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제2부 : 발전 과정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2
배영수 지음 / 일조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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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7장 국가 건설의 실제 


"1791년 12월 해밀턴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에서 연방정부가 적당한 수준에서 세율을 책정하고 관세를 부과하며 미국의 제조업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퍼슨과 매디슨은 해밀턴의 보고서에서 관세 수입으로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대목을 보고, 부패한 영국의 정치적 관행을 떠올렸다. 더욱이 제조업이 발달하면 거기에 고용되는 빈민이 증가하고, 그래서 공화국의 사회적 기반이 위축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농업에 전력을 기울였던 남부를 대표하는 정치인들도 대부분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북부에서도 적잖은 정치인들이 해밀턴의 보고서에 불만을 표시했다. 북부에서 대두하던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밀턴의 제안과 달리 관세를 높게 책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밀턴의 보고서는 의회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그 대신, 제퍼슨과 매디슨을 중심으로 해밀턴을 비판하는 당파가 뚜렷하게 형성되었고, 이들을 〈공화파〉Republican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9-30)


"당대인들은 정당과 파벌을 구분하지 못했고, 당파를 조만간 사라져야 할 현상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은 지속되었고, 당파도 예상과 달리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1800년에는 정권이 연방파에서 공화파로 넘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당파의 대립 구도는 흔히 〈제1당 정당 체제〉First Party System라 불린다." "공화파는 남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182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집권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제퍼슨과 매디슨을 거쳐 제임스 먼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버지니아 왕조〉의 몸통이다." "그래도 제퍼슨은 해밀턴이 추진하던 공채 상환을 중단하지 않았다. 부채는 정치를 오염시키는 폐단이므로 신생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청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정책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점은 제퍼슨 행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간주되는 루이지애나 매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광대한 영토 매입은 연방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31, 35-6)


"미국의 정치는 1815년부터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에 들어갔다. 연방파는 해밀턴의 부국강병책을 중심으로 집결했지만, 공화파가 그런 정책을 대부분 계승함에 따라 뚜렷한 색채를 잃게 되었다. 더욱이 연방파는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공화파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상인과 금융인을 비롯한 자산가들을 비호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부패와 권력의 집중을 면밀하게 경계하지 않는다는 공화파의 비판에 주의를 기룽리지 않았다. 반면에 공화파는 그런 비판을 제기하며 각지에서 민중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결국 연방파는 점차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고, 이는 〈제1차 정당 체제〉의 해체로 이어졌다. 더욱이, 1815년에 미영전쟁이 끝난 다음에 대두한 국민주의nationalism가 정치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른바 〈제2의 독립전쟁〉을 계기로 미국인들은 종교적, 문화적, 지역적,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으로서 유대 관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46-7)


"존 마셜은 1801년 1월부터 1835년 7월까지 3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법원장직을 역임하면서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제도적 지주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19년 다트머스 대학 판례에서 마셜은 미국 헌법이 모든 계약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과 경제적 가치에 관한 계약을 보호한다는 취지를 지닌다고 해석했고, 그것도 사적 계약을 정치적 권위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큰 관심을 지닌다고 이해했다. 이 판결은 다트머스대학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마셜 법원은 다트머스 대학 판례를 통해 법인─원래 의료나 교육 같은 비영리사업을 목적으로 만드는 단체─이 헌법의 보호를 받는 제도로서, 정부가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등, 간섭하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마셜은 법인이란 정부가 창조하는 법적 존재이지만, 그 취지가 정부의 운영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부가 자의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고 천명했다."(61-3)


제8장 발전 동력의 재편 


"19세기 초부터 시장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적 상승이나 하강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은 과거에 비해 더욱 물질적 풍요에 주목하고 또 주력하던 풍조를 보여 주었다. 이제 미국인들은 〈제 힘으로 성공한 사람〉self-made man,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귀영화를 누리며 성공을 구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러러보았다. 이런 관념은 나중에 〈미국인의 꿈〉American Dream이라 불리는 면면한 전통으로 발전한다." "다른 한편 경제발전과 빈부 격차가 동시에 전개된다고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함께 랄프 왈도 에머슨을 중심으로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대안을 모색하던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의 꿈〉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71-3)


"미국식 자수성가의 대표적 사례였던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는 〈잭슨파〉Jackson Party는 보통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구호 아래 정치인과 결탁해 특권을 확보하는 상공업자들을 경계했다. 잭슨파는 우호적인 언론기관과 접촉하고 지역별로 정치단체를 조직하며, 휘장을 두르고 노래를 부르며 대중 집회를 열고 가두 행진을 벌이는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 정치의 기법들을 도입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1824년 24%에서 4년 뒤에 58%로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그중 56%가 잭슨을 지지했다. 그러자 선거에서 패배한 애덤스와 클레이도 추종자들을 모아 정파를 조직하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잭슨파는 주권재민과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는 〈민주당〉Democratic Party이라 불리게 되었고, 애덤스파는 그와 달리 법의 지배와 소수의 권리를 옹호하는 〈휘그당〉Whig Party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수립된 〈제2차 정당 체제〉는 1850년대 중엽까지 한 세대 동안 유지된다."(74)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공황 때문에 각 주의 정부는 재정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 많은 주들이 은행을 수립하고 운하를 건설하는 데 투자했으나, 공황 때문에 채무 불이행 사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권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잭슨과 민주당은 자유방임을 역설했다. 그들이 말하던 자유방임은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거나 개혁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부가 소수의 유력자들을 비롯한 〈특수 이해관계자들〉special interests을 비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결국, 1820년대부터 일부 주들이 뉴욕을 뒤따라 법인 설립을 자유화하며 유한책임제를 도입하는 조치를 취했고, 1850년대에 이르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주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혁명과 건국을 통해 수립되었던 자본주의의 정치적 토대 가운데서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을 분립시킨다는 원칙이 실제로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85-6)


"〈미국형 제조 체제〉American system of manufacturing는 기계화와 표준화, 그리고 대량생산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이런 특징은 물론 노동력을 적게 들이면서도 일정한 규격에 따라 많은 물량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요소였다. 그것은 토지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한 반면에 노동력이 부족한─특히 장인의 숙련 노동력이 부족한─미국의 특이한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이 주도하는 미국의 독특한 시장 특성도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부자는 언제나 있었지만, 시장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원하는 사치품은 장인이 많은 유럽에서 생산되고 있었던 만큼, 거기서 수입해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중산층이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매우 두터웠고, 노동자도 높은 임금 수준 덕분에 유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탄탄한 구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인구와 경제가 함께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미국에서는, 대중이 주도하는 시장이 대단한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99-100)


"미국의 부르주아지는 (유럽과 달리) 귀족과 평민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층이 아니라 사회질서의 상층을 차지하는 계급이었다." "흔히 대·중·소 세 부류로 구분되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대부르주아지가 바로 엘리트와 그 가족으로 채워진다. 엘리트는 흔히 어떤 선발 과정을 거쳐 뽑힌 사람들이나 그럴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훨씬 제한된 의미로 쓰인다─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최상층을 차지하고 거기서 제도적 권위를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엘리트 연구를 주도한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대개 사회적 위계질서와 더불어 자신들의 지위를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일생 동안 지위가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엘리트는 상당히 견고한 집단으로서 지속력을 지닌다는 것이다."(122, 125)


"미국의 노동자들은 기계를 부수며 산업 발전에 항의하지 않았다.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기계는 노동자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노동자의 작업을 지원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개선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지만 미국의 노동자들도 심각한 문제점에 부딪혔다. 우선, 빈부 격차가 더 커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부유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격차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욱 심했다." "무엇보다도, 시장경제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제였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에 따라 좌우되며, 언제든 일정치 않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사람들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서도 변덕스럽게 바뀐다. 불황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느닷없이 찾아와서 누구든 떨게 만들었다. 그처럼 예측할 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불황을 미국인들은 〈공황〉panic이라 부르기 시작했다."(131-3)


부록: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 동력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가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도 권력이나 위신이나 명예, 또는 신앙을 추구하는 욕구가 존재하며, 사람에 따라 물질적 이해관계보다 훨씬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런 욕구가 인간을 움직이는 매우 강력한 동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에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적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유물론적 시각에서는, 그것이 포착되지 않는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에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과학과 기술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문화는 이미 1980년대부터 문화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이 부각되는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조엘 모키르는 근대 서양의 대두 요인으로 과학의 진보와 기술의 혁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장 문화〉에 주의를 환기한다."(159-62)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내재적 모순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그 동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계질서를 옹호하는 소수의 특권 집단과 평등주의를 추구하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립은 결국 정치적 발언권을 지니는 시민이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경제성장을 자극하거나 소득 재분배에 기여하는 등,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민의 개념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예상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되는 단순한 구조로 개편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지 않고 여러 집단으로 분열되었으며, 중산층도 다양한 계급으로 분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적 모순과 사회적 대립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국제 질서와 함께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요인이다."(166-7)


제9장 노예제 


"19세기 미국은 산업혁명과 시장경제의 발전을 겪으며 빠른 빠른 속도로 성장했지만, 외환 측면에서는 고질적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수입하던 공산품 이외에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계류의 수입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농산물과 수산물을 비롯한 일차 산품의 수출이 늘어나도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 사정이 크게 달랐다. 적자는 주로 북부에서 나왔고, 남부는 그것을 대부분 메웠다. 바꿔 말해 북부의 상인들이 해외에서 공산품을 수입해 남부에 공급하고, 그 대금을 남부의 공장주들이 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결제함으로써 무역적자를 대부분 메웠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850년대 가장 중요한 수입품은 63.2%를 차지한 공산품이었고,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61.6%를 차지한 원자재였다. 수출품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품목은 면화였다. 즉, 면화는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경제발전에 가장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190)


"농장주들은 작업 일지를 바탕으로 노예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압력을 가했다. 특히 일을 잘 하는 노예에게 식품이나 의복 같은 선물을 주며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유도한 다음, 같은 작업 조에 편성된 다른 노예에게도 그만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채찍질을 가하는 방법을 썼다. 따라서 노예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작업을 완수하고 채찍질을 모면하기 위해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다. 게다가, 두 손 모두 바른손으로 써서,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일을 해내라는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더욱이, 농장주들은 기록을 토대로 해마다 더 많은 작업량을 노예들에게 부과했다. 그 결과, 180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어느 농장에서 노예 한 사람이 하루에 딴 면화가 28파운드였으나, 1846년 미시시피에서는 그 양이 341파운드로 12배 이상 늘어났다. 남부의 농장은 관리 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나중에 북부에서 대두하는 대기업들에게 선례를 제공했다."(192)


"노예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면서도 주인의 소유 아래에 있는 재산으로서 복합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세기 남부에서 노예 매매가 지엽적인 현상이 아니라 중심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서 노예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노예 가격은 젊은 남성의 경우에 가장 높았는데, 19세기 초에 200달러 정도였다. 그렇지만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600달러로 급등했고, 게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상승해서 내전 직전에는 1,500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따라서 남부의 농장주들은 노예가 재산으로서 지니는 가치도 십분 활용하고자 했다. 노예를 담보로 잡혀 자금을 마련하고, 그것을 이용해 토지를 매입하거나 다른 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업, 면방직 같은 제조업, 철도나 운하를 건설하는 토목업은 물론이요 심지어 증권에도 손을 뻗쳤다. 이런 측면에서 농장주들은 자본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197-9)


"폭력은 특히 노예 여성에게 벗어나기 어려운 공포였다. 젊은 여성은 농장주에게 손쉬운 능욕의 대상이었다. 농장주는 마음이 내키면 강간을 저지를 수 있었고, 또 마음에 들면 첩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의 아들이나 조카 등, 농장주 일가의 남성도 그에 못지않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에 저항하는 여성은 채찍질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보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남부 백인 사이에 만연한 성적 방종을 질타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늙은 여성은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공포, 즉 가족과 강제로 이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농장주는 돈이 필요할 때는 물론이요 다루기 어려운 노예를 처벌할 때도 노예를 팔았고, 그래서 흔히 노예의 가족생활을 깨뜨렸다. 따라서 매매라는 형태로 나타나던 이 폭력은 노예 가족의 핵심 구성원 가운데서도 특히 여성에게 언제나 잠재적 공포로 존재했다. 노예제 아래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욱 심각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202)


제10장 내전 


"미국의 인구는 1810-60년 반세기 동안 724만 명에서 3,144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1810년에는 북동부에 거주하는 인구가 349만 명으로, 전체 인구 724만 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8.1%를 차지했다. 반면에 남동부 인구는 268만 명이었고, 그 비율이 36.9%였다." "1860년대에 북부로 취급되던 북동부의 인구는 1,059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래도 전체 인구 가운데서 차지하는 비율은 33.7%로 크게 줄었다. 남동부 인구는 537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그 비율은 17.1%로 북동부보다 더 크게 줄었다. 반면에 북중부와 남중부를 합친 서부의 인구는 1,487만 명에 이르렀고, 그 비율은 47.3%로 훨씬 크게 늘어났다." "서부에서도 노예제가 없는 지역의 자유인 인구는 남쪽에 비해 4배가 넘는 속도로 증가했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서부에서는 자유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서도 노예제에 의존하는 남쪽보다 그렇지 않은 북쪽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222-3)


"속도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서부로 이동한 이주민은 남에서나 북에서나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서부 내륙이 〈교통 혁명〉 덕분에 동부 해안과 연결되자, 새로 이주한 농민은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후가 온난 다습한 남쪽에서 면화와 사탕수수를, 또 한랭 건조한 북쪽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쪽에서는 농장주의 주도 아래 노예제에 의존하는 농장 농업이 발전한 반면에, 북쪽에서는 자영농이 주도하는 자작 농업이 확립되었다." "인구 분포를 토대로 배정된 하원 의석은 건국 초기부터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들에 비해 그렇지 않은 자유주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그 이후에 진행된 인구 변동과 서부 팽창 덕분에 더욱 기울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관계는 건국기에 45 대 55였지만 1840년대에는 40 대 60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내전 직전에는 35 대 65로 기울어졌다."(224-5)


"미국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대서양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토지를 차지한 데서 출발했고, 건국 이후에는 외국인 귀화 정책과 원주민 이주 정책에서 보듯이 그런 식민주의적 자세와 정책을 유지했다. 그런 전통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남쪽에서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차지하고 북쪽으로는 오리건까지 손을 뻗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바다를 건너 쿠바마저 스페인으로부터 매입하고 니카라과를 텍사스처럼 장악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전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적 팽창 노선이 미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이견과 분열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팽창을 통해 확보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금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 미국인들은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전의 원인은 노예제를 넘어 서부 영토에서, 나아가 식민주의 전통에서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237-8)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결국 정계 개편을 초래했다. 캔저스-네브래스카 법안을 저지하지 못한 북부의 정치인들은 휘그당을 되살리는 대신에 새로운 정당을 조직했다. 거기에는 노예제를 반대하던 휘그당원들, 자유토지당에 가담했던 사람들,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 그리고 심지어 이민 반대론자들도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는 노예해방이나 인종 평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노예제의 확산과 농장주 세력의 확대를 저지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서부 영토에 노예제와 농장주가 정착하지 못하게 저지함으로써, 자영농이 되려는 노동자들을 위해 충분한 토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자영농 공화국을 지향하던 정치인들은 1854년 7월 전당대회를 열고 제퍼슨을 뒤따른다는 뜻에서 공화당Republican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유 노동, 자유 토지, 자유 인간〉이라는 구호도 채택했다."(246-7)


"링컨은 폐지론자들과 달리 노예제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주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예제 폐지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고는, 설령 폐지한다 해도 해방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기가 어렵고 또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 백인과 평등한 지위를 누리며 살게 하기도 어렵다고 부연했다. 이처럼 인종 평등을 부인하는 조심스러운 언행은 당대 미국에 인종주의가 만연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치적 고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다수 미국인들은 인종 평등이 혼인을 통한 인종 혼합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우려했고, 그래서 1860년대부터 새로운 용어 'miscegenation'을 만들어 쓰며 인종 평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링컨이 주력한 것은 노예제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었다.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 노예제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전제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는 시민의 자치를 지향하는 공화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제도였다."(251)


제11장 재건과 신남부 


"공화당은 이미 1864년에 남부의 재건에서 반란 가담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링컨과 존슨이 그와 같이 엄격한 조치가 오히려 통합을 방해할 것이라며 거부하고 온건한 노선을 천명함에  따라, 의회는 재건 정책의 주도권을 잃었다. 그렇지만 전후에 남부에서 사태가 악화되자, 의회를 지배하던 공화당은 급진파의 주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1866년 6월 급진파는 의회에서 수정조항 제14조를 통과시켰다. 제1항에서는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을 시민으로 규정함으로써 1857년 드레드 스코트 판례를 무효화했다. 흑인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원주민과 달리 미국의 관할권 아래에 있으므로, 미국의 시민이자 그들이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제1항의 〈적법 절차〉due process of law와 〈법률의 평등한 보호〉equal protection of the laws 구절은 이후 소수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281-4)


# 다만 수정조항 제14조 1항의 해당 구절은 차후에 '법인'의 권익을 보장함으로써 엘리트의 권력을 보호하는 기능도 지니게 되었다. 


"흑인 참정권은 새로운 정치체제에 반발하던 남부 백인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것은 인종주의적 편견에 물들어 있던 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연방의 권위와 공화당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남부 정치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따라서 수정조항 제14조와 제15조에 불구하고, 인두세 납부 실적과 문자 해독 능력을 비롯해 흑인의 참정권을 제약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활용했다. 그리고 그런 장치에도 불구하고 참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에 나타나는 흑인을 저지하고자 물리적 폭력을 가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백인 연맹〉이나 〈붉은 셔츠〉 같은 준군사 조직을 결성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테러에 의지해, 민주당은 1870년대 중엽에 이르면 남부에서 공화당을 밀어내고 정치권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남부 백인들 사이에서 〈구원〉Redemption이라 불리던 정치적 변화였다."(288-9)


"연방정부는 남부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그에 반발하는 민주당과 남부 백인의 저항을 제압하지 못했다. 또 흑인의 참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집행하고 질서를 확립할 만한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 연방은 내전을 계기로 압도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을 구축했으나, 재건 시대 남부의 행정과 치안, 그리고 사법을 관장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자원까지 확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부의 주 정부나 지방 정부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연방정부가 테러범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데 협력하지 않았다. 범인들 가운데서 사법 처리를 받은 인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1870년대 중엽에 이르러, 공화당은 남부에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작업을 단념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연방의 권위는 남부 주들의 집단적 저항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으나, 재건이 끝날 때에는 남부에서 과거의 정치 체제가 부활하는 것을 막지 못할 만큼 위축되었다."(293)


"남부의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구원자들〉Redeemers이었다. 그들은 민주당 안에서도 주로 법조계와 기업계 출신의 남부 정치인으로서, 남부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재건을 주도했던 공화당 급진파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 아니라, 남부를 내전으로 이끌었던 기존 엘리트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먼저 자치와 백인 우월주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따라서 투표장으로 가는 흑인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백인 우월주의 단체를 억제하지 않았고, 또 인두세 납부 실적이나 문자 해독 능력을 근거로 투표 자격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도 철폐하지 않았다. 그런 장치가 빈곤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백인 빈민의 참정권까지 침해하는 데도 개의치 않았다. 〈구원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부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구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권위였다."(302-3)


"대법원 역시 흑인의 권리 신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흔히 〈민권법 판례〉Civil Rights Cases이라 불리는 1883년 판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흑인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법원에 제기했던 다섯 건의 소송을 하나로 묶어서 다룬 판례였다. 여기서 연방 대법원은 연방헌법 수정조항 제14조와 1875년 민권법─기차나 선박, 음식점이나 숙박업소 같이 공중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시설에서 인종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개인 사이의 사적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수정조항 제14조는 개인이 다른 개인과 맺는 관계가 아니라 주에서 제정하는 법률이나 시행하는 조치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하는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구에 얽매이는 편협하고 인위적인 해석이라는 소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 의견에 따라 1883년 민권법 판례는 연방의 권위가 남부의 인종 관계까지 미치지는 않는다고 단언했다."(313-4)


"남부는 재건 이후에 산업화와 도시화를 추진하면서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으나, 남부 경제가 담배와 면화, 곡물과 염료 등, 몇몇 농산물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할 수 없었다. 〈신남부〉라는 구호는 농업이라는 전통적 토대를 허물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상공업을 이식시키는 발전 방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전을 계기로 농장이 해체되었지만, 남부 농업에는 노동력이, 그것도 저렴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이 여전히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그런 노동력은 물론 노예제에서 해방된 흑인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남부는 우선 해방 노예에게 자영농으로 독립할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농장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또한 소작제도와 수확물 유치권 제도를 도입했으며 참정권을 박탈하고 마침내 인종을 격리하는 체제를 수립했다. 이런 뜻에서 저렴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악면 높은 인종 격리 체제의 대두를 가져온 근본적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326-7)


제12장 법인 자본주의 


"미국을 향한 〈대량 이민자들〉은 대체로 출신 국가나 지방에 따라 특정 지역에 모여들었고, 그래서 미국의 대도시에는 다양한 민족 문화권이 형성되며 미국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했다. 이는 이주의 물결이 이민 사이에서 일어나던 일종의 연쇄반응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민은 고국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uprooted이 미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인식은 미국이 〈용광로〉melting pot처럼 다양한 민족 내지 인종과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잡다한 요소들을 서로 융합해 미국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관념의 일환이다. 그런 인식이나 관념과 달리, 이주자들은 고국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전통에 의지하며 미국으로 이주하고, 또 그것을 미국 문화에 덧붙이며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옮겨 심긴 나무처럼 〈다른 땅에 옮겨 심긴 사람들〉transplanted이라 할 수 있다."(345-6)


"〈트러스트〉trust 제도는 주주가 어떤 사람에게 주식의 관리권을 위탁하고, 그 수탁자에게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며 기업을 통제하게 만드는 방안이었다. 이런 방안에 따라 여러 기업의 주주들이 주식 관리권을 어떤 인물이나 기구에게 위탁하면, 수탁자는 그들 기업에 대해 위탁 주식에 상응하는 통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트러스트는 여러 기업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실체를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트러스트는 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의 신뢰를 전제로 성립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안정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은 이미 1870년대부터 철도 회사에 도입되었던 지주회사holding company라는 제도였다. 지주회사란 스스로 사업을 벌이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 또는 부동산 같은 자산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기업을 지배하며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실제로 사업을 벌이고 수익을 올리는 여러 기업들을 몇몇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69-71)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돈을 끌어들여 큰 자본을 모은 다음에, 그것을 다른 기업에 투자해 지배적 영향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주회사는 기존 법률에서 허용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의회의 특별 입법을 통해서만 설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89년, 뉴저지는 기업가들이 그런 규제를 회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주회사가 허용되자, 미국의 기업계에는 합병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1895년부터 1904년까지는 그 바람이 유난히 거세게 불었다. 채 10년도 되지 않는 그 기간에 모두 1,800개 이상의 기업이 사라지면서 157개의 기업으로 통합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법률은 미국 기업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즉, 국가가 기업 사이의 제휴나 연합을 억제하는 반면에 통합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기업계를 이끌던 엘리트는 법인이라는 제도에 의지하며 여러 기업을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려 했다고 할 수 있다."(371, 376)


"혁명기 미국인들에게 부패란 본질적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지녀야 하는 미덕을 저버리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적 이익이 공적 권위의 행사에 과도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지 시대에 뿌리 내린 구체제의 관행이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공직자들은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토지를 비롯한 국가의 자원에 관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행태를 보였다." "그와 같은 부패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한) 자유방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상인 듯하다. 즉, 자본주의 문명이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을 구분하고 정치과정에서 경제활동을 해방시킴으로써 경제 권력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정치적 권위의 개입을 요청하며, 따라서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 사이에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수립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이 얽혀 있던 자유방임과 부정부패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402-4)


"돌이켜보면, 그것은 미국의 권력구조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건국기에 수립되었던 넓은 뜻의 권력구조에서 경제 권력은 뚜렷한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전환기에 이르면,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 권력이 종교적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권위에도 못지 않게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 미국인들은 스포츠를 즐기듯이 돈을 버는 일에 뛰어들 수 있었고, 나아가 교회나 국가의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돈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20세기 말에 이르면 교회와 국가를 넘어 사회의 제재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더욱 확대된다. 그런 권력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으로 집약되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법원의 자유주의적 신조─특히, 사용자와 피고용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가정하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외면하는 보수적 안목─덕분에 안전한 지위를 누렸다."(407)


부록: 19세기 미국에서 국가가 지니는 성격 


제13장 대안과 개혁 


"19세기 말 미국에서 거론된 여러 대안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농민이 제시한 인민주의populism라 할 수 있다. 그것은 1890년대 미국의 정치 지형에 거센 바람을 몰고 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엘리트에게 집중된 권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던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바꿔 말해, 미국 자본주의에 내재하던 평등주의적 동력이 위축되었다." "대표적으로 1860년대 미국 농민들이 조직한 그레인지Grange 운동은 자신들이 거둔 성과를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 운동은 여성에게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더욱이 흑인에 대해서는 참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등, 인종주의에 얽매여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한계로는, 그레인지 운동이 정치적 토론이나 행동을 억제하는 방침을 선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한계로 인해, 그레인지 운동은 농민이 관심을 지녔던 정치적 쟁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다."(423, 427-8)


"19세기 말에는 미국의 노동자들도 공화주의 전통에 입각해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으나, 농민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했다. 농민과 달리, 그들은 위축되는 경로 대신에 성장하는 경로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그 경로는 그들에게 독립적인 〈생산자〉라는 관념을 버리고 종속적인 임금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런 변화에 앞장선 새뮤얼 곰퍼스는 〈생산자〉 대신에 노동자, 그것도 숙련 노동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사고나 질병, 또는 해고 같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상당한 금전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대신, 조합원들은 사용자에게 맞서는 쟁의와 교섭에 관해 노조 지도부에 권한을 위임하고 거기서 결정되는 방침을 준수해야 했다." "곰퍼스는 이와 같은 노선을 〈순수 노조주의〉라 불렀지만 그것은 〈생산자〉나 공화국 같은 정치적 개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사업 노조주의〉로 여겨졌다."(441, 449-50)


"곰퍼스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역할을 제한하는) 자발성 원칙voluntarism을 강조했다. 노사 관계는 국가를 비롯한 제삼자의 개입 없이 노동자와 사용자의 자발적 노력과 직접적 협상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곰퍼스는 노동자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등,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동단체를 정치 세력으로 바꾸는 데 대해 분명하게 반대했다. 국가가 노사 관계에 개입하는 데 반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단체가 국가의 운영에 개입하는 데에도 반대했다. 따라서 자발성 원칙은 미국노동연맹이 기존의 양대 정당 이외에 제삼의 정당을 창설하는 운동에 힘을 보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정당정치를 밑받침하는 선거제도를 비롯해 미국의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뜻에서, 그 원칙은 정치와 경제 두 영역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노동단체의 활동을 그 경계선 안으로 한정한다는 함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453-4)


"어째서 혁명론이 미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주목을 끌지 못했는가, 특히 사회주의가 취약한 입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의문은 당대부터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사회과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얻은 결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일찍이 민주정치가 도입됨에 따라 노동자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해 영향을 끼쳤고,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으며, 또 사용자와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지닐 뿐 아니라 나아가 그것을 향상시키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좀바르트는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유력한 대안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유를 노동자도 기존 체제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데서 찾는다고 할 수 있다."(458)


"중산층은 흔히 계급으로 간주되지만, 이 책에서는 하나의 계층으로 취급된다. 그것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며, 계급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내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산층은 자본가나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한 관심사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흔히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서서히 위축되는 운명을 지닌 집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예단과 달리, 중산층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건재를 누린다." "중산층은 19세기 중엽부터 노예제뿐 아니라 도시에서 심화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촉구하며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개혁 운동은 내전을 계기로 퇴조를 겪었다가 재건 시대에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그때에는 빈곤, 음주, 도박, 매음, 절도, 폭력 등 도시문제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것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근대 세계에서 대두한 인도주의가 노예제 폐지에 따라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린 결과이다."(471, 478)


"진보주의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사회운동이었다. 그것은 엘리트와 중산층 이외에 다른 많은 미국인들도 참여한 거대한 운동이었고, 또 사회복지관에서 시청과 공원을 거쳐 철도와 은행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제도에서 개선책을 도입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진보주의에서 부각된 가치가 무엇보다도 반독점과 효율성, 그리고 사회적 화합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런 가치는 분명히 20세기 전환기에 미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특히 중산층에서 강조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산층은 대체로 자본주의 발전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만큼 제한적 처방을 선호했던 듯 싶다. 이는 기존 질서를 혁신하는 대신에 민주정치를 보강하고 경제성장에 성공하기만 하면 계급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적 화해와 국민적 통합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낙관적 전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498)


제14장 제국주의 


"미국인들은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기부터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데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미 17세기 중엽에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토지를 차지하며 자신들을 '아메리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18세기 중엽에는 애팔래치아산맥 너머 서부에서 토지를 얻기 위해 워싱턴을 앞세워 프랑스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또 19세기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데 이어 그에 못지않게 넓은 땅을 멕시코로부터 빼앗았다. 이런 팽창은 원래 개인들이 기업을 수립하고 그것을 통해 추진하던 사사로운 계획의 소산이었고, 건국 이후에야 비로소 국가의 공식적 사업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런 전통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워싱턴처럼 미국을 이끌던 엘리트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해외 팽창이나 제국주의에 앞장서던 엘리트가 미국의 경우 대체로 기업계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도 세력의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505-6)


"주류에 속하는 미국인들은 여전히 기독교와 공화주의를 대전제로 받아들였으나, 점차 국가를 비롯한 공동체보다 기업에 적합한 행동 윤리를, 특히 대기업에 필요한 행동 윤리를 중시했다. 그들의 새로운 덕목에서 소박하고 건전한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으로 대체되었고, 거기에 필요한 축적과 진보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간주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런 가치를 위해 육체를 정신에, 감성을 이성에 종속시키면서, 대기업의 관리 체제에 순응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를 갖추고자 노력했다. 바꿔 말하면, 미국 사회가 진보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계의 일종이라 보고, 자신들이 거기에 들어 있는 수많은 부품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관념에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차별의 근거 역시 표면상 공화주의적 덕목에서 자본주의적 행동 윤리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가부장제와 인종주의 같은 고질적 편견을 넘어 사회적 다윈주의 같은 새로운 이념까지 포함할 만큼 넓어졌다."(507-8)


"그들이 보기에 미국은 먼저 라틴아메리카에서 열강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고, 다음에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분할을 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 지역으로 진출해 식민지나 속령을 확보하는 데 나서야 한다. 거기서 미국은 폭정이나 혼란, 또는 야만을 뿌리 뽑고, 주민에게 안정과 자유,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주류 엘리트들은 식민지를 확보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도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이 식민지를 거느리면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다른 일부는 식민지 주민이 유색인이며, 그래서 인종주의적 이유에서 미국 시민과 통합되기 어렵다고 보고 제국주의 팽창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타협안은 식민지나 속령을 미국의 주권 아래 두는 경우에도 미국의 일부로 통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 주민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의 흑인이나 원주민처럼 종속적 위치에 묶어 둔다는 것이었다."(509)


"그런 전망과 과제에 관해, 미국의 엘리트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발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시장 가운데 중국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중국은 인구나 자원 측면에서 가장 큰 나라였고, 그래서 열강 사이에서 경제적 패권을 좌우할 관건을 쥐고 있었다. 바꿔 말해 중국을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차지한다면, 나머지 나라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열강이 서로 이권을 존중하며 지배와 착취를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더욱이, 중국을 포함해서 낙후 지역에서 지배와 착취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했다." "거기에 근대적 제도와 문화를 도입하면 낙후 지역이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동시에, 미국도 교역과 투자를 늘리며 오랜 기간에 걸쳐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바꿔 말하면, 제국과 식민지가 제로섬 게임에 빠지지 않고 모두 이득을 얻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518)


부록: 제국주의 연구에 대한 논평 


"제국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한마디로 제국을 다른 국가나 종속 지역에 대해 지배적 권위를 행사하는 국가로 규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자면, 〈어떤 제국이나 국가가 외국을 통치하거나 외국으로 통치권을 확대하는 정책, 또는 식민지와 속령을 획득, 보유하는 정책〉이라는 정의를 들 수 있다. 이 정의는 제국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 영역을 경시한다는 단점을 지닌다." "필자는 〈제국이란 어떤 지역에서 지상至上 권력을 추구하면서 국제관계에서 자국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는 국가〉로 정의한다. 여기서 주안점은 제국이 장악하고 행사하는 강대한 세력에 주목하는 대신에 그런 세력을 갖고서 제국이 수립하고자 하는 위계적 국제 질서에 주목하자는 데 있다. 바꿔 말해 어느 국가가 자국을 정점으로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지 살펴보면, 그 국가가 제국인지 아닌지, 또 제국이라면 어떤 제국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568-9)


"다음 난관은 이데올로기에 있다. 특히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고 내지 최후 단계라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에서 떼어 낼 수 없는 부분이며 자본주의 자체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의 학자들은 제국주의가 본질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와 분리되어 있는 정치적 현상이라고 본다. 그들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있었던 교역이 식민지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다고 해도, 제국에는 뚜렷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식민지가 그 대신에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바꿔 말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레닌주의자들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민낯으로 깎아내리며 자본주의가 사라지기를 고대한다면,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그에 맞서 오욕으로 얼룩져 있는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그 때문에 양자는 모두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570-1)


"1960년대에는 몇몇 비판적 학자들이 제국주의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뒤에도 저개발국가에 남아 있는 종속적 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위상이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국제적 차원에서 수립되는 분업 체계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이 그렇지 않은 여러 나라와 함께 공업 제품을 수출하고 농수산물과 광물자원을 수입하는 교역 체계를 수립하는데, 여기서 공업 제품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농수산물과 광물자원이 낮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불평등한 교환관계가 성립한다." "세계체제론은 적잖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결함을 안고 있다. 그 이론에서는 중심부-주변부 관계를 중심으로 국제적 분업 체계가 변화를 겪지 않는 구조로 간주한다. 물론, 세계체제 이론가들은 한국, 미국, 일본 등, 몇몇 나라가 주변부에서 반주변부, 또는 중심부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나라를 예외적인 성공 사례로 취급하는 데서 멈춘다."(573-4)


"필자는 세계체제론자들이 중시하는 구조적 제약에 공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주목하는 국제 분업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널리 알려져 있듯이 외교는 결국 내정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시야를 정치에 한정하지 말고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초점을 국제 질서에 맞추고 시야를 정치·경제에서 사회·문화까지 확장하면, 제국주의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제국주의가 국제관계에서 자국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수립하려는 프로젝트라면, 그것은 바꿔 말해 한 국가가 자국 내에 존재하는 사회질서를 국제관계로 확장하려는 프로젝트라 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제국은 원래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내부로 통합함에 따라 성립하며, 그래서 본래 국제 질서를 내부의 사회질서로 흡수하며 발전하는 체제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정점으로 형성되는 국제 질서는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질서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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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제1부 : 토대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1
배영수 지음 / 일조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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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문명이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조직적으로 결집하는 실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위해, 자신이 지닌 완력과 지력智力을 사용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을 조직하고, 또 지력地力과 수력, 풍력 등 자연의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흔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 부르는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 "자본주의의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여러 유형의 힘 가운데서 재산을 토대로 형성되는 힘에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재산은 전근대 세계에서 정치적 권위, 종교적 권위, 또는 물리적 폭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발전한 경제 권력이 다른 유형의 힘과 맺는 관계, 특히 정치적 권위와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형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17-9)


제1부 


토대 


제1장 자연환경 


제2장 원주민과 이주민 


"북미대륙에는 잉카제국이나 아즈텍제국처럼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없었다. 원주민은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적은 인구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수많은 조그마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원주민의 지리적 분산은 언어 다양성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 북미대륙에 남아 있는 원주민 언어는 300개에 가깝다. 미국에는 250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는 17만 명이 사용하는 나바호Navajo어이다." "물론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300년 전후에 기온이 하락하는 냉각기가 시작됨에 따라, 중세 온난기에 번영한 거대한 집단의 정착 생활도 쇠퇴했다. 1500년경 북미대륙의 원주민은 많아야 수만 명, 적으면 수백 명 단위로 나뉘어 살면서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보면, 그와 같은 정치적 분열상은 그들이 부족사회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국가라 부를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41-2)


"스페인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재정복 사업의 전통 위에서 아메리카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이베리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교황과 군주를 앞세우며 스페인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것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복자들에게 재산과 명예, 그리고 지위를 의미했다.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정복자들은 대개 하급 귀족이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황과 군주에 대한 봉사를 제외하면 무엇보다도 눈부신 황금과 세상이 칭송하는 업적, 그리고 영주로서 누리는 위신이었다." "이런 기회는 목장이나 공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연줄과 재주를 동원해서 고관의 수행원이 되어 배를 탄 다음에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행로는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것보다는 젊은 남자가 홀로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따라서 스페인 식민지는 개척이 시작된 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사회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다."(69-72)


"영국 식민지는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사회적 안정을 누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거기에 미국 문명의 대두, 또는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 가운데 하나가 있다. 영국의 북미대륙 식민지는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개척 과정에서 교황과 군주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던 정치권력으로부터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적 동기가 식민지 개척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1620년 영국의 종교 탄압을 피해 북미대륙으로 이주한 필그림Pilgrim들이 미국의 건국 시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인들이 필그림의 도착 200주년을 계기로 미국의 건국 과정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설화이다. 그보다 13년 앞서는 1607년에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영국 식민지가 먼저 건설되었다. 더욱이 개척자들은 종교적 동기가 아니라 돈벌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임 목적을 위해 식민지 건설에 참여했다."(72-4)


"관대한 토지 정책은 사실 제임스타운에서 시작되었다. 담배가 수출 품목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원주민 노동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자, 버지니아 컴퍼니는 부랑자와 범죄자를 붙잡아서 북미대륙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 위에 1616년에는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하는 성인 남성에게 50에이커씩 토지를 배분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인두권 제도headright system라 불리는 이 정책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북미대륙까지 가는 데 드는 여비 부담 때문에 이주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버지니아는 계약 하인제도indenture를 도입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이주민은 여비를 부담하는 주인을 위해 4-5년 정도 하인으로 봉사한 다음에 자유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영국 식민지 전체로 확산된 이들 제도는 결국 무일푼이라 해도 일을 하려는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북미대륙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실제로 이주민은 17세기 말까지 약 100년 동안 53만 명에 이르렀다."(80)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영국 식민지에서도 아메리카와 그 원주민을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자세가 확립되었다. 근대 유럽에서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나아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 능력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을 많이 지닌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조금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근대 영국인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인종 질서나 사회질서 같은 위계질서가 있다고, 또 그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정착 초기에도 유혈 충돌이 우호적 교역 사이에 일어났지만, 1640년대부터는 잔인한 살육전이 지속되었다. 영국 식민지가 발전을 위해 관대한 토지 정책을 수립하고 영국에서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자,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이 〈야만의 세월〉이라 부르던 이 기간은 1670년대에 원주민의 패퇴로 끝났다."(87-8)


제3장 식민지 사회 


"버지니아의 이어들리 총독은 1619년 7월 주민 대표로 구성되는 대의기구를 수립했다. 먼저 회사가 임명하는 유력자들로 자문회의Council를 구성하고 총독의 자문에 응하게 했다. 다음으로 11개 정착지에서 주민이 선출한 대표 22명으로 민의원House of Burgesses을 구성하고 영국의 하원과 같은 역할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두 기구는 따로 모이기보다 흔히 함께 모였고, 그래서 주민총회General Assembly라 불리기도 했다. 구성이나 기능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에서는 그런 기구에 선임된 유력자들이 다른 이주민과 뚜렷이 구분될 만큼 사회계층이 충분히 분화되지 않았다. 더욱이 영국과 달리 귀족이 없었고, 따라서 자문회의를 영국 상원처럼 귀족으로 구성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새로 수립된 대의기구는 버지니아에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특히 민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며 과세권을 장악하고 총독을 견제하는 기능을 확보했다."(98)


"다른 한편으로 버지니아는 영국과 달리 노예제 사회가 되었다.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르면 영국인을 비롯한 기독교도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고, 따라서 노예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계약 하인들은 대개 노예와 다름없이 가혹한 처우에 시달렸다."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1660년대부터 뚜렷하게 심화되었다. 1662년 버지니아 의회는 〈이 지방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는 오직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만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결정된다〉고 선언했다. 이는 영국인 남성의 자녀는 모두 영국인이 된다는 확고한 전통에 어긋나는 조치였다. 그것은 흑인을 백인으로부터 분리해 영구적 예속 상태에 속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5년 뒤 버지니아 의회는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어도 자유인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런 조치들은 결국 1705년에 제정된 〈하인과 노예에 관한 법〉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법은 제22조에서 노예를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라고 규정했다."(99-100)


"매서추세츠의 유래는 1628년 식민 사업에 관심이 있는 여러 상인들이 뉴잉글랜드라 불리던 북미대륙 북부를 대상으로 새로운 회사를 세우고 국왕에게 식민 사업을 허가해 달라고 청원한 데 있다. 흔히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라 불리던 이 회사는 버지니아 컴퍼니와 마찬가지로 법인격을 지니는 정치조직이었다. 바꿔 말해 회사는 다른 영국인처럼 소송을 제기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하며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하면서도, 그들과 달리 자연인의 수명보다 오래 존속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회사의 구성원들이 충독과 부총독을 한 사람씩 선출하고 보좌역 18명을 선임해서 〈여기서[칙허장에서] 명시, 증여되는 토지와 지역, 거기에 건설되는 식민지, 그리고 그 주민의 통치에 관한 일반 업무와 용건을 처리하고 규제하게〉 했다."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가 이와 같은 정치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것을 뉴잉글랜드로 옮긴다는 것은 곧 하나의 자치 식민지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108-9)


"독실한 지도자 존 윈스럽이 이끄는 청교도들은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를 장악하고 그것을 '신세계'로 옮김으로써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도착한 직후에 오늘날의 보스턴에 자리를 잡고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세웠고, 즉시 주변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런 〈도시〉는 도읍town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을 만큼 안정되었던 중세 촌락village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근대 도시city에 가까웠다." "도읍 창건자들은 발전을 위해 청교도 이외에 다양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읍민회의town meeting에 참석하고 투표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읍민회의는 전체 주민이 모여 도읍의 운영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기구였다. 토지는 창건자들로 구성되는 자치단체가 장악했지만, 원주민 관계를 비롯한 치안과 질서의 문제는 읍민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읍은 신정정치神政政治에서 벗어나 있었다."(109-12)


"로저 윌리엄스는 성직자의 길을 생각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영국교회에 실망하고 청교도로 변신했고, 1631년에는 보스턴으로 이주해 목회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서도 실망하게 되었다. 나중에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주홍 글자』에서 묘사한 것처럼 교회는 십계명을 어긴 주민에 대해 처벌을 가하는 등, 세속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윌리엄스가 보기에 청교도 교회도 영국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제대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바꿔 말해 교회가 국가의 권위에 기대어 개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뜻했다. 윌리엄스는 그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1636년 당국의 추방 결정에  따라 매서추세츠를 떠나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하게 되었다. … 이미 1630년대부터 교회는 청교도 신앙의 쇠락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이주〉에서 한 세대가 흐르자, 청교도 교회는 신도가 감소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114-5)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과 달리) 토지를 확보할 때 원칙적으로 원주민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일종의 단체로서 교섭하는 방식을 취했다. 식민 사업의 주체가 회사든 영주든, 또는 국왕이 임명한 관리든 간에, 대표를 임명하고 그에게 먼저 원주민과 교섭해서 토지를 확보한 다음에 그로부터 토지를 분할, 인수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것은 자신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치열한 경쟁을 방지하며 원주민으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방법이었고, 또 영국에서 수립되고 있었던 근대적 재산권을 북미대륙에서도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즉 토지에 대한 소유권에는 그것을 처분하는 권리뿐 아니라 거기서 수렵이나 경작을 하는 등, 그것을 이용하는 권리도 포함된다는 원칙을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그런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토지를 양도한 다음에도 거기서 수렵은 물론이요 경작도 계속하려 했다. 따라서 영국 식민지에서는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123)


부록: 문명의 개념 


"문명의 개념에 남아 있는 유럽 중심주의는 윌리엄 맥닐의 『서양의 대두』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문화적 확산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고든 차일드가 주목하는 질적 저하를 수반하며, 따라서 주변 지역에서 발전하는 문명을 모두 중심 지역의 아류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의에서 문화는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생활양식이라는 정의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그것은 문명과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문명에 들어있는 기술, 예술, 지식, 종교, 이데올로기 등, 지적, 예술적, 정신적 자산을 포괄하는 부분으로 간주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문화를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펌프를 써서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녔던 문화이든 남에게서 배운 문화이든 간에 가용한 문화적 자원 가운데서 쓸모 있을 만한 것을 선택하고 필요하다면 거기에 적절한 변형을 가하며 사용한다."(132-3)


"문명이 자연과 외적을 제어하는 기능을 지닌다면, 그것은 그런 기능을 발휘하도록 구축된 인위적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일찍부터 씨족이나 부족, 또는 국가 같은 집단을 형성했지만, 오직 일부만 문명을 건설하는 단계, 즉 자연에 변형과 제어를 가하며 집단을 보호하는 지속적 건조물을 수립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문명이란 사람들이 외적은 물론이요 자연까지 제어하기 위해 여러 유형의 힘을 모아 만들어 내는 집단적 건조물이라고, 한마디로 줄여 권력구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구조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주권을 기능에 따라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누고 그것들을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좁은 뜻의 권력구조이다. 그와 달리, 필자가 말하는 넓은 뜻의 권력구조는 주권처럼 정치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권위를 넘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른 영역에서 성립하는 권위까지 포괄한다."(137)


"다종다양한 권력이 필자가 말하는 넓은 뜻의 권력구조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그런 권력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기 때문이다. 특히 물리적 폭력과 정치적 권위, 경제 권력과 종교적 권위 등, 주요 권력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구조를 조직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은 서로 흩어져 사는 대신에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다종다양한 권력 사이에 일정한 상호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며 권력을 효과적으로 결집하는데, 그 결과로 형성되는 조직체가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본질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구성하는 조직체라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문명은 힘을 결집하는 방식이나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왜냐하면 문명은 사람들이 자연과 외적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여건 속에서 스스로 당면하는 상이한 필요에 따라 힘을 결집하는 방식과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138-9)


제4장 제국과 식민지 


"매서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처음부터 자치를 지향했다. 더욱이 1675-76년에 원주민과 이른바 필립왕전쟁을 치르며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기 때문에, 원주민이 프랑스 식민지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두려움은 국왕이 루이 14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미대륙에서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탄압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들이 수립한 작은 도읍의 주민들은 결의를 통해 영국의 정치적 전통에 따라 〈주민 대표로 구성된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떤 세금도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뉴잉글랜드 최고행정관인) 안드로스와 (국왕 자문기구인) 추밀원의 태도는 〈당신들은 노예로 팔리지 않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주민이 영국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모국에 종속되는 존재로 간주했던 것이다."(148-9)


"그래도 팽창하는 제국과 그 식민지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완화되었다. 1688년 12월 명예혁명을 계기로 안드로스가 영국으로 소환되고 뉴잉글랜드령이 해체되자, 식민지 주민은 여기저기서 봉기해 국왕이 파견한 관리들을 쫓아내면서 절대주의적 통제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특히, 왕정복고 이후에 취소되었던 과거의 칙허장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가 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타협이 성립했다. 국왕은 총독을 임명하는 권한과 함께 식민지의 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최종 권한을 확보하는 반면, 식민지는 주민 대표로 구성되는 의회를 통해 입법권과 과세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1689년 권리장전 제정으로 입헌군주정이 수립되면서 정책은 의회에서 주도했다. 의회는 중상주의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무역과 식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만 취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153)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대영 수입은 1740년대부터 빠르게 늘어났는데, 이는 식민지 주민의 소비가 활발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북미대륙의 영국 식민지는 영국 경제에 묶여 있으면서도 대서양 경제라는 더 큰 틀과도 깊은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관계는 흔히 삼각무역이라 불린다. 실제로 북미대륙 식민지는 영국에 담배와 생선 등, 일차산품을 수출하고 다양한 공업 제품을 수입하는 한편, 카리브해에는 곡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당밀과 설탕을 수입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교역 품목이 몇몇 주요 생산물에 그치지 않고 비단과 인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교역 대상도 영국과 그 식민지에 머무르지 않고 남부 유럽까지 넓게 확대되었다. 식민지의 교역은 기본적으로 중상주의적 규제에 따라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그런 규제는 지정된 품목에만 엄격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대륙 식민지는 영국 경제권 이외의 지역과 교역함으로써 대영 적자를 대부분 메울 수 있었다."(163)


부록: 자본주의의 개념 


"토지를 비롯한 재산은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고 자유를 향유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지만,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수준을 넘어서면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며 그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강제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뜻에서 재산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넘어 경제 권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 권력은 전근대 문명에서 언제나 다른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은 흔히 정치적·종교적 권위의 공격 대상이거나 물리적 폭력의 제물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신의 자유와 함께 재산과 계약에 대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경제 권력을 정치적·종교적 권위에서,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권력에서 해방, 분립시킨다." "문명은 다양한 힘을 결집하는 조직체인데, 그 조직 방식은 문명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경제 권력을 분립시킴으로써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결집하는 문명이라는 점이다."(201)


"경제 권력의 분립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뚜렷이 드러내는 두 번째 특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재산을 추구하고 축적하는 데 따르던 다양한 제약이 약화되는 현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정치적 권위는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평화와 치안을 유지하고 재산과 계약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반면에 시장에 대한 개입을 자제했다. 사회적 제약은 마르크스가 강조하듯이 봉건제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노동 능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이 확대된 덕분에 해결되었다." "베버가 지적한 바 있듯이, 종교적 권위는 근대에 들어와서 재산을 물욕의 결과로 보지 않고 근면과 절약 같은 미덕의 소산으로 여기며 축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또 허시먼이 입증한 바 있듯이, 근대 유럽의 사상가들은 전쟁이나 폭정을 제어하는 효과를 기대하며 물질적 욕구를 중세의 악덕에서 근대의 미덕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경제 권력의 분립을 둘러싸고 있던 문화적 변동은 아직 부분적으로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201-2)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단서는 개인주의의 대두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궁극적인 주체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사회적·종교적·사상적 변화의 주인공으로서 개인은, 정확하게 백인 남성이 대표하는 개인은, 근대에 들어와서 나타났다. 중세 유럽에서 개인은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가련한 존재였다. 거기서 사람들은 가계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촌락 공동체나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사회적 협력과 통제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개인이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인이 되었고, 또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더욱이, 재산을 지니고 계약을 맺으며 자신의 이익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개인을 축재에 주력하게 만든 것은, 그래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주도한 동력은, 물론 〈돈에 대한 사랑〉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근대 유럽에 와서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는 점이다."(203-4)


제5장 미국혁명 


"미국혁명의 기원은 식민지의 빈곤과 곤경이 아니라 성장과 번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는 지속적 번영을 위해 서부 팽창을 갈망했고, 영국은 그것을 저지하고 식민지를 통제하고자 시도했으며, 양자는 제국 체제 안에서 이견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의 기원에 관한 해석 가운데 고전적인 것은 7년전쟁이 끝나는 1763년을 출발점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며 모국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던 식민지는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낡은 규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거기서 혁명에 이르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 성과는 7년전쟁에 주의를 환기한다.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대결인 동시에 식민지와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점, 그리고 종전 후에는 제국 체제를 정비하고자 했던 영국에 맞서 식민지가 반발했다는 점─식민지인들은 영국의 조치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에 주목한다."(215-6)


"식민지 정치인들은 영국이 식민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세금을 부과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영국에서 세금은 군주의 권력 기반이었다. 그것은 군주가 봉건 영주에 맞서 상비군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 군주들은 중세말부터 언제나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를 확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에 의회는 오랜 투쟁을 거쳐 의회의 동의가 없이는 세금을 부과하지 못한다는 전통을 수립했다. 바꿔 말해 입법권과 함께 과세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17세기 들어 왕좌를 차지한 스튜어트 가문의 왕들은 의회의 동의없이 부과할 수 있는 세금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오랜 혼란을 거친 끝에,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 군주정을 수립하며 의회의 과세권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면, 영국이 식민지의 동의 없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유구하고 확고한 정치적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또 앞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221-2)


"독립선언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서문에서는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전문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을 중심으로 보편적 원칙을 설명하며 독립 선언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어서 국왕 조지 3세가 북미대륙 식민지에 폭정을 강제했다고 지적하며 독립 선언의 경험적 근거를 제시한다. 본문에서는 동의 없는 과세와 배심원 없는 재판 등, 영국 정부가 취한 조치 스물일곱 가지를 하나씩 열거하며 그 폐단을 고발한다. 덧붙여서 그런 폐단에 대해 영국 국민에게 호소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고 개탄한다. 끝으로 발문에서는 미국이 영국과 결별하고 새로운 주권국가를 수립한다고 선포한다." "다만, 전문의 〈모든 사람은 본래 평등하다〉는 명제는 당시 미국에서 한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서 〈사람〉은 백인, 그것도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더 좁혀 말한다면, 참정권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지닌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거기서 〈사람〉은 시민을 가리켰다."(247-9)


"독립선언문에서 부각된 핵심적 생명 및 자유와 더불어 재산 내지 〈행복의 추구〉라는 것은 미국이 자본주의에 필요한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에 들어섰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사랑을 풀어주고 돈이 독립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그래서 결국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조직하며 새로운 문명을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신의 자유와 함께 재산과 계약에 대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재산을 토대로 성립하는] 경제 권력을 정치권력에서,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권력에서 해방, 분립시킨다.〉 식민지 미국에서는 그런 권리가 불안한 기반 위에 있었다. 이는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에서, 특히 영국의 과세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반응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8세기 중엽까지도 지속되었다. 이제 독립선언문에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를 핵심적 가치로 설정함으로써, 미국은 비로소 자본주의의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251)


제6장 연방헌법 


"북미대륙 식민지에는 귀족이 정착하지 못했고, 따라서 신분제도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국의 신분제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고, 또 젠트리가 최상부를 차지하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혁명은 이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 "영국군이 패퇴하면서 무려 6만 명이 넘는 근왕파가 영국군과 함께 식민지를 떠났다. 혁명기 미국의 전체 인구가 250만 내지 300만 명 내외였으니, 이는 망명에 나섰던 사람들이 2%를 넘는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망명자들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줌(약 0.5%)에 불과했으나, 혁명이 끝난 다음에 고국으로 되돌아갔고 재산과 관직을 되찾으려 애썼으며, 그래서 프랑스를 구체제로 되돌리고자 했다.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혁명에 저항하는 세력과 혁명을 밀고 나아가려는 세력 사이의 치열한 갈등에 시달렸다. 미국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이 분립되는 과정에서 첫째 국면이 혁명을 통해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8-9)


"여러 정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치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편견은 사실 군주정과 신분제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일반적인 사조였다. 그렇지만 적잖은 지도자들은 민주정이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소농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은 무지하고 무례한데도 정치에 참여하며 발언권을 확대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이 보기에 반란으로까지 비화하는 보통 사람들의 세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민주정치가 정치·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에는 신생 미국을 무정부 상태에 빠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는 여러 지도자들의 과제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과제는 본질적으로 권력에 맞서 권리를 지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전에는 소수의 권력에 맞서 다수의 권리를 주장한 데 비해, 이제는 다수의 권력에 맞서 소수의 권리를 옹호해야 했다. 그것은 존 애덤스가 1787년 즈음에 런던에서 주영 대사로 지내면서 깊이 생각하던 주제의 일부였다."(299-300)


"1787년 5월 필라델피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새 헌법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담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또 그런 정부는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직접 주권을 수임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의견 일치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입법부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하원과 함께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상원을 두고, 행정부와 사법부도 국민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견이 보이지 않았다." "9월 중순, 새로운 헌법안에 서명한 대표들은 강력한 연방정부를 창설하는 것이 과도한 민주정의 폐단을 극복하고 신생 미국의 존립과 발전을 기약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선언과 함께 탈피하려 했던 영국의 〈혼합 정부〉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귀족정과 군주정의 요소를 이끌어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적 추세에 역행하는 반전이었다. 바로 그것이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지도자들이 추구한 목표였다."(311-2, 318)


"매디슨은 1787년 11월에 발표한 『연방주의자』 제10편에서 파벌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파벌은 내우외환을 일으키며 공화국을 위험에 빠뜨리는 중요한 요인인데도 그 원인을 제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재산을 축적하는 능력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형성되는 관념과 견해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상이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파벌이 존재한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라 해도, 그처럼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공동선에 기여하게 만들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대책을 세우는 것이 근대 국가의 주요 과제다. 파벌은 피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공화국을 위협하지 않도록 제어할 수는 있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화국을 작은 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토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는 데 있다. 규모가 크면 파벌과 이해관계가 그만큼 더 다양해지고, 일부가 다른 부분을 끌어들여 다수를 형성하기도 어려워지며, 따라서 소수의 권리도 쉽게 침해당하지 않는다."(324)


"그러나 공화국은 작아야 한다는 당대의 상식이 여전히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나중에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는 매디슨이 거기에 다시 도전했다. 매디슨은 1788년 2월에 발표한 『연방주의자』 제51편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거론하며 광역 공화국의 장점을 역설했다. 광역 공화국에서는 여러 파벌이 서로 다투다가 다수를 쉽게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소수를 억누르지 못하는데, 이는 권력을 여럿으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서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저지하고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기대는 것은 결국 통치란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방을 창설하고 광역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필요한 조치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권력을 지니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유혹이나 압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324-6)


"그래도 권력에 대한 경계심은 높았다. 그래서 매디슨을 비롯한 연방파는 비준 과정에서 형성된 타협안에 따라 1789년 9월 연방회의에서 권리장전이 통과되는 데 협력했다. 권리장전은 2년이 넘는 비준 절차를 마치고 수정조항 제1-10조로 확정되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시민이 누리는 자유에서 무기를 지니는 권리와 공정한 재판을 받은 권리를 거쳐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리까지 다양한 권리를 열거한다. 그리고는 열거되지 않은 권력과 권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권리장전은 구체적으로 〈헌법에 일부 권리가 열거되어 있다고 해서 국민이 보유하는 다른 권리가 부인 또는 경시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제9조)고 선언한다. 이어서 〈헌법에 의해 미연방국에 위임되지 않은 권력이나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력은 개별 주, 또는 국민이 보유한다〉(제10조)고 부연한다. 이들 조항은 혁명기의 민국인들이 권리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보여 준다."(328-9)


부록: 미국 헌법에 관한 논쟁 


"근래의 연구는 당대 미국에 전통적 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가 일인과 소수, 그리고 다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통적 관념은 왕족은 물론이요 귀족도 없는 미국 사회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도 뚜렷한 사회질서가 있었고, 그 정점에는 흔히 상류층이라 불리던 계층이 있었다. 그들은 귀족처럼 많은 재산과 높은 위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귀족과 달리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신분제를 통해 유지되는 〈인공 귀족〉artificial aristocracy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로 인해 형성되는 〈자연 귀족〉natural aristocracy으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은 상류층과 달리 민중의 참정권과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연 민주세력〉natural democracy으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혼합 정부〉의 기본 원칙, 즉 사회 세력에 상응하는 권력구조를 수립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은 건국기에도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347-8)


"매디슨을 비롯한 연방파 역시 미국에도 귀족이나 평민과 비슷한 세력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또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런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며 정부의 수립과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분이 사라졌지만 아직 계급이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만큼, 사회적 위계질서라는 친숙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에 의지해 미국의 사회구조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수립된 권력구조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권력의 자의적 침해로부터 보장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또 그렇게 해서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상부를 차지하는 소수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경제 권력으로 변형시키는 길을 열어 주고, 나아가 경제 권력이 정치적 권위나 종교적 권위, 또는 물리적 폭력에 종속당하지 않고 자율적 위상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결국,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만큼 더 튼튼한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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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부: 서론 


1장 우리 시대의 반지성주의


"미국의 사정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1950년대에 여기저기서 울려퍼진 반지성주의의 가락은 새롭기는커녕 오히려 익숙한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반지성주의가 195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사실 이 나라가 국가로서 확립되기 전부터의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배경을 살펴보면 미국에서 지식인에 대한 존중의식이 꾸준히 감소한 것도 아니고 최근에 갑자기 실추된 것도 아니며, 주기적으로 변동하기 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시대에 지식인에게 쏠리는 악감정도 지식인의 지위가 땅에 떨어져서 나타난 게 아니라 그 지위가 점차 높아졌기 때문에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내 생각에 이런 일반적인 정식화는 과감한 정의만큼이나 유용할 것이다."(24-5)


"지식인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지식인에 대해 양면적 감정을 갖는 듯하다. 즉, 존경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의심과 원한을 품는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껏 많은 사회와 역사의 국면에서 늘 있어왔다. 어쨌든 반지성주의는 사상에 대해 무조건 적의를 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제대로 배운 사람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설프게 배운 사람인 것처럼, 으뜸가는 반지성주의자는 대개 사상에 깊이 몰두하는 이들이며, 종종 케케묵거나 배척당한 이런저런 사상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이들이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고, 일편단심으로 지적 열정에 사로잡힌 적 없는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반지성주의의 대변인들은 거의 언제나 어떤 사상에 헌신하며, 살아 있는 동시대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식인들을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오래전에 죽은 일부 지식인들─애덤 스미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장 칼뱅,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조차─을 추종하기도 한다."(44-5)


"또한 이따금 반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그것을 무조건적인 신조나 일종의 원리원칙처럼 여기며 헌신하고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시각이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대개 모종의 정당화될 수 있는 의도에서 빚어진 우발적 결과이다." "만약 반지성주의가 우리 문명에 널리 퍼져 있다면, 그것은 반지성주의가 대체로 정당한 대의, 적어도 옹호할 만한 대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복음주의 신앙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정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지성주의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고삐 풀린 열정은 우리 시대의 다른 망상들처럼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5-7)


2장 호평 받지 못하는 지성 


# '지성'과 '지적 능력'의 구분

1. 지성intellect : 여러 상황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음미하고 숙고하고 의문시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상상하고 사색하는 능력

2. 지적 능력intelligence : 명확히 '한정된' 틀 안에서 어떤 사안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하고 정리하는 (실용적인) 능력


"일반적인 어법에서 지성은 일부 전문직의 속성이라고 여겨진다. 자크 바전이 말한 것처럼, 지식인은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편리한 설명을 포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은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전문직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학문과 관련된 직종이라 할지라도 전문직 종사자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지식인이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지성은 대부분의 전문직에서 도움이 되지만, 지적 능력만 있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학인이 모두 지식인은 아님을 알며, 종종 이런 사실을 개탄한다. 또한 지성은 전문직을 위해 훈련받은 지적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인물에 부속되는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회에서 지성과 지식인 계급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을 때, 우리는 일부 직업 집단의 지위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신적 자질에 담긴 가치도 염두에 둔다."(51)


"지식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헌신적이고 진지하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이 모종의 제한된 선입견이나 완전히 외적인 목적에만 봉사하게 되면, 광신이 지성을 삼켜버린다. 정신적 삶에서 지식에 자립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특수하게 제한된 지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일이다. 그 영향을 신학만큼이나 정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경건함에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경건함이 너무 경직된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지적인 기질에 있는, 내가 장난기라고 부르는 자질, 즉 정신의 놀이이다. 우리는 정신의 놀이에 관해 말한다. 지식인은 분명 정신의 놀이 그 자체를 즐기며, 이런 놀이에서 인생의 주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지적인 활동으로 맛보는 순수한 기쁨의 요소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지성을 건전한 동물적 본능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정신 에너지의 잉여분은 실용성이나 한낱 생존에 필요한 일에서 해방될 때 작동한다."(56-7)


"지성에는 사회를 파괴하는 힘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에게 사실 지성은 안전하고 온건하며 유화적이라고 답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심 많은 보수주의자Tory나 호전적인 속물들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맞다. 지성은 〈위험하다.〉 방치해두면 지성이 음미하고 분석하고 의문을 던지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지식인 계급이 영향력 행사를 자제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다만 어떤 사회에서든 확실한 것은, 만약 지성의 힘의 자유로운 행사를 부정한다면, 행사를 인정한 경우보다 그 사회의 상황이 훨씬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지식인은 문화자경단 사람들의 공상과는 정반대로, 사회 전체를 전복시킬 일은 우선 없다. 그러나 지성은 늘 뭔가에 맞서서 움직인다. 모종의 억압이나 기만, 환상, 도그마, 이익 등은 언제나 지식인 계급의 면밀한 조사를 받으며 폭로와 의분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이에 맞서 지성을 두려워하고 증오한 사람들은 일종의 대항신화를 발전시켜왔다."(78-9)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반지성주의의 전제가 되어 왔던 이 입장은 완전히 추상적인 가공의 적의에 바탕을 둔다. 지성은 감정과 대립된다. 지성은 따뜻한 감정과는 어쩐지 안 어울린다는 이유로 말이다. 지성은 인격과 대립된다. 지성은 단순한 영리함이라서 교활함이나 악독함으로 간단히 바뀐다고 널리 믿어지기 때문이다. 지성은 실용성과 대립된다. 이론은 실용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 〈순전히〉 이론적인 정신은 터무니없이 경시되기 때문이다. 지성은 민주주의와 대립된다. 지성은 평등주의를 무시하는 일종의 차별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의가 일단 인정되면 지성을, 넓게는 지식인을 옹호하는 입장은 사라져버린다." "물론 이런 허구적 적의의 근본적인 과오는 인간 생활에서 드러날 수 있는 지성의 진정한 한계를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결합되게 마련인 인간의 다른 모든 특질을 단순히 지성과 분리해버리는 점에 있다."(79-80)


2부: 마음의 종교 


3장 복음주의의 정신


"미국의 정신은 근대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 종교는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최초의 활약 무대였고, 따라서 반지성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최초의 활약 무대였다. 초창기 미국 종교에서 이성이나 학습의 역할을 심각하게 위축시킨 모든 요인은 나중에 세속의 문화에서도 그 역할을 위축시키게 된다. 사상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정서, 학설이나 교의에 대한 멸시, 사상을 닦는 것에 대한 경멸, 감정에 호소하는 힘이 있는─혹은 여론 조작 기술을 가진─인간을 사상가보다 중시하는 태도, 이는 모두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미국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메리카라는 신세계에서 새로운, 더 악랄한 반지성주의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적 상황에서 전통적인 권위와, 부흥주의 운동이나 열광주의 운동 사이의 균형이 후자 쪽으로 크게 기울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성적인 스타일의 종교는 설 자리를 빼앗겼다."(89-90)


"미국의 각성운동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사한 종교적 변화, 특히 독일 경건주의와 영국 감리교의 출현에 대응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경우는 특히 종교적 재각성을 위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교회의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고, 또 상당수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목사들의 손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이다." "대각성운동은 1720년에 시작되었다. 정규 목사들의 경우, 처음에는 그 압도적 다수가 순회 부흥사야말로 교구민들의 신앙을 북돋아주는 이들이라며 환영했다. 목사들은 보스턴의 벤저민 콜먼 같은 걸출한 교양인까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부흥사들에게 공통의 영적 소임을 수행하는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그것도 아주 열등한 경쟁자─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정규 목사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대각성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고부터였다."(101-4)


"실제로 기존 목사들은 각성자들의 도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특별한 종교적 흥분을 느낄 일이 없는 상태에서 늘 회중과 코를 맞대고 살던 정규 목사들은 보통의 일상적 환경에서 신도들의 영적 각성을 유지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부흥운동가들은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거나 까다로운 교리 문제를 다룰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설교가 아니라, 청중과 즉흥적으로 직접 대화했다. 그들은 종교적 경험에서의 궁극적 진실─죄의식, 구원의 열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기대─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전통적으로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등 기성 교회의 목사들은 신앙심과 영적 자질 면에서 존경을 받았지만, 학식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모든 전제 조건이 마침내 도전을 받았다. 가장 극단적인 부흥운동가들은 개인적인 언행으로 성직자의 위엄을 갉아먹고 있었다."(105-7)


"부흥주의는 훗날 뉴잉글랜드나 중부 식민지(즉 회중교회나 장로교회)로부터 남부나 서부의 개척지대로 옮겨감에 따라 좀더 원시적이고 감정적인, 〈황홀감〉을 강조하는 쪽으로 변해갔다. 학식이 부족한 전도자들이 점점 늘어났고, 회심의 수단으로서 육체적인 반응을 별로 자제하지 않게 되었다. 엎드려 기고, 경련을 일으키고, 울부짖거나 하는 반응이 흔해졌다. 남부 식민지에서는 처음부터 휘트필드의 영향이 컸다. 그의 설교와 중부 식민지의 수많은 장로교 부흥주의자들에 의해 힘을 얻은 복음주의 운동은 버지니아나 노스캐롤라이나로,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심남부深南部까지 확산되었다. 그 지역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인구를 대거 거느리고 있는데다 시골 사람이 다 된 성공회 성직자들이 겨우겨우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기성 성공회가 상류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흥운동의 민주주의적인 이의제기는 그 함의가 더욱 강렬했다."(115)


4장 복음주의와 부흥운동가


"미국인들은 과거와의 단절을 희망하고, 미래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역사에 대한 경멸이 점차 강해졌다. 미국의 정치적 신조에서는 유럽이야말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지난날의 부패를 대표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파들도 그리스도교의 과거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발전은 가치 있는 제도상의 형식이나 관행의 누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원시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부패와 타락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도들의 목표는 형식을 보존하는 게 아니라 이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이동이 심하고 유동적인 사회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야 하는 사회에서 교파들이 기본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책무는 부차적이었다. 실용주의는 철학적 신조가 되기 훨씬 전부터 소박한 형태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셈이었다."(126-8)


"〈스타〉 시스템은 연극계보다도 일찍 종교계에서 그 위세를 떨쳤다. 그 결과, 시드니 E. 미드가 지적했듯이, 〈목사 개념은 이제껏 받아들여진 사제적인 면을 사실상 상실했으며,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현실의 교회에서 특정한 목적의 활동들을 지휘하는 신성한 관리가 되었다.〉 복음주의의 충격이 점점 범위를 넓히며 지배적이 되면서 목사도 점차 부흥주의의 판단 기준─목사로서 얼마만큼의 실적을 올렸는가─에 따라 선발되고 훈련되었다. 목사를 지성과 교육 지도자로 보는 청교도의 이상은 목사를 대중적인 개혁 운동가나 권유자로 보는 복음주의의 이상 앞에서 꾸준히 약해졌다. 신학 교육 자체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단순한 공식 교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교회는 세속 세계에 지성을 가져다주는 역할에서 눈에 띄게 멀어졌다. 그리고 종교는 지적 경험에 기초하는 생활의 일부를 이룬다는 이념을 포기했고, 종종 합리적 연구 분야를 단념했다."(130)


5장 근대성에 맞선 반란 


"극히 현실적이었던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전도 대상인 소박한 대중에게 학식이나 지적 자의식으로 무장한 회의주의가 실질적 위협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된 적은 합리주의가 아니라 종교적 무관심이라는 것을 그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1785년부터 1835년까지 복음주의가 큰 성과를 거두고 이신론이 주춤해짐에 따라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의 싸움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남북전쟁 후에 일변하여, 합리주의는 다시 복음주의 정신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당시 출현한 다윈주의가 사상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영향을 끼치자, 정통 그리스도교는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학식 있는 목사나 교육 받은 평신도들 사이에서 근대적인 학문에 힘입은 성서 비평이 이루어지면서 다윈주의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이제 목사와 평신도 모두가 근본주의와 근대주의, 그러니까 보수적 그리스도교와 사회복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175-6)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본주의자들은 결국 영향력과 체통을 상당 부분 상실했음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교 스타일이 등장한다. 그것은 성서 비평, 진화론, 사회복음, 갖가지 합리적 비판 등 모든 근대적 가치관에 역행하려는 욕구에서 형성되었다. 마침내 사회적 반동과 종교적 반동이 손을 잡은 것이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이렇게 말한다. 〈극단적 정통주의에서 나타나는 열광이야말로 회의주의의 독이 교회의 영혼을 침범한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확신이 흔들릴 때 오히려 그런 확신을 가장 격렬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의심을 덮어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광기 어린 정통주의로 치닫는다.〉 결국 토론을 통해 합리주의나 근대주의와 대화할 시기는 지났다는 정서는 극히 폭력적인 언사로 그들을 압도하려는 광신적인 움직으로 발전하여 탄압과 위협으로 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움직임은 1920년대의 반反진화론 십자군운동에서 절정에 달했다."(176-9)


"여기에 등장한 다수지배형populistic 민주주의와 구식 종교의 결합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다. 마음의 문제는 보통사람의 문제라고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보통사람의 직관은 지식인의 직관만큼─실제로는 그 이상이다─뛰어나다고 보았던 그는 종교 문제에서도 보통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와 과학의 싸움에 판결을 내리는 주체는 보통의 일반인들이지 〈인간을 졸업장이나 학위로 평가하는 자들〉이 아니라고 브라이언은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종교적 신념이 브라이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테네시 주의 투표함 앞에서는 똑같이 뛰어난 생물학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결국 브라이언은 진화론 시비를 그리스도교인들의 투표에 붙이자고 제안하여, 쟁점을 다수의 권리 문제로 돌려버렸다. 브라이언이 보기에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185-6)


"근본주의자의 정신은 진화론이나 금주법에 관한 도덕·검열의 문제에서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권위를 지닌 거대한 대중매체에 의해 감성이 훼손되거나 무시당하면서 영향력 저하를 자각하고 있다. 실험적이고 〈세련된〉 현대 사회에서 근본주의자의 정신은 자꾸 구석으로 밀려나고 놀림거리로 전락한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종교적 〈부흥〉도 과거의 근본주의자적 열정에서 보면 도저히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점잖고 온건하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현대의 세속화된 근본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 새로운 힘과 응징하는 능력을 발견하고 있다." "근본주의 교육에 여전히 충성을 다하고, 소득세로 타격을 입고, 뉴딜이 추진한 사회 개혁에 적의를 품는 부유층, 그리고 고립주의자 집단과 호전적인 민족주의자들, 〈신 없는 공산주의〉 문제를 놓고 과거의 박해자들과 비로소 손을 잡으려 하는 가톨릭 근본주의자들, 흑백 분리 철폐를 둘러싼 싸움으로 새롭게 활기를 얻은 남부의 반동 세력 등이 그들이다."(193)


3부: 민주주의 정치 


6장 젠틀맨의 쇠퇴


"미국이 지식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특히 반지식인 일제 공격의 첫 희생양이 된 유명인사는 토머스 제퍼슨이었는데,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연방주의 지도자나 뉴잉글랜드의 기성 교회 성직자들이었다." "1796년에 제퍼슨이 워싱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할 것으로 예견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연방당 하원의원 윌리엄 라우턴 스미스는 익명의 소책자를 발행해서 제퍼슨을 공격했다. 그는 제퍼슨을 가리켜 철학자라고 지적하면서, 철학자는 정치를 하는 방식에서 교조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자는 감언을 잘 늘어놓고 명예욕이 강하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제퍼슨의 능력에 관해서도 〈나라의 실질적인 이익보다는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훗날 지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사용하게 될 수사修辭를 생각해냈다. 지식인은 사소한 일에 매달리다 중대한 문제를 놓친다는 것이다."(206-9)


"제퍼슨은 이신론자이고 세속의 학자였는데도 복음주의나 경건주의 교파들, 특히 침례교로부터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었다. 이 지지자들은 민주주의적 정서를 지녔다는 제퍼슨에 대한 평판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종교의 자유를 옹호한 것에서도 비주류 교파로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퍼슨을 비롯한 세속의 지식인들은 기성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공통의 반감을 바탕으로 경건주의 교파들과 기묘한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을 이간시키기 위해 기성 교회 성직자들은 제퍼슨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도에게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경건주의자들과 계몽된 자유주의자들의 동맹에서 최종적인 분열이 일어났을 때, 즉 힘을 키워간 대중민주주의 세력이 계몽된 귀족적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때, 복음주의 세력은 반지성주의를 낳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반지성주의는 모든 점에서 기성 교회 성직자들이 제퍼슨에게 사용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독성이 있었다."(212-3)


"미국의 민중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은 자산 계급이나 지식 계급의 리더십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민중이 스스로 지배하고 자산 계급이나 지식 계급의 리더십을 극력 억누르려 하는 경우, 어디에서 지침을 받아야 할까? 답은 내부에서일 것이다. 민중민주주의가 힘과 자신감을 키워감에 따라, 직관력을 타고난 민중의 지혜는 지식 계급이나 자산 계급의 교양 있고 지나치게 세련되고 자기중심적인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음의 지혜나 하느님과의 직접 교섭을 중시하고 학문으로서의 종교나 형식적으로 제도화된 성직자 집단을 거부한 것처럼, 평등주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보통사람의 타고난 현실적 감각과 진리와의 직접 대면을 중시하고 훈련된 지도자들을 배제시키자고 제안했다. 보통사람의 지혜를 중시하는 이런 경향은 민주주의적 신조를 과격하게 선언하는 가운데 서민들에 의한 일종의 호전적인 반지성주의로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218-9)


"미국 정치에서 실로 강력하고 대대적인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최초의 충동은 (앤드류) 잭슨주의 선거 운동에서 나타났다." "미국인들은 〈퇴폐의〉 유럽은 〈자연의〉 미국보다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미국인들은 문명의 발달이 〈인위적〉인 것이어서 자국이 자연에서 멀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잭슨 지지자들은 그가 자연적 지혜를 대표한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자연이라는 학교에서 배웠고〉,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하는 인간으로 여겨졌다. 잭슨은 다행히도 〈학교의 교육이나 변론술〉에 오염되지 않고, 〈아카데미즘에 의한 망상적 사색으로 판단을 그르칠 일〉이 없으며, 〈타고난 정신력과 실천적인 상식, 온갖 유익한 목적에 필요한 판단력과 식별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질은 현자가 익힌 어떤 학문보다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정신은 〈삼단논법이라는 번거로운 큰길이나 분석이라는 다져진 좁은 길, 논리적 연역이라는 따분한 샛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220, 224-5)


"누구나 공직을 재산의 일종으로 여겼지만, 잭슨주의자들은 이런 재산을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무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은 경제 문제에 대한 반反독점적 입장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정부 직원의 임무는 너무도 단순해서 거의 누구나 수행할 수 있다는 잭슨주의의 확신에 의해 전문직이나 훈련된 사람들의 역할이 경시되고 결국 정부 기능이 복잡해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젠틀맨이 미국 선거의 필요성 때문에 밀려난 것처럼, 전문직, 아니 그저 유능한 사람조차도 정당 체제나 윤번제에 의해 미국의 정치 체제에서 극히 한정된 자리밖에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숙련과 지성은 결정을 내리거나 관리하는 권한에서 완전하게 소외되었던 것이다. 공공생활에서 지성의 지위는 유감스럽게도 교육이나 훈련에 대한 젠틀맨의 시각에 의존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명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왔다. 19세기 미국에서 지성은 결국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240)


7장 개혁가의 운명


"직업 정치인에 대한 개혁가의 비판에서는 무지, 천박, 이기주의, 부패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단어들이 거듭 등장한다. 이런 언어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인이나 정치 거물은 하나의 대응책으로서 개혁가들의 우월한 교육이나 문화를 정치적으로 불리한 점이라고 깎아내리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라는 어렵고 더러운 일이 그들의 적성에 맞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다." "(정치인들이 보기에) 현실은 도덕이나 이상, 교육이나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사업이나 정치라는 극히 남성적인 영역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미국 남성이라는 하나의 정착된 선입견에 기대면서, 교양은 비실용적이고 교양인은 쓸모없으며 교양은 여성적이고 교양 있는 남자는 여자처럼 연약해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개혁가들은 공직이나 권력을 남몰래 갈망하지만 실제로 필요한 것에 대한 필수적인 이해력이 없어, 성공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공직자나 권력자의 뒤를 캐는 위선적인 감독관에 불과하다."(259-60)


"정치인들은 개혁가들의 탐탁지 않은 성격에 대한 암묵적 동의의 기반으로서 모종의 정서에 의지하고 있었다. 정치 활동은 남성의 특권이라서 여성은 정치에서 배제된다는 정서, 더 나아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능력이야말로 남자다움의 잣대라는 정서였다." "호러스 부시넬은 만약 여성이 선거권을 얻어 수백 년 동안 이어간다면, 〈여자들의 외모나 기질 자체가 바뀔 것〉이라고 걱정했다. 여성의 생김새는 날카로워지고 몸은 빳빳해지며 목소리는 갈라지고 행동도 조심성이 없어질 것이다. 자기 확신이나 의지, 대담함으로 가득차서 지위나 권력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좀더 순수하고 사심 없는 개인적 이상을 정치에서 구현하려 했던 개혁가들은 정치를 여성화하고 남녀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들었다. 여자들이 정치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여자다움을 잃듯이, 개혁가들도 여성적 기준─도덕성─을 정치 생활에 도입함으로써 남자다움을 잃었다는 것이다."(264-5)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누가 뭐래도 〈투사〉였다. 호전적 국가주의와 정력적인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그의 공격성은 부각되었다. 잭슨과 같은 투쟁과 결단의 자질을 갖추고, 제퍼슨 같은 겁쟁이가 아니며, 존 퀸시 애덤스 같은 학자도 아니고, 커티스에게 던져진 우유부단하다는 비난 따위는 결코 듣지 않을 지식인 정치가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도시화된 산업 문명은 심각한 불황에 시달리며 타락의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루스벨트를 좀더 남성적이고 활력 넘치는 신세대의 선구자로서 환영했다. 루스벨트는 개혁에 관심이 있는 교육 받은 귀족적 계층의 위신을 되찾아줌으로써,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남성적 덕목을 다시 불어넣음으로써 혁신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던 것이다. 거칠고 강인한 자세를 요구받은 미국의 남성들은 이미 남자다움을 잃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이런 식의 이상주의나 개혁에 부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루스벨트에게서 미국인 정치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발견했던 것이다."(272-3)


8장 전문가의 부상 


"잘나가던 도금 시대의 개혁가들에게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준 지식인과 권력측의 이반은 혁신주의 시대에 들어 조금은 갑자기 끝을 맺었다. 미국 경제와 사회의 발전은 그동안에는 산업의 개발이나 대륙 전체의 지배, 부의 증대에 관심이 쏠렸는데, 여기에 필적한 만한 것이 새롭게 생겨났다. 앞선 수십 년 동안 구축된 거대한 권력들을 인간화하고 조정하려는 기운이다." "거대 권력을 주요 기업가나 정치 거물들의 수중에서 빼앗어 거기에 인간성을 불어넣고 도덕을 가미하려면 정치를 정화하고 경제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행정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더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해질 것이었다. 전문가들을 의심한 잭슨주의적 태도는 불식되어야 했다. 민주주의와 교육 받은 사람 간의 긴장은 해소되어가는 듯했다. 언제나 전문가의 가치를 강조해온 사람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고, 민주주의도 역시 전문가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75-6)


"혁신주의는 지역이나 주 차원에서 전국 차원의 정치로 확대되었다. 정치 세계에서 전문가의 역할을 시험한 무대는 워싱턴이 아니라 주도州都, 특히 위스콘신 주 매디슨이었다." "위스콘신 주의 실험이 교훈적인 것은 정치에서의 전문가나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아가는 모든 단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첫 단계로, 지식인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 변화와 불만의 시대가 있었다. 둘째 단계로는 지식인이나 전문가와, 그들이 관여한 개혁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셋째 단계에서는 이 개혁에 대한 불만이 점차 높아졌다. 개혁의 효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 대개는 이런 불만 표시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불만은 특히 기업들 사이에서 심했는데, 그들은 정부의 간섭을 규탄하고 개혁에 따른 비용이 너무 높다고 불평하는 등 다양한 근거로 호소하면서 일반 서민이 개혁가들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고, 그 하나가 반지성주의였다. 그리하여 최종 단계에서는 개혁가들이 쫓겨나고, 개혁은 미완성으로 끝났다."(278-9)


"1912년에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지식인이 (윌슨 특유의 고귀한 이미지에 끌려) 그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차대전 이전의 윌슨은 학자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예상된 것과 달리, 정치의 세계에서 지식인 조언자를 등용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불신했다. 루스벨트나 라 폴레트와 달리, 윌슨은 전문가들을 개혁의 추진자가 아니라 오히려 대기업이나 특수 이익에 유용한 고용인으로 여겼다. 대부분의 혁신주의 사상가는 대기업에 의한 통치와, 달갑지 않은 사업 관행을 규제하기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는, 민중에 의한 통치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윌슨은 전문가들이 대기업이나 특권화된 이익과 결탁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타파하려면 정부를 〈국민〉의 손에 돌려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루스벨트의 견해와는 달리, 그는 대기업의 규제에 관여하는 전문가는 오히려 대기업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291-2)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국내 문제보다 전쟁이 지식인들의 영향력을 키웠다. 역사가나 작가가 선전을 위해 동원되고, 온갖 부류의 전문가들이 영입되었다. 군사정보부, 화학전국, 전시산업위원회 등에는 학자들이 우글거렸고, 워싱턴의 코스모스 클럽은 〈모든 대학을 망라한 교수단 회의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 결과는 지식인의 지위에 치명상을 입혔다. 윌슨 대통령과 손을 잡고 1차대전을 지휘했던 지식인들은 윌슨과 그와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자신들에게도 미치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다수 지식인들이 무턱대고 열광해서 전쟁 분위기에 가담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도덕심이 무너진 일이었다." "허버트 크롤리는 〈미국인들이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압감 속에서 어떤 심리상태〉에 빠질지 자신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대중은 지식인을 쓸모없는 거짓 개혁을 부르짖는 예언자라거나 행정부의 주역, 전쟁 지지자, 심지어 볼셰비키라고 공격했다."(294-6)


"뉴딜 시기 동안 지식인과 대중의 우호적 관계는 복원되었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주장과 지식인의 사고방식이 이토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지난 혁신주의 시대에 지식인과 대중은 대체로 똑같은 대의를 신봉했다. 그것이 뉴딜 시대에는 양측을 더욱 끌어당겨, 지식인들이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윌슨이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뉴딜에 반대하는 소수는 보기 드문 격렬한 적의를 품고 대항했다. 지식인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들에 대한 감정도 악화되어, 2차대전 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우익 인사들은 일반 대중을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대중의 편견이라는 오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뉴딜을 비판하는 세력은 지식인들의 권력을 과장했다. 그리고 그들을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고 음모를 즐기는 실험주의자로 보면서, 무명 신세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탓에 오만하고 명성을 의식하게 되었다고 비난했다."(296-7, 301-2)


4부: 실용적인 문화 


9장 기업과 지성


"확실히 미국 문화는 학문이나 예술의 후원자인 소수의 부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 이 점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기업계에서의 반지성주의를 특별히 다루는 것은 기업이 미국 사회의 다른 부문에 비해 명백하게 더 반지성주의적이거나 속물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업이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강하고 폭넓은 관심을 유발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생활 문화에서는 실용성이 압도적으로 중시되어왔고, 기업가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가장 강력한 반지성주의 세력이었다." "미국의 기업계가 지식인과의 논쟁에서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여러 가지 점에서 전통적인 서민의 지혜와 합치된 데 있었다." "기업계가 지닌 지성에 대한 두려움과 문화 멸시의 기반이 되는 것은 문명과 개인적 신조에 대한 미국인의 두 가지 보편적인 태도이다─첫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과거에 대한 경멸, 둘째는 신앙심조차 실리주의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자조와 자기개발의 사회적 기풍이다."(329-30)


"과거를 멸시하는 미국인의 태도의 근저에 있는 것은 역사의 중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과학기술적·물질주의적 야만주의가 아니었다. 미국인들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군주제나 귀족정에 대한, 그리고 무자비한 민중 착취에 대한 공화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항의를 상징했다. 또한 미신에 대한 합리주의적 항의, 구세계의 수동성이나 비관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항의, 그리고 역동적이고 활력 넘치는 독창적 심성을 상징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태도는 의도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반문화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를 혼란과 부패와 착취의 집적으로 여기는 지적 스타일의 발전을 조장하고, 실용적인 지능과 결합되지 않는 모든 계획과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열정을 경멸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대한 이런 견해는 실제적 진보와 관련되는 일이야말로 삶의 요체라는 주장에 쉽게 굴복했다. 많은 미국인은 문명의 진정한 성과는 특허청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30-1)


"유력한 세습 귀족이나 국가의 보호가 부재했던 미국에서 예술이나 학문은 상업적 부에 의지했고, 이런 이유로 기업가들의 교양 수준이 지식인의 삶에서는 늘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처음부터 미국은 일을 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사회였지만, 그래도 18세기 중반에는 동해안의 타운들에서 예술이나 학문의 실질적인 토대가 만들어지고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상인 사회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계급의 중추를 이룬 것은 상업으로 쌓은 부였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가 꼭 사업을 추구하고 돈을 모으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적으로 여기지는 않은 사람들의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업가가 문명의 첨병이라는 이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에 대한 헌신, 검약, 절제라는 청교도적 가치와, 여가와 문화, 다재다능함이라는 젠틀맨의 이상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특히 동해안의 큰 타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관되게 그 이상을 지키며 실현했다."(339-42)


"그러나 상업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제조업이 부상함에 따라, 해외 무역에 종사하면서 폭넓은 시야와 범세계적인 견해를 갖게 되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미국의 경제와 미국인의 정신이 내부로 향하면서 차츰 자족적인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륙의 앨러게니 산맥 너머나 중서부로까지 사업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문화 제도나 심적 여유도 뒤로 밀려났다. 사람이나 물자는 제도나 문화보다도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급 간 장벽이 무너지고 보통사람에게도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려, 관련 업계나 상류 사회가 벼락출세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문화가 보스턴이나 뉴욕,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무렵만 해도 황무지였던 내륙의 신흥 도시에서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과 귀족의 후손들이 대등하게 뒤섞였다. 그리고 대개는 벼락부자들이 젠틀맨 집단을 하향평준화했다." "지난날 정치에 직접 관여했던 사업가들도 공직에서 손을 뗐고, 문화적 생활에서는 더욱 멀어졌다."(345-6)


10장 자조와 영적 기술


"상인의 이상이 쇠퇴하자, 대신에 자수성가의 이상이 대두되었다. 백만장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부유한 사업가가 된 무수히 많은 시골 출신 소년들의 경험과 야망을 반영한 이상이었다. 현대의 사회 동태 연구자들이 완벽하리만치 명확하게 밝혔듯이, 미국의 전설적인 입신출세 이야기는─기업의 역사를 장식하는 눈부신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통계상의 실태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이자 상징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9세기의 가장 열띤 팽창기에도 미국 산업계의 정점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태어난 부류였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도 확실히 많았다. 그들의 존재는 극적이고 감동적인 출세 이야기와 함께 신화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점에 선 사람들과는 별개로, 그만그만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도 있어서, 오히려 현실적인 성공의 목표로 여겨진 것은 이쪽이었다. 출세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 사례를 열심히 뒤져보았다."(350-1)


"19세기 말이 되면 사업 성공의 전제인 정규 교육에 대한 사업가들의 태도가─정규 교육을 적대시하고 경험을 종교적일 정도로 숭배하는 경향─크게 바뀌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대규모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대기업을 특징짓는 승진 제도는 관료적인 것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성공을 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어느새 시대에 뒤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교육 받지 못한 자수성가한 사람들, 특히 사업으로 원하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이상이 점차 현실성을 잃어가는 상황도 마지못해 직시하기 시작했다. 관료적인 사업의 세계에서 좀더 탄탄하게 출세하기 위해서는 정규 교육이 훌륭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기업 자체에 변화가 생기면서 공학, 회계학, 경제학, 법학 등의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의 효과를 긍정하는 태도가 곧 인문교양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대학 자체가 선발 제도 아래에서 직업 교육을 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361-2)


"프로테스탄티즘은 초기 단계에서 종교 의례의 상당 부분을 폐지하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교리를 최소한으로 간소화했다. 영감 서적은 이 과정을 완료하고, 교리도 대부분 없애버렸다─적어도 그리스도교라고 부를 수 있는 교리는 대부분 없애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개인의 주관적 경험뿐이며, 그런 경험조차도 대개는 개인의 의지를 주장하는 정도에 그쳤다. 숙고하면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영감 관련 저술가들이 말할 때, 그 의미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목표를 세울 힘이 있고 하느님을 움직여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뉴욕 시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노먼 빈센트 필이 말할 정도로 그 에너지는 엄청나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은 인간과 운명을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투지를 불어 넣어 운명에 맞서서 격렬히 저항하게 하는 것이다.〉"(370-1)


11장 주제의 변주 


"지식을 얻거나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불신의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든 지식은 특권이나 세련된 품위를 지닌 일부 특수한 사람들의 특전으로 여겨져 반감을 샀다." "물론 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 중 압도적 다수는 농업의 화학적 개량에 대해 아둔하고 자멸적인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상당수 농민들의 농사 관행은 토양을 낭비하고 고갈시켰다. 개혁가들의 계몽 시도에 대해 농민들은 〈실제적〉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이론가를 멸시하는, 〈교과서 농업book farming〉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과학이나 교과서 농업에 대한 이런 반발에 비춰보면, 교육은 (농사 현장에서 하는 실습 훈련은 제쳐둔다면)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농민들이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도 놀라울 게 없다. 농민들이 농업 교육에 기대를 품었을 수도 있지만, 학교가 많아지면 세금만 무거워질 뿐이라는 우려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376-8, 382-4)


"애초에 미국의 노동 운동은 고용이나 임금 교섭, 그리고 결국에는 그 본질적 특징이 된 파업 같은 협소한 문제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미국 노동 운동에는 언제나 부르주아 지도부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지식인들과 노동 지도자들은 노동 운동에 기대하는 바가 서로 전혀 달랐다. 지식인들은 노동 운동을 더 큰 목적─사회주의나 또다른 형태의 사회 개조─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 운동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로, 노동자 계급 자체에서 배출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지식인들은 중간계급을 멸시했는데, 대다수 노동 지도자들과 일반 숙련 노동자들은 중간계급을 선망했다. 미국노동총연맹 같은 생활 향상을 위한 조직은 지식인들의 이상주의에 조금도 호소하지 않았고, 지식인들도 언제나 그런 조직 지도부를 낮추어 보았다. 노동 지도자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한 부류라고 보는 게 제일 타당할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다수의 기업가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390-3)


"〈부르주아적〉 목표를 추구하던 미국의 조직 노동 운동이 지식인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이와 비슷한 문제가 지식인들에게 실제로 큰 빚을 진 비공산당계 좌파, 특히 사회당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획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회당도 어느 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주의 숭배에 시달렸다. 당내의 빈번한 분파 싸움에서 지식인 대변자들에게는 흔히 중간계급 어용학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운동의 보루인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들과 부당한 비교를 당했다(혁명을 향한 열정이 문제가 될 때면 지식인들은 우파보다는 좌파 쪽에 서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사회주의자 지식인들 중에는 견실한 중간계급 출신자도 많고 때로는 부유한 가정 출신자도 있었다. 비판을 받은 그들은 출신 계급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이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이상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이런 시도는 불가피하게 모종의 자기비하나 자기소외로 이어졌다."(398-9)


5부: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 


12장 학교와 교사


"미국인들이 대중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무엇보다 지성을 키우려는 열정이나 학식과 문화 자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 아니다. 그 근저에는 오히려 교육이 가져다주는 정치적·경제적 이득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교육 개혁가들은 교육의 역할을─높은 문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강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전〉 수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에 의한 정부 아래서는 국민을 위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미국인들의 마음에 심어놓았다. 교육에 대한 비용 지출을 꺼리는 부자들에게 그들은 대중 교육이야말로 사회의 무질서나 숙련되지 않은 무지한 노동력, 추악한 정치, 범죄, 급진주의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중하층 계급에게는 대중 교육이야말로 민중의 힘의 토대이자 기회 획득의 수단, 나아가 성공을 둘러싼 경쟁에서 평등한 조건을 마련하는 위대한 장치라고 말했다."(419)


"미국 역사를 보면, 학교 교사가 학생을 지적인 삶으로 이끄는 본보기 역할을 한 예가 별로 없었다. 교사 스스로도 그다지 지적이지 않은데다 정작 전수해야 할 기술도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자질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임금이 낮고 교사의 개인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상황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착취나 위협 같은 말을 연상시키게 되었다. 미국의 교사들이 보수나 평가 면에서 우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교사에 대해 존경심보다는 동정심을 더 느낀다. 그들은 교사의 급여가 적다는 것을 알며, 교사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야망이 있고 유능한 청소년들은 교직을 선망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언제까지나 평범한 교사만 나타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교사는 지적인 삶과 그에 따른 보수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그러나 교사라는 존재는 본의 아니게 지적인 삶을 전혀 매력 없어 보이게 만든 셈이다."(426-8)


13장 생활 적응의 길


"생활적응 운동은 어느 의미에서는 2차대전 이래 미국 청소년들에게서 보였던 두드러진 의욕 저하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그 이상이어서, 1910년에 시작된 반지성주의적 운동의 가치관을 사회의 주류로 만들려는 교육 지도자들이나 교육청의 시도였다." "개혁 운동의 대변자들에 따르면, 고교생의 20퍼센트가 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또다른 20퍼센트는 기능직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나머지 60퍼센트는 양쪽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생활적응론자들에게는 생활적응 교육이 필요한 60퍼센트의 아이들이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가 분명했다. 그 학생들은 대체로 미숙련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부모들의 소득은 낮고 문화적 환경도 열악하다. 학교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가고, 학습 진도에서 계속 뒤처져 성적도 나쁘다. 지능 검사나 학업 성취도 검사에서도 점수가 낮고, 학교 공부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정서적으로 미숙하여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다."(466-7)


"교육청은 〈이런 특질을 거론한다고 해서 이들이 열등하다고 단언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육자들이 주장하는 이상하고도 자멸적인 〈민주주의〉 해석에 따르면, 가난한 문화적 환경 속에 있는 아이들이 미숙하고 불안정하며 신경질적이고 학습 진도가 뒤떨어진다고 해서, 좀더 좋은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나 성숙하고 안정되며 자신감과 재능까지 갖춘 아이들에게 〈결코 꿀릴 게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말로 〈민주주의〉에 아첨함으로써, 그들은 미국 청소년의 다수를 그저 교육 불가능한 존재로 단정한 사실을 놀라운 확신을 담아 은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운한 다수자에게는 어떤 교육이 적합할까? 그것은 지성의 개발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나 소비자, 시민이 되기 위한 실천적인 훈련이다." "결국 생활적응 교육자들이 주장한 바는 지적 훈련은 보통의 청소년들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467-8)


14장 어린이와 세계 


"루소와 페스탈로치, 프뢰벨을 경외한 듀이와 그의 세대의 교육 개혁가들이 가다듬은 교육 관념은 개인의 발달─감수성이나 상상력, 개인적 성장이 일차적으로 문제시된─과 사회 질서의 필요성─특수 지식이나 규정된 관습과 도덕, 전통이나 제도에 맞춰진 개인적 소양이 요구된다─을 대립시킨 점에서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그들은 인위적인 사회에 맞설 자연 그대로의 어린이들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어린이는 하늘의 영광을 안고 이 세상에 온 존재이며, 교사들의 신성한 임무는 어린이들에게 이질적인 규칙을 들이밀려는 시도에 가담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어린이의 생활은 자연이나 활동에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즉, 어른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전통을 흡수하거나, 어린이의 욕구·관심보다도 성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서나 기술 습득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500-1)


"〈교육이 곧 성장〉이라는 개념은 듀이의 몇몇 추종자들에 의해 현대 교육 역사상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은유가 되어버렸다." "성장이라는 것은 본래 생물학적인 은유이고 개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은 정신을 교육의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떼어내 교육의 개인적 기능으로 돌려버리는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의 관심과 대립되는 어린이의 관심에 관한 주장이 되었던 것이다. 성장 개념 때문에 교육 사상가들은 부당하게 두 가지를 대립시키게 되었다. 즉,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지시하는 내부로부터의 성장은 선이고, 외부로부터의 틀에 박은 행위는 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종착점end은 상당 부분 유전적 요인에 의해 미리 정해지는 반면, 교육의 목적ends은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듀이는 양측이 조화로운 통합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육은 곧 성장〉 개념은 어린이를 찬미하고 사회 문제를 무시하는 흐름을 낳았다."(507-8)


"교사들에게는 여전히 그들 나름의 지도에 나서거나 어린이들의 충동이나 욕구를 어느 정도 구별하도록 확고한 의무가 주어졌지만, 방향을 잡아주는 지표는 제공되지 않았다." "듀이는 〈어린이의 천성이 그 나름의 운명을 실현하게 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런 표현은 시간상으로 떨어진 지점에 어린이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종국 목표나 도달점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훗날의 이른바 혁신주의 교육은 수단에 관해서는 매우 풍부하고 독창적이지만, 종국 목표에 관해서는 대단히 무익하고 혼란스러웠다. 교수 기법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무척 귀중한 것이었지만, 그 기법을 활용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입장이 모호했고 종종 무정견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관심을 학습 쪽으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초기에 눈부신 효과를 거두었지만, 아이들의 관심에 의해 학습이 밀려난 경우도 많았다. 혁신주의 교육의 기법이 확립됨에 따라 그 도달점은 불분명해졌던 것이다."(509-10)


"앞선 교육 개혁가들은 성인 사회가 교육의 종국 목표를 세우고 그에 걸맞은 교과과정을 고안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듀이는 더욱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와 교육의 관계를 탐구했다. 이런 시각이 낳은 한 가지 결과는, 그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유한계급과 노동자 계급에 관한 일반적 논의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구체적인 계급 구조나, 이 구조와 교육 기회의 관계, 또는 사회적 유동성을 높이고 계급 간 장벽을 허물기 위한 기회 확대의 수단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이다. 요컨대, 교육과 민주주의의 문제에 관한 그의 시각은─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한─경제학적이거나 사회학적이거나 정치학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심리학적 혹은 사회심리학적인 것이었다. 듀이의 이론에서 민주적 교육의 종국 목표는 어린이들을 사회화함으로써 추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경쟁적인 존재에서 협력적인 존재로 바뀌면서 마음이 봉사 정신으로 〈가득찰〉 것이었다."(515-6)


6부: 결론 


15장 지식인: 소외와 체제순응


"지식인들은 거부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또한 이런 거부는 이후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오랫동안 사회에 대한 반응 패턴을 만들어왔다. 이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은 이제 소외야말로 자신들에게 걸맞은 명예로운 지위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거부나 공공연한 적의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반응에 대한 대처법을 익혔고, 또 그것을 자신들의 숙명이라고까지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소외감의 상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점차 인정받고 편입되고 활용됨에 따라 그저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가 되고, 창의성과 비판 정신을 지닌 참으로 유용한 인간은 사라져간다─기세 넘치는 젊은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처지에서 오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반지성주의를 증오하고 그것을 우리 사회의 심각한 약점이라고 보면서도, 지식인들은 스스로가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에 괴로워하고 자기 내부에서 훨씬 더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는 것이다."(535-6)


"반지성주의는 이 나라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지식인들은 양립 불가능한 시도에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믿는 선량한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가 끊임없이 자아내는 문화의 속류화에 저항하려고 했다. 자기 계급의 엘리트적 성격과 자신의 민주적 열망 사이의 해소하기 어려운 갈등에 미국의 지식인들이 솔직하게 대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계급 간의 장벽을 끊임없이 공격하면서도 특별한 존중을 받고자 갈구하는 작가들은 대체로 갈등에 정면으로 대응하려 하지 않는 단적인 경우이다. 지식인과 민중의 동맹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적인 지식인 계급은 때로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르든 더디든 지식인들의 정치적·문화적 요구에 대중이 응해주지 않으면, 지식인들은 상처 입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대중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훼손하지 않는 정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555-6)


"사실 가장 버거운 이상과 당면한 야망이나 이해관계 사이의 딜레마에서 어떤 식으로든 괴로워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극적인 곤경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곤경은 지식인에게 특수한 형태로 집약되어 있다." "진지한 사색을 문제제기가 아니라 일종의 오락거리로 여기는 풍조에 작가들은 반발한다. 동시에 작가들은 종종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문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타협─그것 자체는 피할 수 없다─이 자신의 메시지가 지닌 힘을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기 역시 자신이 비난하는 독자들과 똑같아진 것은 아닌지 의아해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솔직한 태도는 일종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 절망은 저절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결국에는 〈지위〉나 태도를 추구하게 된다.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도덕적인 시련을 겪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은 얼마나 부정적인 사고가 가능한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느낀다."(569, 572)


"올바른 소외의 스타일이란? 비트족─온갖 사회적 논제를 대할 때 심각한 논쟁에서 발을 빼고 그것을 장난스러움으로 치환하는─과 힙스터─자신들이 선택된 소수자라는 자각을 품고 '정신병적 현명함'을 동경하는─그리고 정치적 좌파의 의견은 서로 대립된다. 하지만 그들은 바람직한 소외의 태도나 스타일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공통의 확신을 가졌고,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개성과 창의성을 해방시키거나 사회비평가의 비판 능력을 유지시키며 스스로를 부패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외는 그 자체로 일종의 가치라는 그들이 확신에는 낭만주의적 개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가지의 역사적 원천이 있다." "창조력이 풍부한 지식인은 남들과 〈공동으로 세계와 맞서야 하는〉 보헤미아에 의지하기보다는 보통 자기 혼자서 세계와 맞서는 데 필요한 자질을 키우려고 한다. 공동으로 세계와 맞서는 것은 정치적 전술이지만, 혼자서 세계와 맞서는 것은 창조적인 태도의 특질인 것처럼 보인다."(578, 582)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론을 움직여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면에 권력과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역할은 반드시 서로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측 모두 모종의 개인적·도덕적 위험이 걸려 있다. 또한 양측 모두 운을 하늘에 맡긴 개인적 선택을 보편적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권력 비판자들에게 특징적인 지적 결함은 권력이 어떤 한계 내에서 행사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 특징적인 도덕적 결함은 스스로의 순수함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으면 모종의 순수함은 쉽게 확보된다. 한편, 권력자에게 조언하는 전문가에게 특징적인 결함은 비판의 원천이 되는 독립적인 사고 능력을 발휘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전문가는 권력의 관점을 흡수함으로써 권력을 떨쳐버리는 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지적 분별력을 상실할 위험이 상존한다."(586-7)


"모든 지식인들이 권력에 봉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과 관계를 맺는 지식인들이 지식인 공동체와의 연대감을 모조리 빼앗긴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비극일 것이다." "어쨌든 다양한 장점을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회에서도 이런 미덕을 발견할 수는 있다. 자유로운 문화의 붕괴나 고급문화의 소멸에 관한 독단적이고 묵시록적인 예언은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저항하려는 의지나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자신감보다도 이런 예언이 자기연민이나 절망감을 퍼뜨릴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현대의 조건 아래서 다양한 선택의 길이 차단될 가능성은 있다. 미래의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특정 신조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역사의 저울을 좌우하는 한, 인간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믿으며 산다."(588,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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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추리소설 읽는 법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양자오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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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최후의 답안, 그 합리적이고 유일한 해석에 흥미를 느끼고 집착한다. 그렇지 않은가? 탐정추리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면 더는 당장 손에 쥔 책을 읽기만 하지 않는다. 책 뒤에 자리한 장르문학의 미궁으로 들어가, 손에 쥔 책의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미궁의 출구를 찾는 놀이를 하게 된다. 시체, 단서, 밀실, 명탐정, 알리바이 증명, 범죄 심리, 주고받는 대화 속 두뇌 대결, 나아가 궁극의 추리논리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과거의 저 소설(들)을 계승하거나 저 소설(들)에 도전하고, 이에 따라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훼방을 놓는다. 6-7)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 책을 선정했다. 첫째, 탐정추리소설이 가진 ‘장르’ 특성으로 돌아가, 장르에서 선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을 골랐다. 바꿔 말하면, 이후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온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 탐정추리소설의 규칙이 이루어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수 있고, 독자는 추리소설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기초를 재빨리 닦을 수 있다. 둘째,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찾았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았는데, 그러면 다시 읽기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좀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작품 안팎의 텍스트에 일정 정도 복잡함이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내부 텍스트가 충분히 복잡해야 자세히 분석할 만하고, 겉으로 봐서는 한눈에 알 수 없는 깊거나 모호한 정보를 캐내는 맛이 있다. 외부로 연장된 복잡함은 한 시대, 한 사회의 특징과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다른 수많은 책, 다른 문화 현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9)


1 호기심의 시작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죄’는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14)


# 추리소설의 3대 요소 : 탐정, 미스터리(수수께끼), 추리


초기의 탐정추리소설은 범인을 찾고 범죄 과정,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수법을 설명하고 나면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쳤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누가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왜 했는가’에도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기를 조사하고 범죄 동기에서 범죄에 대한 정보, 나아가 범죄가 일어난 사회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죄는 매일 일어나고 그중에는 기이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넘쳐난다. 만약 매체의 요란한 기사만을 본다면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을지언정 그 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이 벌인 이상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추리소설은 독자가 범죄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도록 두지 않는다. 범죄 현상을 꿰뚫고, 범죄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보편적인 논리와 이치이며,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일상 행동을 관할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와 이치다. 19)


코넌 도일은 장장 몇십 년간 수십 가지 이야기 속에 허구의 인물 한 명을 묘사하면서, 강한 인내심과 의지로 홈스의 일관성을 지켰다. 홈스의 외모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어떤 사건의 의뢰자나 용의자를 만나든 홈스의 생각, 태도, 반응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홈스는 겉으로 보면 논리만 보고 이치만 믿는 추리 기계 같다. 그는 감정이 일처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왓슨은 자기가 기껏 머리를 굴려 답이라고 말한 내용을 홈스가 비웃자 의기소침해한다. 홈스는 왓슨이 한 추리의 빈틈을 지적하지 않고 그가 감정적으로 구는 부분을 질책한다. 그러나 코넌 도일은 소설에 홈스의 부드러운 내면이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자잘한 일화를 여기저기에 수없이 장치해 둔다. 홈스를 묘사하는 내용을 스무 번, 서른 번, 쉰 번 읽고 나면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큼 홈스에 대해 훤히 알게 된다. 홈스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일관성이다. 26-7)


코넌 도일의 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소설 서사는 전지적 시점이었다. 신처럼 모든 일을 다 아는 인물이 소설 속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에는 문제가 있다. 객관적인 묘사와 서술로는 독자가 서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자에게 이입하기 쉽지 않아서 공감하고 느낄 상대가 분명하지 않다. 일인칭 시점에도 한계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홈스 같은) 극도로 특이한 인물에게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왓슨은 코넌 도일의 또 다른 돌파구이자 성과다. 코넌 도일은 추리소설뿐 아니라 소설의 역사에 독특한 서사 방식을 창조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골라 주인공 곁에서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의 문장과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28)


왓슨이 있기에, 홈스는 우리에게 그의 모험이 얼마나 놀랍고 위험했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더 놀라고 더 위험하게 느끼고 더 대단하게 여기게 된다. 홈스가 있으면 왓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없이 대비가 일어난다. 왓슨이 스스로 보기에 뭔가 끝내주는 해결책을 생각해 냈거나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해결책은 달랑 두세 쪽이면 뒤집히고 아이디어는 오류임이 증명된다. 하지만 왓슨은 절대 광대 역할이 아니다. 코넌 도일도 일부러 왓슨에게 황당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떠맡기는 게 아니다. 아니 왓슨의 생각은 대체로 우리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기도 하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왓슨의 입장에 선다. 그러다 이따금 왓슨보다 훨씬 빨리 사건의 단서를 파악했거나 홈스가 입을 열기 전에 왓슨의 추리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왓슨과 홈스의 사이에 서게 되고, 그 순간 색다른 재미와 만족을 얻는다. 33)


우리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두 편이 아닌 전편을 모두 읽었을 때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 중 하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나의 친구 홈스’의 모습이다. 우리는 홈스를 알게 될수록 왓슨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게 탄복하고, 이 사람을 좋아하고, ‘나의 친구’로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홈스가 쓴 추리 수법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이다. 코넌 도일에게 추리의 기본 게임 규칙을 세울 자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나중에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모두 코넌 도일이 세운 규칙을 지키는 한편 추리 수법에서 홈스를 뛰어넘을 아이디어를 궁리해야 했다. 따라서 이후의 추리소설에는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어떤 단순함을 담기 어려웠다. 그 단순함이란 일반 과학 원칙과 경험 법칙에 의지하며,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연막탄을 피울 필요가 없고, 이야기의 흐름이 간결하며, 작가가 스스로 생각한 수수께끼에 의기양양함이 없고, 작가가 독자를 도발하거나 조롱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37)


2 그리하여 그는 영웅이 된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완숙 계란을 뜻한다. 달걀을 삶아도 삶은 달걀의 본질은 여전히 달걀이다. ‘하드보일드 맨’으로 번역되는 중국어 ‘硬漢’은 무척 억세고 강해서 사람을 때려 길바닥에 쓰러뜨릴 정도의 건장한 사나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hard-boiled’라는 단어를 보면, 특히 달걀을 생각해 보면 ‘하드보일드 맨’의 강함은 그런 강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알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45-6)


‘하드보일드 맨’, 그중에서도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은 모두 ‘말수가 적다.’ 딱히 떠들 만한 것 없음. 헤밍웨이가 해밋과 챈들러에게 물려준 ‘하드보일드 맨’ 스타일이다. 우리는 이 딱히 떠들 만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며 그가 뽐내지 않으려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에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며 웃고 울 만한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추측하게 된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 우리와 말로의 관계에는 챈들러가 드러낸 부분 외에 우리가 상상하여 참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런 상상력을 갖추었거나 상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가 독자가 챈들러의 소설에 들어갈 수 있는지,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른다. 헤밍웨이에서 해밋에 이르면서 ‘하드보일드 맨’은 ‘하드보일드 탐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55)


챈들러는 설령 소설에서라도 한 사람의 죽음이 기록될 만하고 대답을 구해야 할 일이라면, 그 죽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만한 문명의 의제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는 구원의 성격이 있다. 만약 수준 높은 비극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비극일 것이며, 연민과 풍자가 있을 수 있고, 거친 남자의 왁자한 웃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남자는 비열하지 않고 오염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 속의 탐정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며, 보통 사람인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57)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챈들러는 영웅을 그리고자 했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영웅,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 아닌 로스앤젤레스 거리의 영웅,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영웅을 말이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실재하는 환경에서 산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읽은 후 이 복잡하고 시끄럽고 실재하는 주변 환경에서 따뜻함, 안전한 느낌, 신뢰감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다. 아, 이런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이러한 설정에서 우리는 말로가 ‘슈퍼맨’이 아니며 ‘홈스’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홈스를 베이커 거리에서 1930년대의 로스앤젤레스로 데려온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59)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있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다채롭고 기이한 환경에서 사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그 다채롭고 기이하며 비상식적인 환경에서 그저 평범하게 좋은 사람으로 계속 사는 데에는 영웅 같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영웅이 되어야 한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중에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64)


챈들러는 또한 그의 이전에 형성된 탐정소설의 클리셰를 거부한다. 즉 소설의 끝부분에서 탐정이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연이어 무엇을 찾아냈는지, 저기에서 무엇을 조사했는지, 마지막으로 결국 누가 어떤 수법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 감췄는지 같은 사건의 추리 과정을 경찰이나 피해자에게, 범인에게, 그리고 실제로는 덜 똑똑한 독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챈들러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단순한 세부 사항은 독자에게 넘겨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하도록 해도 된다. 전체 줄거리란 결국 일련의 범죄를 일으킨 은혜와 원한과 애정과 복수이고, 이 부분은 말로가 분명하게 밝힌다. 사실상 인간관계와 동기에 대한 통찰에 기대어서야 말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고, 말로와 그 배후에 있는 챈들러라 할지라도 반드시 범죄 과정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71-2)


3 탐정추리의 곤경을 돌파하다


『장미의 이름』 이전의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현대 기호학은 기독교 신학의 성상학聖像學, iconography에서 연원한 부분이 있다. 기독교 문화에는 수많은 성상聖像, icons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모상이라는 사실은 우리도 안다. 그러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의 옛 교회를 한 바퀴 돌다 보면 다양한 그림과 장식 문양, 각종 형태의 기물이 깊은 인상을 주어 절로 발을 멈추게 한다. 이 모두가 넓은 의미의 ‘성상’이며, 각각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 바꿔 말하면 모두 의미를 지닌 기호다. ‘성상학’은 성상에 담긴 상징 의미, 역사와 변화, 상징과 상징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에코는 이런 학문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의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91)


소설은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이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 설정은 소설의 시작부터 충돌과 긴장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클뤼니 개혁’ 이후 수도원 규율을 명확히 세운 조직이다.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사의 생활, 예컨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성서를 읽고, 몇 시에 노동을 하고, 묵상을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그리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유럽 각지에 방대한 수도원 체계를 형성했다.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를 계승하며, 이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세속의 모든 재산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베풀며 전도했고 일생의 거의 대부분 동안 회색 수도복 한 벌 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그가 보인 생활상의 모범이 당시 기독교회를 놀라게 하면서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는 윌리엄처럼 사방을 떠도는 생활을 했다. 93-4)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한 명이 웅장한 건물, 수도원 소유의 장원莊園, 안정된 식량 공급과 전속 공인, 하인이 있는 대규모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은 윌리엄에게 재부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윌리엄이 속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념에 은근히 도전하고, 그들이 세속의 아름다운 사물을 거부하는 태도를 물으며, 그들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신의 가장 정밀하고 신묘한 뜻과 권위를 교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 보유한 재산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진귀하며 유명한 것이 책, 커다란 장서관에 보관된 신화와도 같은 풍부한 장서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들을 소장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의 지식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은 14세기의 진보적 인물이다. 그는 윌리엄 오컴, 로저 베이컨 등을 통해 새로 발전하는 논리 사고를 읽고 받아들이며, 여기에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94)


수도원의 도서관은 악령이 지키는 듯 금지된 곳이다. 왜 이런 도서관이 있는 걸까? 도서관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윌리엄의 믿음과 반대된다. 그들은 책 속에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진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책을 통해 신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은 믿지만 사람에게 책의 지식과 진리를 평가할 능력과 자격이 있음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 책에 기록된 것이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현실의 현상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믿는다. 한쪽에는 지식이 세계에 대한 조사, 연구, 탐색, 귀납에서 온다고 보는 윌리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수도원 정신이 있다. 그들은 지식이 신에게서 오고, 책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본다. 뒤집어 보면,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방식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영혼은 타락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이 반드시 엄중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쉽게 개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95)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우리가 ‘개’라고 말하는 동물과 ‘개’라는 이름 사이에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개’라는 동물에 다른 이름을 붙이며, 우리도 ‘개’를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로 가득하다. 우리는 기표를 기의로 오해하고 이름을 본질이라고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오해를 운용하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우리에게 형식에 속지 말라고 알려 주다가도 어떨 때는 우리가 어떻게 형식이 오도한 함정으로 빠지는지 작정하고 비웃기도 한다. 98)


『장미의 이름』의 「서문」을 쓴 작가는 현대인(우리는 당연히 저자 에코라고 추측한다)의 말투로 어떻게 1968년에 오래된 수고手稿를 찾았는지 말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인이 원고를 가져가 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통로를 통해 원고의 내용을 손에 넣는다. 이 「서문」은 대단히 꼼꼼하게 쓰여서 진짜처럼 느껴지며, 이어지는 14세기 이야기와 현재의 작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틀’을 잡아 주는 작용을 한다. 「서문」은 우리가 읽을 글이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온 허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졌으나 이제야 겨우 빛을 본 옛 수고라고 믿도록 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엄격한 학술 규칙에 맞춰 인용한 옛 문헌은 모두 에코가 지어낸 가짜다. 수고 역시 에코가 지은 이야기이고, 수고에서 옮겨 적은 척한 윌리엄의 사건 수사 과정 또한 당연히 에코의 창작이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98)


4 추리소설 그 이상을 보여 주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 탐정소설의 추리 수법을 가져와 전쟁 후의 사회소설에 도입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태어나고 자라 전쟁의 광기와 잔혹을 겪었고, 전쟁이 가지고 온 파괴와 빈곤을 견뎌 냈다. 그는 날카롭게 전쟁 전후의 변화를 체득했다. 전쟁 전의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며 지낼 뿐 어떤 발전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일어나는 사회에서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전쟁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115)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 동기는 범죄 사실과 똑같이 중요하며, 심지어 범죄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다. 추리에는 추측과 조사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범죄 사건의 경과뿐 아니라 범인이 누구고 어떤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에서 도망치는지, 더욱 중요하게는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추론해 내야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올곧게 사건의 동기를 밝히는 길로 나아가며 그렇게 하고 나서야 사건을 종결짓는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발전한 특수한 서사 방식이 이후 사회파 추리소설에 전면적으로 계승되는데, 그 방식은 바로 사건 해결의 열쇠를 종종 범인의 동기에 숨겨 두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이 범인과 피해자의 일일 뿐이라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보내고 살아온 시대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소설로 일본인이 고개를 돌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압도적으로 몰아붙였다. 진정으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117)


미야베 미유키가 수십 권의 작품을 출간하기는 했어도 ‘국민 작가’로서의 정도를 보려면 『모방범』이 가장 훌륭하고 표준이 될 수 있겠다. 원서 단행본 기준 1,400여 쪽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 43명. 『모방범』을 읽고 토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숫자다. 1,400여 쪽에 이르고, 43명의 인물이 움직이는 소설은 분명 한 가지 사건과 해결 과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 속의 놀라운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면모를 설명하고 묘사하고자 했다. 『모방범』은 전통 일본 사회에는 없었던 ‘거품 경제 이후’에야 나타난 새로운 현상, 전혀 다른 정신 상태에 대해 말한다. ‘거품 경제 이후’의 일본 사회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젊은이에게 어떤 준비도 시키지 못했다. 이 정신 상태의 출현은 거품 경제의 붕괴, 그러니까 오래 지속되리라 예측했던 번영의 급작스러운 정체 및 쇠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방향을 상당한 수준에서 주재했다. 122)


소설 『모방범』에서는 전지적 관점이 자주 쓰인다. 주요 등장인물 43명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에 43명의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가 편하고 쉽게 얻은 수수께끼 풀이의 성취를 이후의 무거움으로 뒤집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독자의 부담은 커진다. 미야베 미유키가 마쓰모토 세이초와 닮은 부분이다. 두 작가는 독서를 마친 독자가 산뜻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독자는 자신이 명탐정만큼 똑똑하다고 자축할 수 없고, 법망이 성글지만 촘촘하다는 단순한 믿음을 강화할 수 없다. 소설에는 결국 끝이 있으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근심한다. 이 사건이 해결될까? 끝과 해결은 다른 문제다. 132)


그토록 많은 주요 인물이 병존한다는 말은 이 소설에 일반적인 의미의 ‘주인공’이 없다는 뜻과 같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추리소설에는 ‘추리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주인공을 맡는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적당한 때에 나타나 우리에게 사건의 진상과 추리 과정을 알려 준다.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억지로라도 주인공을 찾자면, 범인이 탐정의 자리를 대신해 소설에서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135)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악과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아미카와 고이치가 지나온 삶의 역정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그가 어떻게 한 개인에서 악인으로 변했는지 쓰지 않은 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악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악이 가져온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다른 무엇에 섞이고 바래는 일 없이 똑똑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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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개정판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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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국의 고유 종교인 무교(巫敎)는 미신인가?


▷ 무교는 어떤 종교? 


"누구에게 확인할 것 없이, 대부분의 한국인은 무교(무당종교)를 두고, 종교가 아닌 '무속'에 불과하며 게다가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무당 종교를 지칭할 때도 '교'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속'이라는 낱말을 써서 '무속'이라고 부른다. 무속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에 사대부 같은 기득권 세력이 무교를 폄하하여 야속(野俗)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미신과 소위 '정신(正信)'을 구별하지 않는 종교학에서는 무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만일 불교나 그리스도교를 불속(佛俗) 혹은 기독속(基督俗)이라고 부르자고 하면 그게 가당하기나 한 생각이겠는가?" "통상 한국인은 무당을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한참 덜떨어진 기괴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족속으로 여긴다. 그러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 대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은 다 던져버리고 무당에게 달려가지만 말이다. 한국인이 무당에 대해 갖는 생각과 태도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21-3)


"무교는 크게 볼 때 '신령과 무당과 신도'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요소는 굿이라는 무교의 고유한 의례에서 만나게 된다." "이 구조에서 무교는 신도가 무당이라는 특수한 사제 계급의 중개로 신령을 만나 도움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말에 선교사로 활약하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빠질 때는 영혼 숭배자〉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은 한국인이 평소에는 유교나 불교적으로 살지만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게 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떻든 이러한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무당에게 가면 무당은 신령과 교통할 수 있는 자신의 신묘한 능력으로 신령에게 해결책을 구한다. 그러면 신령은 각 사안의 경중에 따라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신도가 신령과 교통하려면 반드시 무당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사제를 통해서만 신에게 다다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구조이다."(31-3)


"나는 무당을 '민간 사제'라고 부르는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무당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당이 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내림굿을 받는 것이다. 내림굿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무당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내림굿이란 '사제 서품식' 혹은 '목사 안수식'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당은 정확히 말하면 내림굿을 받은 후부터 비로소 신자들과 신령을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전에도 여러 신령들과 교통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신령들의 도움을 받아 점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쳇말로 하면 아직 영계에는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다. 아직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점방(店房)을 낼 수도 없다. 상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내림을 받아야만 그 신의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점보는 일 같은 무업을 할 수 있다."(36-7)


"그런데 무당이 굿을 주재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모시는 신령, 즉 몸주신(Lord Spirit)을 모셔야 한다.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게 되는 것은 이 몸주신을 통해서이다. 몸주신을 받는 것은 무당이 신령계와 통하기 위해 자신만의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령계에는 신령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만의 신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당은 영계에서 헤맬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무당이 모시는 몸주신은 일종의 영계 가이드인 셈이다." "내림굿을 받지 않았으면서 신점(神占)을 치는 사람들도 신을 모시기는 한다. 그러나 정식으로 내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신은 신령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점쟁이들은 사제가 아니라 술사(術士)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무당들은 '오구굿' 같은 사령제(死靈祭)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이런 것이 바로 무당의 사제 기능이다."(37-9)


"무당 후보자들은 왜 인간이 감내하기 힘든 신병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당 후보자도 무당이 되기 전에는 속된 인간이다. 이 속된 인간이 성스러워지려면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이전의 속된 인간을 벗어던지고 환골탈태(換骨脫胎)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뼈를 깍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이전의 속된 찌꺼기나 때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더구나 무당 후보자가 내림굿을 받은 뒤에 무당이 되면 그다음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큰 문제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온갖 고통과 번민이 가득 차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무당은 자아가 매우 강해야 한다." "그래서 무당은 그 형용할 길이 없는 고통을 먼저 겪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고통을 나눔으로써 가볍게 해 주려는 사람은 거의 이러한 과정을 겪는다."(43-6)


▷ 굿은 어떻게 하나 


"별달리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기 위해 무당을 찾아간다. 이때 무당과 신령 사이에 어떤 식으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알던 만신은 이렇게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일반인들은 자기네들이 점을 칠 때 신령이 계속해서 모든 것을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실제의 경우에는 신령이 내담자의 상황에 대해 시시콜콜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두세 마디의 단어로만 아주 짧게 알려 준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단어 대신 냄새를 풍겨주는데, 무당은 이런 것을 바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탐문해 간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것은 신령이 내담자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신령이 아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면 무당은 유도신문과 같은 질문법으로 내담자의 상황을 염탐해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당히 넘겨짚어야 한다.〉"(57-8)


# 신령의 처방 수위

점괘 〉 부적 〉 치성(약식 굿) 〉 정식 굿


"굿이란 보기에 따라 노래와 춤이 그 핵심 내용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뮤지컬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판소리를 '1인 오페라'라고 하듯이 굿도 '1인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굿은 그냥 뮤지컬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성한 뮤지컬이다. 그런데 온종일 하는 뮤지컬을 혼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의상을 입고 노래만 하는 판소리와는 달리, 굿은 거리마다 의상을 바꿔 입고 다른 춤을 춰야 한다. 그래서 세명(주 무당 한명, 보조 무당 2명)이 하는 것인데 그래도 버거운 것임은 틀림없다. 악사의 경우는 조금 융통성이 있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을 많이 내면 정식에 해당하는 3인조 악사를 부를 수 있다. 이 밴드의 악기 구성을 보면 젓대(민속 대금)와 피리, 그리고 해금으로 구성되는데 이렇게 악기를 셋 '잡히면' 제일 규모 있게 하는 굿이다. 굿을 부탁한 신도가 돈이 없으면 악사는 아예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무당들이 돌아가면서 장구와 제금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64)


"각 거리의 기본 구조를 보면, 대체로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신을 초치하고(청신, 請神), 타령이나 노랫가락, 춤 등으로 신을 즐겁게 해서 공수(계시)를 받고(오신, 娛神), 신을 다시 본래 자리로 보내는(송신, 送神) 세 단계이다. 이 세 단계에서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신령을 모신 다음 즐겁게 해주고 다시 보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거리마다 무당은 격렬한 춤을 춤으로써 엑스터시(망아경, 忘我境) 상태로 들어가 신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신의 말을 전하는데 이것이 굿의 핵심이다. 이때, 각 거리에는 불러야 할 노래나 추는 춤, 그리고 의상 등이 모두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굿 중에서도 이런 형식이 가장 잘 잡혀 있는 굿은 무당이 자기 자신(그리고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서 하는 '진적굿'이다. 이 굿은 무당이 1~2년에 한 번씩 자기가 모시는 신령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하는데, 자기의 몸주신을 위해 하는 것인 만큼 아주 격식을 잘 갖추어 굿을 한다."(75-6)


▷ 한국인의 근원 신앙인 무교 


"굿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좋은 운이 들어오게 하는 '재수굿'과 대표적인 사령제(死靈祭)인 '오구굿'이 가장 많이 연행된다. 이 외에도 진적굿이 있고, 병 고칠 때 하는 병굿, 그리고 환갑이나 결혼식처럼 집안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하는 여탐굿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굿 종류는 많다. 이 가운데 병굿은 상류층에서는 우환굿이라는 점잖은 이름으로 불리고, 기층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푸닥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굿들이 개인이나 가족에게 한정된 것이라면 마을 단위로 하는 굿도 많다. 강릉 단오제나 은산 별산굿, 하회 별신굿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모두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하는 굿이다. 이런 굿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며칠에 걸쳐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은산 별산굿(제)은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한 복신과 도침을 기리기 위해 하는 굿으로, 일반적으로 3년에 한 번씩 한다. 굿을 하는 전 기간이 15일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 만하겠다."(84-5)


"사람이 죽었을 때 가족들은 경황이 없어 그 영혼과 제대로 이별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항상 불효한 것 같아 감정의 찌꺼기가 남기 마련이다. 오구굿은 이런 경우에 하는 것이다. 부모의 혼을 불러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이 굿을 하는 것이다. 이 굿의 하이라이트는 부모의 혼이 무당에게 들어왔을 때이다." "자식들은 자신의 부모로 분한 무당에게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와 같은 식으로 용서를 청하면 그 무당은 부모를 대신해서 〈아니다, 네 덕에 난 이생 잘 살았다.〉라고 답하는데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식들은 죄의식에서 면책되는 것이다. 이런 '짜임새'는 매우 훌륭하다. 오구굿은 아주 상징적인 순서로 끝나는데 그것은 부모의 넋을 넋전 상자에 싣고 저승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 이 부모의 혼을 데리고 가는 신령은 그 유명한 '바리공주'이다. 이렇게 해서 굿이 끝나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질서가 잡히고 모두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86-7)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선악 개념이 불분명하다. 굿을 할 때 보면, 자신을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고 진노한 신령이 금세라도 인간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처럼 외치다가도 신도들이 싹싹 빌면 곧 관대한 신으로 바뀐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 사이에 위계적인 질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 것도 한국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무교의 신령들은 단독으로 움직이며 자기를 몸주로 하는 무당을 매개로 현현하기 때문에, 신령들 간에 소통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냥 따로따로 존재하다가 자기를 섬기는 거리에 나타난 굿 한번 받아먹고 가면 끝이다. 잡신들은 하위 신령들로 여겨지기 때문에 아예 격외로 치지만, 무당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정신(正神)들은 대체로 동등한 위계 구조에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무교에서 인기 있는 신 가운데 한이 많은 신령들이 대표급 신령으로 인정되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이라 하겠다."(95-7)


Ⅱ. 왜 한국은 무교의 나라인가?


▷ 한국 무교 약사 


"한국이나 일본이 가장 중국적인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양국에 이미 그 이전부터 토착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교가 맡아서 하는 기능을 한국에서는 무교가, 일본에서는 신도가 한 것이다. 도교와 무교, 그리고 신도는 세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 그 외양은 다르지만 작은 신들(lesser gods)을 신봉해서 재물과 건강 같은 세속적인 행복을 기구(祈求)한다는 점에서 그 속성이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동북아 3국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들의 기층 종교를 인정하고 양성화한 반면, 한국은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미신으로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음성적 문화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본성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전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무교의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뿌리를 무시한 것이다. 자신들의 정신적인 뿌리를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불교, 유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스스로 폄하한 것이다."(117-8)


"무교와 신라 문화가 관계된 항목 가운데 화랑이나 처용을 무교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처용이 역신을 쫓아냈다는 의미에서 남자 무당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등이 그것인데, 이는 단지 하나의 설에 불과할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고려로 내려오면 서서히 무당을 억압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아직 주자학이 발흥되기 전일 뿐만 아니라 국교로도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무교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았다." "고려조에도 어김없이 무교가 성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을 직접 기술한 것이 잘 발견되지는 않지만 편린적인 기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종 때 궁궐에서 기우제를 지내는데 무당 300명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번에 이 정도의 숫자가 동원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숫자의 무당이 저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126-8)


"조선조 때에는 무교를 탄압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우선 불교 승려와 더불어 무당은 천민 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당들을 도성에서 쫓아냈다는 기사가 쉬지 않고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도성 안으로부터 무당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무당들은 왕십리나 구파발같이 도성 바로 바깥에 자기네들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사실은 일반 국민만 무당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도 무당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유교는 종교적인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기우제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무당이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병이 삿된 영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해 병을 치료할 때도 무당에게 퇴마하는 일을 맡겼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성수청(星宿廳)과 활인서(活人署) 같은 기관에 무당을 소속시켜 각각 제사를 관장하게 하고 병자를 치유하도록 했다."(130-1)


▷ 무교의 현재 


"다른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조에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무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에게는 이 무교가 절대적인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 지배층 남성들은 종교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무교를 그들의 중심 종교로 삼아 종교적 욕구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굿판은 한마디로 여성들을 위한 장이자 해방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굿판에서만큼은 일상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조 때 여성들이 시집을 오면 친정 부모에 대한 제사가 용인되지 않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시가에 전적으로 예속시키기 때문에 여성과 관계되는 것은 대부분 억눌리고 그 권리가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중한 가부장제에서도 굿은 예외였다. 주부(며느리/딸)가 죽은 자기 친정부모를 위해 오구굿만큼은 할 수 있었다. 굿만이 조선조의 여성들이 친정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의례였는지 모른다."(137, 140)


"유교 사회에서 주부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대상을 보면, 우선 남편 집안사람이어야 하고 동시에 남자이면서 결혼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도 죽을 수 있고 결혼하지 못한 딸(그리고 아들)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유교 사회에서는 주변인이라 할 수 있다." "유교 교리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조선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그저 무시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어찌 무시와 외면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조선조에 이런 영혼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의례는 굿밖에 없었다. 무당이 나서서 이 갈가리 찢어진 부모의 마음을 보듬어 주어야 했다. 무교가 여성과 같은 사회 주변인에 의해 지탱되었던 만큼 무교는 이러한 주변인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무교가 보전되어 내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142-3)


"일제 때도 어김없이 무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무교가 그리 쉽게 사그라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무당들의 활동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탄압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된 다음에 비록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무당들에게 좋은 시절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나 서양 세력의 쓰나미 같은 유입과 이른바 '조극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무교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박정희에게 무교는 미신의 대명사일 뿐이었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무교 같은 저급한 신앙은 없었다는 듯이 무시의 대상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 결과 수십 개에 달하던 서울 지역의 굿당들이 몇 안 남고 다 없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무당들에게 재충전의 성지였던 계룡산의 수많은 기도처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정화(?) 작업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무교는 더 밑으로, 더 주변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145-8)


▷ 한국인의 근본 종교는 무교! 


"한국인들은 왜 노래를 그다지도 좋아하는 것일까? 한국 무당들에게 춤과 노래는 무엇일까? 이를 심증적으로 무교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굿을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노래와 춤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당들의 가무는 놀이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교통하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무당들은 노래와 춤을 통해 망아경 속에 빠져 신을 받는 것이다. 다시금 망아경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무교와 관련해서 말해보면, 한국인들은 술을 통해 낮은 수준의 망아경에 가까이 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라는 뜻의 '음주가무'라는 한 단어로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술만 먹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격렬하게 흔드는 것이 훨씬 망아경 속으로 들어가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들은 밤마다 무당들이 하던 고대의 엑스터시 항연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161)


Ⅲ. 한국인의 종교적인 내면 세계


▷ 무교에서 바라본 불교와 그리스도교 


"특별한 장소에서 하는 의례가 아니더라도 특히 개신교인들은 교회서든 집에서든 기도를 많이 한다. 이들은 어떤 때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기도를 '빡세게' 해달라고 서로에게 요청한다. 밥 먹을 때에도 그야말로 밥 먹듯이 기도를 한다. 이렇게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그들이 믿는 신께 '무엇을 해 달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불교는 그리스도교처럼 그렇게 대놓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대신 승려가 사제가 되어 불상 앞에서 신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축원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찌 됐든 기도를 받는 대상이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인간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라 하겠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가 앞에서 본 무교의 구조, 즉 '신령↔(무당)↔신도'의 구조와 다를 바가 없다. 무교의 구조에서도 신도가 직접 신령께 정성을 올릴 수 있고 무당이 대신 그 정성을 올릴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왜 그리스도교나 불교는 미신이 아니고 무교만 미신이라고 하는 걸까?"(171-4)


"무교에 대한 여러 비판 가운데, '무당이 신령께 정성을 바친다고 잔뜩 제물을 차려 놓고 굿을 하는데 그게 정말로 신령께 전달되는 것인가?' 하고 따지는 것이 있다. 신령이란 문자 그대로 신이라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들이 먹는 음식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무당들은 신령은 기쁘게 하고 그들과 교통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하는데 그게 신령에게 정말로 전달되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다. 그리고 굿을 해서 어떤 일이 뜻대로 되었다면 그게 정말 굿을 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내 기도가 정말로 신에게 전달되는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현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지, 과학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자기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존중받으려면 무당들이 신령들에게 기도하는 것도 응당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191-3)


▷ 종교 신앙은 일반적으로 다 같다 


"무교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권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무교는 계속해서 권력과의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미신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나 유교가 중국에서 들어오기 전까지 무교는 미신으로 천대받은 적이 없다. 아니 무교는 오히려 당시의 보편 신앙이었다. 그러나 불교나 유교 같은 수입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무교는 미신'이라는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가 이 종교들을 믿게 되면서 또 그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종교적 신념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권력을 잡은 많은 사람들이 힘으로 밀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무교는 '어떤 중심 교리를 믿는다'와 같은 확실한 교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무당들과 신도들의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나올 수 없다. 인간 사회에서는 만일 조직이 없다면 그것은 힘이 없다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208-11)


"가령, 무당 중에 걸출한 이가 나와 교리를 이론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고 온갖 수를 써서 정치권과 결탁했을 뿐만 아니라 큰 종교 조직도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런 무교가 사회에서 정통 신앙으로서 인정받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이것은 공연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예가 있어 하는 소리이다. 일본의 신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신도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무교와 다를 게 없는 원시신앙에 가까운 종교이다. 이렇다 할 교리도 없고 경전도 없다. 그냥 신령 잘 모셔서 복 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도는 일본의 정치권과 결탁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 종교가 되었다. 지금 세계 종교계에서 일본의 신도를 미신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신사에서 근무하는 궁사(宮士)들도 우상숭배자라고 지탄받기는커녕 사회에서 나름대로 존경받는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인들이 신도를 그네들의 정통 신앙으로 인정해 체제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222-4)


마치며


"서사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굿을 한국 문화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무당들의 노래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리공주 무가 하나만 해도 서너 시간을 구송하는 것이니 그 안에 탐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가 하면 남도의 시나위 굿판에서 태동한 시나위 음악은 한국 민속 음악의 백미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 파생한 산조 음악은 '가야금 산조'나 '대금 산조'의 예처럼 예술성이 뛰어나다." "춤도 마찬가지이다. 굿판에서 연주되는 곡은 모두 무용 반주 음악이기도 하다. 시나위 음악에 맞춰서 추던 춤이 바로 세계적인 춤인 살풀이다." "그런가 하면 굿판은 한마디로 즉흥 연극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큰 틀은 있지만 각본은 정형화되지 않은 연극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적인 연극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굿판이 매력적인 일차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도 많은 함의를 갖고 있을 터이니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2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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