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국민화 - 독일 대중은 어떻게 히틀러의 국민이 되었는가?
소나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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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면, 영속적이고 동질화된 정체성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바로 국민이다. 군소 도시들간의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리면서도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야망을 간직해 온 독일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사회를 통합하는 공통 심상과 초시간적 절대성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사유가 체계화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질서잡힌 세계를 지향하는 고전주의와 고양된 열정을 직접 체화하는 낭만주의를 동시에 세계관으로 받아들였으며, 대중들은 체조동호회와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 같은 지역단체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적 전례와 게르만족의 신화가 버무려진 민족적 표현 양식을 꾸준히 습득했다. 하나의 국민을 지향하는 세속 종교가 사람들을 포획해 나아갔다.

새로운 정치양식인 세속 종교의 본질은 신화와 상징을 단순히 물질성의 반대항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한층 추상화된 관념으로 재조직하여 현실에서 이룩할 수 있다는 '약속된 체제'의 기반으로 삼는다. 이것은 소음으로 가득한 다원성을 억누르고 일체화된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공동체를 향하여 도전하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나치즘은 독일인들의 내면에 녹아있는 정서를 정교한 기계적 절차 속에서 국가 숭배로 전환해냈다. 대중은 그저 눈을 가린 채 민족주의의 용광로에 떠밀려간 희생자가 아니라, 민족 정기가 서린 공간에서 잘 구성된 제의와 축제를 체험하면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으로 고양된 애국심으로 뭉친 민족의 일원이었다. 나치는 '신학'의 집행자이자 완성자였던 셈이다.


(오직 대의 정부만이 민주적이라는 전제가 오류인 것은) 파시즘이 작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파시즘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초기 대중운동의 신화와 제의였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솔리니가 말한 전통 안에서 의회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 개념보다 더 생생하고 의미 있는 정치적 참여의 표현을 보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의 오랜 전통 덕분이며 그 전통은 내셔널리즘 지지자의 대중운동뿐 아니라 노동자의 대중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30)

파시즘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정치사상을 하나의 체계라기보다 "태도"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사실 민족 제의에 틀을 제공한 일종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의례와 전례가 그 중심이 되었고 글에 호소할 필요 없는 정치론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나치와 다른 파시즘 지도자들은 말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연설은 이데올로기를 교훈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례의 기능을 수행했다. 말은 그 자체로서 숭배 의례에 통합되었고 실제 이야기된 내용은 결국 이런 연설을 둘러싼 무대 장치나 의례보다 중요치 않았다. 36)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와 체조동호회가 기념식에서 제 역할을 했다. 프로테스탄트 사제들이 애국적인 설교를 했고 프로테스탄트 성가대가 노래를 불렀다. 게르만적인 것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런 혼합은 19세기가 시작된 이래 변함이 없었다. 1815년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사람들은 그 제단 위의 신성한 불꽃에 예배를 드렸다. 104)

민족 해방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는 뮈토스의 주요 주제였다.
...
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민족의식의 발전에 기본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민족으로 여기고 기념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민중이었다. 내셔널리즘은 민족을 해방한 것은 물론이고 각 개인의 영혼을 해방시켜 그들이 민족과 결합해 진정으로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157)

하나의 거대한 애국 조직으로서 사격동호회는 대중적 조직을 위한 하나의 모범을 제공했다. 체조동호회원들, 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애국 단체를 형성했고 나치가 집권하기 전 한 세기 이상 민족 의례를 지탱하고 거기 참여했다. 그들의 축제는 통상적인 정치 회합이 아니었다. 피셔의 말처럼 민족 제의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활동이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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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일본 근현대사 5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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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아우르는 일련의 분쟁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시각은 '중일간의 국교 회복과 평화 정착을 저해하는 잔존 세력의 토벌전'이었고, 군부의 시각은 '조약에 명시된 일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 행위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국교 회복은 만주가 일본에 귀속된 지역임을 상호 확정하는 것이고, 조약의 이행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과 맺어온 각종 이권의 보장을 뜻한다.

군부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잠재적인 적대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열도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만주(몽골까지 포함한)의 영구 점령이라고 판단했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여론전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정서를 적절히 자극했고, 정치권은 군부의 폭주에 때로는 당황하면서도 곧 적절한 수용과 전략적 이용을 모색했다.

본 저서는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군사적 도발과 외교적 수사, 경제의 총동원, 이념적 정당화까지 일체화된 군국주의가 어떠한 인간 행위자와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서 점차 강고화되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거기에는 정념의 선동과 대결하는 이성의 숙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군을 뒷받침하는 '계산적' 이성의 모습이 가감없이 들어있으며, 달리기 시작한 열차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주사변은 1)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2) 본래는 정치 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3)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4)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17)

(만몽개념의 확대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방법은 우선 지역을 말로 표현하고 다음으로는 말에 표현되는 실태를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팽창시키는 방법이었다. 4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 공황을 맞아 (만몽지역 확보를 통한 일본 국방경제의 자급자족정책 확립이라는)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124)

1920년 신 4국 차관단 교섭에서 일본 측이 만몽권익에 관한 열거적 제외를 영미 열강에게 요구할 때의 설명은 `우리 국방 및 국민적 생존`상의 필요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국민적 생존이라는 말은 만몽을 제외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서 시작된 세계 공황이 일본에 파급되자 현실은 이러한 수사를 밀어냈다. 138)

조르게는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하는 사이에 23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육군에서 독일이나 적군 규모의 큰 육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중일전쟁까지는 기술상으로도 훨씬 뒤떨어져 보였으나 지금은 모든 근대 병기를 갖추어 기술상으로도 뛰어난 역전의 육군으로 변화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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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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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를 횡단한 서구 제국주의에 아시아가 대응한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자신들의 우월한 종교나 전통에 충실하면 섭리 혹은 순리에 따라 강성함이 돌아온다는 생각, 둘째, 전통 문화와 사회 질서를 보존하면서 그 위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한다는 생각, 셋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국제 세계에서는 옛 것을 철저히 내버리고 서구 근대화를 압축 달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과 기술을 다루는 방식이 제각각이었지만, '국민국가'라는 서구의 제도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단결만이 압도적인 서구에 맞설 수 있다는 논리는 국가별 입장과 발전 수준의 차이 앞에서 와해되어 갔다. 범이슬람주의는 사회주의가 세계대전의 파도 속에서 국가에 포섭된 것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렀고, 범아시아주의는 제국 일본의 야심이 선의를 집어삼키면서 사라졌다.

서구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서구에 종속되어도 좋다는 몰아(沒我)는 서로를 침식했고, 유교나 불교, 이슬람을 내세운 도덕적 전통은 새로운 사회 체제의 중심 이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시아는 민주적 제도를 국가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권위체로서의 성격만을 받아들였는가로 지형이 나뉘었다. 개인은 내면을 규율하는 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부단히도 다원성을 희생시키고자 했다.

주어진 것과 쟁취한 것은 같은 것이라 해도 결국에는 같지 않다. 주어진 것은 쟁취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다시 빼앗기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아시아는 제국의 습격에 맞서 오래된 제국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몰두했다. 그러나 제국이 무너져내린 폐허에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들과, 유령처럼 그 위를 배회하는 '종교'만이 남았다. 이 인공의 들판에 자라나는 쇠사슬을 처리하는 일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시아 세계 어디에서든 근대화는 두 가지 가장 영속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군 장교나 정부 관료, 새로운 전문직처럼 세속적이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집단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납세을 요구받은 일반 시민들, 서구인 때문에 영향력이 위태로워진 종교와 사회 엘리트, 당국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고유의 인종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깨달은 소수 집단들의 반발이었다. 103)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초기에 도쿠토미 소호는 자유주의적 개혁론자였지만, 18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국가들마저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대의제와 정당 내각"의 가치를 의심했다. 량치차오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구현된 국가주의를 갈수록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추세에 영향을 받은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249-50)

도쿠토미는 많은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믿었던 개전의 더 큰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앵글로색슨족이 동아시아를 잠식하고 강탈한 악랄한 선례를 근절하는 방법으로만 동아시아의 질서와 안녕, 평화, 자족을 성취할 수 있음을 동아시아의 인종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48)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이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4)

초기에 알레 아마드(1923~1969)는 이란 학생들을 서구 대신 일본과 인도로 보내서 서구 중독증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양에 중독된 이란인들이 서구에 중독된 이란인들과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계획에는 이슬람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1962년에 당시 신생 국민국가이던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국민들이 공유하는 종교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결속의 힘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
터키와 달리 이스라엘은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근대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385)

공산주의적 반제국주의자뿐 아니라 무슬림조차 배척하기 어려운 서구의 관념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 거의 어디에서나 탈식민 사회의 엘리트들은 유럽의 성공으로 보증된 그 관념을 받아들였다. 너그럽게 해방을 약속한, 자강과 긍지를 위한 그 혁명적 비책은 바로 국민국가의 제도와 관행이었다.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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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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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는 가장 전형적인 무대가 바로 전쟁터이다. 전쟁은 국민이 국가의 실체를 자각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며,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도록 요구한다. 여기에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와 '국가적 지도자(천황)'라는 "국가의 현현(顯現)"을 덧붙이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은 상징 조작이 구체적인 행위를 지휘하는 통제실이 된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국가는 살아남았다. '천황'은 전범의 혐의를 벗었고, 전쟁을 수행한 국가기구와 집행자들은 최소한의 손실만 안고 상층부로 귀환했다. '열렬한' 군국주의자가 '열렬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정념이 인간 본성의 근본 기제임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부정적인 비판보다 긍정적인 위안이 매력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열광을 소진하고 남은 잿더미를 안쓰러운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전쟁 자체가 가장 큰 '희생의 강요자'이며, 일본이야말로 현대 전쟁의 가장 전형적인 희생자라는 관점은 자신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가한 희생의 무게를 외면하도록 허용했다. 이 '적극적인 소극성'이야말로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강력한 이상주의로 무장한 미군정의 열의 역시 역설적으로 상황의 역전에 기여했다. 일본에 주어진 '자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선택을 고심하다가 길을 잃어버렸고, 일본에 부과된 '강제'는 자신이 놓는 길이 더디게 진척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파괴를 일삼았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현재는 불투명했다. 폐허가 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부정적인 순환은 회의주의를 불러오며, '적극적인 소극성'을 정당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얼룩진 것이라도 현재의 평화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도화된 이념이 가장 단단한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아베 정권이 헌법9조를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방송에서 천황은 절대로 `항복`이라든가 `패배`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 이것이야말로 이후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인용될 말이었다.
이 칙어에서 천황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애썼다. 그것은 바로 굴욕적인 패전 선언을 일본의 전쟁 수행과 시공을 초월하는 천황의 도덕성에 대한 다른 식의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33)

전시의 미사여구들은 전후 목표와 관계가 있을 경우 쉽게 변형 가능했다. 그 표현들은 대체로 전후 재건에 알맞게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기 따문이다. 일본인들도 `군국주의와 침략 만세!`를 외치며 전쟁을 향해 행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평화와 안보, 공존과 공영, 일본과 아시아 전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선언한 것이다. 217)

교조주의적 좌파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 인민 전체가 뛰어난 영도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는 데 한몫했다.
...
맥아더의 GHQ, GHQ의 개혁 과제를 따라야 했던 구 지배층,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일본 공산당 모두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천황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305)

미국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그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억압과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게 했다. 황실 측근 일부에서 그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SCAP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다. 356)


사토 다쓰오는 헌법 번역 마라톤이 끝나자마자 이 작업을 기초하기 시작하여, 민정국에 대해 일견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요구, 즉 법적 보호의 제공은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므로 중복이고, 따라서 그 삭제를 요청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말을 조금 바꿔 외국인을 법적 보호로부터 제외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미국인들은 이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고쿠민`을 `모든 일본 국적자(all national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부는 대만, 특히 조선 식민지 출신의 수십만 신민들에 대해 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 508-510)

난바라의 전향은 그가 기리며 추모한 진리를 추구했던 학생들처럼 자신도 일본 지도자들에게 속았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항복 후에 가장 많이 사용된 수동 표현은 `다마사레타(속았다)`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난바라의 감정은 이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감정과 완전히 일치했다. 심지어는 전시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전 선동을 일삼던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전쟁 책임을 세탁하는 세제로 이런 유의 기만적 표현을 동원했다. 638-9)

하급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기세이(희생)`를 자주 언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자`이거나 `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거나 혹은 `패배`나 `일본의 재건`, `일본 민족`,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희생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로 생각이 통일되지 않았다. 677)

(전쟁 포기라는) 이상을 헌법이나 법률로 명기한 예는 일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무장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법률과 헌법에 의한 보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하는 기본 문제, 평화와 전쟁이라고 하는 기본선이라는 원점으로 논의가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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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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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국민적 민족공동체'라는 개념 안으로 노동계급의 정념을 집약하여 그들을 행동하는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며, 타자에 대한 배제와 무력 행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민족자결주의에 고취된 제3세계는 파시즘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이자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고 일체화를 달성하는 기술로 수용하였으며, 민족정신의 함양을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보다 우선시했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일부에서도 파시즘을 자주적 민족주의의 방편으로 적극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한 이범석과 거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안호상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경제적 제국주의'와 '영토적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민족 고유의 정신 아래에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공동체였다.

이들은 민족을 피로 맺어진 자연적 산물이자 역사적 고난을 공유한 공동체로 규정하면서, 좌우를 모두 포섭하고자 노력했고, '지행합일' 사상을 강조하여 실천의 근간이 되는 육체를 통제하고 생활 전반에 대한 군사적 규율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로 포장된 파시즘이 냉전을 주도하는 현실 권력의 견제와 감시 아래에서 피어나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이들이 "민족의 통일과, 국민 균등의 복리, 세계 평화에 기여"라는 원대한 구상으로 제시한 '일민주의'는 민족의 허약한 역량과 냉전 체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결여한, 머리만 웃자란 갓난아기의 꿈이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순진한 자기 중심주의를 삼킨 것은 미군정의 위력을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가던 거대한 산, '이승만'이었다.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고 표현되기도 했는데, 30년대부터 형성된 흐름이 냉전이 시작된 뒤에도 제3세계에서 지속된 것이다. 흔히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라 불리는 흐름은 대체로 좌익적 경향이 강한 것이었지만, 민족의 일체성이나 지도자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파시즘과도 공통적인 지점들이 존재했다. 29)

정신 훈련 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승강기식인데, 입소한 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저녁 국기와 단기의 승강기식을 거행했으며 음악에 맞추어 애국가, 단가를 합창했다.
...
(이범석은) 국기 승강식이 무질서하고 산만한 것은 "국기에 대한 숭경심, 따라서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는 것, 즉 민족적 결속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라며 국기에 대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7)

양우정은 스스로의 전향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데, 1930년대에 전향을 선언했을 때와 다른 것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을 국가와 일치시킬 수 있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전향했을 때 찾지 못한 `지도자`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양우정의 전향은 `지도자` 이승만을 매개로 완성되었으며, 1930년대에 천황제를 매개로 고바야시 모리토가 전향자운동을 추진했듯이, 양우정 역시 이승만을 앞세우면서 전향 공작에 앞장서게 된다. 237)

양우정은 일민주의의 핵심인 동질성을 자본주의 비판, 즉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계급 분열에 대한 비판과 그 변혁에서 찾으려고 한 데 반해, 안호상은 그 동질성을 변혁을 통해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라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찾는 것이다. 일민주의가 내포할 수 있었던 변혁적 요소는 안호상에 의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65)

반공주의 논리의 변화 역시 족청계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족청계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를 통해 내부적 계급모순을 `(적색)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로 치환시키는 파시즘적 논리에 의한 것이었는데, 족청계 제거 직후부터 반공주의 논리로서 오히려 `제3세력`과 결부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영 논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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