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신앙은 의식적이고 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이성이나 의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신학교에서 제가 가장 비판을 받은 것은, 내 무의식에 깃든, 그들이 보기에 범신론적인 감각이었습니다.아무리 명석하고 논리적이라도, 이 유럽 기독교에는 생명 속에 서열이 있습니다." 176신성이란 온전히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전체에 굴복(아우구스티누스)하거나 또는 파기(도킨스)하거나 그도 아니면 신비주의로의 도약을 감행한 서양의 '이해의 구도求道' 체계를 헤르만 헤세가 잘 보여준다면, 엔도 슈사쿠는 '사랑의 구도'를 말없이 체현함으로써 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려는 '깊은 강'처럼 흘러가는 동양의 사유방식을 본 작품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다.전작 '침묵'보다 나약해 보이는 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실존의 본질을 가감없는 드러낸 탓이리라.
도올의 글이 인기있는 이유는 가식없는 입말로 현장성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것이 약점이 되기도 하는데, 좌충우돌하는 저돌성이 문제가 아니라 단언에서 비롯하는 짜임새의 문제다. 공개 강의 중에는 자신의 논리가 산으로 가더라도 그걸 인식하는 것이 어려우며, 모순을 인정하는 것은 더 곤혹스런 일이다. 글로써 반론과 대면하고 자신의 오류를 고치는 일이 차라리 쉽다(물론 배움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긴 하지만).가령, 요한복음의 주테마가 바로 '하나님은 곧 말씀이요, 로고스'라는 것인데 첫 구절에서 '아무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는 번역70)이 엉터리라고 일갈해놓고 뒤에서는 하나님이 시공의 밖에 있는 절대적 타자146)라고 말한다. 본인 말대로 로고스가 밖에서 인간세로 진입했다면 세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그리고 그게 요한복음 저자의 뜻이기도 하다).전반적으로 '기독교 성서의 이해'에 비해 도올이 벅차다는 느낌이 든다. 동양 고전이나 불경처럼 짧은 경구에 많은 뜻을 담은 글이 아니라 예수의 비유를 요한 저자가 빈자리 없이 꼼꼼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에 섣불리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드라마틱한 서술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기에는 가슴이 너무나 벅차오르고, 그 지혜의 높은 고갯길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일 또한 너무나 숨이 벅찬듯 싶다.