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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제1부 : 토대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ㅣ 미국의 자본주의 문명 1
배영수 지음 / 일조각 / 2022년 10월
평점 :
서론
"문명이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조직적으로 결집하는 실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더 나은 삶을 꾸리기 위해, 자신이 지닌 완력과 지력智力을 사용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을 조직하고, 또 지력地力과 수력, 풍력 등 자연의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일정한 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흔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 부르는 다양한 영역을 포괄한다." "자본주의의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여러 유형의 힘 가운데서 재산을 토대로 형성되는 힘에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재산은 전근대 세계에서 정치적 권위, 종교적 권위, 또는 물리적 폭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들어와서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발전한 경제 권력이 다른 유형의 힘과 맺는 관계, 특히 정치적 권위와 맺는 관계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과 형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17-9)
제1부
토대
제1장 자연환경
제2장 원주민과 이주민
"북미대륙에는 잉카제국이나 아즈텍제국처럼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없었다. 원주민은 널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적은 인구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수많은 조그마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원주민의 지리적 분산은 언어 다양성에서도 나타난다. 오늘날 북미대륙에 남아 있는 원주민 언어는 300개에 가깝다. 미국에는 250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는 17만 명이 사용하는 나바호Navajo어이다." "물론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300년 전후에 기온이 하락하는 냉각기가 시작됨에 따라, 중세 온난기에 번영한 거대한 집단의 정착 생활도 쇠퇴했다. 1500년경 북미대륙의 원주민은 많아야 수만 명, 적으면 수백 명 단위로 나뉘어 살면서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보면, 그와 같은 정치적 분열상은 그들이 부족사회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국가라 부를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41-2)
"스페인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재정복 사업의 전통 위에서 아메리카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이베리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교황과 군주를 앞세우며 스페인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것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복자들에게 재산과 명예, 그리고 지위를 의미했다.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정복자들은 대개 하급 귀족이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황과 군주에 대한 봉사를 제외하면 무엇보다도 눈부신 황금과 세상이 칭송하는 업적, 그리고 영주로서 누리는 위신이었다." "이런 기회는 목장이나 공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연줄과 재주를 동원해서 고관의 수행원이 되어 배를 탄 다음에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행로는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것보다는 젊은 남자가 홀로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따라서 스페인 식민지는 개척이 시작된 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사회적 안정을 누리지 못했다."(69-72)
"영국 식민지는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사회적 안정을 누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거기에 미국 문명의 대두, 또는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 가운데 하나가 있다. 영국의 북미대륙 식민지는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개척 과정에서 교황과 군주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던 정치권력으로부터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적 동기가 식민지 개척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흔히 1620년 영국의 종교 탄압을 피해 북미대륙으로 이주한 필그림Pilgrim들이 미국의 건국 시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인들이 필그림의 도착 200주년을 계기로 미국의 건국 과정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설화이다. 그보다 13년 앞서는 1607년에 오늘날의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이라는 영국 식민지가 먼저 건설되었다. 더욱이 개척자들은 종교적 동기가 아니라 돈벌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임 목적을 위해 식민지 건설에 참여했다."(72-4)
"관대한 토지 정책은 사실 제임스타운에서 시작되었다. 담배가 수출 품목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원주민 노동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자, 버지니아 컴퍼니는 부랑자와 범죄자를 붙잡아서 북미대륙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 위에 1616년에는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하는 성인 남성에게 50에이커씩 토지를 배분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그렇지만 인두권 제도headright system라 불리는 이 정책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북미대륙까지 가는 데 드는 여비 부담 때문에 이주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버지니아는 계약 하인제도indenture를 도입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이주민은 여비를 부담하는 주인을 위해 4-5년 정도 하인으로 봉사한 다음에 자유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영국 식민지 전체로 확산된 이들 제도는 결국 무일푼이라 해도 일을 하려는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북미대륙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실제로 이주민은 17세기 말까지 약 100년 동안 53만 명에 이르렀다."(80)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영국 식민지에서도 아메리카와 그 원주민을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자세가 확립되었다. 근대 유럽에서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나아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 능력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을 많이 지닌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조금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근대 영국인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 인종 질서나 사회질서 같은 위계질서가 있다고, 또 그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정착 초기에도 유혈 충돌이 우호적 교역 사이에 일어났지만, 1640년대부터는 잔인한 살육전이 지속되었다. 영국 식민지가 발전을 위해 관대한 토지 정책을 수립하고 영국에서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자,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이 〈야만의 세월〉이라 부르던 이 기간은 1670년대에 원주민의 패퇴로 끝났다."(87-8)
제3장 식민지 사회
"버지니아의 이어들리 총독은 1619년 7월 주민 대표로 구성되는 대의기구를 수립했다. 먼저 회사가 임명하는 유력자들로 자문회의Council를 구성하고 총독의 자문에 응하게 했다. 다음으로 11개 정착지에서 주민이 선출한 대표 22명으로 민의원House of Burgesses을 구성하고 영국의 하원과 같은 역할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두 기구는 따로 모이기보다 흔히 함께 모였고, 그래서 주민총회General Assembly라 불리기도 했다. 구성이나 기능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에서는 그런 기구에 선임된 유력자들이 다른 이주민과 뚜렷이 구분될 만큼 사회계층이 충분히 분화되지 않았다. 더욱이 영국과 달리 귀족이 없었고, 따라서 자문회의를 영국 상원처럼 귀족으로 구성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새로 수립된 대의기구는 버지니아에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특히 민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민의 의사를 대변하며 과세권을 장악하고 총독을 견제하는 기능을 확보했다."(98)
"다른 한편으로 버지니아는 영국과 달리 노예제 사회가 되었다.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르면 영국인을 비롯한 기독교도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고, 따라서 노예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계약 하인들은 대개 노예와 다름없이 가혹한 처우에 시달렸다."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1660년대부터 뚜렷하게 심화되었다. 1662년 버지니아 의회는 〈이 지방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이는 오직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만 노예인지 자유인인지 결정된다〉고 선언했다. 이는 영국인 남성의 자녀는 모두 영국인이 된다는 확고한 전통에 어긋나는 조치였다. 그것은 흑인을 백인으로부터 분리해 영구적 예속 상태에 속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5년 뒤 버지니아 의회는 노예로 태어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어도 자유인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런 조치들은 결국 1705년에 제정된 〈하인과 노예에 관한 법〉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법은 제22조에서 노예를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있는 재산이라고 규정했다."(99-100)
"매서추세츠의 유래는 1628년 식민 사업에 관심이 있는 여러 상인들이 뉴잉글랜드라 불리던 북미대륙 북부를 대상으로 새로운 회사를 세우고 국왕에게 식민 사업을 허가해 달라고 청원한 데 있다. 흔히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라 불리던 이 회사는 버지니아 컴퍼니와 마찬가지로 법인격을 지니는 정치조직이었다. 바꿔 말해 회사는 다른 영국인처럼 소송을 제기하고 의무를 이행하며 재산을 소유하고 처분하며 계약을 체결하고 이행하면서도, 그들과 달리 자연인의 수명보다 오래 존속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회사의 구성원들이 충독과 부총독을 한 사람씩 선출하고 보좌역 18명을 선임해서 〈여기서[칙허장에서] 명시, 증여되는 토지와 지역, 거기에 건설되는 식민지, 그리고 그 주민의 통치에 관한 일반 업무와 용건을 처리하고 규제하게〉 했다."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가 이와 같은 정치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것을 뉴잉글랜드로 옮긴다는 것은 곧 하나의 자치 식민지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108-9)
"독실한 지도자 존 윈스럽이 이끄는 청교도들은 매서추세츠 베이 컴퍼니를 장악하고 그것을 '신세계'로 옮김으로써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도착한 직후에 오늘날의 보스턴에 자리를 잡고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세웠고, 즉시 주변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런 〈도시〉는 도읍town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여간해서는 변하지 않을 만큼 안정되었던 중세 촌락village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근대 도시city에 가까웠다." "도읍 창건자들은 발전을 위해 청교도 이외에 다양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읍민회의town meeting에 참석하고 투표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다. 읍민회의는 전체 주민이 모여 도읍의 운영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기구였다. 토지는 창건자들로 구성되는 자치단체가 장악했지만, 원주민 관계를 비롯한 치안과 질서의 문제는 읍민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읍은 신정정치神政政治에서 벗어나 있었다."(109-12)
"로저 윌리엄스는 성직자의 길을 생각하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으나 영국교회에 실망하고 청교도로 변신했고, 1631년에는 보스턴으로 이주해 목회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서도 실망하게 되었다. 나중에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이 『주홍 글자』에서 묘사한 것처럼 교회는 십계명을 어긴 주민에 대해 처벌을 가하는 등, 세속사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윌리엄스가 보기에 청교도 교회도 영국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제대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바꿔 말해 교회가 국가의 권위에 기대어 개인의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뜻했다. 윌리엄스는 그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1636년 당국의 추방 결정에 따라 매서추세츠를 떠나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하게 되었다. … 이미 1630년대부터 교회는 청교도 신앙의 쇠락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대이주〉에서 한 세대가 흐르자, 청교도 교회는 신도가 감소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114-5)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과 달리) 토지를 확보할 때 원칙적으로 원주민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일종의 단체로서 교섭하는 방식을 취했다. 식민 사업의 주체가 회사든 영주든, 또는 국왕이 임명한 관리든 간에, 대표를 임명하고 그에게 먼저 원주민과 교섭해서 토지를 확보한 다음에 그로부터 토지를 분할, 인수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것은 자신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치열한 경쟁을 방지하며 원주민으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방법이었고, 또 영국에서 수립되고 있었던 근대적 재산권을 북미대륙에서도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즉 토지에 대한 소유권에는 그것을 처분하는 권리뿐 아니라 거기서 수렵이나 경작을 하는 등, 그것을 이용하는 권리도 포함된다는 원칙을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그런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토지를 양도한 다음에도 거기서 수렵은 물론이요 경작도 계속하려 했다. 따라서 영국 식민지에서는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었다."(123)
부록: 문명의 개념
"문명의 개념에 남아 있는 유럽 중심주의는 윌리엄 맥닐의 『서양의 대두』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문화적 확산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고든 차일드가 주목하는 질적 저하를 수반하며, 따라서 주변 지역에서 발전하는 문명을 모두 중심 지역의 아류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의에서 문화는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생활양식이라는 정의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그것은 문명과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문명에 들어있는 기술, 예술, 지식, 종교, 이데올로기 등, 지적, 예술적, 정신적 자산을 포괄하는 부분으로 간주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문화를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펌프를 써서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녔던 문화이든 남에게서 배운 문화이든 간에 가용한 문화적 자원 가운데서 쓸모 있을 만한 것을 선택하고 필요하다면 거기에 적절한 변형을 가하며 사용한다."(132-3)
"문명이 자연과 외적을 제어하는 기능을 지닌다면, 그것은 그런 기능을 발휘하도록 구축된 인위적 건조물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일찍부터 씨족이나 부족, 또는 국가 같은 집단을 형성했지만, 오직 일부만 문명을 건설하는 단계, 즉 자연에 변형과 제어를 가하며 집단을 보호하는 지속적 건조물을 수립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문명이란 사람들이 외적은 물론이요 자연까지 제어하기 위해 여러 유형의 힘을 모아 만들어 내는 집단적 건조물이라고, 한마디로 줄여 권력구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구조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주권을 기능에 따라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누고 그것들을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좁은 뜻의 권력구조이다. 그와 달리, 필자가 말하는 넓은 뜻의 권력구조는 주권처럼 정치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권위를 넘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른 영역에서 성립하는 권위까지 포괄한다."(137)
"다종다양한 권력이 필자가 말하는 넓은 뜻의 권력구조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그런 권력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기 때문이다. 특히 물리적 폭력과 정치적 권위, 경제 권력과 종교적 권위 등, 주요 권력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구조를 조직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은 서로 흩어져 사는 대신에 함께 모여 집단을 구성하면서 다종다양한 권력 사이에 일정한 상호 관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며 권력을 효과적으로 결집하는데, 그 결과로 형성되는 조직체가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본질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구성하는 조직체라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문명은 힘을 결집하는 방식이나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왜냐하면 문명은 사람들이 자연과 외적으로 구성되는 다양한 여건 속에서 스스로 당면하는 상이한 필요에 따라 힘을 결집하는 방식과 집단을 구성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138-9)
제4장 제국과 식민지
"매서추세츠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처음부터 자치를 지향했다. 더욱이 1675-76년에 원주민과 이른바 필립왕전쟁을 치르며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기 때문에, 원주민이 프랑스 식민지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두려움은 국왕이 루이 14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미대륙에서도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탄압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들이 수립한 작은 도읍의 주민들은 결의를 통해 영국의 정치적 전통에 따라 〈주민 대표로 구성된 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떤 세금도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뉴잉글랜드 최고행정관인) 안드로스와 (국왕 자문기구인) 추밀원의 태도는 〈당신들은 노예로 팔리지 않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주민이 영국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모국에 종속되는 존재로 간주했던 것이다."(148-9)
"그래도 팽창하는 제국과 그 식민지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완화되었다. 1688년 12월 명예혁명을 계기로 안드로스가 영국으로 소환되고 뉴잉글랜드령이 해체되자, 식민지 주민은 여기저기서 봉기해 국왕이 파견한 관리들을 쫓아내면서 절대주의적 통제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특히, 왕정복고 이후에 취소되었던 과거의 칙허장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가 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타협이 성립했다. 국왕은 총독을 임명하는 권한과 함께 식민지의 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최종 권한을 확보하는 반면, 식민지는 주민 대표로 구성되는 의회를 통해 입법권과 과세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1689년 권리장전 제정으로 입헌군주정이 수립되면서 정책은 의회에서 주도했다. 의회는 중상주의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무역과 식민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만 취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153)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대영 수입은 1740년대부터 빠르게 늘어났는데, 이는 식민지 주민의 소비가 활발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북미대륙의 영국 식민지는 영국 경제에 묶여 있으면서도 대서양 경제라는 더 큰 틀과도 깊은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관계는 흔히 삼각무역이라 불린다. 실제로 북미대륙 식민지는 영국에 담배와 생선 등, 일차산품을 수출하고 다양한 공업 제품을 수입하는 한편, 카리브해에는 곡물과 목재를 수출하고 당밀과 설탕을 수입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교역 품목이 몇몇 주요 생산물에 그치지 않고 비단과 인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교역 대상도 영국과 그 식민지에 머무르지 않고 남부 유럽까지 넓게 확대되었다. 식민지의 교역은 기본적으로 중상주의적 규제에 따라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그런 규제는 지정된 품목에만 엄격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대륙 식민지는 영국 경제권 이외의 지역과 교역함으로써 대영 적자를 대부분 메울 수 있었다."(163)
부록: 자본주의의 개념
"토지를 비롯한 재산은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고 자유를 향유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지만,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수준을 넘어서면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며 그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강제하는 능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뜻에서 재산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넘어 경제 권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 권력은 전근대 문명에서 언제나 다른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은 흔히 정치적·종교적 권위의 공격 대상이거나 물리적 폭력의 제물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인신의 자유와 함께 재산과 계약에 대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경제 권력을 정치적·종교적 권위에서,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권력에서 해방, 분립시킨다." "문명은 다양한 힘을 결집하는 조직체인데, 그 조직 방식은 문명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경제 권력을 분립시킴으로써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결집하는 문명이라는 점이다."(201)
"경제 권력의 분립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뚜렷이 드러내는 두 번째 특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재산을 추구하고 축적하는 데 따르던 다양한 제약이 약화되는 현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정치적 권위는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평화와 치안을 유지하고 재산과 계약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반면에 시장에 대한 개입을 자제했다. 사회적 제약은 마르크스가 강조하듯이 봉건제의 해체와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노동 능력을 사고파는 노동시장이 확대된 덕분에 해결되었다." "베버가 지적한 바 있듯이, 종교적 권위는 근대에 들어와서 재산을 물욕의 결과로 보지 않고 근면과 절약 같은 미덕의 소산으로 여기며 축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또 허시먼이 입증한 바 있듯이, 근대 유럽의 사상가들은 전쟁이나 폭정을 제어하는 효과를 기대하며 물질적 욕구를 중세의 악덕에서 근대의 미덕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경제 권력의 분립을 둘러싸고 있던 문화적 변동은 아직 부분적으로만 밝혀져 있을 뿐이다."(201-2)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단서는 개인주의의 대두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궁극적인 주체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사회적·종교적·사상적 변화의 주인공으로서 개인은, 정확하게 백인 남성이 대표하는 개인은, 근대에 들어와서 나타났다. 중세 유럽에서 개인은 공동체에서 버림받은 가련한 존재였다. 거기서 사람들은 가계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촌락 공동체나 동업조합의 일원으로서, 언제나 사회적 협력과 통제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개인이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인이 되었고, 또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더욱이, 재산을 지니고 계약을 맺으며 자신의 이익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개인을 축재에 주력하게 만든 것은, 그래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주도한 동력은, 물론 〈돈에 대한 사랑〉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근대 유럽에 와서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는 점이다."(203-4)
제5장 미국혁명
"미국혁명의 기원은 식민지의 빈곤과 곤경이 아니라 성장과 번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는 지속적 번영을 위해 서부 팽창을 갈망했고, 영국은 그것을 저지하고 식민지를 통제하고자 시도했으며, 양자는 제국 체제 안에서 이견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의 기원에 관한 해석 가운데 고전적인 것은 7년전쟁이 끝나는 1763년을 출발점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며 모국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던 식민지는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낡은 규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거기서 혁명에 이르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 성과는 7년전쟁에 주의를 환기한다.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대결인 동시에 식민지와 원주민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점, 그리고 종전 후에는 제국 체제를 정비하고자 했던 영국에 맞서 식민지가 반발했다는 점─식민지인들은 영국의 조치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에 주목한다."(215-6)
"식민지 정치인들은 영국이 식민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세금을 부과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영국에서 세금은 군주의 권력 기반이었다. 그것은 군주가 봉건 영주에 맞서 상비군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 군주들은 중세말부터 언제나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를 확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에 의회는 오랜 투쟁을 거쳐 의회의 동의가 없이는 세금을 부과하지 못한다는 전통을 수립했다. 바꿔 말해 입법권과 함께 과세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17세기 들어 왕좌를 차지한 스튜어트 가문의 왕들은 의회의 동의없이 부과할 수 있는 세금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오랜 혼란을 거친 끝에,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 군주정을 수립하며 의회의 과세권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런 역사를 되돌아보면, 영국이 식민지의 동의 없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유구하고 확고한 정치적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또 앞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221-2)
"독립선언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서문에서는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을 천명한다. 전문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을 중심으로 보편적 원칙을 설명하며 독립 선언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어서 국왕 조지 3세가 북미대륙 식민지에 폭정을 강제했다고 지적하며 독립 선언의 경험적 근거를 제시한다. 본문에서는 동의 없는 과세와 배심원 없는 재판 등, 영국 정부가 취한 조치 스물일곱 가지를 하나씩 열거하며 그 폐단을 고발한다. 덧붙여서 그런 폐단에 대해 영국 국민에게 호소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고 개탄한다. 끝으로 발문에서는 미국이 영국과 결별하고 새로운 주권국가를 수립한다고 선포한다." "다만, 전문의 〈모든 사람은 본래 평등하다〉는 명제는 당시 미국에서 한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서 〈사람〉은 백인, 그것도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더 좁혀 말한다면, 참정권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재산을 지닌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거기서 〈사람〉은 시민을 가리켰다."(247-9)
"독립선언문에서 부각된 핵심적 생명 및 자유와 더불어 재산 내지 〈행복의 추구〉라는 것은 미국이 자본주의에 필요한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에 들어섰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사랑을 풀어주고 돈이 독립된 힘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그래서 결국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조직하며 새로운 문명을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신의 자유와 함께 재산과 계약에 대한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재산을 토대로 성립하는] 경제 권력을 정치권력에서,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권력에서 해방, 분립시킨다.〉 식민지 미국에서는 그런 권리가 불안한 기반 위에 있었다. 이는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갈등에서, 특히 영국의 과세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반응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18세기 중엽까지도 지속되었다. 이제 독립선언문에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를 핵심적 가치로 설정함으로써, 미국은 비로소 자본주의의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251)
제6장 연방헌법
"북미대륙 식민지에는 귀족이 정착하지 못했고, 따라서 신분제도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도 영국의 신분제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고, 또 젠트리가 최상부를 차지하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혁명은 이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 "영국군이 패퇴하면서 무려 6만 명이 넘는 근왕파가 영국군과 함께 식민지를 떠났다. 혁명기 미국의 전체 인구가 250만 내지 300만 명 내외였으니, 이는 망명에 나섰던 사람들이 2%를 넘는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망명자들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줌(약 0.5%)에 불과했으나, 혁명이 끝난 다음에 고국으로 되돌아갔고 재산과 관직을 되찾으려 애썼으며, 그래서 프랑스를 구체제로 되돌리고자 했다.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혁명에 저항하는 세력과 혁명을 밀고 나아가려는 세력 사이의 치열한 갈등에 시달렸다. 미국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정치적 권위와 경제 권력이 분립되는 과정에서 첫째 국면이 혁명을 통해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278-9)
"여러 정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치를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 편견은 사실 군주정과 신분제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일반적인 사조였다. 그렇지만 적잖은 지도자들은 민주정이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기에, 소농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은 무지하고 무례한데도 정치에 참여하며 발언권을 확대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이 보기에 반란으로까지 비화하는 보통 사람들의 세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민주정치가 정치·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에는 신생 미국을 무정부 상태에 빠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는 여러 지도자들의 과제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과제는 본질적으로 권력에 맞서 권리를 지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전에는 소수의 권력에 맞서 다수의 권리를 주장한 데 비해, 이제는 다수의 권력에 맞서 소수의 권리를 옹호해야 했다. 그것은 존 애덤스가 1787년 즈음에 런던에서 주영 대사로 지내면서 깊이 생각하던 주제의 일부였다."(299-300)
"1787년 5월 필라델피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새 헌법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담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또 그런 정부는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 국민으로부터 직접 주권을 수임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의견 일치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입법부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하원과 함께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상원을 두고, 행정부와 사법부도 국민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견이 보이지 않았다." "9월 중순, 새로운 헌법안에 서명한 대표들은 강력한 연방정부를 창설하는 것이 과도한 민주정의 폐단을 극복하고 신생 미국의 존립과 발전을 기약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선언과 함께 탈피하려 했던 영국의 〈혼합 정부〉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귀족정과 군주정의 요소를 이끌어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적 추세에 역행하는 반전이었다. 바로 그것이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지도자들이 추구한 목표였다."(311-2, 318)
"매디슨은 1787년 11월에 발표한 『연방주의자』 제10편에서 파벌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파벌은 내우외환을 일으키며 공화국을 위험에 빠뜨리는 중요한 요인인데도 그 원인을 제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재산을 축적하는 능력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형성되는 관념과 견해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상이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파벌이 존재한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라 해도, 그처럼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공동선에 기여하게 만들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대책을 세우는 것이 근대 국가의 주요 과제다. 파벌은 피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공화국을 위협하지 않도록 제어할 수는 있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공화국을 작은 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토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는 데 있다. 규모가 크면 파벌과 이해관계가 그만큼 더 다양해지고, 일부가 다른 부분을 끌어들여 다수를 형성하기도 어려워지며, 따라서 소수의 권리도 쉽게 침해당하지 않는다."(324)
"그러나 공화국은 작아야 한다는 당대의 상식이 여전히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나중에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는 매디슨이 거기에 다시 도전했다. 매디슨은 1788년 2월에 발표한 『연방주의자』 제51편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거론하며 광역 공화국의 장점을 역설했다. 광역 공화국에서는 여러 파벌이 서로 다투다가 다수를 쉽게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소수를 억누르지 못하는데, 이는 권력을 여럿으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서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저지하고 권리를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기대는 것은 결국 통치란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방을 창설하고 광역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필요한 조치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권력을 지니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는 유혹이나 압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324-6)
"그래도 권력에 대한 경계심은 높았다. 그래서 매디슨을 비롯한 연방파는 비준 과정에서 형성된 타협안에 따라 1789년 9월 연방회의에서 권리장전이 통과되는 데 협력했다. 권리장전은 2년이 넘는 비준 절차를 마치고 수정조항 제1-10조로 확정되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시민이 누리는 자유에서 무기를 지니는 권리와 공정한 재판을 받은 권리를 거쳐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리까지 다양한 권리를 열거한다. 그리고는 열거되지 않은 권력과 권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권리장전은 구체적으로 〈헌법에 일부 권리가 열거되어 있다고 해서 국민이 보유하는 다른 권리가 부인 또는 경시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제9조)고 선언한다. 이어서 〈헌법에 의해 미연방국에 위임되지 않은 권력이나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력은 개별 주, 또는 국민이 보유한다〉(제10조)고 부연한다. 이들 조항은 혁명기의 민국인들이 권리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보여 준다."(328-9)
부록: 미국 헌법에 관한 논쟁
"근래의 연구는 당대 미국에 전통적 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가 일인과 소수, 그리고 다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통적 관념은 왕족은 물론이요 귀족도 없는 미국 사회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도 뚜렷한 사회질서가 있었고, 그 정점에는 흔히 상류층이라 불리던 계층이 있었다. 그들은 귀족처럼 많은 재산과 높은 위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귀족과 달리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신분제를 통해 유지되는 〈인공 귀족〉artificial aristocracy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로 인해 형성되는 〈자연 귀족〉natural aristocracy으로 간주되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은 상류층과 달리 민중의 참정권과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연 민주세력〉natural democracy으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혼합 정부〉의 기본 원칙, 즉 사회 세력에 상응하는 권력구조를 수립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은 건국기에도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347-8)
"매디슨을 비롯한 연방파 역시 미국에도 귀족이나 평민과 비슷한 세력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또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런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며 정부의 수립과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분이 사라졌지만 아직 계급이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만큼, 사회적 위계질서라는 친숙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에 의지해 미국의 사회구조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수립된 권력구조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권력의 자의적 침해로부터 보장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또 그렇게 해서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상부를 차지하는 소수가 재산에 대한 권리를 경제 권력으로 변형시키는 길을 열어 주고, 나아가 경제 권력이 정치적 권위나 종교적 권위, 또는 물리적 폭력에 종속당하지 않고 자율적 위상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결국,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만큼 더 튼튼한 토대를 갖출 수 있었다."(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