."(398)


"일제강점기 조선의 개발과 근대화를 강조하는 주장들은 일반적으로 조선 전체의 변화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일본으로부터 선진적인 기술과 대량의 자본이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광공업·농림수산업·금융업과 상업 등 각종 산업이 발달했으며, 철도·도로·항만·통신 등의 각종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되었고, 도시가 발달했으며, 인구가 증가했고, 소득이 증가하는 등 변화가 생겼다. 일제강점기의 통계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갖는 시대적 특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시대이다. 많아야 전체 인구의 3%도 되지 않는 일본인들이 조선 내 생산수단의 주요 부분을 장악했고, 후기로 갈수록 생산수단은 일본인들에게로 더욱더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 시기였다. 일제강점기가 어떤 시대였는지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바로 이 민족문제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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